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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을 만든 영화사 라이온스게이트가 오는 9월 또 한 편의 문제작을 내놓을 예정이다. 영화제목은 ‘미국 대 존 레논'(The US vs. John Lennon).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다큐멘터리는 세계적인 뮤지션에서 반전운동의 아이콘으로 변신한 존 레논의 삶과 그의 입을 막으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을 담았다. 영화가 얼마만큼 존 레논의 진실을 담을지 벌써부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해 레논이 운동의 대열에 동참한 것은 ‘변신’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1971년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급진적인 발언을 했을 당시 신좌파 활동가들조차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북부 노동자 도시 리버풀 출신의 레논이 운동에 뛰어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레논은 1971년 <카운터펀치>에 실린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과의 인터뷰에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이 언제부터 형성됐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처럼 자란 사람에게는 경찰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먼 곳에 데려다 놓고 목숨을 잃게 만드는 군대에 끌려가는 걸 경멸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건 노동계급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에게 ‘계급’은 뿌리깊은 원초적 자각이었고 계급구조가 있는 한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레논은 종교에 심취해 있을 때에도 자신을 ‘기독교 공산주의자’로 규정했다.
존 레논은 1940년 10월9일 선원인 아버지 알프레드와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논이 5살 무렵 아버지가 가정을 버린 후 그는 이모의 손에서 자랐다. 학창시절 미술에 재능을 보인 레논은 리버풀 미술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자퇴했다. 레논은 이후 자신의 삽화를 담은 책 두 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중등학교 시절 ‘쿼리멘’이란 이름의 밴드를 조직한 레논은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등을 영입해 ‘조니 앤드 더 문독스’를 결성한다. 이후 밴드의 명칭은 ‘실버 비틀스’를 거쳐 ‘비틀스’로 확립된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비틀스의 멤버 4명은 모두 리버풀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 출신이다. 리버풀 주민들은 아직도 비틀스를 낳은 도시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비틀스의 팬이라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지난 3월 리버풀의 존레논 공항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존 레논의 ‘이매진’으로 강력한 항의의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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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변두리 출신의 이 로큰롤 밴드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 레논은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조지 해리슨은 미국에서 아직 반전운동이 활성화되기 이전인 1966년에 연예부 기자들 앞에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비틀스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누차 베트남전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레논의 첫 정치적 발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미국의 록그룹에 대해 경멸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중산층이고 부르주와”이고 “대부분이 우익으로 보이는 미국의 노동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어서 ‘계급’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논의 정치 참여가 단순히 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신성분’에 기반했던 것임을 다시금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이 좌파들로부터 항상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68혁명의 와중에 인도에 명상 여행이나 떠나거나 '혁명'이라는 노래에서 자신을 혁명의 대오에 "포함시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알 수 없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노래 ‘혁명’에 대한 논란과 관련, 레논은 나중에 이 노래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해명했다. 원곡에는 ‘나를 포함시키라(count me in)’는 것이었고 두 번째 곡에는 ‘(파괴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나를 빼달라(count me out)’는 것이었다는 설명이었다.
레논은 1969년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새 연인인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와 함께 본격적으로 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레논은 비틀즈 해산 이후 발표한 솔로 앨범 곳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대가 '우리 승리하리라' 같은 옛날 찬송가나 부르는 것을 보고 직접 '민중에게 권력을'이라는 운동가를 짓기까지 했다.
그는 이 노래에서 "지금 당장 혁명이 필요"하며 "노동자들이 제 몫을 되찾아야" 하고 "여성이 해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매진'에서는 "종교도 없고", "국가도 없으며", "소유도 없는" 세상을 말했다.
레논을 단순히 급진적인 노래를 불렀던 사람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마르크스의 이상이 바로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했으며, 소련과 중국에 대해 상당히 깊이 있는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또 "모든 혁명은 개인 숭배로 끝나고 말았다"며 이는 쿠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보고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어버이'가 되어 어떠한 '어버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자기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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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논의 이러한 명철한 정치의식과 투쟁은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베트남전을 질질 끄는 닉슨 정부에 대한 투쟁에 열중하다가 좌절하면서 부침을 겪었다. "좌파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계급 젊은이들에게 다가가야만 한다"고 일갈했던 그는 한때 술에 찌든 백만장자로 소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앨범을 발표하면서 그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엎치락뒤치락했던 정치 경력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면서도,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보수파가 되든지 사회주의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라며 자기는 자신의 사상을 "선(禪)-맑스주의"로 정리하겠다고 단언했다.
'선불교'와 '맑스주의'의 결합. 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1980년 12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가 캘리포니아 이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지원 방문을 계획할 무렵이었다. 25세 청년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저지른 암살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지났지만 레논은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몽상가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는 날 세계가 하나처럼 살게 되길 바래요
- '이매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