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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송원 동문모임..겨울 여행 2012.1.26~27,목금

작성자석관일|작성시간12.02.02|조회수41 목록 댓글 0

 득량만 수문을 지나가며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오리떼를 본다.


   새오리 눈빛

 

  득량만 수문 갈대숲에 싸여

  새오리 얼음 위에 서 있다.

  청둥오리떼 물 가르며 헤엄치는 모습

  가만히 바라보며 홀로 서 있다

  싸늘한 얼음 위일망정

  그림자 오래도록 함께 서 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갈대들이 새오리 바라보며

  겨울 바람 막아주고 있다.

  얼음장 한 덩이도

  새오리의 피곤한 다리와 날개 받쳐주고 있다 


6개월 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 어느덧 자녀들은 자라서 떨어져 나가고 부부들만 다시 모였다. 대학생 허찬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 보성 득량면 강골마을

첫 여행지로 보성 강골마을로 간다. 전통 한옥이 잘 간직된 곳으로 산수가 수려하고 마을 사람들이 고루 잘살며 조용하여 살고 싶은 곳이다. 보성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강골마을은 처음 와 본다. 강골마을이란 명칭은 일제 강점기 득량만에 방죽을 쌓기 전에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넘실거리고 계곡에서 물이 많이 나와 강골(江谷)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양반과 평민들의 빈부 격차가 별로 나지 않은 동네이다. 집 뒤는 대숲에 둘러싸이고 앞에는 오봉산이 바라보인다. 나무가 많아서인지 대체로 동네가 평화롭고 아늑하다. 돌과 진흙을 어우러지게 쌓은 돌담이 어릴 때 살던 고향 마을을 떠올리게 하여 더욱 정겨운 느낌이 난다. 이 마을은 광주 이씨의 집성촌이라고 하는데 현재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는데, 이곳에서는 쌀눈을 발아시켜 만든 엿을 만들어 팔고 있다.

국회의원인 이중재 씨 생가로 들어간다. 정갈한 기와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문턱이 오랜 세월에 닳아져서 둥글게 패여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다. 마당에 들어서니 처마 밑에 벌집과 수수대 말린 것이 걸려 있고 툇마루 한쪽에 짚바구니와 멍석이 놓여 있어 시골의 수수함이 잘 드러난다. 집 뒤로 돌아가니 김치항아리 땅에 묻던 곳이며 장독대가 보인다. 대나무가 울창하게 솟아 있어 강직한 인물이 많이 나왔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왼쪽에 정원이 아담하게 잘 가꾸어져 있다. 이중재 씨는 아마 공부하다 지치면 툇마루에 나와 이 정원을 바라보며 눈의 피로를 식히지 않았을까? 텃밭 오르는 곳에 요강이 반쯤 땅 속에 묻혀 있다. 겨울밤 방 한쪽에 놓여 요긴하게 이용되던 요강. 주인은 사라지고 요강만 남아 맑은 물을 품고 앉아 하늘만 비추고 있다.

열화정에 오른다. 조선 현종 때 이재 이진만 선생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해 현재 중요민속자료 162호로 지정받은 ‘열화정’은 이진만 선생의 손자 이방희가 당대 석학 이건창과 학문을 논했던 곳으로 한말의 의병으로 유명한 이관회, 이양래, 이웅래 등을 배출했다고 한다. 이곳 정자는 특이한 모양이다. 계단으로 지대를 높게 쌓아 ㄱ자형 팔작기와지붕 얹어 방과 넓은 정자를 함께 들였다. 마루쪽은 지대가 낮아 긴 기둥으로 받쳐져 있고, 방쪽은 계단 위에 쪽마루로 둘려 있다. 방과 마루는 천장에 매단 문으로 바로 오가도록 만들어 여름이면 참 시원하겠다. 이곳에서 공부도 가르치고 강연도 하고, 사랑방처럼 모임도 가졌을 것이다. 정자 뒤에는 대나무숲이 우거지고 커다란 동백나무가 줄줄이 심어져 있다. ㄱ자형의 정자 앞에는 ㄴ자형의 연못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구조를 보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정경호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다. 살얼음이 낀 연못 그늘진 곳에는 눈싸라기가 떡 시루에 끼얹은 흰 고물처럼 뿌려져 있다. 정자 툇마루 높은 곳에 앉으니 따스한 겨울 햇살이 온몸에 스며든다.

소리샘으로 향한다. 열화정이 남자들의 공간이라면 소리샘은 여자들만의 공간이다. 우물터인데 바로 이용욱 가옥의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벽에 구멍을 내 놓았다. 우물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지 푸른 이기풀이 한겨울인데도 무성하다. 우물 아래는 미나리꽝으로 푸른 미나리가 푸릇푸릇하고 작은 개구리밥풀이 물 위에 떠 있다. 이곳 우물터에서 여인네들은 남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소곤소곤 동네 소문 주고받으며 깔깔깔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지은 집도 우물도 그대로 있는데, 주인이라고 큰 소리 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 또한 그렇게 언제인가는 사라져 갈 것이다.

민속자료 159호인 이용욱 가옥으로 간다. 열화정을 지은 이진만이 초가로 지은 것을 손자 이방회가 기와로 바꾸고 솟을대문을 3칸으로 늘렸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행랑채, 중간문채, 사당, 연못 등 사대부집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전통가옥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장독대 들어가는 곳에 대문이 따로 있다. 그만큼 중요한 장소였으리라.

그 옆집은 노란 초가가 인상적인 '이식래 가옥‘이다. 이곳에서 엿을 고아 만드는지 마당 한쪽에는 솥단지가 대여섯 개 걸려 있다. 설이 끝나서인지 솥은 깨끗이 씻겨져 아직은 쉬고 있다. 처마에는 무청시래기 다발이 걸려 말라가고 있고 매주를 묶던 짚의 빈 손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그 옆에는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집 뒤에는 푸른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바깥으로 나오니 마을 중앙에 큰 연못이 파여 있는데 추운 날씨에 얼음이 얼었다. 겉표면에 갖가지 얼음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오래 산 팽나무가 예사롭지 않는 눈빛으로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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