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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지몽(邯鄲之夢)

작성자漢陽 Jun.|작성시간24.11.04|조회수438 목록 댓글 0



한단지몽(邯鄲之夢)

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하북성(河北省)내]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서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
서울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 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은
포박 당하는 자리에서 탄식하여 말했다.


내 고향 산동에서 땅뙈기나 부쳐먹고 살았더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걷던 때가 그립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칼을 들어 자결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년 후 원죄(寃罪)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는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고하고
하단을 떠났다.

​☆
한단지몽(邯鄲之夢)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榮華)의 헛됨의 비유함.


​= 톡으로 받은 글 =




漢陽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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