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考力을 위한 文學敎育의 設計*
金大幸**
Ⅰ. 問題의 方向
사고력이라는 말은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스스로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이 들어 가서 나쁜 뜻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힘’을 뜻하는 ‘-력’이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사고한다’는 그 자체가 인간의 특성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긍정적인 사고활동에 문학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문학의 교육은 어떤 고려가 필요한가? 이 글이 밝히고자 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그런데 잘못된 관점이 논의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을뿐더러, 본질을 멀리 벗어나 뒤틀린 현실적 관행이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경우도 더러 본다. 따라서 먼저 문학과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 문학교육의 구체적인 설계에 대한 지표를 검토하기로 한다.
Ⅱ. 觀點의 檢討
1. 成長으로서의 敎育
문학이 사고력에 대해 어떤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어떤 효과’는 바로 ‘교육적 결과’에 해당한다. 따라서 논의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
교육을 정의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인간의 성장에 관한 활동’이라는 정의는 비교적 타당해 보인다. 성장이라면 신체적 성장이 먼저 떠오르지만, 지식, 기술, 판단, 의지 등의 능력에도 적용되고,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개성 혹은 인격에도 적용되며, 개체의 유지와 변화에 관계되는 신념, 욕구, 정서, 감정, 기질, 안목 등의 성품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성장은 증진 혹은 증대 등의 양적 개념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안정, 순화, 균형, 세련, 조화, 통합 등의 질적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교육의 이러한 본질에 기대어 문학이 개인의 사고력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어떤 것보다도 문학은 사고력의 향상에 포괄성과 구체성 및 효율성을 가진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과 사고력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연합하는 기제인 교육에 대한 관점을 명료하게 해 둘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교육이라고 하면 먼저 학교를 떠올리고 수업의 행태를 생각하고 교재를 연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서 상당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이 곧 학교만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사람의 한 생애는 학교 이외에도 가정, 사회 등 수많은 교육적 기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며, 제도교육은 사회적 가치가 상당한 기속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문학이 사고력을 향상시킨다는 문제를 검토할 때에도 문학을 학교에서 영역 또는 교과목으로 부과되는 명칭쯤으로 한정해버리는 것은 문학의 실상에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외재적 관련에 지나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문제에 대한 바른 접근을 그르칠 염려가 없지 않다.
교육에 대한 통념 가운데 또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교육을 받는 사람을 백지 상태로 보는 경향이다. 인간이 지능과 정서에서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지만, 한 생명체가 차가운 공기 속에 노출될 때 이미 거기에는 사회적 혹은 문화적 상태가 어떤 형태로든 주어지게 마련이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의식하건 혹은 의식하지 못하건, 또는 그것의 습득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이미 무엇인가가 어떤 상태로 이미 교육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서 어느 수준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에서는 그 교육되는 주체가 무엇인가를 이미 지닌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을 본능이라고 하건, 아니면 능력이라고 하건, 그 명칭이 무엇이건 간에 인간은 이미 지니고 있는 어떤 상태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고 지니고 있는 것을 수정하는 활동이 이루어짐으로써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학과 사고력이 연관되는 장에서 인간의 정신적 내부에 무엇인가가 새로이 형성되고 혹은 수정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일은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교육을 ‘인간의 성장에 관한 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이 정당하고, 인간은 성장의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삶은 성장의 추구와 실천이라는 명제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본다면, 문학이건 사고력이건 이미 어느 수준의 교육된 결과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데서 출발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런 관점이 타당한 것이라면, 문학이 사고력에 대해 발휘하는 교육적 기제를 성장의 체계화‧풍요화‧심화의 활동이라고 보고자 한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이미 도달한 어떤 수준에서 양적‧질적으로 더 향상된 성장을 도모하는 활동이 문학활동을 통해서 활발하게 추진되는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2. 文學을 屬性으로 보기
사고력에 관련하여 문학을 생각하는 관점도 분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잘못된 문학관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교육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문학을 기피하게 된 혐의가 없지 않음을 생각하면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문학’이라는 용어에서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金素月의 ‘엄마야 누나야’이든가, 아니면 黃順元의 ‘소나기’ 같은 것들이다. 아니면 고등학교의 문학 교과서이거나 국어 교육과정상의 한 영역인 ‘문학’이다. 문학을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는 현상이지만 문학에 대한 접근을 매우 어렵게 하고 뒤틀리게 한 요인도 된다.
그 까닭을 문학의 실상에서 찾아보면 그 문제점이 쉽게 드러난다. 문학에 대한 정의가 매우 다양하고 그 본질이나 속성이 매우 다채롭게 설명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안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작품 중 그 어느 것도 그러한 문학의 본질이나 속성을 모두 갖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이 언어예술이라는 것은 문학의 결정적인 필요조건이겠지만, 그 나머지의 본질이며 속성은 그 중 어느 일부만의 조합으로도 문학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문학의 실상이 그러하며, 그것의 변모가 바로 문학사의 흐름이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문학을 구체적인 작품으로만, 또는 문학의 역사로만 이해하려고 드는 것은 문학에 대한 시각을 제한한다. 이 세상의 어떤 문학 작품도 문학에 관한 설명을 다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작품 중심의 문학관은 문학에 대한 이해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고, 새로이 읽어야 할 문학작품에 대한 교육적 유연성을 감소시킨다. 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민요를 찾기 힘들다고 투덜거리거나, 속담이 과연 문학일까 하는 고민은 대체로 이런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학에 대한 관점을 實體 中心觀과 屬性 中心觀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구체적 작품을 강조하고 거기에 시각을 고정시키는 관점을 실체 중심이라고 한다면, 문학성, 시의식, 산문정신 등의 용어에 含意된 시각은 속성 중심의 문학관이라 할 수 있다. 실체 중심의 문학관은 전문적인 문예비평의 시각을 견지하면서 작품 창작을 강조하게 마련이고, 이에 반해 속성 중심의 문학관은 생활로서의 문학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문학적인 글쓰기 등 문학 능력에 주목함으로써 교육적 국면을 중시한다. 바람직한 문학교육을 위해서는, 특히 사고력과 연관되는 문학의 공리성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속성 중심의 문학관 쪽에 서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까닭은 자국어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보는 관점과도 관계가 깊다. 실체 중심의 문학관은 문화유산관(cultural heritage)과 관계가 깊다. 교육받은 엘리뜨가 지녀야 할 수준으로서의 민족문화에 대한 체질화가 강조된다. 속성 중심의 문학관은 그보다는 개인의 성장(personal growth)과 관계가 더 깊다. 자기 실현을 해 내는 개체로서의 능력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나머지 세 가지 목표인 범교과(cross-curricular), 성인적 필요(adults needs), 문화 분석(cultural analysis)과 함께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지만 문학에 대한 관점이 실체 중심으로만 기울 때 한 쪽이 강조될 수밖에 없게 된다. 더구나 사고력에 대하여 문학이 발휘하게 되는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개인적 성장이라는 관점의 지지를 더 받도록 문학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3. 多樣性으로서의 思考力
사고력이라는 말이 ‘생각하는 힘’으로 풀이되는 것은 다소 모호해 보이면서도 적절해 보인다. 그 까닭은 사고력이라는 용어가 매우 다양한 내포를 지니고 있을뿐더러 논의의 역사도 오래고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접근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각 작용에 직접 의지하지 않으면서 상보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과정이 사고라는 본질의 정의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생각하는 일 이상으로 달리 정의되는 것은 결국 독특한 관점의 표명에 그칠 것이다.
이런 판단이 가능한 것은 사고의 본질에 대한 관점이 변모에 변모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새로운 그리고 타당한 판단인 추리를 끌어내는 과정’이라고 하여 개념, 판단, 추리를 중시함으로써 이미 습득한 지식의 재활용을 통해 사고가 이루어진다는 측면에 주목을 한 바 있고, 그런 관점에서 논리법칙이 강조되었다. 그 후 피아제에 이르기까지 사고력이라는 용어에 논리적 냄새가 짙게 배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서도 ‘새로움’은 중시되었으며, 사고력을 생산적 방식으로 보아 새로운 견지에서 사태 새로 보기로 규정한 것이 꼭 게스탈트 학파의 공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고력이라는 용어에는 논리성만이 아니라 창의성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자리를 잡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를 다시 ‘認知’라는 용어로 바꾸어 정보 처리 과정이나 능력으로 접근하는 관점에서도 지각과 기억을 포함하면서 재조직과 생산이라는 본질에는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의미 있는 차이들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충분하고 깊이 있게 논의된, 따라서 그만큼 규정이 다양한 사고력의 재정의나 구조 또는 기능의 규명은 논의의 초점도 아니려니와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므로 논외로 한다. 그러기보다는 사고력을 규명하기 위해 그 동안 많은 연구들이 들추어 낸 여러 측면이 오류이거나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그런 측면이 문학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고력이 지닌 다양성에 오히려 충실하는 길이 될 것이다.
Ⅲ. 文學과 思考의 關聯 樣相
1. 文學의 形象性과 類推的 思考
문학은 언어로 구축한 형상으로서 自足的인 완결성을 갖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속성은 사고력과 연관하여 생각해야 할 세 가지 측면, 즉 언어성, 형상성, 자족성으로 요약된다.
언어는 기호일 뿐 事象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은 언어가 사고력의 중요한 촉매라는 점을 환기시켜 준다. 언어적 매개과정을 중시하여 사고과정을 살피려는 연구 경향이 있는 것도 이러한 속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바람’이라는 기호가 바람 그 자체를 소유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언어로 이루어지는 결과는 지각이 아니라 기억의 재조직이며, 이러한 재조직 과정은 곧 사고과정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언어활동은 그 자체로서 사고과정이며, 활발하고 효율적인 언어활동의 설계는 곧 사고력의 개발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 활발함과 효율성을 위한 장치가 무엇인가만 고민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언어는 언어의 이러한 사고적 일반성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문학이 아닌 언어에서 중시되는 것은 지시대상과의 일치 또는 그 적절성이다. 따라서 일상어에서 그 정확성이나 적절성의 평가는 사실 세계의 대상에 조회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반면 문학의 언어는 현실에 조회하지 않는다. 금강산에 가더라도 ‘나무꾼’이나 ‘선녀’를 조회하는 바보는 없으며, 徐廷柱의 ‘애비는 종’이었는지 호적을 뒤지지 않는다.
이것은 문학이 언어로 만들어 낸 별도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형상이며, 별도의 세상이므로 현실 세계의 구체적 무엇을 직접 가리키지 않는다. 그래서 문학을 허구라고도 하고, 상상력의 소산이라고도 한다. 그러기에 문학을 접하는 일은 숲 속에 감추어 둔 보물을 찾기가 아니라 지도로 재개념화하고 그것을 헤아려 보는 일이 된다. 사고력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경험의 재조직이며 그를 통한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다.
문학의 형상성이 사고력에 매우 중요한 연관을 갖는 측면이 여기서 드러난다. 현실 세계의 구체적 대상을 환기하는 일은 일회적이고 단선적인 데 비하여 현실 세계와 무관한 별개의 세계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를 요구한다. 만들어 내되 멋대로가 아니라 경험 세계에 근사하게 조직된 것이라야 한다. 문학을 감상하거나 문학적인 글을 쓰는 일은 따라서 경험의 재조직이다. 재조직하는 능력이 곧 사고력임은 앞의 정의에서 이미 드러난 바다. 자연과학의 발전에서도 이러한 재조직과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은 力學理論의 예에서만도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문학이 만들어 낸 형상이란 쉽게 말하면 그림이다. 대체로 장르의 속성과 관계가 깊지만, 그것은 때로 靜畵이기도 하고 動畵이기도 하다. 그 어느 쪽이건 그것은 현실에 조회하는 것이 아니라 재조직된 경험과 창조될 가능성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은유가 되며 따라서 다의성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문학의 숙명이다.
이 숙명이 곧바로 창의력을 위한 사고력의 기반으로 강조되는 미덕이다. 사고의 기능을 창조와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새로이 만들어진 것은 새로운 상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창의성의 개발을 위해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은유적 사고가 창의력 유발 요인으로 매우 중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의 형상이 지닌 의미를 다양하게 추리하는 힘이 사고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바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창의성의 개발을 위해서는 애매성에 빠지게 하라는 이론을 굳이 빌어오지 않더라도 애매성이 곧 多義性과 동의어이며 多義性이 사고를 얼마나 다양하게 하는가는 노스트라다무스나 土亭秘訣을 통해 충분히 체험하고 있는 바이다.
이러한 다의적 사고는 유추적 사고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문학적 유추는 그 본질이기도 하므로 경험적 혹은 개념적 유추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의 풍요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1:1의 관계가 아니라 1:多의 관계다. 과학적 발명이라고 일컫는 것들이 대체로 유추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므로 문학과 사고력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는 쉽사리 이해된다. 유사성의 근거만으로도 추리적 사고는 왕성하고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으며, 창의성이라는 것이 대체로 無에서 有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를 달리한 암시에서 촉발되고 생산된다는 점을 재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2. 文學의 體驗性과 思考의 具體性
문학은 체험의 표현이라는 명제는 문학이 우리와 세계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임을 말해 준다. 우리와 세계의 관계는 매우 다양하며, 그래서 어느 하나도 동일하지 않은 문학작품이 존재하고 앞으로도 또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세계 속에 ‘저’가 맺는 관계를 실천하고 경험하면서 살아 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표현되면 문학이 된다.
문학의 이러한 성격은 작품 읽기가 곧 정보의 획득이라는 말로 바꾸어질 수 있다. 우리는 정보라고 하면 생활적 필요나 직접성을 떠올리고 즉각적인 효용을 생각하는 표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즉각적 실용에 닿는 정보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영위될 수는 없다. 인간이기를 지향하는 우리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심층적 소용에 닿는 정보라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학은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나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나를 규정하고 또 충동하며 압박하고 고무하는가를 말해 준다. 적어도 문학은 그런 것을 드러내는 일을 속성으로 하고 있다. 개개의 문학작품이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정보들이다. 말하자면 삶의 근원에 닿는 정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의 습득은 우리의 사고를 풍요롭게 하고 발전하게 한다.
어린이의 사고력에 관해 성찰한 비코는 ‘어린이는 추리를 할 수 있지만 어린시절에는 추리할 소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였다. 따라서 형식논리를 가르치기보다 경험을 부여하라고 권한다. 듀이도 비슷한 뜻의 말을 했다. ‘사고라고 일컫는 발전적인 경험의 최초 단계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견해는 얼마든지 더 있다. 지식의 획득도 그 자체가 경험이라는 말도 그러하고, 기억은 대체로 심상과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도 그러하다. 따라서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라는 것도 개념이나 원리 또는 규칙이나 법칙과 같은 명제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그 필요조건을 말한 것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지적도 비슷한 뜻을 지닌다.
이들은 모두 사고가 경험을 기반으로 이루어짐을 드러내고 있다. 문학이 체험의 표현이라는 속성은 형상성과 연합하면서 경험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닌다.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문학을 통한 경험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사고력의 향상을 위해 인류가 고안한 최상의 제1단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직접체험은 한계가 있으므로 독서라는 간접체험이 중요하다는 말을 여기서 되새길 필요는 없겠으나 경험의 구체성으로 말한다면 그 어떤 언어표현물보다도 문학은 강렬하고 우선적이다.
문학이 형상화하는 경험이 認知와 情意의 양쪽에 두루 걸쳐 있다는 점도 사고력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고력이라고 하면 으레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연상하는 경향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사고에는 감성적 경험이 수반된다고 하였고, 경험주의자들은 사고활동의 요체로 감성적 경험을 꼽았으며, 사고의 동기를 주체와 쌍방의 불균형 상태에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활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가 하면, 정서적 일관성이 기억에 도움이 되며 인지조차도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사고가 결코 논리나 인지만의 단독 작용이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한 때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가 감성과 이성의 기능을 갈라 맡아서 작용한다는 가정이 림빅 시스템의 발견으로 부정된 것이나, 지능의 박약이 대체로 정서적 박약을 겸한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는 점으로 보아 사고는 정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점이 인정된다. 또 정서라는 것의 본질도 모순되는 충동에 의한 심리적 불균형을 이성의 간여에 의해 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흐름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인지와 정의의 관계에 대한 여러 견해와 사실은 문학이 형상화하는 체험의 포괄성이 사고력의 기반이 되는 경험으로서 매우 효율적임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여기서 사변적이기를 잠시 멈추고 실생활의 경험에 비추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사려가 깊어지는 것은 무엇에 근원하는 것일까를 두고 생각하면 문학과 사고력의 관계가 자명해진다.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그 생각함의 근원이 바로 사고 자료로서의 경험적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을 세우고 일의적 해답을 얻기 위해 벌이는 과학적 실험에 비긴다면 문학은 훨씬 더 많은 사고 자료를 다양하게 분사하는 구체적 자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3. 文學의 文化性과 批判的 思考
문학은 사람이 만들어 낸다. 만들어지는 속성을 조명하여 설명한 많은 말들을 여기서는 아껴도 좋을 듯하다. 그것은 문학의 본질이며 권능이기도 하다. 이 권능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 ‘知的 産物로서의 文化’라는 인식에 이른다. 이 때 知的이라는 말은 사고과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기에 문학적인 글쓰기는 발견에서 실행과 평가와 수정에 이르는 일관된 과정이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그에 알맞는 지적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기에 생산이며 창조이다. 그리고 남들이 형상한 것과는 달라야 하므로 새로운 발견이다. 메슈 아놀드가 문학을 고급 문화로 본 것은 이런 시각에서다. 이것이 사고과정에 해당한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문학적인 글쓰기는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인 사고과정을 거친다.
