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근질근질....그때, 해후처럼 나와 마주쳐”
문태준 시인이 말하는 ‘절에서 하룻밤’
수많은 방을 바꿔가며 수많은 방을 만났지만 절에 가 묵는 단출한 방만 못하다.
단출한 방에서의 하룻밤,
살림이 없는 방은 병(病)이 난 몸에게 처음 먹여주는 미음 같은 것.
절이 내주는 방은 가구와 가전이 없다.
절은 ‘맨밥’같은 방 한 칸을 내준다.
벽과 천정과 바닥만 있는 방, 나는 깜박깜박 졸하다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근질근질하다.
도로 누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뒷짐을 지고 방안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속말이 있으나 더불어 말할 사람이 없다.
두고 온 사람 생각이 왜 없겠는가. 접어놓고 온 일에 왜 불안하지 않겠는가.
일을 잊자고 온 곳에서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고 잊고자 하여도 잊기 어려운 것은 그냥 둬본다.
좇아가 찾는 추심(推尋)을 삼가고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본다.
내가 가려서 선택하고 욕망했던 일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 그때. 해후처럼 나를 마주하게 한다.
생각이 일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이것 또한 관대하게 나의 마음을 경청하는 일 아니겠는가.
절에서 소낙비를 마음 없이 바라보는 일도 일미(一味)이다.
여름비가 내리다 문득 긋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잠깐 웃는 사이 같기도 하고,
울음이 쏟아졌다 막 멎는 사이 같기도 한 그것,
웃음도 울음도 잠깐 얽히고 설킨 그물의 일일 뿐, 모든 것은 흘러간다.
비가 그치면 풀벌레 소리가 돋아나니 더욱 좋다.
불어난 계곡물은 절에 에두르고, 물이끼는 돌의 이마에서 한층 짙푸르고,
계곡의 청량한 바람은 새소리를 맑게 옮겨준다.
녹음과 풀벌레소리와 골물과 돌이끼와 바람과 새소리와 간소한 방이 절에서는 나의 모든 재산,
그것들을 금고에 가둘 필요는 없다.
아무도 그들을 몰래 떠메고 가지 않을 것이므로 도둑이 없으므로 빼앗길 것 도 없고,
나로부터 빼앗아가는 이도 없다.
찐 감자를 내놓은 인심도 좋지만,
산나물과 말간 국으로 차린 소찬의 밥상도 좋다.
밤은 더 캄캄하고 적적하다.
오, 밤이 이렇게 길었다니,
한숨의 잠을 자고 나도 바깥은 여전히 밤,
그러니 일어나 밤을 걸어도 좋다.
구겨진 잠을 잘 필요는 없을 테니. 여름밤의 긴 은하는 어떠한가.
그럴 때는 절 마당에 조용히 솟은 탑을 두레를 가만가만 돌아보라.
한 가지 소원을 빌면서,
아무도 없는 절 마당의 한가운데에 쪼그려 앉아도 보라.
달밤에는 마루에 앉아 보라,
내가 낮 동안 끌고 다닌 신발이 댓돌에 가만히 올려져 있는 것을 바라보라.
대숲이 가까이 있거든 댓돌까지 내린 대나무 그림자가 댓돌을 쓸 때 먼지가 일고 있나 살펴보라.
나의 생을 누가 흔들고 있는지를 자문해보라.
새벽녘에 스님이 목탁을 치며 절 마당을 돌거든
조용히 대웅전으로 가 스님들과 함께 아침예불을 올려보라.
하늘과 땅과 물속의 생명을 큰 사랑으로 다 보살피겠다는 원력도 세워보라.
너 나 할 것 없이 공양하겠다는 작심도 한번 해보라.
두고 온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어질 때 그때 돌아보라.
당신보다 조금 늦게 찾아올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이 머문 한 칸의 방을 말끔하게 정리해 놓고서,
그곳에 빈 방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서,
비로소 당신의 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 한 칸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