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의 소동
2016, 5, 22
행19 : 21-41
본문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에 관해서 사도 바울이 당시의 상황을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에 기록 되어 있는 상황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힘에 겨운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사형선고를 받아놓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목숨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믿음을 붙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 가운데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환난이나 고난이나 고통을 겪으면서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을 알게 되고 주님을 더 실제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환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3절과 4절에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은 체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인내를 얻게 하고 인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을 얻게 하고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하는 복음과 함께 성령의 능력이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도 나타나는 것을 보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두려움으로 죄를 자복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었다고 했습니다.
마술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마술하는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공중 앞에서 불에 넣어 소각하며 다시는 사람들을 속이는 마술을 하지 않기로 선포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주의 말씀이 힘을 얻고 흥왕하게 되어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여 이런 성과를 거둔 후에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서 예루살렘교회로 올라갔다가 그 후에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 교회로 올라가려는 계획이 조금 연기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했던 것은 에베소교회와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 모금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올라가서 그 헌금을 교회에 전하고 사도는 로마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헌금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1절에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로 가기로 작정했다고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성령 안에서 작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로마로 갈 것을 지시하신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문물의 중심지요, 권세의 중심지였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의 모든 권세가 거기로부터 나왔고, 모든 문화가 거기로부터 나왔습니다.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요, 로마는 온 세계로 나가는 공도가 나 있었고 온 세계의 길은 로마로 향해 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세계의 중심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복음이 온 세계로 뻗어나가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복음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전파되었고 복음은 로마에서 온 세계로 전파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성령 안에서 작정되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생활 전부를 성령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주의 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자기 생활 전부를 주관하시도록 드렸으며 온전히 자기 자신을 주님께 굴복 시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여 따르면 인간적인 축복도 반드시 따라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축복을 바라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는 육신적인 사람은 성령님의 종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겸손하게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의 백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8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나귀타고 올라가신 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제자 둘을 불러서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메어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대답하라 그리하면 보내리라.” 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은 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맞은 편 마을로 들어가서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는 나귀새끼가 나무에 메어 있는 것을 만났다.” 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그 나귀새끼를 나무에서 풀자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주인이 그들에게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주님이 시키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고 대답을 하자 그 주인이 나귀새끼를 보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냄은 받은 제자들이 맞은 편 마을로 들어가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나무에 메어 있는 것을 만났고” 또 제자들이 나무에 메어있는 나귀새끼를 풀자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께서 대답할 말을 가르쳐 주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십니다 하고 대답을 하자 그 나귀 새끼를 보내 주어 풀어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 때 그 제자들처럼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만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 일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지금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만난다면 우리도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도들은 우리에게 살아계신 주님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은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심각하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시는 주님을 아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것은 주의 말씀을 순종을 통해서만 아는 것입니다.
주이 말씀을 순종하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살아계신 그분의 실제를 아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주께 순종하는 자가 주의 제자요, 주를 실제로 아는 자가 주의 백성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지 않습니까?
나는 지난주에 하나님 나라는 이 땅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세에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 삼으시고 주께서 자기 백성들 안에서 내주 하시면서 왕이 되어 다스리시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는 이 땅 위에 세워져 있고 주는 자기 백성들의 왕으로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지금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이 땅위에서 주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주의 백성들이 내세에 들어가서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주께 다스림을 받고 있지 않는 사람은 무엇으로도 그를 주의 백성이라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권속이라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우고 좀 더 에베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에베소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들어간 도시는 어느 도시건 큰 소동이 벌어지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심히 부럽습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함께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로마 총독 앞에 고소하는데 그 변사가 사도 바울을 가리켜 하는 말이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라고 고소했습니다.