문학은 이처럼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한 개인적 발견을 본질로 하지만 그것은 남에게 이해되어야하므로 자신의 독창적 언어이면서 남들이 공유하는 언어로 쓰게 된다. 아니 그 독창적인 것을 구상하는 그 생각이 벌써 남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게 된다. 이것이 ‘삶의 方式으로서의 文化’인 문학의 세계이다. 한 때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무협소설이 잔혹 西部劇 마카로니 웨스턴과 中國式 水滸志의 모자이크라는 평이 나오게 되는 것도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사는 방식’이 우리의 삶의 방식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평가의 표백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는 우리다운 가치가 담겨 있고, 신념이 있으며, 우리 것인 기준이 있고, 그 짜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민족 문화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외국에서 인기를 모은 상품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꼭 베스트 셀러가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창의력이라는 것도 이러한 문화의 맥락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보편적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는 그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생각을 우리답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구체적 경험과 직결되어 있으므로 문학이 지닌 경험성과 연관되는 문제이고, 그것이 그러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이제 비판적 사고의 몫이 된다. 즉 문학은 만들어진 것이기에 거기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저 혼자의 의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럿이 그렇게 생각한 것을 그가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여럿이 함께 오래오래 두고 그렇게 말하거나 노래했을 수도 있다.
만들어진 말의 이러한 의지―그것을 가리켜 ‘談論’이라는 다소 껄끄러운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의 표상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삶의 방식’을 한 단계 더 압축한 ‘意味作用으로서의 文化’로 문학은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측면, 즉 의미 작용으로서의 문학은 필연적으로 가치의 문제를 내포하게 된다. 그 가치는 사회적 힘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한데 이것의 타당성과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이 없는 문학의 수용은 盲目이며 愚民의 노릇이다.
문학 감상의 과정 자체가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과정과 흡사한 경로를 거친다는 것은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모든 형상은 그 전체와 부분 모든 국면에서 證據, 推論, 價値, 論證, 發見 등의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를 하게 만들고, 事件과 事象 또는 事態들간의 관계에서 그것의 양립 근거를 따짐으로써 논리적 사고를 하게 만든다.
의미 작용으로서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참됨이며, 어떤 것이 착함이고, 어느 것이 아름다움인가를 드러내고 주장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따라서 문학은 사고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을 구체적 근거로 하면서 이를 가치의 기준에 비추어 보는 비판적 사고를 풍성하게 그리고 공론화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개인적 사고의 정당성이나 적절성을 조회하는 과정까지를 문학은 지니고 있는 셈이다.
Ⅳ. 思考力을 위한 文學敎育의 設計
1. 思考力 向上을 위한 文學敎育의 指標
지금까지 문학과 사고력의 관계를 대충대충 짚어 보았다. 기실 문학은 여기서 이렇게 살피지 않더라도 사고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어떤 것보다도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사고력이라고 하면 연상하는 수학에 비추어 보더라도 문학은 정의적인 측면까지 포함하므로 더 포괄적이고, 개념이나 규칙에 그치지 않고 형상으로 이루어지므로 구체적이다.
문제는 그것을 교육적으로 의미 있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방안이다. 이를 위하여 여기서는 豊饒化, 體系化, 內面化, 自由化의 네 방안을 생각해 본다.
豊饒化란 문학의 형상성과 경험성에 관련되면서 사고를 세련시키는 방법과 관계되는 설계다. 문학이 구체적인 경험을 드러내는 형상이라는 특성은 구체성, 경험성, 형상성 등의 용어로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 본질에 충실하면서 사고력의 향상을 위해서는 그 다양성에 입각한 사고의 유연성을 겨냥해야 한다. 문학의 독서는 물론이요 문학적인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한 즉각적인 관심을 갖는 민감성, 그리고 문제를 발견하고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의구성을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민감성과 의구성은 구체적 형상인 문학이 지닌 다의성과 애매성에 대한 다각적인 해석과 반응, 그리고 질문을 만들어 내는 유추적 사고로 전개될 것이다.
體系化는 발견학습 또는 탐구학습의 그것처럼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는 상위인지적 활동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동화에 나오는 인물들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보는 노력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학적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구조화하고 짜임새를 갖추는 정교성, 그리고 이를 개념화하고 원리를 찾아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학교교육은 이러한 과정이 역전되어 있다는 점에 유념하는 것도 사고력 개발을 위한 설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의 판서나 참고서의 설명들을 통해 얻는 것은 이미 개념화되어 버린 것이거나 남에 의해서 해석된 결과들이다. 교육이 능력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능력이 주로 방법적인 것에 관계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엇’보다는 ‘어떻게’라는 강조점에 주목하여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內面化란 문학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사고활동이 생활의 태도 수준에 이르도록 설계해야 함을 가리킨다. 사고활동 지향적인 정의적 성향을 과제 집착성, 도전성, 호기심, 독자성 등으로 보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에 재미를 느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재미를 동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재미가 단순한 말장난이나 말초적 흥미로 흐르지 않으면서 알고자 하고 더 찾아보고자 하는 욕구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흥미나 욕구는 자기 세계의 인정과 추구에 있다는 점에 착안하면 작품 세계와의 대화를 촉진하는 장치를 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며, 이야기 이어가기나 페러디의 습작도 의미 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自由化란 사고력의 공리적 측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창의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부분이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창조 행위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끝없이 만들어 내는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속성 중심의 문학관에 서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시, 소설을 쓰는 일은 그것의 관습이 지닌 완고함과 완성도의 문제 때문에 누구에게나 부담스럽다. 따라서 문학의 한 속성을 중심으로 하여 문학적인 글을 써 보는 것은 귀중한 체험이 될 것이고 문학적인 능력으로 발전하는 첩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사고 능력의 확장에 필요한 요소를 유창성, 융통성, 독창성으로 보는 것과도 관계가 깊다.
또한 문학이 유추적 사고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을 감안하여 이런 국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토록 하는 것은 전형적 틀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개인의 세계를 개발하는 자유화에 유용할 것으로 본다.
2. 思考力 向上을 위한 敎授-學習
사고력을 위해 문학의 교수-학습에서 실제로 이루어져야 할 활동을 구상하는 데는 문학의 본질이 언어의 속성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로 이루어진 형상이라는 점을 재확인하면서 우리는 전통적인 수사학이 조직적 사고로 권장하고 있는 활동을 원용할 수 있다.
(1) 定義
‧사전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 말은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그 말을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가?
‧이 말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가?
‧이 말에 포함되는 것들은 다른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들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이 말이 그 전에 뜻하던 것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말과 같은 뜻의 다른 말이 있는가?
‧이것의 구체적 사례는 무엇인가?
‧이 말이 잘못 이해될 때는 어떤 때인가?
(2) 比較
‧이것과 비슷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비슷한가?
‧무엇이 이것과 다른가? 어떻게 다른가?
‧이보다 나은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나은가?
‧이보다 못한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못한가?
‧이것과 정반대 또는 상이한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이것과 가장 유사한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3) 關係
‧무엇이 여기에 이르게 했는가?
‧이 일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일이 일어났는가?
‧그래서 어떻게 되어 갔는가?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다음에 어떤 일이 있겠는가?
(4) 立證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는가?
‧이에 관한 사실이나 자료를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언가?
‧이에 대하여 누구와 말을 해 보았는가?
‧이에 관련하여 한, 유명한 혹은 널리 알려진 말을 아는가?
‧이에 관한 속담이나 시를 인용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법률이나 규칙이 있는가?
‧이에 관한 노래, 잡지 기사, 신문이나 방송 혹은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이에 관하여 어떤 조사를 해 보기를 원하는가?
(5) 環境
‧이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어떤 여건이 그것을 가능, 혹은 불가능하게 하는가?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개연성이 있는가? 왜 그런가?
‧전에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는가?
‧누가 이 일을 실천하거나 경험하였는가?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이 일이 시작된다면, 무엇이 그것을 끝맺게 하겠는가?
‧지금 이 일이 일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이 그 일의 발생을 방지할 수 있는가?
이상 다섯 가지 방향의 사고 목록은 본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을 가다듬고 구체화한 것이어서 언어를 운용하는 사고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은 언어 일반의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수준의 교수-학습 활동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상위 수준의 문학적 특성을 形象性, 體驗性, 文化性으로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문학의 이러한 특성을 통한 교육의 효과로서 성장이 이루어지자면 문학을 통한 사고 활동의 주체인 ‘자신의 세계’에 근거하여 전개할 필요가 있다. 또한 블룸(Bloom, Benjamin)은 학습 위계의 피라밋을 知識(knowledge), 理解(comprehension), 適用(application), 分析(analysis), 綜合(synthesis), 評價(evaluation)의 여섯 단계로 구상한 바 있다.
문학의 교수-학습을 자신의 세계에 근거하는 주체성과 교육 일반의 학습 위계라는 두 측면을 고려하여 종합한다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활동 범주를 구상할 수 있다.
㈀ 기술하기(記述, describe)
사고 활동은 대상을 아는 일에서 비롯한다. 이는 사고력을 위한 문학교육의 지표 가운데 체계화에 관계되며, 블룸의 학습 위계에서 첫 단계와 둘째 단계인 지식 및 이해와 관계된다. 글을 쓰기 위한 대상의 본질은 무엇이며,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특징은 무엇인지..... 작품 자체가 지닌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사실 자체를 정확하게 아는 구체성을 띤 사고로 이어진다.
㈁ 비교하기(比較, compare)
대상의 정체나 특질은 다른 것과 대조 또는 비교할 때 구체화된다. 따라서 파악된 대상의 세계를 보다 체계화하고 풍요화하기 위하여 많은 것과 비교해 보는 활동은 왕성한 사고 활동을 촉발하게 된다. 블룸의 학습 단계 중 지식과 이해에 관련되며 문학교육의 지표 가운데 풍요화와 체계화에 관련된다.
글을 쓰려고 하는 대상을 다른 것들과 비교하고, 읽은 작품의 모든 측면을 주제가 비슷한 여타의 작품, 같은 작자의 다른 작품, 장르나 시대가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파악한다. 비교의 방법은 대상의 특징을 인식하는 문제 해결적 사고로 발전한다.
㈂ 연상하기(聯想, associate)
대상 자체의 이해를 넘어서서 그것과 연관된 모든 것을 생각하는 힘은 사고의 풍요화와 자유화를 증진시킨다. 블룸의 학습 위계에서는 이 단계의 활동이 구상되지 않았지만, 이는 언어 또는 문학이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다른 학습활동에서는 문학 만큼의 상상이 요구된다고 하기 어렵기에 일반적이라 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이 자신에게 환기하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생각나는 모든 것을 연상해 보고, 작품이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언어 활동의 주체는 언제나 그 개인이므로 특히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떠오르는지 연상함으로써 상상적 사고력이 길러진다.
㈃ 적용하기(適用, apply)
습득되고 이해된 것은 다른 대상 또는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고 자신의 것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 효용성 및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하나를 알아 열을 통하는 차원도 바로 이 단계로서 문학교육의 지표 가운데 풍요화, 내면화로 가는 길이 되며, 블룸의 학습 위계에서도 적용을 강조하고 있다.
관찰하고 파악한 대상을 두고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작품에서 얻은 생각을 통해 무엇을 더 이해하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던 무엇을 더 파악하게 되었는지, 실제로 우리 삶에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생각한다. 전환적 사고의 바탕이 된다.
㈄ 분석하기(分析, analyze)
블룸의 학습 위계에서도 넷째 단계로서 분석을 설정하고 있는바 대상에 대한 분석력은 풍요화, 체계화, 내면화, 자유화 모든 지표에 해당하는 상위 수준의 사고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종래의 문학교육에서는 이 단계의 활동을 학생에게 실천하게 하지 않고 분석된 결과를 전달함으로써 학습의 의의를 잃게 만든 혐이 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자신이 그것을 써 낼 수 있는 정도에 이를 정도로 분석한다. 인물, 플롯, 표현.... 등을 분석하는 힘은 그 흥미를 기반으로 분석적 사고력을 기르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
㈅ 논란하기(論難, argue)
문학의 교수-학습은 ‘자신의 세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단계이다. 대상이나 작품이 자신에게 던지는 의미를 평가하고 주체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사고 활동이다. 문학교육이 지표 모두가 이 단계를 위해서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블룸의 학습 위계 가운데 종합과 평가가 이에 관련된다.
그것을 지지하는 쪽에서, 혹은 그에 대해서 반대하는 쪽에서 근거를 대면서 생각해 본다. 근거의 종류를 다양하게 대고 구사하는 논리를 다변화함으로써 논리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
이상의 여섯 가지 활동은 순차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특히 최종 단계인 논란하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전부를 포함하도록 교수-학습 활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사고를 진전시킬 수 있으며, 풍요화, 체계화, 내면화, 자유화의 지표를 달성할 수가 있게 된다.
Ⅴ. 맺는 말―人間 世上의 文學敎育
지금까지 살핀 것이 문학교육의 모든 것일 수도 없고, 애당초 그럴 목적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문학과 사고력을 생각해 보려고 한 것은 문학이 이 방면에 지닌 공리적 미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학과 함께 성장하고 문학과 함께 인간다와진다고 보는 것이 나의 관점이다. 더구나 요즘 우리 사회같이 공유할 가치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문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끝없는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는 사고력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특별한 훈련을 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학을 통한 사고는 그렇게 힘겨운 노력이 없이도 재미 있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문학은 사고력을 위해 매우 귀중하고도 효과가 큰 벌판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요즘은 창의력이 강조된다. 21세기에는 그것 없이는 못 산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어디에서건 없던 것이 툭 떨어지는 일이 있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다. 시 한 줄을 두고 생각하는 그 많은 유추적 궁리 속에서, 소설 한 편을 읽고 사람들을 묶어 보는 범주적 사고 속에서 많은 것은 발견된다고 나는 믿는다.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한 관찰과 이해라는 경험 과정에서 새로운 것은 창출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모두 창의적이겠지만, 창의적이라고 해서 모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것이면서도 인간다와야 하고, 인간의 삶에 의의가 있는 것이라야 한다. 창의성이라는 말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다움과 의의를 아울러 포괄하는 국면을 우리는 문화라 하며, 인류의 역사는 이 문화 개발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문화란 자연적 상태에 대립하는 인위성을 뜻하면서, 또한 지적‧정신적 활동을 뜻하고, 나아가 삶의 방식이면서 의미를 창출하고 소통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의 논의는 대립적이고 이해 다툼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인간의 인간 다움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인간을 禽獸와 구별짓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문화의 윤리성과 가치에 대한 논의가 일기도 한다.
언어활동은 문화의 중핵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문학은 인류의 문화 자체이면서 촉진제이자 매체가 되어 왔다. 창의성에 이르고자 하는 사고가 문학을 기반으로 할 때 의미 있는 것이 된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글을 짓고 읽는 활동인 문학의 향유가 단순히 문학을 즐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고력 개발에 의미 있는 장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기에 문학교육은 단순히 문학을 아는 데서 그칠 수 없으며, 인간다움의 추구에 유의미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한 흥미만을 추구하는 문학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으며, 문학작품의 질이 감동으로 요약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학교육의 총체적 성찰이 필요한 까닭은 이런 데서도 재삼 확인된다.
세계화가 강조되고, 문화의 세계적 보편성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민족적 정체성이 중요해진다는 점에서도 사고의 문화적 요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 문화는 존재의 의의를 상실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고, 고유성이 곧 보편성이면서 세계성이라는 본질적 인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타당하다.
인간의 존재론적 의의가 ‘나, 민족, 인류’의 관계망 속에서 구현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문학교육이 곧 사고력의 교육임을 우리는 재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그렇게 살아 가도록 하는 길임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그 지표와 방법의 정당한 설정과 추구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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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만(1981), ꡔ정신문화와 두뇌ꡕ, 교문사
Cowan, Elizabeth, Writing, Scott, Foresman & Company, 1983
Dacey, John S.(1989), Fundamentals of Creative Thinking, Lexington Books
Lipman, M & Sharp, A. M.(1986), Growing up with Philosophy, 여훈근 외 옮김, ꡔ세 살철학 여든까지ꡕ, 정음사
소설의 양식적 속성과 국어교육*
김 동 환**
Ⅰ. 문제제기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주 접하게 되는 말 중의 하나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너 그 이야기 좀 해 봐라.” “이야기를 해야 알지, 이야기를 안 하니까 답답해서 견딜 수가 있나.” “뭐 재미있는 이야기 없을까?” 등등 하루에도 십 수 차례 듣게되는 단어가 바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명) ① 어떤 사물 또는 현상에 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잡아 하는 말이나 글. ㉠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일러주는 말. ② 옛날 이야기.
