무리들에게 돌에 맞는 바울
2016, 2, 14
행14 : 19-28
지난주에 말씀을 전하는 중에 두 사도가 니고니온에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자 주님께서는 두 사도의 손을 통해서 표적을 행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말씀은 “주를 힘입어” 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나는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의 열매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고 그것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며 그의 목적은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필연적으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기를 원하는 분이라면 “주를 힘입어” 라는 말씀을 흘러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믿음과 의지와 노력으로 순종 하려고 하는 이들과 “주를 힘입어” 순종하려고 하는 믿음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의 믿음과 의지와 노력으로 주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지나온 날을 살펴보면 순종의 삶을 살지 못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자기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신대로 살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순종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 있는 한 순종의 삶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를 힘입어 주로 말미암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 6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 하나니.”
주 안에 거하는 자만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지 그 대답은 요한일서 3장 8절에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본래 마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육신 안에 있는 한 마귀의 종으로 마귀의 죄를 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에게 벗어나서 죄를 짓지 않으려면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주 안에 거하는 오직 이 한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마귀로부터 벗어나는 오직 한 길은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우선 우리는 마귀의 권세와 그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서는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들어 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마귀에게 속해 있는지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그 분별은 의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인지 그렇지 못하는 사람인지 그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실제 행위에서 그렇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의를 행하며 모든 믿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는 주 안에 거하며 주로 말미암아 사는 그리스도인만 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과 33절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반드시 우리 마음에 새겨 두어야할 말씀인 것을 깨닫지요?
모든 사람 앞에서 주를 시인할 수 있는 사람은 주 안에 거하며 주로 말미암아 행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보면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가지를 잘라내시고 그 가지가 마르면 사람들이 불에 던져 넣는 것처럼 누구든지 주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열매 맺지 못할 것이며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처럼 잘라냄을 당하고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넣느니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 안에 거하며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아니면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어 열매 맺지 못하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주 안에 거하며 주로 말미암아 사는 길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셨습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그 때마다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에 기도하면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생각나는 말씀이 없다면 여러분의 깨끗한 양심이 말하는 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고 천국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 안에 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허다한 이들이 실패하는 것은 주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사도들이 이방인의 성읍에 가서 전하는 복음은 우리가 아는 그 복음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를 믿게 하고 그 다음에는 주 안에서 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복음을 미워합니다.
그들의 원하는 것과도 너무나 다르고, 그들이 사는 풍습과도 다르며,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누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하셨습니다.
사도가 어느 성읍에서든지 복음을 들고 들어가면 복음은 그 성읍 사람들을 나누어 놓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나누어집니다.
복음을 받은 이들은 세상과 타협할 줄을 모릅니다.
세상과도 타협하지 않고 우상과도 타협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 식구하고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무리 중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표적을 행하여 이 표적으로 인하여 루스드라 성에 신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돌아왔다고 하며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루스드라 성의 제사장과 사람들은 소까지 끌고 와서 사도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까지 했습니다.
사도들은 나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하며 그들이 제사지내려는 행위를 겨우 말렸는데 그 때 마침 사도들을 미워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온 유대인들과 니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성 사람들을 충동질 하여 바울에게 돌을 던져 죽게 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19절에서 20절을 읽어 봅시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니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들을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튼 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루스드라까지는 90km이고 니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는 60km나 되는 거리였습니다.
안디옥에서 그리고 니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충동해서 바울에게 돌을 들어 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사도에 대한 미움을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 줍니다.
니고니온에서 바울을 돌로 치려하는 것을 알고 루스드라로 도망하여 왔는데 그들은 먼 길을 마다 않고 기어코 루스드라까지 좇아와서 무리를 충동해서 바울을 돌로 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성 사람들은 금방까지도 신으로 알았던 바울을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유대인들의 충동질에 의해서 바울을 돌로 쳐서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의 악의적인 충동질에는 쉽게 빠져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 쳤습니다.
21절과 22절을 보아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루스드라에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실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이 도시에서 얻은 것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진실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러나 아직 바울의 편을 들면서 바울과 함께 돌에 맞아 죽을 만큼 믿음을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에게 돈을 던지는 유대인들에게 항의하고 대들면 그도 돌에 맞아 죽게 될 뿐 바울의 시신조차 돌볼 자가 없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바울을 대적해서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지켜 볼 뿐 제자들은 그 무리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법에 항의할 틈도 없이 돌에 맞아 죽게 된 것입니다.