이 말쟁이 말대로 어느 성에 전염병이 들어가면 그 전염병은 삽시간에 온 성에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열병을 앓듯이, 사도 바울이 들어간 성마다 복음이 사람들 가운데 전파되어 열병을 앓고 그 온 성은 소동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에베소에 소동이 벌어지게 된 것은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같은 업을 하는 은장색들을 선동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여신상을 섬기는 큰 우상의 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상을 섬기는 그 전각은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였을 만큼 웅장하며 아름다운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전각은 크고 아름다워서 여행객들이 그 전각을 보기 위해서 많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아데미 여신상은 우리들에게는 다이아나 라는 여신상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여신상은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하늘에서 에베소 땅으로 떨어진 운석인데 유방이 10개나 달린 여자 모습이었기 때문에 생식의 여신이요, 생산의 여신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5월은 아데미 여신을 기념하여 섬기는 달로 세계각지에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자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에 이때를 맞추어 아데미 여신상과 그 전각의 모형을 만들어 파는 장색인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 같은 업을 하는 은장색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에베소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는 것을 당신들도 들었을 것이요,
바울이 전하는 말로 우리의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아는 아데미 여신의 위엄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은장색들이 데메드리오의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기를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며 일어났는데 삽시간에 에베소 전체가 이 소동으로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며 “크신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여” 하고 외쳤습니다.
이 연극장은 2-3만명 가량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넓은 야외 연극장이었습니다.
그들이 크신 아데미 연신의 위엄을 명분으로 내 세우며 외치지만, 사실은 그들의 업이 천시되고 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2년 동안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에베소 사람들과 아시아의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큰 영향을 받아 우상에서 돌아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울 사도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하는 말에 사람들은 여신상을 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으로 교제할 줄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돈을 아데미 여신상을 사는데 쓰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철나무 잎들은 추운 겨울도 이겨내고 폭풍우도 이겨냈지만 봄이 되어 새 움이 돋아나며 옛 잎 파리들은 새로 나오는 그 새 움에 밀려 하나 둘씩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가면 사람들의 내부에 있던 거짓되고 그릇된 욕망들은 새로 들어온 복음에 영향력으로 제압되고 밀려나게 되며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부로부터 새 생명이 돋아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옛 것들은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는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새 생명이 들어오면 육신의 옛 거들은 제압당하고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받고 주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확신과 세력을 얻어 행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돕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그들이 잡혀 연극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그들 가운데로 가고자 했는데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가이오는 요한삼서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으로 칭찬을 받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울이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군중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하자 관리 중에 바울이 친구가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때의 일을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면 바울은 본 군중들이 더욱 흥분하여 사나운 맹수로 변하여 더 큰 소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관리들도 바울 사도를 그 군중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함께 모여 소동을 일으키는 무리의 태반이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고 이 소동에 대해서 어떤 사람을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저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소동에 참석한 무리의 태반이 그들이 어찌하여 모여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시위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촛불 시위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부를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일어나 벌인 시위입니다.
그 진실여부야 어떻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정부를 반대하기 위한 반대하기 위해서 선동하는 말에 많은 젊은이들이 시위에 참석하여 시위를 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판단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려서도 안 되고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언론매체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어 세워 알렉산더가 손 짖을 하며 백성들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군중들은 그가 바울과 같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를 거부하고 다 한 목소리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고 두 시간이나 외쳤습니다.
이 소동을 에베소의 서기장이 무리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에 크신 아데미 여신이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을 누가 모르며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있는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 그렇지 않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고 진정시켰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아 너희 말이 다 사실이다. 아데미는 위대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굳이 소동을 벌리며 외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 한 것도 아니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들이 붙잡은 것은 너희의 경솔한 행동이다.”
“만일 너희가 누구를 고발할 일이 있으면 총독들이 있으니 피차 고발하라, 날을 정하여 재판할 것이다.
만일 그 외에 다른 일을 원한다면 민회에서 결정할 일이다.
그들이 너희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 것도 아니요, 아데미 신을 비방하지도 않았는데 오늘 까닭 없이 소요를 일으킨 이 사건으로 오히려 너희가 재판에 넘겨져 자유를 잃을 위험이 있다.”
“또 우리는 이 불법 시위에 대해서 고발한 자료가 없다.” 하는 서기장의 말에 그들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놓아 주고 시위를 그치고 흩어졌습니다.
이 소요의 결과는 오히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에베소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교회도 안정되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요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아 죽게 되는 줄 알았지만 바울 사도가 이 소요를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은 자기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믿는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소요 동안에 순교까지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1장 20절에서 “내 안에 사시는 이는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병들어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늙어서 시름 시름 앓다가 죽는 것 보다 주를 위해서 순교하여 죽을 수만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