사전에서 설명된 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그것보다 의미가 축소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예로 든 사례들을 보면 사전에서 설명한 것 외에 보통의 대화, 생각의 표출, 의견 제시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상적인 용법이 본래의 용법과 달라지거나 사람들이 잘못 사용한 데서 오는 현상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 단어의 의미가 실용적으로 확장되는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하나의 단어를 자신의 경험이나 의식을 바탕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범주 내에서 변용해 사용하는 일은 언어를 규범적으로 사용하는 태도보다 창조적 언어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더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야기’라는 단어의 변용 즉 의미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토대를 우리가 범박하게 ‘소설’이라 부르는 글쓰기 양식에 대한 지적‧정서적 경험으로 보고자 한다. 즉 소설 작품을 배우거나 감상하면서 깨달은 소설의 다양한 속성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상적 언어활동을 통해 발현시킨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러한 논리가 순환논리에 불과하거나 자의석인 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야기’라는 단어가 먼저 존재하고 이후에 ‘소설’이라는 대상을 그것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이라든지 ‘이야기’와 ‘소설’은 우리말과 한자라는 관계일 뿐 그 선후를 따질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든지 하는 견해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고에서는 우리의 일상적 언어활동을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닌 정서적 반응의 결과로 보는 방향에서 접근해 가고자 하기에 이런 논란들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어활동은 사실 논리적인 측면보다는 비논리적인 측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본다. 때로는 감정의 영향을 받아 즉흥적으로 반응하기도 하고 충분한 사고과정 없이 즉각적으로 발언을 해야 할 때가 더 많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거나 교육의 과정에서 주어진 조건에 맞는 글을 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충실하고자 하지 논리적인 속성을 더 고려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글쓰기에서는 글을 잘 쓴다거나 못 쓴다는 차원을 넘어 개성이라는 요소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개성이라는 요소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격, 교육정도, 환경, 가치관 등의 다양한 변수를 고려할 수 있다. 필자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언어적 형상물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들고 싶다.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배우게 되는 과정 중 초기 단계의 한 특징으로 모방 행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언어, 다른 식구들의 언어, 좀더 커 가면서는 또래 집단의 언어를 모방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구사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서의 언어사용의 일차적인 목적은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개인간의 편차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달의 효과를 고려한다든지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언어사용은 모방의 단계를 넘어 ‘선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때 비로소 하나의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양을 떨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말에 울음을 덧붙이는 행위들을 하게 되는 것은 ‘선택’의 문제에 속한다. 그리고 이후 단계의 언어활동에서는 이 ‘선택’의 속성이 점점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문제는 그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일 것이다.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선택 가능한 범주들을 설정해 두어야 할 터인데 그 범주들은 대개의 경우 체험을 통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양상의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좋다” 라든가 “멋있다”, “쓸만하다” “인상적이다” 등등의 정서적 반응을 하게 되는 언어적 현상에 대해서는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 사고체계 내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모델’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델들은 이후 개인의 언어활동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되며 그것이 바로 개성이자 자질로 발전하게 된다고 본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여러 언어적 현상 중에서도 특히 미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 언어적 형상물에서 이러한 모델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리라 본다.
소설의 양식적 속성과 국어교육을 연관지어 보고자 하는 본고의 의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문학교육학’을 정립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들이 있었고 많은 성과를 이루어 낸 것은 인정하지만 논의의 대부분이 자족적인 테두리에 머무르고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느낀 적이 많다. 문학이 국어교육에서 담당해 낼 수 있는 몫, 감당해야 할 몫이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현상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속성을 애써 감싸 안으려는 태도 때문에 그 교육적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을 철저히 열린 텍스트로 본다고 해서 문학의 가치가 훼손된다거나 속성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학의 확대 재생산을 통한 존재가치의 상승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싶다.
Ⅱ. 소설 읽기 방법의 문제
문학의 한 속성을 학습의 대상으로 삼게 될 때 다양한 차원의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앞서 고려해야 할 점은 바로 효용성의 문제일 것이다. 문학의 한 속성에 대한 앎이 궁극적으로 무엇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려하자는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지금까지의 소설교육은 대체로 예술적 인식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떤 소설작품을 통해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의 미적 가치를 알고, 삶의 태도와 방향에 도움을 줄 교훈을 얻고, 사회와 세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경험의 원천으로 삼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예술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감상 방법이 주를 이룬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상당한 수준의 독자의 입장이 아니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원리가 아닌 결과를 학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과과정에서 배우지 아니한 새로운 작품들을 대하면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존재로 다가온다고 토로한다. 교과과정 밖에서 주어지는 작품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난감함을 느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간의 교육방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교육을 받았지만 새로운 소설을 쉽게 ‘읽어 낼’ 수 없다는 교육적 결과에 대해 문학교육 전공자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결과는 필연적으로 학교 현장의 문제보다는 교육적 이념과 방향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학교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교육과정을 입안하는 일이나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은 전적으로 전문가로 인정받은 연구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인문학보다도 국어교육학 또는 문학교육학은 그 실천적 성격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전공자들의 폭넓은 책임의식이 요구된다고 본다. 필자는 그 책임의식의 기저에 기존의 전공 영역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는 발상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발상법은 이미 오래 전에 제시된 바 있고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그러한 분위기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논의의 장에 이르러서는 핵심적인 발상으로 자리잡고 있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전히 대부분의 논의의 근저에는 기존의 전공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문학교육학의 내부에서는 시나 소설,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등의 경계가 온존하고 있으며, 국어교육학의 차원에서 볼 때는 문학과 비문학의 교섭은 아예 차단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응용학문으로서의 국어교육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하나의 기초학문을 바탕으로 삼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기초학문이 통합을 지향하기 위한 것이 아닌 차별성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지금의 국어교육학은 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각 연구자들이 역량을 결집해야 할 때이지 세부 영역 간의 차별성을 위해 역량을 분산시킬 단계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소설교육 나아가 문학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앞에서 말한 발상법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소설 읽기’라는 개념이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활동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현행 교육과정에서는 ‘이해와 감상’이라는 용어로 문학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면밀히 읽어 보아도 문학작품을 바르게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인간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거나 ‘아름다움과 정신적 가치를 이해’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어떻게 읽어야 그러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즉 ‘읽은 후’의 단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런 구절은 있다. ‘작품을 즐겨 읽는 태도를 기르도록 하자’는 권유이다. 그렇지만 문학작품을 즐겨 읽을만한 대상으로 느끼게 하거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역시 없다. 다른 논설문이나 설명문을 읽는 것처럼 하되 읽은 후에 그것이 미적 구조물임을 염두에 두면서 감상을 하면 된다는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문학작품은 다른 글들과 달리 특수한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특수한 것이기에 학생들이 느끼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애써 피하고 있는 인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정작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방법은 배제되어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전공 영역의 경계를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의식의 발로이자 결과라고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만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국어 과목의 하위 영역으로서의 ‘문학’과 문학 과목의 ‘문학’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살펴 보다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의 영역과 ‘문학’ 영역을 분리시킴으로써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효과는 무엇이며 학생들은 그러한 체계를 통해 어떤 능력을 얻게 될 것인지 하는 의문을 던져 주는 것이 현행 교육과정의 가장 큰 특성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그 작품을 특별한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태도의 형성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자는 말이다. “문학이 심미적 구조물임을 안다.”라는 학습목표는 오히려 문학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걸림돌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정작 ‘미적인 것’이 무엇이고 ‘생활적인 미’나 ‘정신적이 미’가 어떻게 다른 지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학습자로서는 이 정체불명의 목표를 향해 자신의 사고활동을 수렴시키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감상 결과에 다가가는 과정이지 스스로의 감상 결과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대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인간의 여러 정신 작용 중에서도 매우 고차원에 속하는 범주에서 가능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논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입장은 때로는 위태롭게 보이기조차 한다. 자칫 대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이나 거리감을 초래할 수도 있기에 그러하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통해 문학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어떤 계기로 주어지거나 선택한 불특정 작품을 대할 때 우선 낯설고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이나 거리감 때문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문학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작품이라는 것이 쉽사리 잡히지 않는 어떤 차원에 놓여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문학작품도 다른 언어적 구성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상적 언어활동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나 설명문이나 글쓰기, 글읽기의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대상이다. 다만 전달하고자 하거나 읽어 내야 하는 내용이 어떤 그릇에 담겨 있느냐 하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설명문이 단순하고 생겼고 안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릇이라면 소설은 모양도 복잡하고 입구가 좁거나 목이 이리저리 구부러진 그릇이어서 안에 담긴 내용을 들여다보거나 꺼내기가 수월하지 않은 그릇이다.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긴 내용을 누군가가 꺼내 주고 “이것은 이 복잡한 그릇에서 나온 것이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내용물을 음미해 보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을 것이다. 빨대 같은 것으로 내용물을 조금씩 맛보면서 그것이 무엇일가를 생각해보거나, 갖은 기술을 다 동원해서 다른 그릇으로 옮겨 내는데 성공하는데서 오는 성취감, 정 안되면 복잡한 그릇을 깨트려서 기어이 그 내용물의 정체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느끼게 될 발견의 기쁨 등을 스스로 얻도록 해 주는 것이 올바른 소설 교육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진해서 또 다른 그릇들을 찾아 나서고 싶은 의욕도 생기고 더 복잡한 그릇에서도 내용물을 섭취하는 능력도 함양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내용물에 접근하는 방법인 셈이다.
Ⅲ. 정보 찾기로서의 플롯 읽기
대표적인 서사양식인 소설과 타 양식과의 변별적 특성을 논할 때 그 첫머리에 내세우게 되는 것은 서사구조이다. 그리고 플롯은 이 서사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해 낸 개념의 하나이다. 따라서 소설이라는 양식에 대해 가르치고자 할 때 대개의 경우 우선적으로 플롯을 앞세우게 된다. 이야기(story)와 플롯(plot)의 차이점에서 시작해서 플롯의 유형, 각 단계의 특성 등을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이 때의 플롯은 당연히 미적 구조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설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일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일단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소설 텍스트를 미적인 것에서 실용적인 것, 일상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보자.
일상적인 언어활동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구어, 플롯은 문어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건을 남에게 말로 전달할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건이 일어 난 시간 순서대로 말한다. “두서없이 말을 한다”고 할 때도 사건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시간 순서’가 기준이 된다. 말을 하는 중간에 자신의 느낌을 보태거나 사건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을 슬쩍 끼워 넣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라는 식으로 재촉을 한다. 듣는 상대방과 직접적으로 접촉을 하면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전달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전달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한다. 듣는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의 견해나 입장보다는 자신들의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내가 직접 봤는데 말야” 정도의 말을 통해 신뢰성을 인정받으려는 의도 정도는 개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말하는 이의 주체성이 매우 미미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문어적이라 할 수 있는 플롯의 상황은 구어적인 상황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선 구어적인 상황과는 달리 전달받는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정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일정한 시간이 경과된 뒤에 전달되기 때문에 전달방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전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를 중심으로 글의 구도를 정하게 된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든지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고 싶은 경우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그 의도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플롯을 ‘인과관계에 따른 사건의 전개’라고 설명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인과관계는 사건을 전달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도가 배제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을 비주체적인 글쓰기로 보게 되는 셈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쓸 때에도 글쓰는 이의 의도에 따라 글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구성이 달라지기 마련임을 상기할 때 소설의 구성을 비주체적인 글쓰기로 규정하게 되는 이러한 접근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소설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이 글쓴이의 치밀한 의도보다는 사건들의 선후관계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하도록 하게 만듦으로써 ‘배운 소설은 이해할 수 있되 그 이후에 맞닥뜨리게 되는 소설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빌미의 하나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 소설은 일반적인 글과 같이 글쓴이가 어떤 원리와 방식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달성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읽어 나가도록 유도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리와 방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설의 구성을 말할 때 흔히 사용하는 개념 쌍으로 스토리와 플롯의 관계와 유사한 fabula와 sujet를 원용해 보기로 하자. 원래의 설명방식에 따르면 fabula가 a1, a2, a3, a4, a5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sujet는 산술적으로 120개가 도출된다. 그러나 a1 - a5 가 모두 사용된다고 보는 데에 기존 견해의 문제점이 있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a1 - a5를 모두 적절하게 나열하여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구현하는 양식을 소설이라 보기에 구성의 원리보다는 구성 전체의 내용과 그 미적인 성격을 강조하게 된다.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소설에서 플롯의 핵심은 이야기의 구성 요소가 모두 제시되는 것이 아니고 작가의 의도에 의해 취사선택된다는 점이다. 즉 작가는 독자들이 작품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친절하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보들을 교묘하게 감추거나 아예 빼버리기도 한다.
정보의 은닉과 배제를 플롯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볼 때 소설 읽기의 일차적인 목적은 바로 이 정보 찾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은닉되었거나 배제된 정보를 쉽게 찾아 낼 수 있는 소설인가 그렇지 않은 소설인가에 따라 난해한 소설인가 쉬운 소설인가도 구분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은닉과 배제의 원리에는 그 원리를 이끄는 어떤 법칙이나 기준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작가의 의중에 달려 있다고 볼 것인가. 대개의 경우 기본적인 틀이 존재하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소설 양식도 사회적 의사소통을 위한 하나의 언어적 기호이기에 소통 당사자 간에 합의된 어떤 약속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약속의 한 예를 들어보자. 소설이 사건을 다루는 양식이라는 점에서 그 기본 약속을 기사문의 원칙과 비교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6하원칙은 사건의 기본적인 요소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조합이 이루어진다. 그 중 두가지 요소만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여섯 가지 요소가 다 충족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누가, 무엇을’ 이라는 요소는 생략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약속이다. 그 두 가지 요소는 반드시 존재해야 소설로 인정받을 수 있고 독자들도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생략된 나머지 요소들도 유추나 논리를 통해 채워 넣거나 상상을 통해 만들어 넣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여기에서 소설 읽기와 다른 글 읽기와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인 글의 필자들은 중심 정보를 최대한 정확하고 많이 전달하고자 하지만 소설가는 그것을 최소화하거나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두 유형의 읽기는 정보 찾기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글을 읽는 능력과 소설을 읽는 능력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일반적인 글을 읽어 내는 능력이 뛰어 나다면 소설을 읽어 내는 능력도 그에 못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설을 잘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면 일반적인 글 읽기의 능력도 신장될 수 있을 것이다.
Ⅳ. 정보의 성격 파악과 視點의 활용
소설의 플롯을 통해 정보 찾기라는 읽기 활동이 가능하다면 시점을 통해서는 정보의 성격을 파악하는 읽기 활동을 상정할 수 있다. 주어진 정보는 과연 어떤 믿을만한가, 믿을만하다면 그 신뢰도는 어느 정도인가, 역으로 주어지는 정보는 아닌가 하는 의문 등을 가져봄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끌어 내는 일이 시점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읽기 활동은 어떤 글을 읽더라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활동을 가능케 하는 시점이라는 요소에 대해 어떤 측면에서 접근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선 제기될 수 있다.
기존의 소설교육에서는 시점을 어떤 고정된 장치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작품의 제목과 동일시가 가능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과 관련된 사전지식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이 작품은 어떤 시점을 통해 서술되고 있는가”라는 질문 하나면 시점에 관한 학습은 마무리된다. 그러다 보니 학습자들은 아예 시점을 한 작품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나 으레 지니고 있어야 할 어떤 요소 정도로 치부하고 암기의 대상이나 단순 확인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시점이야말로 비슷한 주제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소설들이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인 요소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시점을 단순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위치’와 관련되는 요소로 보아서는 그 역동적인 성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된다. 특히 글 읽기라는 차원에서 시점에 접근하게 될 때에는 보다 다층적인 차원의 시각이 필요하다.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가”라는 차원은 물론 “왜 이런 단어나 구절이 필요한가”라는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근이 요구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시점에 관한 이론들을 두루 살필 필요는 없을 것이며 익히 알려진 한 가지 이론을 예로 들어 논의해보기로 한다.
