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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경 대학살이란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盧溝橋)사변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시작한다. 먼저 천진을 점령한 일본은 이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3개월만인 그해 11월 12일 상해를 점령한다. 남경에 있던 장개석 정부는 11월20일 사천성 중경(重慶)으로 피난을 하게된다. 남경에 남아있던 15만명의 중국군대는 남경을 수비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10만의 병력으로 이를 공격하게 된다. 12월 초에 일본군은 남경의 외곽을 점령하게 되고, 남경 시내에 대해 선무활동을 펴서 투항을 권유하나, 중국 수비대는 대포로써 대답하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인다.
12월10일 새벽3시에 일본군은 남경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재차 남경의 수비대에투항을 권유하나 굽히지 않자 드디어 12시에 남경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12월12일 오후, 남경수비대장 唐生智는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일부는 장강을 건너 탈출하라”는 지시를 수비대에 내린다. 이 명령은 결국 가장 중요한 도시전투에서 조직적인 저항도 못하는 동시에 안전한 후퇴도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와서, 결국 대부분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집단처형을 당하였다. 12월 13일 오전, 일본군은 남경시내에 부대별로 입성하였고, 대학살의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이라는 만행은 이미 치밀한 사전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중국수도에서의 대학살을 통해 공포감을 조성하여 일본군을 두려워하게 한다’는 심리적인 우위를 차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군 화중총사령관은 “남경은 중국의 수도로 남경을 점령한 것은 국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필히 상세한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김으로써 일본군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서 남경의 13여군데에서 거의 동시에 학살이 저질러졌으며, 사망자수가 30만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만행이었다.
일본군들은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학살하였으며, 어느곳에서는 “100명 먼저 죽이기내기”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외 생매장, 영아 죽이기, 부녀자 강간등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3. 노구교 사건 노구교는 북경의 서남쪽 15㎞에 위치한 다리로서 일본 군국주의의 중국침략에 구실을 제공해 주는 역사적인 곳이다. 여기서 일본군은 자신의 군인 1명이 실종되었다는 억지를 주장하면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