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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 김성철 교수

작성자主人公|작성시간11.04.10|조회수76 목록 댓글 0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아인슈타인이 ‘우주 종교’라고 극찬했듯이 불교의 많은 가르침은 현대의 과학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의 우주론이 그렇고, 불교의 생명관이 그렇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어림짐작해 보아도 너무나 타당한 가르침이 한 가지 있다. 인신난득(人身難得), 즉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학은 ‘확률론’이다. <잡아함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맹구우목(盲龜遇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을 가르치신다.
 
맹구우목이란 ‘눈먼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남’이란 뜻인데,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날 때 인간의 몸을 받을 확률’은, ‘온 땅덩이가 바다로 변했을 때 수명이 무량겁인 눈먼 거북이가 바다 밑을 헤엄치다가 숨을 쉬기 위해서 100년에 한 번씩 물 위로 올라오는데 우연히 그곳을 떠다니던 나무판자에 뚫린 구멍에 목이 낄 확률’보다 더 작다고 가르치신다.
 
 
‘눈먼 거북이가 나무판자 만남’처럼 어려워
 
 
‘눈 뜬 거북이’라면 그 나무판자를 겨냥해서 물위로 올라올 수 있기에 판자구멍을 찾아 목을 들이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먼 거북이가 태평양 같은 바다에서 여기저기 떠다니는 한 장의 나무판자를 만나서 그 구멍에 목을 넣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은 그보다 더 작다.
 
조갑상토란 ‘손톱 위의 흙’이란 뜻이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손톱 위에 흙을 퍼 올려놓고서 이 흙과 대지의 흙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많은지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스님들은 대지의 흙이 훨씬 많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람으로 살다가 인간계나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자는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적고 아귀나 축생, 지옥 등 인간계 아래에 태어나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이 많다고 가르치셨다.
 
현재 전 인류의 수는 70억에 가깝다고 한다. 그런데 맹구우목과 조갑상토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70억 인류 가운데 전생에 사람이었던 자는 거의 없고, 내생에 다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자는 거의 없다. 참으로 무서운 가르침이지만,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나의 지금 이 몸은 원래 1/10mm도 안 되는 한 점의 수정란이었다. 어머니의 자궁 속 수정란이 풍선처럼 부풀어서 지금의 이 몸으로 자란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이런 작은 수정란에서 현생의 삶을 시작한다. 불전의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서는 죽은 중음신이 수정란에 반영되어 잉태되는 과정을 “식(識)에 의존하여 명색(名色)이 있다”거나 “식이 입태(入胎)하여 명색이 자라난다”고 표현한다. 인간이나 짐승, 새나 곤충, 벌레나 물고기는 그 크기와 외형이 각양각색이지만 그 출발점인 수정란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유전자를 갖는 세포핵과 원형질로 이루어진 단세포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세포는 자라서 새가 되고 어떤 것은 물고기가 되고, 어떤 것은 모기나 파리, 개미나 벌이 되고, 어떤 것은 송아지나 돼지, 강아지가 되고 어떤 것은 인간이 된다. 인류의 수가 70억이라고 하지만 이는 매일매일 지구상에서 형성되는 온갖 생명체들의 수정란 수와 비교하면 태평양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의 양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인신난득이다. 어떤 유행가에서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고 읊조리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상의 생명체의 수도 그런데, 불전에서는 삼천대천세계에 온갖 생명체가 가득하다고 가르친다. 화가 김환기가 그림으로 표현한 김광섭의 시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가슴을 저민다.
 
김성철 교수 /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불교신문 2710호/ 4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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