무리들은 바울이 죽은 것으로 알고 성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바나바와 제자들이 바울의 시체를 둘러서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제자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기절했을까?
아니면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는데 주님께서 그를 살리셨을까?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이 때 그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말했던 그 3층천까지 갖다 온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 안에서 한 사람을 아는데 그가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린도후서를 쓴 때로부터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시기가 바로 십 몇 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험한 일을 당한다 해도 주 안에서 결코 공짜는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경험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환난이 크면 클수록 고난이 크면 클수록 영적인 은혜도 그 만큼 크게 받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고난을 많은 받은 사람과 환란을 많이 겪은 사람이 하나님의 크고 깊은 은혜도 맛보는 것입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 때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자가 되어 일어났을 것입니다.
바울 그는 이 때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덧입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 쳐진 바울은 제자들이 둘어 서서 보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는 일어나 다시 루스드라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정말 못 말리는 불굴의 사람입니다.
바울이 성안으로 다시 들어간 것은 주를 믿는 자들에게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믿음을 굳게 세우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깨달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실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하다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믿음을 가져야 비로써 언제나 주를 위하여 살며 주의 말씀에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교회는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고난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을 신실하게 뒷받침해 주는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를 이 성읍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 이튼 날 바울과 바나바는 이웃 도시인 더베로 갔습니다.
더베는 루스들아에서 가까운 도시입입니다.
더베는 두 사도가 1차 전도여행을 한 끝점이요, 반환점이었습니다.
두 사도는 더베로 가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루스드라까지 따라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던 유대인들은 더베까지는 따라오지는 않은 것같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면서 제자를 얻어 교회를 세우게 되었지만 더베에서는 평안한 가운데 많은 제자들을 얻어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더베에서 이 때 요한 3서에 나오는 가이오라는 충성된 일꾼을 얻었습니다.
두 사도는 더베을 반환점으로 하여 오던 길을 다시 되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두 사도가 처음 출발했던 수리아 안디옥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더베에서 다소까지 타우루스 산맥을 지나는 큰 길이 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다소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실루기아로 가서 거기서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안전하고 쉬운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경로를 취하지 않고 더베에서 다시 루스드라까지 30km 루스드라에서 니고니온까지 60km 다시 니고니온에서 수리아 안디옥까지 90km를 여행하며 그들이 지나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오면서 각 성읍에서 그들이 얻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시 만나러 간 것입니다.
바울이 더베에서 다시 되돌아가려는 그 성읍들은 두 사도를 죽이려 했던 그들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있는 성읍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바울을 돌로 친 루스드라 성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가 바나바는 얼마 동안 머물러 있다가 그들은 다시 루스드라에서 니고니온으로 니고니온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사도들은 왜 전도하고 지나간 도시들을 다시 되 돌아와야 했던 것일까?
바울과 바나바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해서 믿는 자를 얻었다 해도 불과 몇 사람에 불과 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보는 기독교는 아주 낯설고 생소한 것이었고, 그들의 생활 풍습을 깨는 종교요, 세상과도 소통이 안 되는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은 자들은 세상과 고립되어 박해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이웃들과 친척과 식구들로부터도 고립되어 미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가야 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단은 그들에게 온갖 의심과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에 강력하게 이끌림을 받아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가서 그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하고 더 굳건하게 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온전한 지식은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불타는 소망을 갖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환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고난의 길을 뚫고 지나 하나님 나라에 이른 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그 사실을 아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어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은 세상을 거스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고, 새 생명으로 살면서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그들이 각 성읍들에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의 장로들을 세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목사들입니다.
그 중에 진리를 확실하게 붙잡고 믿음에 서 있는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찾아 각 교회에 지도자로 세우는 것이 교회를 다시 찾아 되돌아온 세 번째 이유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사도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세운 교회를, 수년 후에 거짓 교사들이 와서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을 불신임하게 하여 교회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로마감옥에 있을 때에 이 문제로 이 지역의 교회들과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서신을 보내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며 처음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격려 했습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 버가에 들려 전도하고 앗달리아에서 배타고 처음 출발했던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보낸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와서 교회 앞에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 교회들을 세웠는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셨던가를 전했고, 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의 문을 열어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를 전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전도 여행을 가서 여러 교회를 세웠지만 그 길을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성령님이 동행해 주시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3차전도 여행 가운데 1차전도 여행의 여정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비시디아 안디옥교회와 니고니온교회와 루스드라교회와 더베교회와 마지막으로 버가에 교회를 세우고 돌아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사도는 1차 전도 여행에서 5개의 교회를 세우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