Ⅴ. 게임으로서의 소설 읽기
소설 읽기는 글쓴이와 읽는 이 사이에 지속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되 독자들이 가능한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그것을 찾아내게끔 유도한다. 작가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가 좀더 오랫동안 음미되고 무게를 지녔으면 하는 의도를 달성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소설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설정해 놓은 여러 장치들을 하나 둘씩 헤쳐 나가야하기에 세밀한 읽기 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어느덧 작가의 의도에 다가가게 된다. 제대로 그 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글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고체계의 중심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무척 인상깊고 매우 의미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 글쓰는 사람 모두의 욕망임을 감안하다면 소설쓰기는 글쓰기의 전형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이 점을 좀더 교육 현실과 관련된 차원에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게임과 유사하다. 우선 작품은 그 속에 작가와 독자 간에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약속이 있다는 점에서 규칙을 필수 요건으로 하는 게임의 장이 된다. 또한 작품의 내용이 작가나 독자가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진진해야 한다는 게임의 내용과 상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이다. 게임은 일방적인 힘의 우열관계가 드러나면 더 이상 게임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소설 읽기와 대응된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독자는 그 정보를 어렵게 찾아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지나치게 정보를 움켜쥐고 있음으로 해서 독자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 나머지 글읽기를 포기한다면 작가 또한 글을 읽도록 해야 하는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되기 때문에 작가의 우위를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독자가 별다른 노력없이도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는 소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읽어 낼 수 있는 소설일 때 그것을 읽는 행위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설이 그러해야 한다는 조건의 충족은 우리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능력과 감각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 소설가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문제는 독자인데 독자들은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라는 양식의 규칙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물론 작가가 고심 끝에 선택한 언어들의 형상물을 읽어 내는데 필요한 언어적 감각과 상상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그래야만 작가와 독자 간에 정당하고 흥미있고 유익한 게임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교육의 한 방향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소설작품을 당위적으로 배워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 즐겨 배우고자 하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방법을 탐구하는데 어드벤쳐 게임과 같은 전자오락게임을 줄기는 학생들의 심리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것에서 출발해서 점점 복잡한 게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는 원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핵심이 된다.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덧 매니아로 변모하게 되고 여유를 가지고 즐기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스스로의 활용할 수 있는 원리의 터득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는 일이다. 전자가 지식의 문제라면 후자는 태도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다.
흔히 소설교육 나아가 문학교육에서 지식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처럼 비쳐 왔다. 이러한 경향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제도가 시행된 이후 좀더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교육에서 지식의 범주를 경시하는 경향은 소설작품을 추상적인 것으로 남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떤 범주와 관련된 지식은 그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기에 사고 대상과 사고 주체를 긴밀하게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해 준다. 또한 지식은 한 사회나 민족의 집단적 사고의 종합체이기 때문에 그 지식과 관련되는 현상과 둘러 싼 개체들 사이의 공유된 인식을 표명하기도 한다. 문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지식들의 특수한 발현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식을 멀리하는 소설교육은 경우에 따라서는 소설작품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게 하거나 매우 감각적인 것으로 대하게 만들 위험성을 안고 있다. 만일 소설을 우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면 소설교육, 나아가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국어교육은 교육의 속성상 이미 그 의미가 반감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의 체계화를 강조한 최근의 한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태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줄이는 것이 핵심임을 이미 말한 바 있다. 즉 하나의 작품을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개인의 창조물로 보게 함으로써 학생들 자신과는 매우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며 그렇기에 그가 쓴 작품 역시 우리들이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글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소설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을 심어주는 데는 소설을 직접 창작해 보게 하거나 작품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를 써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가지 활동을 통해 작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나름대로의 안목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일상적인 차원의 글쓰기로 대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면 소설읽기를 통한 국어교육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Ⅵ. 맺는 말
이 글은 소설 양식을 통한 국어교육의 한 방법을 모색해 보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소설의 양식적 속성 일반을 전반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학생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으로 판단되는 플롯과 시점의 경우만을 예로 들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초점을 ‘소설의 읽기’라는 방법적 개념에 두고 한두 가지의 발상법을 제안하는 형식을 취했다. 소설 이론의 측면에서 볼 때는 너무 낯익다 못해 진부해 보일 수조차 있는 이론을 내세운 감도 있다. 그렇지만 본고가 의도하는 바는 새로운 이론을 업고 그 이론에 기댄 발상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익히 아는 것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보자는 것이다. 소설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서 늘상 떠올리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소설 이론의 허망함이었음을 염두에 둔 탓이기도 하다. 몇 년간의 소설 교육을 받지만 소설은 여전히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운 존재라서 소설 읽기의 즐거움과 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대학 1, 2학년생들의 절박한 호소를 흘려 버릴 수 없었던 까닭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문학작품을 국어교육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적 토대로 삼을 수 있을 터이며, 역으로 국어교육이 지금의 틀을 벗고 전향적으로 나아갈 때 문학작품은 자연스럽게 보다 친숙하고 의미있는 존재로 다가오게 될 터인데 왜 그것이 어려울까 하는 아쉬움이 발동한 때문이라 보고 싶다. 기존의 영역 간의 벽을 허물기가 그리 쉽지 않겠지만 다른 학문과의 비교우위나 경쟁력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명분을 찾을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굳이 외국의 경우를 예로 들지 않더라고 지금 우리의 국어교육의 체계가 대내외적으로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지 영역을 떠나 진지하게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하면 하는 바램도 표해본다.
소설을 ‘미적인 것’으로 고집하고자 하는 의식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킬 수 있다면 많은 가능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소설을 일상적인 언어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단계의 형상물로 본다고 해서 문학의 의미나 존재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삶 속에서 소설의 위상이나 비중이 제고되리라 믿는다. 소설을 설명문이나 논설문, 신문기사, 광고문 등과 같은 맥락에서부터 읽어내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러한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작품들을 예로 들지도 않았고 발상의 구체화 방안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 발상의 타당성과 가능성에 대해 우선 점검받고 싶어 이 글을 내놓게 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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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진실성에 대하여
- 노자의 언어관을 중심으로-
김 상 대*
Ⅰ. 서 언
사람은 언어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자국어를 구사한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자국어를 구사하는 데는 어떤 교육도 필요 없으며, 또한 어떤 교육으로도 도울 수 없다. 이 수준의 언어 수행이 동기면에서 가장 순수하고 형식면에서 가장 자연스러우며 내적 가치면에서 가장 진실할 듯하다. 언어학의 일차 대상은 이러한 언어를 생성하는 원리로서의 언어 능력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비언어능력적 요소의 관여가 없거나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수행의 초기 단계는 오래 가지 않는다. 조만간 아이들은 언어 생활에 지적 요소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면서 언어를 인위적으로 조작한다. 이때부터 언어 교육이 관여할 수 있으며, 지적 요소가 점점 더 개입할수록 언어 교육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 언어 교육은 근본적으로 지식 등 비언어능력과 관계되는 것이며, 순수한 언어 능력은 가르칠 수 없고 저절로 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찍부터 동양과 서양의 입장은 대조를 이룬다. 서양의 언어수행 전략은 지적 요소가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될 것을 요구하고, 동양의 그것은 지적 요소를 되도록 극복할 것을 희망한다. 그 결과 서양은 일찍부터 지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을 발전시키고, 동양은 예로부터 과묵과 침묵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또한 서양에서는 언어 자체의 형식적인 면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데 대해서 동양에서는 언어 수행의 내면적 진실성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서구화가 심화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서양의 방식을 추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치고, 과학과 산업이 발달한 고도의 문명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양한 매체 언어가 발달하면서 언어 생활은 질적 양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 높은 지적 수준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시대 추세에 보조를 맞추어 국어 교육도 꾸준히 발전해 오고 있으며, 현재도 우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언어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소양을 길러주기 위해서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발전의 이면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이를 위해서 못지 않게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사실을 절감한다. 사회가 산업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인성은 메말라가며 인간 관계는 대립 갈등 구조로 바뀌고 세상은 무질서와 혼란의 늪으로 빠져든다. 이러한 상황의 일환으로 혹은 그 반영으로 우리의 언어 생활 또한 터무니없는 사기와 과장으로 미화된 채 진실성을 찾아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제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고, 생존경쟁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타인을 공략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일그러진 언어 생활에 위기 의식을 느끼면서, 이렇게 심각한 언어 공해 현상에 무관심하고 이의 극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국어 교육에 대하여 우리는 아쉬움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국어 학자나 국어 교육자의 고정관념으로 볼 때 국어학과 국어 교육이 이런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할 만도 하다. 오히려 이런 현실적이고 주관적 혹은 내면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그 본령을 넘어선 탈선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 또한 우리가 오랜 동안 젖어온 서구적 경향의 영향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학문 어느 교육도 절실한 삶의 문제를 외면한 채 형식적인 지식 놀음에만 종사하는 것으로 그 책무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 공해 문제는 국어학과 국어 교육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유관 분야가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혹은 협동적으로 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언어만의 문제는 아니나, 적어도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언어와 관련된 문제인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고 보면 언어학과 언어 교육이 오불관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날 언어 공해가 아직 심각하게 문제되지 않았을 때는 국어학과 국어 교육에서 이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우리 사회가 이처럼 언어 공해로 몸살을 앓고, 우리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그 가해자 혹은 피해자임을 경험하고 있는 처지에서 이는 더 이상 연기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당면한 과제로 다가온 것이다.
본고는 먼저 국어 교육에서부터 타성에서 벗어나 심각한 언어 공해 문제를 적극적으로 품에 안고 그 극복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제의한다. 이제까지 주로 국어 자체에 관하여 지적 차원에서 접근해온 국어 교육이 이를 수용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수용의 필요성 문제뿐 아니라 그 정당성 여부에 대하여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고 또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국어 교육이 마침내 언어 수행의 진실성 상실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그 극복 방안을 다루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는 국어 교육의 일대 혁신이 될 것이며, 새로운 지평에서 국어 교육의 보람은 배가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눈을 서구적인 것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돌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본고는 동양적인 관점 중의 대표적 혹은 핵심적인 것의 하나로 이해되는 노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Ⅱ. 언어 지식과 언어 이해
이론적으로 볼 때 언어를 교육할 수 있고 교육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언어 수행의 단계를 넘어서 언어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일과 관련해서이다. 그간의 국어 교육도 국민 교육의 기본으로 표준어와 정서법을 발전 보급시키고, 국어의 정확하고 아름다운 표현 방식을 추구하는 등 국어를 문명어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크게 이바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국어는 문명어로서의 제조건을 갖추게 되고, 우리 국민은 문명어로서 언어 생활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화려한 문명의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에서 국어 교육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국어 교육이 이룬 업적들은 모두가 언어의 형식적 측면에 속하는 것이며, 언어 수행에서 비언어능력으로 관여하는 언어 지식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국어 교육의 기본이 됨을 인정하면서도 특히 오늘날과 같이 언어 공해가 심하고 언어 수행의 내면적 진실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는 국어 교육이 그 책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말은 국어 교육에 힘 입어 형식적으로 상당히 정제되어 가고 있고, 그 위에 특히 매체 언어는 전문가들의 두뇌가 동원되어 형식의 원숙미를 과시할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언어 표현들이 그 내용과는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심한 경우는 내용과 무관하거나 상반된 경우도 적지 않음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한다. 현대의 언어 생활은 참으로 공허하고 위험한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국어 교육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언어 표현은 형식미를 갖출수록 전달력이 풍부하고 호소력이 강하게 마련이다. 이런 표현이 내면의 진실성을 상실한 채 난무한다면 이는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무서운 흉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지적으로 뛰어날수록 그리고 언어 구사력이 능란할수록 언어를 무기로 휘두를 가능성이 큰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언어 구사력과 언어 수행의 진실성 간의 이러한 상관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국어 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그 부작용에 대하여 새삼 돌아보게 된다.
언어 교육의 형식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은 사실은 우리가 임의로 택일하거나 경중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언어 형식은 그 내면적 진실성이 전제될 때 그 가치가 성립되는 것이며, 내면적 진실성은 형식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선후 경중을 가려 보자면 내면적 진실성을 더욱 중시하는 것이 동양적 언어관의 입장이다. 언어 형식은 내면적 진실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나, 내면적 진실성은 굳이 언어 형식을 빌지 않더라도 다른 형식을 통하여 혹은 높은 단계에서는 침묵을 통하여서도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국어 교육이 형식면에 치중한 것은 정신면보다 우선하여 의도적으로 그것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 지난 날의 사회적 정황이 진실성의 상실 정도가 심하지 않아 굳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언어 수행의 진실성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자연적 혹은 본질적 요소이어서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의식을 못하다가 사태가 심각하게 악화될 때 비로소 그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난 날의 국어 교육은 정신적 진실성 문제가 불거져 나오지 않을 정도의 그런 대로 좋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년이 다르게 인심이 메말라 가고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지는 상황에서 국어 교육의 현주소를 바로 이해하는 일은 매우 긴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 언어가 쓰이는 상황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언어에 관한 지식(knowledge of language)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것이 언어를 아는 데(knowing of language)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표준어로 말할 줄 알고 정서법에 맞게 쓸 줄 알며, 한자어와 외래어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나아가 논술문 작성 요령을 꿰뚫고 있는 것은 모두 국어에 관한 귀한 지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혼란한 언어 생활의 와중에서, 말을 아끼며 진실되게 하고 혹은 말을 들을 때 통찰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언어의 이해는 결코 지적인 것이 아니며, 사고의 부산물도 아닌 것이다. 공자는, 친구에게 말할 때 신용을 지킬 수 있게 하면 그가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가 배웠다고 할 것이라 하고, 맹자는 말을 안다는 것은 사람들의 말을 잘 살핌으로써 그 의도를 꿰뚫고 그 말의 시비와 득실을 가릴 줄 아는 것이라 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 언어의 이해는 언어와 관련한 지식뿐 아니라 일반 지식과도 무관한 것으로 본 성현들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언어는 지식이 많고 권력과 재력이 있는 소위 지도층일수록 깊이 병들어 있고, 반대로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소시민 사회에서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말일수록 부패한 정도가 심한 현상은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한다. 말을 듣는 데에도 지식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되기 쉽다. 지식은 편견을 만들어 빗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일견 이는 모순처럼 들리나, 요즘 정계에서 여야 간에 시비하는 것을 보든지, 학자들의 토론 장면을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옛날에도 예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어부나 농부 목수 등 지식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위대한 스승들은 자연스러움에 대해 말하였을 뿐이나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은 자신을 규율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 말들을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참으로 수용적인 사람은 그들이 말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말한 바를 이해할 것이며, 그 말이 그의 지식에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삶에는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진실한 언어를 이해하는 데는 특별히 어떠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이는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어 생활이 이토록 타락한 것은 잡다한 지식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머리 속에서 이러한 지식을 남용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을 듯하다. 이제 우리는 언어 사용 방식이 너무 형식 일변도로 기울어진 데 대해서 회의와 위기 의식을 느끼면서 선인들의 언어관에서 다른 일면의 아름다움과 슬기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들은 물론 비현실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듯하나, 이 시대의 언어 공해에 대하여 반성하고 그 극복을 위한 조그만 암시라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Ⅲ. 노자의 언어관
노자의 언어관은 여러 각도에서 살펴 볼 수 있으나, 현대 사회에 뒤얽힌 문제를 조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관점에서 접근해 보려 한다.
1. 진리와 언어의 관계
노자가 언어에 대하여 특히 역점을 두어 말한 것 중의 하나는 언어의 진리와의 관계이다. 그 자신은 늘 침묵 속에서 살며 그가 도달한 진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했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남겨 줄 것을 간청했을 때에도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말로 표현되는 진리는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 말하면 그 진리는 말해지는 순간 거짓이 되며, 언어를 통한 진리의 가르침이란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진리와 관련하여 그는 늘 말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진리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진리는 늘 정숙한 가운데 실현되는 내적 현상이다. 내면의 이야기마저도 멈추었을 때 그것은 실현된다. 정숙 중에 실현되는 것이 어떻게 음성을 통해서 전해질 수 있겠는가? 가령 붓다가 “나는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나는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깨달음 속에는 小我는 없는 까닭에 그런 말은 있을 수가 없다. 깨달음은 ‘나’라는 것이 사라질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진실도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생각이라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생각이 아니라 체험이며 실존이다. 이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을 초월한 무심의 상태에서 도달된다.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에서 일체의 언어는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내면의 진실한 체험은 말로 나타내기 어렵다. 노자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가 없다. 하느님을 마시고 호흡하며 살 뿐이다. 노자가 하느님을 산다는 것은 너무 전체적이고 또한 내밀한 현상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모독이 되고 배반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연인들이 자기들만의 애정 생활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붓다도 40년간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으나, 붓다를 정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진리에 대해서는 결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가 이야기한 말들은 단순한 힌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그물, 자신의 머리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어부의 그물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진리는 절대적인 데 비해서 말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언어에 의해서는 무엇을 말해 보아도 그것은 이원적인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언어의 힘으로는 비이원적 리얼리티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은 무리이다. 한두 예로 ‘쉽다, 조화롭다’ 등의 쓰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가령 ‘그것은 쉽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쉽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약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려움의 일종에 들어간다. 어렵다거나 쉽다고 하는 것은 같은 질을 지니고 있다. 즉, 어느 정도 양적으로는 다르나 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조화’라는 것도 진정으로 조화롭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화란 거기 아직 갈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조화롭다는 말은 곧 거기 대립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정한 조화란 그 대립하는 부분들이 모두 하나로 녹아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그 때에는 그것을 조화롭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조화란 조화가 아니라 단순한 통일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언어의 이원성과 진리의 일원성에서 야기되는 문제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라고 말하는 것조차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란 것은 많은 것이 있다는 상황 하에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토록 절대적인 하나이므로 동양에서는 그것을 하나라 부르지 않고 ‘不二’라고 부른다. 하나엔 둘, 셋, 넷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 아닌 것에 대해 말한다. 거기에는 다수가 없다.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그것을 둘이 아닌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그토록 하나이고 그토록 절대적이다.
