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에 대한 약속이 없는 구약 2016, 7, 31 행23 : 1-36
사도행전 23장 전체를 한 번의 설교로 마치려 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해 가는 과정에서 8절에 와서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 함이라.” 하는 말씀에 이르러 사두개인들이 왜 그들은 천사도 내세도 부활도 영도 없다하는지 그것을 애초에는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 줄줄이 연상해 떠올라 그 내용들을 정리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대제사장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이 어찌하여 내세도 천사도 부활도 부인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오래 동안 깊은 의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심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cs루이스의 책을 읽다가 구약은 내세에 대한 확실한 말씀이 없다는 것을 비로써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 알게 되면서 그 동안의 많은 의문점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구약성경의 저자들도 우리처럼 기독교 신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구약의 선지서와 시편과 다른 본문들을 읽어 왔습니다.
성육신이 우리에게는 이미 기록된 사건이지만 구약의 저자들에게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세와 부활과 영생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주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 하신 것을 통해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의심 없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구약시대 사람들과 현재 우리들의 신학과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아주 중대한 차이입니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성도들도 우리들처럼 죽음 너머의 내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것이며 당연히 천국에 대한 소망과 지옥을 두려워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cs루이스는 말하기를 시편의 어떤 구절들은 구약의 위인들도 내세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끔 하는 말씀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17편 14절에 악인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내세를 암시하는 말씀으로 읽을 것입니다.
또 시편 17편 1절에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 하리이다.” 하는 말씀을 읽으면서 저자가 내세를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cs루이는 이 시편의 말씀들은 내세를 생각하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믿음을 주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세가 있다고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에 “영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다만 “생명”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또 “지옥”이라고 번역된 단어 스올도 단순히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선한 자이든 악한 자이든 모든 죽은 자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28장에 사울 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사무엘의 유령을 불어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스올이란 다만 죽은 자들의 유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불러내온 유령도 내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스올이라는 개념은 죽은 영혼이 가 있는 곳이요 무당들이 그 영혼을 불러내기도 하는 그런 곳이라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생각과 거의 같은 것입니다.
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하데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데스는 천국도 지옥도 아닙니다.
하데스는 영어로는 “nothing”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상이 고대인들이 가졌던 죽음에 대한 개념입니다.
고대 시인들의 표현에 전쟁에서 죽은 영혼들이 하데스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죽은 자들을 유령으로 표현했고 유령은 일종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시편 기자들은 스올은 죽은 자들의 죽음이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데스라는 말은 죽은 사람들은 그저 죽은 것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의미로 한 말입니다.
시편의 많은 구절들이 이런 내용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시편 89편 47절에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사람이 죽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nothing”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39편6절에 “그림자”와 같다고 했으며, 49편 10절에서는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같은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일단 죽으면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30편 9절에 다윗은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6편 5절에서는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이것이 다윗의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시편에 수 없이 나옵니다.
시편 88편12절은 모든 것을 잊혀지는 곳이요, 146편4절에는 사람의 생각이 소멸되는 곳이요, 49편19절에서는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곳이요 끝없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다윗 같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영적인 사람이 내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선지자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마치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처럼 들리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0편 3절에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라는 말씀은 단순히 나를 살리사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116편 3절에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다.” 하는 뜻은 단순히 내가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구약은 영혼의 부활이나 내세에 대해서 분명한 개념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cs루이스의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워서 구약에 정말 내세를 약속하시는 말씀이 없는지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에 내세에 대한 약속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동안에 의문스러웠던 많은 것들을 줄줄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구약에 내세에 대한 개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욥기 19장 25-27절에 “내가 알기로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하는 욥의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말은 신약에서 말하는 부활의 개념은 아닌 듯합니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도 인간의 불멸성에 관해 아주 분명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이 신앙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주님의 시대에 이르렀을 때에 내세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의 존재도 알게 되었고, 영혼의 부활도 믿었고, 내세가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내세와 부활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던 바리새인들을 포함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내세와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갖지 못했던 내세와 부활의 신앙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개인들은 여전히 예전의 생각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사도 없고 영혼의 부활도 없고, 내세도 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것을 유대인들에게 계시해 주셨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내세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cs루이는 이 의문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민족 주변에는 내세에 대해서 엄청난 관심을 쏟은 부족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그들의 문화 가운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죽음 이후의 행복을 보장 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러한 주변 이방 민족들의 종교적 사상을 따르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cs루이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유대인들이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라셨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내세에 대한 관심을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 같지 않아요?
내세를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천국을 추구하고, 지옥을 피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너머의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기독교의 신앙의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 다면 여러분 자신의 신앙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cs루이는 말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은 사람이 자기 건강을 돌보는 일이라든가 자기 노후를 대비해서 저축하는 일과 보혐을 들어놓은 것 같은 개념으로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득과 손실로 계산한다면 엄청난 것으로 그렇게 때문에 정말 내세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엄청난 소망을 갖게 되거나 그 반대로 엄청난 불안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과 불안의 감정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며 나온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자기를 위하는 자신의 안위가 걸려 있는 문제로 소망과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대한 믿음이 전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도들은 죽음 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극락과 장생을 바라지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신론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깨달음과 노력으로 극락 장생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그것은 육신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계시하시면서도 내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그 진상을 생각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셨을 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들의 참된 목적이요, 만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무엇 때문이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 속담에 염불에는 뜻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cs루이스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신앙의 참된 목적은 오직 그분을 알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여기며 즐거워하라고 계시하시면서도 내세의 복이나 화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시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세의 복이나 화는 신앙의 좋은 출발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시면서 천국과 지옥에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면 그들의 신앙의 목적은 천국이 되며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육신적인 신앙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무엇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그것은 육신입니다.
지옥을 피하고 천국 가기 위한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천국 가는 것이 신앙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된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우리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우리 신앙의 근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우리들의 영원한 축복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그분과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요, 주와 연합된 자로서 주의 영으로 살며 자기의 육체의 생명은 죽음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바른 신앙은 주와 연합될 때에 주의 영을 얻는 것이며 그 영이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주와 연합된 자가 주의 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자기의 안위를 생각하며 천국을 열망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첫째 목적은 영생도 천국도 아닙니다.
영생과 천국은 우리 주의 영을 얻고 주와 연합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지옥을 피하고 천국 가는 것이 라면, 그것은 사람이 자기 안위를 위한 생각이요, 사람의 생각으로 그들은 천국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과 연합되어서 우리 육신의 생명이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천국과 영생이 있습니다.
주와 연합하여 주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며 자기 생명을 버리는 자에게 영생과 내세가 약속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목적은 주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 그 섬김을 통해서 자기 생명을 소멸하고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심으로 우리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과 하나로 연합된다면 우리들은 주의 영으로 살 것이요, 주의 영으로 살면 육신의 정욕과 탐심과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육신의 생명을 벗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성군도 내세를 알지 못했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가 다윗이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의 신앙은 영생과 내세를 알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을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그 자체가 영생이요, 하나님 나라가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영생과 부활과 내세에 대해서 계시하지 않으신 것을 우리 주님은 어찌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치셨으며 그것을 또 강조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예수께서 믿는 자에게 주의 영으로 그들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 주와 연합 된 자들이 거하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결별한 자들에게 사망이 있고 그들이 가는 곳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주와 연합해서 주와 함께 하는 자들은 주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처럼 그들도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이 말은 실제로 주를 알지 못하면 천국 가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현세의 축복만을 바랐던 것을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들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도 부활도 영생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그들을 영생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현세에서 그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분을 지금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해서 그분을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이미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바울과 같은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라 해도 믿지 못하고 바울에게 증인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