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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토론장

풍수만능주의를 배척하고 발복을 다시 보자(약봉과 율곡의 경우를 중심으로)

작성자하남촌장|작성시간25.11.06|조회수100 목록 댓글 1

 

풍수만능주의를 배척하고 발복을 다시 보자(약봉과 율곡의 경우를 중심으로)

1. 어떤 풍수의 주장

* 어떤 풍수가 아래와 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약봉 서성의 어머니 고성 이씨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문을 일으킨 여인으로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왜냐면 고성 이씨는 시각 장애인으로서 시집와서 결혼 5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안동에서 시동생이 있는 서울로 이사를 와서 시어머니와 같이 술과 떡을 만들어 팔았는데 맛 솜씨가 좋아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부인은 외아들인 서성을 당대 최고의 학자인 율곡과 송익필에게 학문을 배우게하고 포천에 있는 명당을 구하여 시부모와 남편 묘를 이장하였습니다. 그 명당발복으로 서성을 비롯하여 후손 중 정승 8명, 판서 34명, 문과급제 123명이 배출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신사임당은 율곡을 훌륭하게 키웠지만 풍수에는 관심이 없어서 집안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율곡 선생의 후손들은 잘된 인물이 없습니다.

 

* 위와 같은 주장에는 첫째 음양택이 모든 길흉화복을 결정한다는 풍수만능주의(風水萬能主義)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 둘째 발복을 오로지 후손이 사대부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고 나아가 적잖은 풍수가 동조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 고성 이씨부인과 서성

* 청평군수를 지낸 고성이씨 이고(李股)는 안동 일직면 망호리562에 소호헌을 짓고 살았는데 눈이 반쯤 먼 외동 딸(서성의 말에 의하면 46세 때 완전 실명하였다고 함)이 있었다. 이고는 퇴계에게 사위를 골라 달라고 부탁하여 대구서씨 서해를 추천받았다. 서해는 대제학 서거정의 고손으로 심성이 곱고 대범하여 이씨가 눈이 반 봉사인 것을 알고도 개의치 않고 혼인하여 서성(徐渻, 약봉, 1558~1631)을 얻고 혼인 5년만에 졸(卒)하였다. 이씨 부인은 가산을 팔고 서울 약현으로 이사하여 약주와 약밥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이는 한편 서성을 이율곡에게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다. 이씨 부인이 소호헌 저택을 처분하고 서울로 이사한 것은 서성을 교육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비무장지대에 있던 선산에서 부모와 남편 묘를 서울근교로 이장하던 길에 포천 설운동에서 일박하고 출발하려 하자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그 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10대 명당이라는 말도 있다. 서성부부 합장묘도 몇 백미터 아래에 있는데 평야를 마주하여 바람이 칠듯하였으나 평야바람은 골바람과 달리 분산되어 오므로 피해가 적은 듯하였고 이 묘역의 묘는 중등중급이다. 사람들은 서성이 5개도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지냈고 7세손까지 계속 고위직에 오른 것을 두고 이들 묘의 등급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풍수적으로 본다면 음택발복은 당해 음택을 쓴 뒤에 태어난 후손부터 받고 5대손까지 유효하다고 하는데 서성은 조부와 부친 묘를 이장하기 20년 전(前)에 태어 났으므로 이 묘의 발복이 맞는가, 그리고 6세손 이후에도 발음이 있는가(대명당일 경우에는 발복기간이 오래 가지만)하는 의문이 있다.

 

* 소호헌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현재 대구서씨 안동종회 간판이 걸려있고 민박집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씨부인의 부친 이고 묘는 안동 일직면 명진리 산42-3에 있는데 동네 길지급이다. 절후되었는데 1623년 비석을 세우고 누군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 7~8미터 아래에 일직손씨 중시조 손홍량의 묘가 있다.

 

3.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 신사임당(申師任堂, 평상신씨, 1504~1551)은 여성 화가, 시인, 서예가이고 재력가 신명화의 5녀중 차녀이다. 남편 덕수이씨 12세손 이원수(1501~1561)는 가난한 집 외동으로 신사임당과 사이에 4남3녀를 두었는데 3남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7~1584)이다. 신사임당은 용꿈을 꾸고 이이를 잉태한 뒤 친정집인 오죽헌(강릉 율곡로 3139-24)에서 출산하였다. 남편 이원수와 장남 이선은 여러번 낙방하였으나 이이는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였다. 신사임당은 오만원권에 초상화가 실렸고 이이는 오천원권에 초상화가 실렸다.

 

*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재산을 많이 받아와서 가난한 남편 집을 살렸고(사임당의 유산분재기록에 의하면 노비가 1백명이었다) 이원수는 한량으로 신사임당이 야간 외출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 남편이 간신 집에 출입하는 것을 말려서 사화를 피하였다. 신사임당이 남편에게 자기가 죽더라도 재취를 하지말라고 부탁하였으나 이원수는 20세 어린 주막집여인 권씨를 사임당 생시에 첩으로 데려온 탓으로 사임당 사후에 자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 이이는 적자없이 서출로 2남1녀를 두었다. 송대의 주자가례에 의하면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승계하고 서자도 없을 때 양자를 들인다고 하였는데 서자는 과거시험을  볼 자격이 없어 가문이 빈한하게 되므로 양반들은 대부분 서자를 제치고 양자를 들였다. 그런데 이이는 양자를 들이지 아니하였고 선조가 서자를 봉사손으로 인정했다. 덕수이씨는 이순신의 충무공파와 이이(13세손)의 문성공파가 유명하며 이이의 15대 종손이 파주시에 율곡진흥원부지 수만평을 기증한 사실이 있다.