이 외에도 노자적 관점에서 진리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그것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규정하든지 어떠한 형식으로도 포착하면 손상을 입는다. 한 마리의 나비를 붙잡아서 핀으로 고정시키면 그 나비는 이미 생명체가 아닌 것과 같다. 진실은 이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살아 숨 쉰다. 가령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의 말은 그에게 있어서는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다. 그 거룩한 문구 전부가 그들에게는 단지 죽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진실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믿는 데 그치면 생명을 잃은 한갓 얘기에 불과하다. 진실은 진행형의 경험이지 머리로 이해하고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한 말일수록 오해받기 쉽다. 붓다, 예수, 노자 등 성인들은 한 번도 바로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깊은 오해를 받았을 뿐이다. 그만큼 그들의 말은 진실하였고, 그리하여 손상되기 쉬웠다. 사람들은 신자가 되어 믿고 조직을 만들며 따르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놓쳐 버린다. 만일 한 번이라도 진리를 체험하면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언어를 통하여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다. 고작 그것이 그러한 바의 것일 것이라고 변죽 정도만 울릴 수 있을 뿐이다. 노자도 사원이 아니라 사원의 문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만일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때 우리는 모든 말을 버리고 우리 실존의 깊숙한 곳에 있는 사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보면 반대로 진리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한다. 우리 주위에는 옳은 말과 필요한 글이 도처에 널려 있다. 교회와 사원에서는 구원의 말씀이 넘쳐 나고, 학교에서는 정의를 역설하는 책들이 쌓여 있으며, 거리에는 다양한 표어와 플래카드가 시의적절하게 나붙어 있다. 이들을 듣고 보며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모두 언어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들을 비롯한 모든 언어 표현의 바른 형식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지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데 국어 교육의 목적이 있으며, 이것이 또한 그 한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도로 발달한 지식과 뜨거운 교육열, 풍족한 경제적 여건 하에서 국어 교육의 이러한 목표에 접근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낙관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런 지적 혹은 형식적 교육이 성공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이것이 날로 극심해지는 언어 공해의 치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언어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우려되는 것은 진실성의 결여라 할 수 있다. 인성이 교활하고 거칠어지면서 말이 진실성과 품위를 잃어 가는 데 대해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 의식도 없고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있는 것이 정말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형식적인 국어 교육 극복의 문제와 함께 언어 자체에만 편협하게 파고 들어감으로써 폭 넓은 시각을 잃어버리고 언어와 관련한 보다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는 서구 언어학의 한계에 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2. 지식과 언어의 관계
노자가 언어에 대하여 역점을 두어 말한 것 중의 또 하나는 언어의 지식과의 관계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고 지식의 추구에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자연스러운 무지의 상태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에게는 행복할 만한 까닭을 구하지 않으면 누구나 전혀 까닭 없이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본연의 무지 속에서 언어를 인위적으로 조작할 필요 없이 진실한 삶을 살려고 하였다. 그는 늘 지식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노자에게 있어서 머리에 의한 언어의 구사 혹은 언어 이해는 표면적이고 천박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언어는 필요에 따라 조작될 수 있고 혹은 자신에 유리하도록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자가 과묵과 궁극적으로는 침묵을 강조한 것도 이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노자는 무엇을 말할 경우에 머리로 말하지 않고 가슴으로부터 쏟아 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논리적이지 않고 차라리 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느 경우에도 그것을 위해 계획하지 않고 단순히 내면의 필요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노자의 관점으로는 지식인의 언어는 언제나 거짓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들리지만 현혹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들의 말은 무엇인가를 숨겨야 할 때 특히 유효하다. 거짓말을 할수록 더욱 많은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설명으로도 아무 것도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은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지식을 통해서는 언어를 깊이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도처에서 필요하고 훌륭한 말을 보고 듣지만, 그것은 의식의 표면에서 반짝하고 타올랐다가 금새 꺼져 버린다. 그 순간 사람들은 이해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깊은 무의식 속에서 강풍이 일어나 이 작은 불꽃을 쉽게 꺼 버린다. 인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표면적 지식은 결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허다한 문제가 가로 놓였으며 그에 대한 해법 또한 부지런히 제시되고 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TV에서 또는 많은 교양 서적이 우리 국민을 선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과 지식은 끊임없이 우리를 빗나가게 한다. 우리는 이들을 머리로만 해석하고 결코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에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우리의 가슴 깊이 와 닿고 내면 깊이 파고든다면 반드시 참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언어의 진정한 이해는 결코 지식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이해는 우리가 전체적으로 들을 때 일어난다. 마치 우리의 몸 전체 즉 마음, 영혼, 육체 모두가 귀가 되어 물을 마시듯이 말을 들을 때 이해가 일어난다. 만약 머리와 귀로만 듣는다면 무엇을 듣고 있든 그것은 진정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듣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기껏 사전적 의미일 뿐 그것이 전하는 깊은 메시지는 줄곧 흘려 버린다.
노자가 머리의 언어를 배격하고 가슴의 언어를 옹호한 것은, 머리는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나 가슴은 우리가 그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노자는 가슴의 언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체의 언어를 초월한 정적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우리도 그의 말만 듣고 그의 침묵을 듣지 못한다면 빗나가고 말 것이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침묵을 전하기 위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산업사회를 맞고 다시 그 위에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말들은 가히 타락의 극에 도달하였다고 할 만하다. 갈수록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적 삶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온갖 지식을 동원하여 말을 꾸미고 불리며 말장난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가장 비현실적인 듯하면서도 가장 절실하게 그리고 가장 근원적으로 문제와 해결의 본질을 제시하는 노자의 언어관에 주목하게 된다.
Ⅳ. 도덕경의 음미
도덕경은 물질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정신 문화가 극도로 침체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다만 그를 형식적으로 이해할 때 너무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고 세속적 눈으로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노자는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하지 않으며, 다만 진실을 말할 뿐이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정원 같은 것이 아니고 자연 그대로의 삼림에 비유될 수 있다. 그에게서는 논리나 상식 같은 것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이러한 방식에서 오히려 신선함과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노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거친 듯하면서도 섬세한 발언 뒤에 깊이 숨어 있는 위대한 일관성을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노자의 사상 중에서 특히 언어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려 한다. 노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언어와 관련하여서도 근원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도덕경 81장 가운데서 다소간에 언어 문제와 직접 관련하여 언급한 부분이 20 여장에 걸쳐 있고, 그 이외에도 넓은 의미에서 혹은 깊은 성찰로 언어와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여러 군데 있다. 본고에서는 지면의 제약으로 그 중 일부에 대하여 살펴 보려 한다.
1. 行不言之敎 (제2장)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말을 통해서만 가르치고 배우는 우리로서 이 의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에게 이는 모순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지식은 말로써 전해질 수 있지만 교양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도자들은 언제나 말로 사람을 가르치려 하나, 이를 통해서 실제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자연은 결코 말하지 않으며 가르치려 하지 않으나,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서 늘 배우고 있다. 그래서 자연은 말 없는 스승이라고 한다. 선생은 말이 많은 법이나 전하는 것은 삶과 무관한 지식뿐이다. 참된 스승은 되도록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선생이 말로써 지식을 전하는 것과는 달리 스승이 진리를 체험시킬 때에는 침묵 속에서만 가능하다. 말로 전해주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못 된다. 말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닌 그의 모든 경험은 또한 말 없는 가운데 전해진다. 참된 스승이 진리를 체험시킬 때는 오히려 침묵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약 그가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침묵을 만들어 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진리는 침묵 속에서 직접 전달되는 것이며, 언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될 때 이는 이미 진리가 아니라 생명 없는 죽은 말이다.
스승이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출 때 갑자기 거대한 침묵이 거기에 생겨난다.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작은 틈을 만든 것이다. 말과 말 사이의 순간에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 석가는 참으로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침묵의 작은 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말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틈이야말로 그의 진짜 설법이다. 진정한 제자는 스승이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스승의 존재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뜻을 전달하는 데에 늘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치 있는 것일수록 말은 더 필요 없게 된다. 그리고 메시지가 가장 본질적인 것일 때는 침묵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言不言’이란 표현에 대하여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도덕경의 주석에는 이 표현이 여러 곳에서 쓰임을 본다. 앞의 ‘言’을 동사 그리고 ‘不言’을 목적어의 구문으로 이해하면 이는 말하지 않는 말을 한다는 뜻이 된다. 行不言之敎가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이의 가르치는 방식에 대한 것이라면, 言不言은 언어를 구사하는 모든 사람의 말하는 자세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말을 잘 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말할 때는 준비한 말을 읽듯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중요한 말일수록 더욱 치밀하게 준비하고 예행연습까지 한다. 이는 말을 준비한 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말이 더 정확하고 훌륭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말은 결코 자연스러운 생화는 못 되며 생명 없이 모양만 좋은 조화와 같다. 이에 대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말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즉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말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은 되었어도 말을 하려 한 사람 혹은 말을 한 사람은 없는 셈이다. 자발적인 언행에는 거짓과 꾸밈이 있을 수 없다. 이는 간사한 인간의 때가 묻어 있지 않다. 자발적인 행동은 인간에 속한 행동이 아니라 존재계가 그를 통해서 존재계 자체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말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형식미를 갖추기 위해서 다소간에 미리 생각하거나 준비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 이를 굳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선의에서 말을 준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말만 듣기 좋게 꾸미고 진실성은 없는 말을 늘어놓음으로써 심한 언어 공해를 유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사람들이 言不言하고, 지도자들이 行不言之敎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국어 교육이 이바지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2. 唯之與阿相去幾何 (제20장)
공손하게 ‘예’ 하고 대답하는 것과 불손하게 ‘응’ 하고 대답하는 것이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뜻이다. 이 뒤에는 對句로 ‘세상에서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의 차이는 또 얼마나 되는가’ 하는 말이 이어진다. 세상에는 표면적인 차이에 의하여 모든 것이 구분되고, 그 구분에 의하여 가치가 결정된다. 부자와 거지, 승자와 패자, 신자와 비신자 등의 구분처럼. 가진 것이 많고 적은 것이 부자와 거지의 표면적 기준이라면, 탐욕이 많고 적은 것이 그 본질적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만석꾼이 거지와 두 주먹만 가지고도 여유 있게 사는 부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편이 진정한 부자이고 거지인지 다시 생각해 볼 만하다. 승자와 패자도 현실에서는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무조건 이기면 승자고, 양보하여 져 주더라도 패자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 싸움을 말릴 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말을 흔히 한다. 이 표현을 쓰고 이해하는 데는 특별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도 일견 명백한 듯하면서 실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적이 있거나 교회에 다니는 것이 신자의 표면적 조건일 듯하다. 그러나 내면적 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솔직히 신자와 비신자의 삶에서 별차이를 찾아 보기 힘들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대립적 주장인 ‘신은 존재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도 언어상으로는 상반되나, 기실 그들이 신에 대하여 살고 있는 자세에는 아무런 구분도 없다. 사회에서는 언제나 작은 도둑만 도둑이고 큰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식이고, 소위 지도자가 지도를 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일일이 예거할 필요도 없이 말로 상반되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는 하나인데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보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한 쪽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쪽을 미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똑 같다.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미워할 수도 없고, 미워하는 것은 깊은 의식에서의 사랑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똑같은 논의도 극히 간단히 그 반대의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모든 논리적 논의는 그 반대의 것으로 계속 바뀌어 왔다. 하느님에 관하여 증명하려고 하는 어떠한 것이든 하느님을 반증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모든 논의는 그 자체에 대립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논의라고 하는 것은 단지 게임에 불과하다. 논리라고 하는 것은 식자들이 가지고 노는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유능한 변호사는 같은 사건에 대해서 어느 편을 위해서도 변론하고 또 이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볼 때 혹은 너무 언어에 집착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많은 사물을 대립적 관계로 구분하고 진실로 그런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는 극복해야 할 형식 논리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3. 希言自然(제23장)
이는 들을 수 없는 말이 제 본래 모습이며, 큰 소리로 떠드는 말은 곧 끝장이 난다는 뜻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정말로 혼동 없이 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언어적일 필요는 없다. 만일 그것이 언어적이라면 그것은 오해될 소지도 있고, 천박한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때로는 두 사람이 침묵 속에 앉아 손을 맞잡고,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정숙 속에 만나 융합한다. 논의, 토론이라는 것은 머리와 머리 사이의 일이지만, 합일이라는 것은 실존과 실존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식인들, 지도자들은 무엇인가 큰 소리로 말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의 풍부한 지식을 증명하고, 혹은 야심적인 포부를 내세워야 한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칠 아무런 지식도 그리고 아무런 포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안으로 만족해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에 충실하고 자기 자신만을 주시하므로 크게 외칠 필요도 없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너무도 심오하여 결코 말로 표현될 수 없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은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깊이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처에서 떠들어 대는 말소리로 귀가 아플 지경이다.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큰 소리로 떠들고 큰 활자로 외치고 있다. 말로써 시비를 가리며 싸울 때, 큰 소리가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믿고 더욱 소리를 높이려 한다. 그러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은 오늘날도 통하는 진리이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큰 소리로 씩씩하게 말하는 법만 가르치지 말고 그 허상과 폐단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4. 知者不言 言者不知 (제56장)
도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며, 도를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것도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언어가 객관적인 것을 나타내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내면적인 것을 나타내는 데는 전혀 소용이 안 된다. 말이 내부의 경험을 전달할 수는 없다. 예수나 붓다가 어떤 말을 했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고작 사전에 실려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전은 우리가 살 수 있었던 순간의 체험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는 언어를 초월한다.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내면적 현상에 대해서 언어는 역량 부족이다. 가령 사랑에 대하여 여러 권의 책을 읽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되어야 할 개념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지배되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랑에 빠지는 것에 의해서만 알 수 있으며, 그 밖에 어떠한 설명에 의해서도 알 수 없다. 이를 설명한 말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노자에 의하면, 만일 알고 있다면 그것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얘기한다면 그때는 잘 알지 못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노자 자신 큰 모순에 빠지게 된다. 만일 그가 알지 못한다면 어째서 이토록 엄청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가 의도하는 것은 말에 현혹되지 말고 아는 척 떠들어대는 사람에 대해서 조심하라는 것일 것이다. 오늘날도 자기 혼자만 진리를 아는 것처럼 외쳐 대는 사람이 우리 사회 도처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자의 이 구절은 다시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Ⅴ. 결 어
지금 우리 사회는 최근의 급속한 변화로 말미암아 각종 오염과 공해로 시달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국어 생활 또한 심각한 병리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글은 국어 생활의 여러 문제 중 특히 그 진실성의 상실 현상에 대하여 문제 의식을 가지고 동양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려 하였다.
이는 종래 국어학이나 국어 교육에서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배제되었던 것이다. 사물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학문의 특성으로는 언어에 관한 지식을 추구할 뿐, 아무리 중요하고 심각하더라도 언어 생활의 현실적인 문제는 다룰 입장이 아니었다. 이는 서구적인 학문 풍토의 영향이다. 그러나 동양적 관점에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언어에 관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참으로 언어를 아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적 상황은 언어 문제에 관한 접근에 있어서 서구적 관점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동서양의 관점이 조화롭게 융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동양 사상 중에서도 특히 노자의 입장은 서구적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서양에서는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데 대해서, 노자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언어를 초월하고 자신의 존재 내부로 들어가 침묵 속에서 관계를 떨쳐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다분히 서구화한 우리의 안목으로 노자를 이해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서구적 지식의 숲에서 잠시 벗어나 동양적 지혜로 바라볼 때 노자의 사상은 현실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 시사해 주는 바가 자못 큰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노자의 언어 사상 가운데서 진리와 언어의 관계 및 지식과 언어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급하였다. 이는 이들이 노자의 핵심 사상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언어의 진실성이 특히 문제가 되는 상황과 관련한 배려이기도 하다.
