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학습과제 제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m3324최재민)

작성자최재민|작성시간07.11.09|조회수112 목록 댓글 0

오다 노부나가(직전신장, 織田信長 おだ のぶなが,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는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

 생애

1549년 그가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 국(尾張國)의 다이묘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나이가 어린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오와리 국안의 경쟁자들을 정복하면서(1560년), 사람들은 그의 다이묘으로서의 가치를 알아보게 되었다. 1570년부터 1580년까지 천태종, 일향종등의 불교 종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등 반항하자,군대의 힘과 사찰의 재산몰수정책으로 진압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불교가 자신의 정치적 위협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노부나가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여온 기독교를 보호하여 불교를 견제하였다. 물론 오다가 기독교를 보호한 이유는 기독교를 통해 내부의 적을 견제한 것으로, 노부나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의 이러한 내부 정리 작업은 일본의 역사가 센고쿠 시대(戰國時代)에서 통일시대로 가는 열쇠를 열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1582년, 교토에서 주둔하다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오다 노부나가를 배반해 반란을 일으키자 저항하다가,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자살하였다.

 지도력

오다 노부나가는 뛰어난 전략가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신식무기(조총)도입과 그에 따른 전술체제의 혁신
  • 철저한 실력위주의 인재 관리
  • 소수의 엘리트 체제 확립
  • 직업군인제를 적극 활용
  •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온 부하에게 큰 상을 주는 정책 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일본어: 豊臣秀吉, とよとみ ひでよし, 1536년 2월 2일 - 1598년 9월 18일)는 일본의 무장이다.

오와리쿠니(尾張國, 현재의 아이치 현)에서 하급 무사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고자루(小猿)이다. 후에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지하라 히데요시(藤原秀吉)로 개명하고, 다이죠 다이진(太政大臣)과 간파쿠(關白)의 지위를 겸임하게 되면서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썼다.

 

Toyotomi Hideyoshi
Toyotomi Hideyoshi
Portrait of Toyotomi Hideyoshi drawn in 1601

In office
1585 – 1591
Preceded by Konoe Sakihisa
Succeeded by Toyotomi Hidetsugu

Born February 2, 1536(1536-02-02)
or March 26, 1537
Nakamura-ku, Nagoya
Died September 18, 1598
Fushimi Castle
Nationality Japanese
Spouse Nene, Yodo-Dono

 

생애

정치적인 활약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으로 본래 전국 통일을 눈 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는데, 항상 신발을 들고 노부나가의 뒤를 따라다녔으며, 노부나가는 이러한 그의 충실함을 보고 신임을 하게 되어 크게 중용하였다. 히데요시는 기지와 용병술에 뛰어나 각 지방을 정벌하여 세력 확장에 공을 세워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을 자처했으며, 그의 오사카 성에는 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물려 받았다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또 자신의 칼에도 천하포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는 1584년에 동부 일본의 큰 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고, 1590년에는 천황의 권위를 빌려 마지막 남은 여러 영주와 호족을 정복하여, 죽은 노부나가와 자신의 숙업인 통일을 이룩하여 100년 간에 걸친 센고쿠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그는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을 꿈꾸며 2년 후 20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점차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1598년 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 간 끌어오던 전쟁은 실패하고 일본군은 총퇴각하였다. 이 전란을 통해 일본은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귀나 코를 베어가는 등 잔학 행위를 자행하였다. 또 조선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약탈하고 2-3만 명의 도공들을 납치해 이후 도자기 문화 같은 에도시대의 화려한 문화 발전을 이룩하는 터전으로 삼았다.

그가 사망한 후 일본은 도쿠가와세력과 도요토미 충성세력간의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토요토미 지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졌다. 이로써 도요토미 정권은 2대째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독교 전래

도요토미 시대는 일본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다. 에스파냐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중남미아시아에서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였다. 예수회 설립자중 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일본은 선교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다이묘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이를 묵인[1]했고, 도요토미도 서양의 문물 전래 통로인 기독교의 선교활동을 묵인했다. 하지만 그의 묵인정책은 강경정책으로 바뀌어 26명의 순교자들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이유는 종교를 앞세운 서양의 식민정책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였다.[2] 이러한 기리시단에 대한 박해정책은 도쿠가와 정권, 즉 에도 막부 시대에도 이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とくがわ いえやす, 덕천가강,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는 일본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將軍, 1603년 - 1605년)이자 다이죠 다이진(太政大臣, 1616)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とくがわ いえやす, 덕천가강)

 

 

생애

인질 생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카와노쿠니(三河國)의 오카자키(岡崎)(현재 아이치 현)에서 영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이름은 다케치요(竹千代)였으며 그는 세이와 천황의 후손이기도 하다.

다케치요의 아버지 히로타다는 당시 센고쿠 시대도카이도 지방의 양대 세력인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사이에서 영지를 보존하기 위해 다케치요를 이마가와씨로 보냈지만, 도중 다하라 성의 성주 도다 야스미쓰의 모략으로 오다가로 보내지게 된다. 그곳 2년간 머무르면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알게된다.