양반가의 전형적인 입양(入養)사례로 이언적을 들 수 있다. 이언적(1491~1553)은 성리학의 태두로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동방 5현에 이름을 올린 대학자인데 적자는 없으나 관기와 사이에 이전인(李全仁)을 낳았다. 이전인은 북방 강계에서 귀향살이를 하는 이언적을 찾아가서 7년간 시봉하고 이언적의 시신을 수레에 실어 고향 포항으로 3개월간 몸소 운구하였고(지나는 동네마다 사람들이 길을 치우고 함께 호곡하였다고 한다) 이언적의 글을 정리하여 퇴계에게 전달하는 효자이었다. 그럼에도 이언적은 5촌 이응인을 양자로 들이어 양동 본가를 물러주었다. 이전인은 옥산서원을 물러 받고 뒤에 여주이씨 옥산파시조가 되었다.

 

4. 풍수만능 주의

* 이씨부인은 풍수를 믿고 명당을 구하여 시부모 묘를 이장한 덕으로 가문을 번성시켰음에 대하여, 사임당은 풍수에 무관심하여 명당을 쓰지 아니한 탓으로 이율곡의 후손은 잘된 사람이 없다는 주장은 음택명당이 반드시 후손의 출세를 보증한다는 풍수만능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 그러나 ➀ 사람의 행.불행을 결정하는 요인은 수만가지가 되고 풍수는 그 중  하나의 요인이 될 뿐이다. 이전에 살았던 현인. 성자의 말씀이 그러하다. 불자(佛子)인 필자로서는 인과(因果)법칙을 믿는다. ➁ 현재까지 세계를 지배한 국가라든지 선진국은 풍수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풍수를 믿은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선진국반열에 올랐다. 풍수는 가능성을 줄 뿐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풍수들이 자식들에게 좋은 직장에 연연하지 말고 풍수공부를 하여 산야로 나가서 명당을 찾도록 지도하는 사례는 없다. ③ 인과없이 이씨부인이 명당을 얻지 않았을 것이고(서성의 성과가 이장 묘의 발복이라 보기도 어렵다) 사임당이 명당을 구하려고 하여도 인과없이는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사충 시문용 박상희 지창룡 장용득 손석우 장익호 이문호 등 명사치고 명당을 차지한 지사는 없다. 필자가 답사한 바로는 현재 풍수지리 카페지기의 부모 묘치고 명당에 쓴 묘는 보지 못했다. 동네 길지급이면 다행이고  흉지에 가까운 곳도 있었다. 대개 한 두 번 이장을 하였으나 자기눈에 안경이었다. ④ 명당의 등급과 발복이 정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안동권씨시조 권행 묘는 지형은 중등중급에 불과하지만 발복은 상등초급 수준이다.

 

* 풍수만능주의야 말로 풍수인을 사이비 종교단체의 광신도 쯤으로 폄하하는 요인이 된다.

 

5. 발복을 다시 해석하자

* 예전에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고 기득권세력으로부터 수탈당하는 고통이 컸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이 고위공직(高位公職)가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명당발복으로 고대하는 최대의 복(福)은 고위공직에 올라 권세를 쥐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 그리고 후손대대로 그 지위가 보전되는 것 즉 사대부계층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복(福)의 개념에 현재는 부(富)가 추가된다. 지사들이 명당등급을 분류할 때 흔히 귀(貴)A 부(富)A 등으로 나누는 실정이다. 그러나 지금은 의식주는 해결되었고 개인의 웰빙을 중시하는 추세이다. 그러므로 복의 우선 순위도 건강, 손세(孫勢), 가계의 화목, 인품, 사회적 공헌을 먼저 생각해야 된다.

 

* 이씨부인이 서성을 훌륭하게 키우고 명당에 선조를 모신 치적은 훌륭하다. 그러나 사임당도 이이를 현자로 만들고 한량인 남편을 잘 구슬러 가정을 가꾼 공으로 현모양처라는 평을 듣는다. 신사임당은 천재적 재능으로 문예인이 된 것이 특별한 장점이므로 고성이씨와 평면적 비교를 해서는 안된다.

 

* 이이의 후손이 고위직에 나아가지 못한 이유 중에는 서출이라는 약점이 은연 중에 작용하지 않았을가. 성인군자 이언적이 매정하게 친자식 그것도 천하의 효자를 서출이라는 이유로 내치는 세상인데 이이는 서자를 버리지 않았다. 그 인간적인 면모에 경의 표하지 못할 망정 후손중에 잘된 자가 없다고 허물을 잡아서 되겠는가.

 

6. 풍수만능주의를 배척하고 발복을 다시 정립하자.

풍수만능주의는 진리가 아니고 발복의 내용은 다시 생각해야 된다. 고액의 보수를 노리고 사대부와 재벌이 되는 자리를 잡았다고 떠드는 지관은 SON모 지관의 말투를 빌려서 말하자면 “풍수를 깡통삼아 두드리면서 밥을 빌어 먹는 잡술가”이다.(2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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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멀린 | 작성시간 25.11.20 설풍걸식 함에 대한 질타의 곧은 말씀에 감사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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