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세계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 20세기 후반보다는 열강이 각축을 벌인 19세기에 더 가깝다.” 미국의 대표적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이론가인 로버트 케이건 카네기 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이 외교전문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9·10월호 기고문에서 현재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위상에 대해 밝힌 대목이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요즘 ‘날개 없는 독수리’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냉전에서 소련에 승리한 이후 미국은 그동안 국제 정치나 경제 분야는 물론 군사력 등 각 분야에서 거칠 것이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 해왔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특히 21세기를 맞으면서 출범한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투사하면서 경쟁 상대국이 없을 정도로 힘을 과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9·11 테러를 자행한 알 카에다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사담 후세인과 탈레반 정권을 제거했다. 부시 행정부는 또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옛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의 민주화를 부추겨 정권을 교체했다. 핵무기를 개발하려던 리비아는 미국의 선제 공격 가능성을 우려해 핵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백기까지 들었다. 세계 경제는 미국의 월가와 달러화가 좌지우지했다. 각국이 앞다투어 미국식 자본주의와 선진 금융시스템을 본받으려고 나섰다.
미국식 경제모델의 실패
과도한 군사비 지출·재정적자 증가
기진맥진한 경제에 금융위기 직격탄
그러던 미국이 갑자기 ‘제국의 힘’을 상실하고 있다. 지난 8월 러시아가 친미 동맹 국가인 그루지야를 침공했을 때, 미국은 그루지야에 대한 군사적 지원조차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 지나치게 군사력을 집중하는 바람에 그루지야를 지원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대결을 피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그동안 오일머니로 다시 힘을 비축한 반면, 미국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과 재정적자의 계속된 증가 등으로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졌다. 이 와중에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부실로 비롯된 금융위기가 미국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이번 금융위기는 다른 나라들의 자본으로 소비를 부양해 성장을 촉진해온 미국식 경제모델이 원인이다.
미국은 1990년대 말부터 금융산업을 경제성장의 주력 업종으로 선택했다. 당시 미국 의회는 금융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각종 법안을 양산했고, 이후 미국 금융회사들은 각종 파생상품을 아무런 규제 없이 쏟아냈다. 이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낳기도 했지만 월가의 탐욕과 잘못된 판단 등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부실을 키웠다. 월가의 붕괴는 미국 경제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미국은 제조업 부문의 약세를 금융산업의 막대한 수익률로 상쇄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소비침체가 계속된다면 국내총생산(GDP)의 70% 정도를 소비에 의존하는 미국 경제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미국 금융산업이 전세계에서 자본력과 첨단 투자기법을 활용해 벌어들이는 투자수익은 매년 수조달러에 이른다. 미국 경제가 흔들리면 자연적으로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을 놓고 마치 로마제국이 망할 때와 비슷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컬런 머피 전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 편집장은 저서 ‘우리가 로마인가?(Are We Rome?)’에서 성조기 무늬의 토가(toga·로마시민 복장)를 입은 미국이 로마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제사회에선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국제질서 변화의 3가지 시나리오
“미국의 제국주의는 끝났다” 잇단 경고
美 중심에서 ‘다극 체제’로 재편 가능성
미국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금융위기 이후 국제질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를 전망했다(10월 9일자 보도). 이 신문은 국제적인 세력 구도의 변화를 3가지 시나리오로 제시했다. 첫 번째는 독보적인 수퍼파워의 지위를 누려온 미국이 뚜렷한 쇠퇴기를 맞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이에 따라 미국 중심의 기존 국제질서는 ‘다극(multipolar)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베트남의 악몽이 재연되고 있는 이라크전쟁과 미국식 금융모델의 붕괴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반미 국가인 이란과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도 미국의 리더십을 의심하고 있다.
심지어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유엔총회 개막연설(9월 23일)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는 이제 거의 그 길의 끝에 도달해 가고 있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국 예일대 교수는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쇠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동시에 이를 앞당긴 원인이며 부시 대통령은 미국 정부를 재정적자의 수렁에 빠트린 장본인”이라고 비판하면서 미국 쇠퇴론을 강조했다. 존 그레이(gray) 전 런던정경대 교수는 “현 상황은 세계의 세력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이 변화되는 역사적·지정학적 변화의 순간”이라며 “2차대전 이후 지속돼온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레이 교수는 “소련 붕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몰락은 광범위한 지정학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경제력 약화로 인한 미국의 군사력 축소는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시나리오 1‘팍스 달러리엄’ 무너져 내리는 중
‘큰손’ 중국·러시아, 강력 라이벌 부상
현재 첫 번째 시나리오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과 맞물리면서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로마의 멸망 원인은 설이 구구하다. 그중에서도 은본위제 포기와 금본위제 훼손에 따른 화폐 문제가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식민지와의 무역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은 함유량을 조절해 은화를 평가절하했다.
이때부터 은 함유량은 지속적으로 줄어 로마의 경제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금화를 기축통화로 삼았으나 채굴량 부족 등으로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따라 중산층이 몰락하고 경제가 붕괴되면서 로마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가 멸망한 것은 가정의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제국의 몰락이 가정붕괴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로마의 가계(household)들은 화폐가치 하락에 따른 소득감소로 어려움을 겪었다. 가계는 사회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임과 동시에 국민경제의 핵심 경제주체 중 하나다. 따라서 건강한 가계는 부강한 국민경제의 초석(礎石)이다. 미국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몰려 있다. 서브프라임모기지의 부실로 많은 미국 가정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금융위기는 실물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미국 경기침체 징후는 이미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8월 산업생산은 전달에 비해 1.1% 감소해 2005년 9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기업 활동이 둔화되고 실업이 늘면서 개인의 소득이 줄고 소비지출도 감소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달러화 주도의 세계경제 질서인 ‘팍스 달러리엄(Pax dollarium)’이 무너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미국 상품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달러화 시대의 종료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그동안 막강한 달러화 자본과 월가의 첨단 금융공학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의 ‘지존’으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위기가 확산되자 세계 경제질서의 중심이 미국에서 유럽과 아시아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막대한 구제금융 비용이 가뜩이나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에 추가될 것이며, 누군가로부터 자금을 끌어와야 한다”면서 “가장 큰손은 중국·러시아·걸프 국가들이며 이들은 라이벌이지 동맹국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루비니 교수는 또 “미국은 이번 위기를 어떻게 해서든 넘길 것으로 보이지만, 세계에서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 다른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라면서 “미국이라는 제국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일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