그후,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씨의 포로로 있는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 오다 노부히로와 인질교환이 되어 이마가와씨의 인질로 되었다. 이때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 이름 한자를 받아 마쓰다이라 모토노부로 개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키구치 지카나가의 딸(쓰키야마도노)과 결혼을 하고, 이름을 조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淸康)의 이름 한자를 받아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라고 개명한다.

독립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상경을 하기위해 군을 이끌고 서진하자, 그 부대의 선봉으로 여러 성을 함락시킨다. 하지만, 요시모토가 덴가쿠하자마(현 아이치 현 도요아케 시)에서 전사하자 자신의 연고인 오카자키 성으로 귀환한다.(오케하자마 전투). 그리고, 1562년 이마가와씨와 결별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게된다.(기요스 동맹) 다음해 이름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라 개명한다.

1566년까지 미카와 잇코잇키를 평정하고 조정으로부터 미카와노카미라는 관직을 받고 성을 도쿠가와라 바꾼다. 비로소 자신의 성명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확정짓고 오다 노부나가를 도와 천하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게 하였다.

히데요시와 대립

1582년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죽고 미쓰히데가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 초대에 받아 교토인근 사카이에 머물고 있었다. 곧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죽은 것을 알게되어 미카와로의 귀환을 서두른다. 그리고, 거병을 하여 미쓰히데를 치려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고쿠에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군을 이끌고 미쓰히데를 토벌한다.(야마자키 전투)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 오다 히데노부를 옹립해 실권을 장악한다.

이것에 불만을 품은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1594년 히데요시는 이누야마 성을 점거하고 이에야스를 공격한다.(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승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명분이었던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가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게된다. 대의명분이 사라진 이에야스도 어쩔수없이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게된다.

1586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신하로 삼기 위해, 동생 아사히히메와 이에야스를 결혼시킨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신종의 예를 따르지않았다. 그러자,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게 된다. 효자로 소문난 히데요시가 그의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기 때문에 신종의 예를 표하기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이후 그를 도와 1590년 전국 통일을 이루고 자신은 에도 성(江戶城 : 현재 도쿄)을 축조하였다.

세키가하라

1592년-1598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강행할 때 이에야스는 치안을 이유로 일체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1598년 히데요시의 사후 그 후계자 히데요리(秀賴)를 보좌하는 원로회의에서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경쟁자로 떠올랐다. 1600년 10월 지금의 기후 현에 위치한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동군(東軍), 미쓰나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서군(西軍)으로 포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동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고 서군의 주요 세력들은 더러는 처형당하거나, 영지가 몰수되어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에도 막부

1603년 이에야스는 당시 형식적 존재였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에도에서 가까운 지역일수록 도쿠가와 집안 사람을 신반다이묘(親藩大名), 그 다음으로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을 섬겨 온 직계 가신을 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 제일 변방 지역에는 도쿠가와에 저항 가능성이 있는 도자마다이묘(外樣大名)로 좌천해버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도자마다이묘들은 후에 막부반대운동에 가담한다.

1605년 이에야스는 쇼군의 직위를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오고쇼(大御所)가 되어 슨푸(駿府 : 현재 시즈오카 현)에 머물렀다. 1607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일본에 초청하여 양국 간의 국교를 회복하고 이후 200년 간 조선통신사를 중심으로 교류가 전개되었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구문물의 창구인 기독교를 다소 묵인해 왔으나 1597년 선교사, 신도 등 26명을 나가사키에서 화형으로 처형함으로써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에야스도 1612년 기독교 금지명령을 내려서 종교를 앞세워서 세력을 확장하던 서구 열강을 배척하였다. 당시 에스파냐포르투갈에서 온 예수회선교사들은 모두 필리핀등으로 추방되었고, 신도들은 청동으로 제작한 성화를 밟느냐, 아니냐로 고민할 것을 강요당하거나, 가쿠레다 기리시단이라고 하여 동굴등에 숨어들었다. 이러한 수난사는 일본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소설 침묵에 잘 나와 있다.

말년

1614년 당시 오사카(大阪)에 머무르고 있던 히데요리에게서 역모 혐의가 있다는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1615년 - 1616년에 걸쳐 오사카 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히데요리의 역모혐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건된 오사카 성의 종(鐘)에 걸린 문장을 빌미로 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서 권력을 잡았을때 5살에 불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20살의 청년이 되어 권력유지에 배치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역모혐의를 만들어내서 공격한 것이다. 결국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대의 기만전술로 패한 히데요리는 자결하고 오사카 성은 1616년 여름에 함락되었다. 이로써 도쿠가와 이에애스의 에도 막부는 단단한 권력기반을 갖게 되었다. 같은 해 천황로부터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된 이에야스는 4월 17일 슨푸에서 73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동조궁(東照宮)이라 하며 닛코(日光)를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 세워져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