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사기열전(史記列傳) 한국이 선진 강국이 된 기적 황의순 소장/서울대법대 68학번 졸업 우리의 60, 70, 80대가 살아온 삶 자체가 기적 1950년부터 3년간의 전쟁이 한반도에 남긴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건물은 무너졌고, 다리는 끊어졌다 으며, 사람들은 집을 잃었습니다. 1953년 10월!. 영국 가디언지의 특파원 제임스 카메론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본 광경을 기사로 썼지요. 거리마다 무너진 건물들 뿐이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게 거의 없다. 사람들은 판잣집과 천막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맨발로 돌아다닌다. 겨울이 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어 죽을지 상상조차 끔찍하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서울 인구 100만명 중 60만명이 판자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수도가 없었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1953년 11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한국은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이건 그냥 폐허다. 원조로 연명하는 거대한 난민촌일 뿐이다. 숫자로 보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 빈국으로 꼽혔습니다. 에티오피아가 70달러였습니다. 한국이 에티오피아보다 가난했던 겁니다. 산업시설은 거의 다 파괴됐습니다. 전쟁 전에 있던 공장 600개 중 500개가 폭격으로 망가졌습니다. 남은 공장도 돌아갈 전기가 없었고 전기가 있어도 돌릴 기술자가 없었습니다. 1954년 3월 미국 타임지가 한국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제목이 충격적이었지요. 인류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파괴된 나라.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전쟁 전 남한 인구는 약 2천만 명이었는데 북쪽에서 피난온 사람들까지 합치니 2,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좁은 땅에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만 넘쳐났습니다. 1955년 1월, 세계 은행이 한국에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6개월간의 조사를 마쳤습니다. 마치고 그들이 낸 보고서의 결론은 냉정했습니다. 이 나라가 자립경제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 30년간은 지속적인 국제원조가 필요하며 그마저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30년간 원조를 받아도 성공을 장담 못 한다는 겁니다. 당시 국제 사회의 시각은 명확했습니다. 한국은 영구적인 원조 대상국이 될 거라는 거였죠. 1957년 4월, 일본의 한 경제학자가 도쿄대학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이 일본 수준의 경제를 이루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조차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었으니까요. 먹을 것도 없고 일할 곳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절망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세계가 주목하지 않은 곳에서 말입니다. 1955년 9월, 한국정부가 이상한 결정을 하나 내립니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한 겁니다. 나라에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학교부터 짓기 시작했지요. 1956년부터 1960년 사이 한국에 세워진 학교 수가 무려 3,247개였습니다. 하루에 2개씩 학교가 생긴 셈입니다. 판자집 마을에도 학교가 들어섰고 산골 마을에도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57년 8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이 경기도 한 시골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가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정부는 우선 순위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빵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를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맞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교육이 무슨 소용이냐는 거죠. 하지만 한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8년, 서울 청계천 판자집 마을에 야학이 생겼습니다. 낮에 일하느라 학교에 못 간 어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야학에 모였습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이 1958년 11월에 이 야학을 취재했습니다. 그가 본 광경은 이랬습니다. 40대 노동자가 10대 학생 옆에 앉아 한글을 배운다. 전구 하나 아래서 30명이 공책에 글씨를 쓴다. 이들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배우려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알았던 겁니다. 배워야 먹고 산다는 걸요. 글을 읽어야 기술을 배울 수 있고, 기술을 배워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1959년, 놀라운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진 겁니다. 불과 6년 만에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40% 가까이 늘어난 것입니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교육 현황을 조사 했습니다.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한국만큼 짧은 시간에 문맹률을 낮춘 나라는 전례가 없다. 국민의 교육열이 경제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경제수준을 초과하는 교육열은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배우는 건 멈추지 않았습니다. 굶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1960년 3월 한국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6%를 돌파했습니다. 같은 시기 인도는 61%, 필리핀은 72%였으니까,...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이었는데도 취학률은 한국이 더 높았던 겁니다. 하지만 1960년 국제 언론의 평가는 여전히 냉정했습니다. 1960년1월 뉴욕타임스 헤드라인입니다. 한국 7년째 원조의존!. 자립 경제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설계는 여전히 한국을 끝난 나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아무리 많이 지어봤자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몰랐습니다. 195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196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갈거라는걸요.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완전히 바꿔 놓을거라는 걸요. 1960년이 끝날 무렵 한국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원조에 의존했고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씨앗은 뿌려져 있었습니다. 교육이라는씨앗이오. 그리고 바로 다음에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할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1961년 1월 1일 한국의 수출액은 3,290만 달러였습니다. 수입액은 3억 4,300만 달러였구요. 10배 이상 차이가 났죠. 한국이 수출하던 것들은 뭐였는지 아세요?. 텅스텐 원석, 생선, 김, 그리고 가발이었습니다. 1961년 1월 13일,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섰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격적인 선언이 나왔습니다.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 계산기를 두드려 볼까요?. 3,29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면 30배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10년 만에요. 1961년 9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이 소식을 듣고 기사를 썼습니다. 비현실적인 목표!. 한국정부는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다. 원조 없이는 생존도 어려운 나라가 수출 강국이 된다는 건 환상입니다. 냉정한 평가였죠. 실제로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한국에는 팔만한게 없었습니다. 공장도 별로 없었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냥 시작했습니다. 1962년 1월, 울산의 첫 공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그냥 바다와 모래사장 뿐이었죠. 1962년 5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특파원이 울산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예요. 황량한 해변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인프라도 없고 숙련 노동자도 없다. 대체 무엇을 만들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맞았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들도 잘몰랐습니다. 뭘 만들어 팔아야 할지를요?. 그냥 일단 공장부터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1963년 11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한국인 123명이 내렸습니다. 광부들이었지요. 탄광에서 일하러 온 젊은이들이었죠. 1964년 12월에는 간호사 130명이 독일로 떠났습니다. 독일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 였어요. 그들이 버는 돈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송금됐습니다. 1965년 1월, 독일 쇼피겔지가 한국인 광부들을 취재했습니다. 기사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들은 지하 1,000 m 갱도에서 일한다. 위험하고 힘든일이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는다. 모두 조국에 돈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땅밑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면서,... 뒷이야기는 모두 아시죠?. 글이 여기서 잘렸네요. = 톡으로 받은 글 편집했습니다 = 漢陽 Jun.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