도덕경 내용의 음미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극히 일부분에 한하였다. 도덕경은 그 역설적 표현 방식 때문에 경전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우리 문제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측면에서 관련되는 것을 선정, 되도록 용이하게 해설하여 국어 교육에 다소나마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국어 교육이 그간 현실적 문제와 유리된 채 국어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만 급급했던 데서 벗어나는 데 한 조그만 계기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일찍이 없었던 형편에서 이 논의가 교육계와 학계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적잖이 오해를 살 소지를 배제할 수 없을 듯하여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나, 이미 위험 수위에 육박하고 있는 우리의 언어 현실이 이러한 만용을 강요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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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의 대중문화 수용을 위한 시론
김성진*
Ⅰ. 서 론
언어 사용이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의미를 그저 전달하는 의사 소통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 과정 및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인식은, 비록 모든 국어교육론자들의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나름의 작은 ‘대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국어교과학의 내용 영역을 ‘도구 영역’과 ‘문화 영역’으로 나누어 본다거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문화교육으로서의 국어교육을 주장하는 논의까지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이러한 생각이 필자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대중문화라든지 매체 언어와 같은 우리 언어 생활의 동시대적 문제들이 국어교육의 수단이 아니라 내용으로 도입될 것을 주장하는 논의와 함께 ‘문화’ 문제는 이제 국어교육의 ‘현안’으로 급속히 제기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용어를 놓고 “영어에서 가장 난해한 단어 중의 하나”라는 언급이 나올 정도로, 문화는 간단한 규정을 허락하지 않는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를 고려할 때 ‘문화교육’이라는 용어가 내용을 갖기 위해서는 문화의 어떤 부분을 국어교육의 내용으로 받아들여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교육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국면에 대한 논의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문화의 여러 층위 중에서 대중문화의 문제를 선택하여 국어교육에서 이를 어떤 관점하에 수용할 수 있는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논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디어의 도입이 예술 자체 및 수용자의 예술 수용 태도에 가한 충격과 변화의 내용을 살피도록 하겠다. 테크놀로지를 통한 기술 복제라는 대중문화의 특징이 낳은 수용 태도의 변화에 대한 고려가 있을 때, 기술 복제 이전의 예술 수용과 차별성을 갖는 대중문화 수용의 특성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대중문화 수용에서 우려되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가 국어교육의 내용으로 도입될 수 있는 근거를 기호화로부터의 기호 해독의 상대적 자율성 논의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이상의 논의 속에서 마지막으로 대중문화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읽기의 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문화연구의 핵심 개념중의 하나인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것이다.
Ⅱ. 국어교육과 문화 : 의미화로서의 문화
원래 Culture의 어원은 라틴어 Colere로서, “습관, 경작, 보호, 존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Culture가 agri-culture와 연결되는 것에서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원래 ‘문화’는 곡물을 기르는 농업이나 목축과 관련된 “자연적 성장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자연적 성장”이 인간의 발달 과정에까지 확장되어 쓰이게 되고,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자연과 구별되지 않는 야만의 상태에서 ‘문명’으로의 발전이라는 진화론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문화 개념이 결정적인 전환을 맞게 된 것은 헤르더의 저작 Ideas on the Philosophy of the History of Mankind에 이르러서이다. 여기서 헤르더는 문화 혹은 문명이라는 개념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인류의 보편적 발전 과정이라는 ‘보편사’의 관념을 비판하며, “문화의 복수성”을 주장한다. 헤르더에 따르면 민족과 시기에 따라 구별되는 다양한 복수의 문화들이 있을 따름이며, 한 민족 내부에서도 사회적․경제적 차치에 따라 구별되는 여러 개의 문화가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헤르더에 이르러 문화는 “삶의 방식”이라는 인류학적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 개념은 낭만주의 운동을 통해 독특한 변전을 겪게 된다. 그들은 문화를 ‘문명’과 대립되는 용어로 사용한다. 낭만주의 운동은 ‘민속문화’(folkculture)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문화의 민족성과 전통성을 강조하며, 산업사회에 들어서 발생한 새로운 문명의 ‘기계적’, ‘물질적’ 특징을 비판하기 위해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문화는 ‘인간적’ 발전을, 문명은 ‘물질적’ 발전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를 대립시키는 낭만주의자들의 문화 개념은, 영국에서 19세기 후반 매튜 아놀드의 저서 ꡔ문화와 무정부 상태 Culture and Anarchyꡕ를 거쳐 리비스를 중심으로한 잡지 ꡔ검토 Scrutinyꡕ로 계승되는 ‘문화와 문명’의 전통으로 연결된다. ‘문화와 문명의 전통’은 대중문화를 도덕적, 문화적 기준에 대한 현대 물질 문명의 도전으로 인식하여 ‘위대한 고전’으로부터 현대 문명의 파괴적인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찾으려 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현재의 문화연구와는 목적과 관점 자체가 판이한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대중문화를 진지한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문화와 문명의 전통’을 문화연구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아놀드에게 문화는 (1) 지식 체계로서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말한다. 또한 (2) 문화는 “이성과 신의 의지가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문화는 아놀드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완벽에 대한 연구이며, 이 완벽은 어떤 것을 가진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것이 되어가는 것을 뜻하며, 일련의 외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아놀드에게 문화는 최선을 알기 위한 노력이며 또한 모든 인류를 위해 그러한 지식이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노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화는 예술, 철학, 학문 등과 관련된 지적인 작업으로서, ‘삶의 양식’이라기보다는 지적인 엘리트들에 의해 보존되고 전수되는 ‘고급 예술’에 다름 아니다.
한편 청년 루카치는 이러한 정신문화와 교양에 강조를 두는 문화 개념을 공유하면서도 20세기 초 근대 문명에 나타난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의 분열, 사실과 영혼의 분열을 판별해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문화’를 바라보았다. 청년 루카치는 주체와 객체, 개인과 사회, 개인의 가장 내적인 것의 산물과 외적 제도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으로서의 문화를 사고했다. 이는 문화에서 ‘교양’의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교양을 고립된 폐쇄영역에 국한시키지 않고 근대 극복의 전망과 연결지어 사고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루카치 평생의 사상에서 유일무이한 영역”이라는 발언도 가능하다.
리처드 호가트, 레이먼드 윌리엄즈, E. P 톰슨, 스튜어트 홀의 작업을 통해 고급 문화로서의 문화 개념은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된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최근 문화는 예술, 철학 등의 ‘위대한 정신 문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입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을 보는 방법, 요리, 쇼핑, TV 시청이나 영화 관람과 같은 일상적인 행위의 기능을 포괄하는 ‘삶의 방식’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그러한 일상적인 삶의 방식에서 강조하는 것은 ‘의미’이다. 문화가 사회적 관계와 가치를 ‘의미’로서 반영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그 의미의 생산과 수용 메카니즘 전체가 문화이다. 여기서 문화란 ‘의미의 생산과 소통’을 포괄하는 사회적 의미작용으로 정의되며, 그 과정에서 언어가 행하는 역할이 중시된다. 최근의 문화연구가 기호학과 이데올로기 이론에 힘입어 다양한 문화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도 문화의 이러한 ‘의미작용’적 측면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 개념의 변천사를 참조하여, 국어교육이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문화 개념을 다시 정리해 본다면,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을 설정할 수 있다.
(1) 특권화된 문화 : 이 개념은 가장 뛰어난 예술적 업적을 뜻하는데,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특권화된 문화에 속한다.
(2) 관습으로서의 문화 : 이 개념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나 관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행위, 그리고 그들이 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가정 등을 뜻한다. 이 문화 개념에는 광고, TV 연속극, 신문 기사, 잡지의 기사, 영화 등도 포함된다.
(3) 사회적 담화로서의 문화 : 이 개념은 언어 체계에 대한 지식에 더하여 요구되는 사회에 대한 지식과 상호작용의 기능을 뜻한다. 그러므로 개별 학습자들 자신의 문화적 규범에 의해 두드러진 차이가 생길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습자의 의사소통 능력에는 공손함, 침묵, 반복, 적절한 담화 표지 같은 것들이 아니라 쓰기의 일반적이고 수사학적인 관습에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것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대화 능력은 마주보기, 억양, 몸짓, 상호간의 거리와 같은 준언어적 기호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대중문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영역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이다. 특권화된 문화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학식과 체험된 경험의 인류학적 총체를 뜻하는 문화는, 사람들이 정체성과 가치 및 행동을 습득하는 생활의 맥락에 다름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문화는 고급문화의 작품들과 지식의 저장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대중문화 역시 국어교육의 주요 내용으로 도입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급문화/저급문화 식의 선험적 가치 판단을 내재한 구분은 거부되기 마련이며, 대신에 모든 문화적 표현들이 ‘높이’ 또는 ‘깊이’의 동일한 연속체를 따라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컨대 락 음악이나 힙합 등의 대중음악이나 ꡔ퇴마록ꡕ이나 ꡔ아버지ꡕ 같은 대중소설은 전적으로 이윤을 위해 ‘생산된’ 타락한 표현들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직 순문학 작품만이 진지한 연구의 가치가 있으며 교육의 대상이 될만하다는 생각은 이러한 문화 개념의 변전을 통해 도전받게 되었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교과서에 실리는 ‘순수 문학’보다는 쉽게 읽고 즐길 수 있는 ‘대중 소설’을 즐기고 있는 현실적인 독서 환경을 고려한다면, 대중문화에 대한 교육적 관점의 수립과 수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어교육의 현안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Ⅲ. 대중문화의 미디어 규정성과 수용자의 능동성
1.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로서의 대중문화와 수용 태도의 변화
국어교육에서 대중문화 수용의 근거를 논하기 위한 출발점은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관련성이며 그러한 관련이 낳은 수용 태도의 변화 문제이다. 20세기에 들어와 급속도로 발전한 복제 기술 및 윤전기의 발달은 글자와 그림의 끝없는 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한편 학교 교육의 일반화와 비교적 높은 임금은 책을 읽을 줄 알고 또 읽을 거리나 그림책 등을 살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대중을 만들어 내었다. 바로 이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거대한 산업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기술복제의 가능성이 예술에 가한 변화는 단지 전달 수단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술복제를 통해 예술이라는 범주 자체가 질적으로 새로운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우라’(Aura)의 상실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은 이러한 질적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기에 논의의 근거로 삼을 만하다.
“우리는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강조:필자)이라고 정의내릴 수가 있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분위기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우라를 섣부른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하자면, “접근 불가능성”이다. 아우라는 예술이 종교에서 가졌던 예배적인 의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아우라 논의에서 독특한 것은 아우라가 서구의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해 온 비종교적, 비예배적 예술까지도 특징짓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중세의 예배적 예술과 르네상스 시대의 세속적 예술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통념은 그릇된 것이다. 차라리 결정적인 단절은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예술에 도입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 나타나는 아우라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은 처음에는 마술적 의식, 다음으로는 종교적 의식에 봉사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실은, 예술작품의 이러한 분위기적 존재방식이 한번도 의식(儀式)적 기능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그것에 제일 먼저 본래적 사용가치가 주어졌던 종교적 의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 … 르네상스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그 후 300여년 동안 줄곧 지속되었던 세속적 아름다움의 숭배가 그 본래의 근거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 기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세속적 아름다움의 숭배가 위기를 맞이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예술 자체의 질적 변화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우라의 상실로 작품과 수용자 사이의 관계가 변화한다는 점이다. 아우라에 의존하는 수용은 일회성이나 진품성과 같은 범주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회성과 진품성이라는 범주는 이미 복제가능성을 예술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영화나 만화 수용에 있어서는 불필요한 것이다. 대중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복제 가능성은 작품에 대한 지각 방식을 바꿔놓는다.
“오늘날에 있어서 분위기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사정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사정은 모두 오늘날의 삶에서 날로 커가는 대중의 중요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오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대중이 바라 마지 않는 열렬한 욕구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대중은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대중은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그림을 통하여, 아니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예술을 수용할 때 요구되던, 관조적 태도와 작품 자체에 침잠해 들어가는 수용태도 대신에, 대중은 산만하면서도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수용태도를 취하게 된다. 벤야민은 이러한 수용의 태도를 “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과 정신집중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옛날 중국의 전설에 어떤 화가가 자기가 완성한 그림을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식으로 예술작품 앞에서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에 반해 정신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이 자신들 속으로 빠져들어오게끔 한다.”
이처럼 대중문화를 수용하여 즐기는 대중은 주어진 텍스트에 몰입해 들어가는 태도를 통해 모종의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느긋한 마음으로 즐길 뿐이다. 실제로 대중문화를 즐길 때 수용자들은 대중문화 텍스트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식의 심각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즐기기 위해 대중 소설을 읽거나 TV의 드라마를 볼 뿐이다. 기술복제 시대에 예술은, 수용자에게 신비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제의’와 ‘숭배’의 기능을 상실하고, 수용자는 텍스트를 숭배하는 태도가 아니라 산만하게 즐기는 태도로 대하게 되었다. 이런 수용자의 태도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율 저하의 경향을 만회하기 위해 문화의 영역까지 상업화하여 대중을 기만하는 ‘문화 산업’에 빌미를 제공하는 것으로 비판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산만한 태도는 텍스트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산만한 가운데 대상을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비판적 태도를 취할수 있는 가능성을 낳기도 한다.
“오락으로 정신이 산만해진 사람도 익숙해질 수가 있다. 아니 어떤 과제를 정신분산적 오락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능력 자체가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일이 이미 습관이 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 … 영화는, 관중으로 하여금 비단 비평적 태도를 갖게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그와 아울러 이러한 영화관에서의 관중의 비평적 태도가 주의력을 포함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종교의식적 가치를 뒷면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도 어제 본 드라마나 영화, 만화에 대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텍스트에 대해 나름의 ‘비평물’을 내놓는다. 주인공의 성격이 어떠하느니, ‘나라면 그런 식의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 진지한 시나 소설에 대해서 말을 삼가는 태도와는 달리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투사하여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관적이고 관조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자율적 예술’에 대한 수용이 작품의 형식에 대한 매개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로 이루어지는 복합적 과정을 거친다. 이와는 달리 달리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태도는 자신의 삶과 직접 연결시켜 대중문화를 평가하고 따지는 비판적 태도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산만하고 느긋하게 즐기려는 태도 자체가 수용자의 ‘능동성’ 혹은 ‘비판적 태도’로 직결된다고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에 담긴 거리를 취하여 합리적으로 따져보려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사라진 아우라가 문화산업을 통해 상업화된 형태로 부활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타에 대한 숭배를 통해 예술은 상업화된 형태로 ‘재예배화’된다. ‘스타’를 향한 대중의 열광적 동일시는 느긋하게 즐기는 산만한 태도를 요구하는 대중문화 텍스트가 문화산업의 이윤추구에 봉사하는 ‘세속화된 제의적’ 기능을 갖게 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의 산물인 미디어가 해방시킨, 산만한 가운데 대상을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비판적 태도와 누구나 대중문화에 대한 서슴없이 자기 나름의 ‘비평’을 생산하려는 수용자의 능동성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일 것이다.
2. 기호 해독의 상대적 자율성과 수용자의 능동성
수용자의 능동적 생산의 측면을 좀더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기호 해독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이 지점에서 스튜어트 홀의 기호화와 기호 해독의 차이에 대한 논의가 도움을 준다. 홀의 「기호화와 기호 해독 Encoding and Decoding」은 문화이론에 기호학적/구조주의적 특징을 도입하여 수용자의 능동성을 설명한 영국문화이론의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 홀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미국식 의사소통 모델과 대중문화의 수동적인 소비자로서의 수용자 개념으로부터 결별하고 있다.
홀은 의사소통 과정에 대한 미국식 이론은 의사소통을 송신자에서 수신자로 이어지는 일방 통행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메시지가 송신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수신자에게 반드시 수용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홀에 따르면, ‘메시지의 생산’(Encoding)에서부터 그것이 ‘읽혀지고 이해되는 과정’(Decoding)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의 모든 과정은 그 자체의 결정 요인과 ‘존재 조건’을 지닌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에 수용자의 능동적 작용에 의해 텔레비젼의 메시지는 다양한 시청자들에 의한 다양한 해독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고도로 관습화된 기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수용자가 그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항존한다. 이런 면에서 홀은 텔레비젼의 메시지가 다의적이기는 해도 전적으로 다원주의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의미란 문화적 부호에 의해 완전히 미리 결정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받아들여지는 기호들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 안에서 그 의미가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의 문화는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세계에 대한 범주를 강요한다. 이러한 것들이 비록 단일한 목소리는 아니고 어느 정도의 경쟁을 내포하지만, 지배적 문화 질서를 구성한다. 상이한 삶의 양식들이 담론적인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지배적 혹은 선호적 의미로 서열화된다.”
여기서 ‘선호’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배적인 의미들이 불가항력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호’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홀에 따르면 메시지 해독에는 ‘지배적 해독’, ‘교섭적 해독’, ‘대항적 해독’이라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지배적 해독은 시청자가 가령 텔레비전 뉴스 보도나 시사 프로그램에 내재된 의미를 전부 그대로 받아들여 해독하는 것을 말한다. 교섭적 해독은 사건에 대한 지배적인 부호를 인정하되 개별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보다 교섭적인 적용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한 노동자가 파업이 경제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뉴스 보도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리 해고의 위협 앞에서 그것을 막기 위해 노동조합의 결정에 따르기로 결정하는 것이 교섭적 해독의 예라 할 수 있다. 대항적 해독은 대안적인 준거틀에 의해 메시지를 재해석하는 것을 일컫는다. 자신이 반대하는 정당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 이런 입장을 흔히 취하는데, 5공화국 시절 “하늘에 조각 구름 떠있고”라는 노래 가사를 “하늘에 최루탄이 떠있고”식으로 가사를 바꾸어 그 노래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완전히 뒤집는 경우가 ‘대항적 해독’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홀의 논의가 대중문화 텍스트 해석의 모델로 직접 연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문화를 수용한 국어교육의 목표가 곧장 모든 텍스트에 대한 ‘대항’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대중문화 발신자의 메시지와, 부호를 해독한 결과 산출된 메시지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문화연구에서 수용자의 능동적 의미 구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가 국어교육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Ⅳ. 대중문화 교육의 목적과 방법 : 글쓰기를 통한 성찰
미디어 언어와 대중문화를 국어교육에 받아들임에 있어 그것들이 현재 언어 생활의 주된 흐름이며, ‘순수문학’에 비해 학생들이 대중문학을 선호한다는 ‘현상’의 지적에 머무를 수는 없다. 분명 현재 학생들은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보다는 만화, 잡지, TV나 영화 같은 영상물을 더 즐기고 있기 때문에 일단 대중문화 텍스트의 도입은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듯하다. 따라서 TV, 영화, 비디오, 대중소설, 만화, 잡지, 신문, 인쇄물 등이 교육의 자료로 선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교육이 일어나는 과정을 (1) 주제에 대해 흥미가 생기는 로망스 단계, (2) 사실을 분석하고 발견하는 엄밀성 단계, (3) 사실을 종합하고 이전의 경험과 비교하는 일반화 단계라는 셋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는 일은 대중문화를 국어교육의 장에 도입한 결과 얻을 수 있는 목표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대중문화의 경우 로망스 단계는 이미 학생들이 대중문화를 충분히 즐기고 있기 때문에 교육의 장에 끌어들임과 동시에 수월하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앞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이 일방적으로 대중문화 생산을 통해 이윤을 노리는 문화산업의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수긍한다면, 학습자들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용자의 능동성에 대한 강조가 텍스트를 중시할 것이냐 수용자를 중시할 것이냐는 이항 대립적 문제 설정 속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하느냐는 식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편향을 낳을 것이다. 의미 생산에서 수용자의 능동적 역할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자의적 해석을 용인하거나 수용자의 모든 반응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무주택자들이 자신들의 은신처에서 ꡔ다이하드ꡕ를 보면서 테러리스트들이 빌딩을 점거하는 대목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관찰하고 이것을 수용자의 능동적인 대항적 읽기로 설명하는 일은 수용자의 모든 해석을 그저 용인하며 나아가 모든 저항을 물신화하는 태도를 낳는 위험성을 갖는다. 더구나 무주택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따지고 보면 결코 능동적인 반응이 아니다. 그들은 ‘악’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처단되어야 한다는 사회의 고정 관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켈너 역시 대중의 해석을 무차별적으로 특권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립구도가 역전되고 있지만 피스크가 ‘저항’이란 가치를 부여한 수용자의 능동적 반응은 사전에 조건화된 헐리우드 메커니즘, 즉 ‘악’으로 간주되어 폭력이 행사되어 마땅한 자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장면에서 즐거움을 생산하도록 돼어 있는 메카니즘에 단지 즉자적으로 반응한 것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과제는 대중문화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것을 즐기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것이 참된 욕구인가를 살피는 것으로, 앞에서 제시했던 ‘엄밀성 단계’와 ‘일반화 단계’가 국어교육의 본질적 국면이 될 것이다.
대중문화를 평소에 즐기는 것 자체를 정당화하고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중문화를 대립시키는 것이 대중문화를 수용한 문화교육의 갈 길은 아닐 듯하다. 물론 문화가 더 이상 고급예술이나 지적인 소수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의미작용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미리 선정된 정전이나 전범으로서의 텍스트를 학습자가 ‘진리’로서 무비판적으로 ‘전수’받는 것은 국어교육의 이상적인 모습이 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홀의 주장처럼 기호화와 기호 해독이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수용 과정에서 학습자의 능동적 참여가 의미 작용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문학을 포함한 모든 텍스트는 진리의 저장고가 아니라 학습자의 비판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매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중문화 역시 문학과 더불어 국어 교육의 내용으로서 얼마든지 도입될 수 있다. 문화연구의 가정에 따르면 수용자는 대중문화의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능동적 개입을 통해 대중문화에 담긴 상업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전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대중문화 교육의 목표는 자신들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이유를 성찰하고 자신의 즐거움 속에 투영된 욕망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즉 대중문화를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자신이 대중문화를 즐기며, 대중문화는 어떤 종류의 즐거움을 주는가를 스스로 살필 수 있는 태도를 갖추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찰 능력과 태도야 말로 학생들의 대중문화에 대한 능동적 수용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쾌락을 느끼고 행복을 경험하는 학생들의 욕망에 대한 성찰은 글쓰기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학습자들은 글쓰기를 통해 대중문화의 의미나 자신들이 즐거워하는 지점이 어딘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한 성찰은 “지배적 형식들에 대한 경솔한 모방 혹은 자신들이 이용하는 이데올로기들과 즐거움들에 대한 무비판적 ‘칭찬’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결국 글쓰기를 통한 성찰은 이데올로기의 문제 설정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한 이러한 성찰에서 중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항목이 될 것이다.
(1) 누가, 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가?
(2) 이 텍스트의 종류는 무엇인가?
(3) 이 텍스트는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었는가?
(4) 텍스트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5) 텍스트를 수용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들은 텍스트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6) 주제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
또한 글쓰기를 통한 성찰은 나아가 구술 문화의 특징을 갖는 대중문화와 글쓰기라는 문자 문화를 교차시킴으로써, 대중문화 특히 영상을 본질적 내용으로 삼는 미디어 문화의 감각적 직접성을 극복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자 문화와 구술 문화는, 어느 편이 선험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고와 가치를 갖는 문화의 체계이다. 그렇다면 문자 문화와 구술 문화 중 어느 편이 더 ‘민주적’이고 수용자의 능동성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보다는, 차라리 각각 차별성을 갖는 문화 체계 사이의 소통을 모색하는 일이 더욱 생산적일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러한 소통은 차라리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문자 문화를 대표하는 시나 장편 소설의 예를 들어 보자. 이러한 자율적 예술이 수용자에게 요구하는 관조적이고 침잠해 들어가는 태도는, 텍스트에 모셔져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특징으로 하는 문자 문화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침잠은 능동적인 재구성의 전제 조건에 다름아니다. 아도르노 식으로 말하자면, 시와 소설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작품의 내적 움직임을 자발적으로 구성해 보는 프락시스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응’과 ‘저항’이란 용어를 어느 한편에 일방적으로 귀속시키는 논의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읽기의 실상과 무관한 공론에 다름아니다.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거나 아니면 시나 소설 같은 소위 ‘순수문학’을 대상으로 하건, 읽기는 ‘순응적 읽기’와 ‘비판적 읽기’라는 단순한 양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복합성과 다양성을 갖는다. 어떤 텍스트에 몰입해 있는 독자는 텍스트에 ‘순응’한다. 그러나 ‘순응’이 없다면 ‘비판’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비판 역시 불가능하다. 비판이라고 해서 항상 여럿이 모여 목청을 높여 논쟁할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닌가? 생활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홀로 밤을 새워가며 시나 소설을 읽는 체험 속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 앎을 모색하는 일이 동반되지 않는 ‘비판’은 자신이 ‘비판’하고자 했던 대상의 지위로 전락한다. 게다가 앞서 지적한 켈너의 논의처럼 비판적이며 저항적인 것처럼 보이는 읽기가 철저한 순응일 수도 있다. 이처럼 ‘순응’이 ‘비판’으로, ‘비판’이 ‘순응’으로 전환되는 관계를 놓고, 좀 식상한 감은 있어도 ‘변증법적’이란 용어를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훌륭한 독자는 텍스트에 ‘순응’하기보다 텍스트를 ‘존중’한다는 편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노련하고 능숙한 독자는 자기 자신이 예견할 수 없었던 생성의 가능성을 내다보기 위해 텍스트를 이용한다. 이처럼 자율적 문학의 특징인 관조적이고 침잠해 들어가는 태도에 담긴 능동적 재구성의 가능성과 대중문화의 특징인 ‘느긋하게 즐기려는 태도’에 담긴 거리를 취하여 합리적으로 따져 보려는 태도를 ‘변증법적으로’ 매개시킴으로써, 자율적 예술의 신비화된 아우라를 벗겨내는 동시에 대중문화의 상업적으로 세속화된 아우라 역시 탈신비화하는 진정으로 ‘비판적 이해’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Ⅴ. 남는 문제 : 이데올로기라는 문제 설정의 복귀
대중문화에서 느끼는 수용자의 즐거움이 이데올로기 차원을 벗어난 쾌락의 문제라면, 글쓰기를 통한 성찰이란 한편으로 대중문화를 즐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비판’하는 엘리트주의의 전형적 태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예컨데 신체적 쾌감과 관련된 바르뜨의 ‘쾌락’(juissance)론을 도입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 설정으로는 수용자들이 대중문화를 접하며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도 가능하다.
여기서 수용자들이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의 성격이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이냐를 따져볼 겨를은 없다. 이데올로기를 의식 차원에서든 무의식 차원에서든 근본적으로 ‘허위의식’과 ‘재생산’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대중이 느끼는 ‘쾌락’과 ‘행복’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문제 설정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지적은 어느 정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러나 만일 이데올로기를 지배자들의 환상이 아니라 피지배자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과 행복에 대한 약속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재규정한다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그것(지배 이데올로기)은 우선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반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설적 테제에 이르게 된다. 즉 최종심에서 이와 같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자본가적’인 지배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항상 피지배자들의 가상의 특수한 보편화이다. 그것이 가공하는 통념들은 정의, 자유와 평등, 노동, 행복 등의 통념들인데, 그것들의 잠재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는 바로 그것들이 개인들의 가상에 속한다는 점으로부터 유래한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지만, 또 한편으로 니체를 좇아 어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항상 ‘노예들의 도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복합적인 것이라면, 대중문화가 주는 즐거움은 이데올로기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즉 대중문화는 한편으로 그날 그날의 노동에 지친 수용자들에게 행복을 약속하면서 또 한편으로 바로 그 행복에의 약속을 통해 그들을 현체제에 붙들어 두면서 길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논의가 대중문화 수용에 한층 중요한 의미를 갖는 바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승인’과 ‘저항’/‘반역’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파악이다. 수용자들은 대중문화가 약속하는 행복 바깥에서 그러한 행복의 허구성을 다만 발견,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행복에의 약속 안에 머물면서 현 체제 안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행복에의 가능성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가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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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교육의 과제
마 광 호*
Ⅰ. 인간의 언어 활동과 어휘
인간의 행위는 기본 재료와 사용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즉, 인간의 행위는 기본 재료들의 사용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에 물감이나 색, 도화지, 붓 등은 기본 재료에 해당하며, 물감을 물에 풀거나 붓질을 하거나 칠하는 행위는 사용 과정에 해당한다. 색을 칠하여 결과물로서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인간의 미술 행위이다. 또 인간이 무엇을 먹고 마실 때에 ‘무엇’은 기본 단위이며, ‘먹거나 마시는 것’은 사용 과정이다.
그런데, 인간의 행위가 질적으로 신장되기 위해서는 재료와 사용 과정의 조화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용 방법을 모르면, 그 재료는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며, 아무리 사용 과정, 방법, 솜씨가 좋다 할지라도 재료가 좋지 못하다면,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 행위를 이렇게 사용 과정과 기본 재료의 두 축으로 잡을 때에, 인간 행위의 질은 재료의 질과 과정의 질의 조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다음의 도식을 보자.
그림 1). 인간 행위 도식
위와 같이 인간 행위를 나타낼 때에 인간 행위는 다음의 여러 형태들로 실현될 것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평가 또한 두 축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림 1-a)
그림 1-b) 그림 1-c)
그림 1-a)처럼 수평으로 긴 타원형의 형태는 사용 과정이 우수한 경우이며, 그림 1-b)처럼 수직으로 긴 타원형의 형태는 좋은 재료를 사용한 경우이다. 그리고 그림 1-c)처럼 원에 가까운 형태는 사용 과정과 재료들이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인간의 언어 사용도 인간 행위의 하나로서, 기본 재료와 사용 과정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음소, 형태소, 단어 등은 의미 구조화의 기본 단위로서의 재료들이며, 음운 규칙, 통사 등은 의미 구조화에 작용하는 기제들이다. 그 결과 구조화된 의미들은 문장, 단락, 텍스트, 담화 등의 의미 구성체로 나타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의미 구성체는 단위들의 결합 과정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ㄱ, ㅗ, ㅁ’의 결합 순서에 따라 ‘곰, 목’의 두 단어로 갈라지며, ‘고양이, 쥐, 먹는다, 가, 를’의 결합 순서에 따라 ‘고양이가 쥐를 먹는다’의 문장과 ‘쥐가 고양이를 먹는다.’의 문장이 만들어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먹는다. 쥐를 고양이가!’의 문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법이나 문법, 또는 통사 능력이라고 불리는 사용 과정은 그 자체로서 실현되지 못하며, 반드시 재료들에 수반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위의 ‘고양이가 쥐를 먹는다.’, ‘쥐가 고양이를 먹는다.’는 문장은 ‘주부(主部) + 서술부(敍述部)’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시 서술부는 목적어와 서술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결합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들은 머리 속에서 언어 표현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나, 실제 드러나는 것은 기본 재료들로서의 ‘형태소, 어휘소’ 등등의 언어 구성체들이다. 문법을 Chomsky 류의 변형 과정으로 생각한다 할 때에도, 의미 덩어리들이 구체적인 언어 단위들로 바뀌는 과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언어 사용의 구현체가 재료라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두 개의 중요한 점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어법이나 문법, 등이 없어도 언어 표현과 이해는 가능하지만, 의사 소통의 기본 단위로서의 어휘가 없다면 의사 소통은 불가능하다. 즉, 제아무리 문법적 능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언어 구성의 재료인 형태소, 낱말 등을 알지 못한다면 의사 전달 및 수용 행위는 이루어질 수 없다.
둘째, 언어로 표현된 모든 발화의 질은 거기에 주로 동원된 어휘의 질이 어떠하며, 그것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구사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다음의 문장들을 보도록 하자.
1) a. 오등(五等)은 자(慈)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b. 우리들은 여기에 우리 조선이 혼자 서는 나라라는 것과 우리 조선 사람들이 혼자 서는 사람들임을 널리 밝히노라.
2) a. 학교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본적인 방법을 세워야 한다.
b. 학교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1) a.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요구하는 것임을 두말할 필요도 없으며, 아울러 1) a. 와 같은 글을 써낼 수 있는 힘에는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는 어휘를 다루는 힘도 포함되어 있음을 가정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1) b.와 같은 어휘 수준으로 작성된 텍스트는 내용이 일그러져 있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역으로 ‘문제’라는 문맥에서 ‘대책’을 쓴 2) b.는 자연스럽게 읽혀지는데 반해, ‘방법’을 쓴 2) a.는 자연스러움이 떨어지고 그 결과 문장의 유려성이 확보되지 못한다.
곧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고 이해하는 것은 발화의 질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의사 소통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본 조건에 해당한다.
Ⅱ. 국어교육과 어휘
언어 사용의 행위적 속성을 중시한 이성영(1991)은 언어, 특히 기호 체계를 재료라고 생각하여, 언어 사용을 체계로서의 언어를 재료로 삼아 의미 내용이라는 생산품을 ‘만드는’ 과정으로 보았다. 또한 마광호(1992)는 국어교육의 내용을 설정하는 자리에서 ‘국어 단위’가 설정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위의 주장들은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기에는 이론적인 바탕이 미흡했으며, 실제로도 국어교육의 학문적, 내용적 체계화는 사용 과정을 축으로 이루어져 왔다. 국어과 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는 교육과정의 내용 영역이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의 여섯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속에서 어휘는 읽기에 종속되어 있다. 6차 교육과정에서야 비로소 어휘가 각 영역과 관련을 맺고 있지만, 어휘의 의의를 포괄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학문적 논의의 장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는데, 노명완 외(1988), 박영목(1997)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림 1> 국어과의 교과 목표와 영역 체계(노명완(1988; 33))
┌ 언어 사용 기능의 신장
교과목표│ ↑
└ 지적 기능의 신장 ↔ 정의적 기능의 신장 ↔ 사회적 기능의 신장
↑
표현․이해의 언어 활동
교과활동┌ 활동 (말하기/듣기/읽기/쓰기)
영역 │ ↑ ↑
└ 지식 기반 언어 지식 문학 지식
<그림 2> 국어교육학의 내용 체계(박영목 외(1996; 42))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의 행위는 재료들을 사용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인간이 더 좋은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사용 과정을 개선하거나 좋은 재료를 선택하여야 한다. 인간의 언어 사용 행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국어교육에서 언어 사용 행위의 질적 신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언어 사용 과정을 잘 가르치거나, 언어 재료의 질을 높여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어 재료로서의 어휘는 국어교육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멀리 언어학의 연구 동향과 연관되어 있다. 그동안 언어학에서는 구조주의 언어학 및 변형 생성 문법에서 이론적 단순화를 지향하여 지나치게 통사 위주의 연구를 추구하고, 이론적 체계화가 어려운 어휘, 의미 등을 상대적으로 경시했다. 언어학을 기반학문으로 출발했던 국어교육이 언어학의 연구 동향을 받아들이면서 언어 사용에서의 어휘의 위상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국어교육의 대상인 언어 사용에서 어휘부의 역할은 직접적으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사용 과정의 역할은 분명히 드러난다. 즉, 동일한 낱말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 낱말들을 쓰는 방식에 따라 텍스트들이 달리 생산된다. 따라서 언어 사용 능력의 신장을 위해서 사용 과정에 치중하게 된 것이며, 언어 사용 과정에서 어휘부를 모어 화자들이 지닌 대상으로서 파악하고, 확장되어야 할 영역으로 간주하지를 않았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국어교육 내에서 어휘교육의 위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다.
국어교육의 이와 같은 불합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어 사용 능력의 신장을 목표로 하는 국어교육에서 어휘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또 구체적인 어휘의 선정은 어떤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지도 방법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어휘의 평가는 무엇을 목표를 하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등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요구되며, 그 결과를 반영하는 합리적인 제도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Ⅲ. 어휘 교육의 의의
어휘교육의 의의를 따지는 것은 어휘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 및 구체적인 연구 성과의 축적을 위한 밑바탕을 다지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의 의의는 교육을 함으로써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교육의 의의를 따지기 위해서는 상위 대상을 설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설정된 의의는 교육 내용의 구조화의 기본 철학이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어휘 교육의 상위 대상을 당위적으로 국어교육으로 상정하고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김광해(1998)는 어휘력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어휘의 학습은 일생 계속된다.
(2) 어휘는 문화 자산이다.
(3) 어휘는 지식이다.
(4) 어휘력은 사고 능력이다.
(5) 어휘가 표현의 수준을 결정한다.
(6) 어휘는 신개념의 공급원이다.
(7) 어휘는 문화 유산이다.
이와 같은 어휘력의 의의들을 교육적인 측면에서 검토하는 과정에서 어휘교육과 국어교육의 연관성이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1)은 어휘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계속해서 배워야 할 이유이다. 언어 학습은 음운, 문법, 어휘의 세 측면에서 이루어지는데, 모어 획득의 경우 음운이나 문법은 어린 시절에 완성되지만, 어휘부는 그렇지 못하다. 어휘의 질 및 양은 생활의 장, 개념 수준, 어휘 접촉 빈도 등에 따라 평생동안 계속해서 변화한다. 어휘가 이렇게 평생 발달하는 것이라면, 기초 어휘, 기본 어휘, 일차 어휘, 이차 어휘, 학습용 어휘 등의 다양한 어휘를 선별해서 어휘 확장의 기반은 닦아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어교육 내에서 모든 어휘를 다 가르쳐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2) 및 (7)은 교육의 기초적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교육은 사회 인력의 육성을 통한 공급을 목표로 하되,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춰 주고자 한다. 따라서 당 사회의 고유성을 전수하는 것은 교육의 기초적 성격이다. 어휘가 우리의 고유 문화 자산이라면, 당연히 교육 내용으로서 상정이 되어야 한다.
또한 (4) 및 (5)는 인지 과정으로서의 어휘를 강조하는 것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국어교육과의 기본적인 관련성을 설정할 수 있다.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단어를 산술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또는 개념에 대한 인지 능력이나 논리적 인식 능력이 발달해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 결과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더욱 정밀하고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수준 높은 어휘를 통해 포괄적이면서도 정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휘의 신장을 통해 국어교육의 목표인 국어사용능력의 신장, 다시 말해 고등정신기능의 신장을 도모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3) 및 (6)은 지식으로서의 어휘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국어교육에서 어휘교육의 독자적인 의의를 부여한다. 언어사용에서의 어휘의 역할을 알기 위해 다음의 예문을 보도록 하자.
존은 사장과의 중요한 만남 때문에 직장에 출근하기를 서둘렀다. 그가 집을 막 떠나려던 참에 아들의 롤러스케이트에 미끄러져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
생략된 부분이 어떤 내용일까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들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는 내용은 일반적으로 나타나기 어렵다고 판단이 되며, ‘다리를 접질려서 아픈 표정으로 출근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문장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된다. 이런 예측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에 대한 스키마(schema)를 지식의 틀로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글을 이해할 때에 스키마를 지니고 있다면 글의 독해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3) 및 (6)은 독해 과정에서 지식의 틀로서 어휘가 작용하여 독해를 자극하고, 활성화할 수 있음을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은 언어적 구조물의 구성 방식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다음의 주장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낱말의 의미를 그 언어의 다른 모든 낱말과의 친밀성(즉, 유사성(affinities)) 및 비친밀성(즉, 비유사성(isaffinities))의 패턴이라고 기술할 수 있는데, 그 유형을 가지고 그 낱말은 문법적 맥락들 속에서 의미 관계들을 대조시킬 수 있다. 친밀성들은 두 종류 - 통합적(syntagmatic) 친밀성과 계열적(paradigmatic) 친밀성이다. 통합적 친밀성은 발화 속의 정상적인 연합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개’와 ‘짖었다’ 사이에는 통합적 친밀성이 있는데, 그 이유는 ‘개가 짖었다.’가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 통합적 비친밀성은 ‘?사자가 짹짹 울고 있다.’에서처럼, 문법적 제약들을 위반하지 않는 통합시의 비정상에 의해 드러난다. 계열적으로는, 문법적으로 동일한 두 낱말들의 의미적 친밀성이 크면 클수록, 그 낱말들이 결합싱에 정상적으로 되는 유형들은 더욱더 합치하게 된다. 그래서, 예들 들어, ‘개’와 ‘고양이’가 ‘개’와 ‘가로등 기둥’보다 훨씬 더 많은 정상적인 맥락과 비정상적인 맥락을 공유한다.(Cruse 1986: 16)
즉, 단어를 알고 있는 것은 그 단어의 개념적 수준에서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서, 그 단어에 관련된 지식의 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식의 틀은 의미의 연상망으로 재구조화될 수 있는데, 이것은 언어 사용 과정에서 ‘연상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단어의 연결 방식에 대한 앎을 통해서 효율적인 텍스트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연어 효과’라 하자. 결국 단어를 가르침으로써, ‘연상 효과’와 ‘연어 효과’에 의한 이해 및 표현 능력의 신장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어휘의 이런 성격을 수용할 때에, 우리는 어휘 교육은 개별 어휘들의 누적적 지도를 넘어서서, 어휘들의 역동적인 사용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Baxter(1980, 329)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국어교육의 목표는 언어 사용 능력의 신장이며, 언어 사용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교육적 조처들이 국어교육의 내용이어야 한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등의 사용 과정으로서의 전략적 접근도 언어 사용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교육적 조처로 여겨지기 때문에 국어교육의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휘력이 언어 사용 능력의 신장에 기여할 수 있다면, 국어교육의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어휘 교육의 내용
어휘 교육은 그 대상이 무엇인가부터 분명하지 않다. 어휘 교육의 대상을 어휘로 보느냐 아니면 단어로 보느냐에 따라 어휘 교육의 내용 양상은 분명히 달라진다.
김광해(1993)가 지적한 바처럼, 어휘는 단어들의 집합으로서, 수를 따지는 양적인 개념이다. ‘어휘 교육’을 표면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분명 알고 있는 단어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 정의는 어휘 교육을 형식적으로 접근하게 할 위험성이 있으며, 언어 사용 과정에 작용하는 어휘 혹은 단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즉, 어휘에 대한 형식적은 접근은 언어 사용의 과정을 잡아내지 못하며, 궁극적인 능력의 향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의미의 기본 단위를 가르치는 교육은 언어 형식 중 단어를 기본 단위로서 설정해야 할 것이다.
교육의 기본 단위를 단어로 설정하고, 접근한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우선 단어에 대한 질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단어에는 형식과 의미가 결합되어 있으며, 다시 그 의미는 기본적 의미와 화용적 의미로 달리 실현된다. 이와 같은 관점을 지닌다면, 어휘교육에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즉, 단어의 형식 자체를 알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단어의 질적인 사용을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손영애(1992), 김광해(1993), 이영숙(1996)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으로 이영숙(1996)의 모델을 제시한다.
어휘력의 구조
a. 양적 어휘력 - 어휘의 양
b. 질적 어휘력
ⓐ 어휘의 형태 : 발음과 철자 / 단어의 구조
ⓑ 어휘의 의미 : 여러 가지 종류의 의미 / 다른 단어들과의 의미 관계
ⓒ 어휘의 화용 : 단어의 기능과 상황에 따른 사용의 제약
적절하고 효과적인 단어의 사용
상황에 적절한 단어의 의미 파악
빠르고 효과적인 단어 처리
둘째로 단어의 특성에 따른 접근이 가능하다. 단어의 존재 양상은 각 단어에 따라 각기 다르다. 유의어 군에서 기본적인 의미가 중시되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사용역(register)에 따른 제약이 중시되는 단어가 있다. 반의어 군도 마찬가지이다. 유의어나 반의어가 아니라 할지라도, 단어 자체가 특수한 제약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단어를 가르치는 행위가 단어의 이해와 표현의 차원에서 사용을 전제로 한다면, 사용상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서 단어의 특성이 교육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즉, 단어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정보들 중에서 사용상의 제약을 가하는 특성을 교육의 내용으로 선정하여야 한다. 다음은 국립국어연구원(1993)에서 밝힌 단어 정보의 유형이다.
가. 음운 / 음성 정보 - 소리의 특성에 대한 정보
나. 형태 정보 - 품사, 합성어, 파생어 및 굴절 등에 대한 정보
다. 통사 정보 - 구성의 원리, 호응, 의미역 및 문장의 종류에 대한 정보
라. 의미 정보 - 의미 범주, 同意 관계, 反意 관계, 包意 관계 등에 관한 정보
마. 출처 정보 - 고유어인가 한자어인가 외래어인가 등에 대한 정보
바. 영역 정보 - 전문어인가 아닌가 등에 대한 정보
사. 지역 정보 - 어느 지역의 단어인가 등에 대한 정보
아. 사회 정보 - 어떤 사회에서 쓰이는가 등에 대한 정보
자. 계층 정보 - 어느 계층에서 쓰이는가 등에 대한 정보
차. 인물 정보 - 성별, 연령별 또는 개인이나 개인간의 관계 등에 대한 정보
카. 매체 정보 - 전달 매체에 따른 차이 등에 대한 정보
카. 역사 정보 - 어떤 단어가 쓰인 역사 시대에 대한 정보
이런 기본적인 입장에서 가르쳐야 할 단어들에 대한 구체적인 선정은 이충우(1994)와 이영숙(1996), 송창선(1998)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이영숙(1996)은 읽기교육을 위한 어휘지도의 대상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일단 제외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충우(1994)와 송창선(1998)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이충우(1994)에 제시된 어휘 선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이충우, 1994; 38~46)
(1) 사용 빈도가 높아야 한다.
(2) 사용 범위가 넓은 어휘여야 한다.
(3) 교육에 기초적인 어휘여야 한다.
(4) 조어력이 높은 어휘여야 한다.
(5) 학습자의 발달 단계에 맞는 어휘여야 한다.
(6) 적용성이 큰 어휘여야 한다.
(7) 시대가 요구하는 어휘여야 한다.
(8) 고유 명사, 계급명, 의성어․의태어, 은어․비속어․유행어․방언, 고어 등은 한정된 범위에서 선정해야 한다.
송창선(1998)은 위 기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다음과 같은 세 기준을 제시했다.
(1) 평가 대상자의 발달 단계에 맞아야 한다.
(2) 사용 빈도가 높아야 한다.
(3) 사용 범위가 넓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기준들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에 우리는 약간의 혼란을 겪는다. '오솔길'이라는 낱말이 있다고 하자. 이충우(1994)에 따른다면, (1)이나 (2)의 기준에서 교육용 어휘로 선정되어야 하지만, (4)의 기준에서 교육용 어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반면, 송창선(1998)에 따른다면, ‘오솔길’은 교육용 어휘로서 선정될 만한다. 그런 점에서 송창선(1998)의 기준이 더 적절한 것 같지만, 교육적 차원에서의 배려가 부족하다. 교육은 효율성을 지향하는 행위로서, 다양한 현상들 속에 존재하는 원칙을 가르침으로써 현상들을 확장 적용해 나가는 과정이다. 송창선(1998)의 기준은 체계상 상당히 간결하지만, 실제로는 교육상에서의 효율성을 무시할 수 있다. 어휘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어휘들 간의 관계는 매우 실재적이다. ‘참새’, ‘참나무’, ‘참기름’, ‘참깨’, ‘참고래’, 등의 어휘에는 ‘참-’이라는 접두사가 붙어서 어휘가 파생되어 있는데, 이 접두사는 어기(語基)에 붙어서 그 대상이 ‘진짜이면서도 질이 썩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어휘 간의 관계성이 파악되지 않은 송창선(1998)의 기준을 따라 어휘를 선정하는 것은 어휘를 낱개로 가르쳐야 함을 전제하는데, 실제로는 어휘의 저변에 깔린 원리를 무시한, 비효율적인 교육이 될 위험성도 있다.
이런 논쟁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어휘교육에서 목표로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휘 교육의 목표는 언어 사용 능력의 신장을 목적으로 한 어휘 사용 능력의 신장이다. 달리 말해, 어휘 교육은 의미 전달 행위의 기본적 요소를 가르치는 행위이다. 따라서 어휘 교육의 중심은 언어 사용에서 단위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하며, 의미 정보에 초점을 맞춘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단위는 “어휘소(lexeme)”이다.
어휘소는 일반적으로 어휘 항목을 가리킨다. ‘정인이가 아주 예쁘게 웃는다.’라는 문장을 단어라는 입장에서 접근할 때에, 이 문장에는 ‘정인, -이가, 아주, 예쁘게, 웃는다’의 5개의 단어가 있다. 이 중 ‘예쁘게’와 ‘웃는다’는 ‘예쁘다’와 ‘웃다’의 활용형으로서, 단어적 성격을 지닌다. 만약 어휘 교육에서 단어를 그 대상으로 한다면, ‘예쁘게’와 ‘웃는다’를 ‘예쁘다’와 ‘웃다’와 함께 모두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으로서, 어휘 교육의 대상이 아닌 문법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어휘소를 어휘 교육의 기본대상으로 설정할 때에, 우리는 이와 같은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울러, 의미 단위의 관습적 인식을 무시한 형태소 중심의 어휘 교육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즉, 단일한 낱말을 구성하고 있는 어휘 형성 과정이 현재의 언어 체계 내에서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아서, 언중들에게 하나의 언어 단위로 인식됨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나 언어교육자들이 인위적으로 언어 단위를 나누는 것을 막아 준다. 또한 어휘소를 교육의 기본 단위로 설정할 때에 단어 중심의 접근에서 ‘속담, 숙어, 관용어구’ 등의 확장적인 접근도 할 수 있어서, 언어 사용의 재료를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Ⅴ. 어휘교육의 방법론
어휘 교육의 방법은 어휘 자체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쉽게 그 방향을 결정하기 어렵다. 또 어휘의 존재 양식도 다양할 뿐더러, 개개인이 이를 획득하는 방식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휘 지도의 일원화된 방법을 구상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다.
박붕배(1990; 356~7)는 1) 경험법, 2) 문장법, 3) 단어법의 세 유형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면서 세부 방법으로 총 13가지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으며, 김광해(1993; 319)는 다음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 어휘 교육의 방법
그러나 실제 이러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어휘를 가르치는 일이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은 국어교육 내에서 어휘를 가르치는 것이 실천적으로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교사가 직접적으로 어휘를 가르치는 양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실제 수업 시간에 가르쳐야 할 어휘를 선정하는 것 자체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또한 단어의 의미를 안다고 해서 바로 어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어 사용 능력을 염두에 둔 어휘 지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실제적인 방법은 개발되어 있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휘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아래에서, 기초 어휘가 조사되고, 어휘들이 평정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교과 과정이 개발되고, 어휘 교육용 교재가 개발되어야 한다.(김광해, 1993; 319~324) 이와 같은 과정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뒤에 비로소 적절한 어휘 지도의 방법이 구안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위와 같은 연구 성과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어휘 지도의 교육적 함의도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어휘 지도법은 원론적인 논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당위적인 차원에서 합리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재적인 차원에서 최선의 상태를 지향하는 행위이어야 한다. 어휘 지도의 대상이 불분명하다는 점이 어휘 지도법 논의를 뒤로 미루어야 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어휘 지도법을 논하는 과정에서 어휘 지도의 대상이 분명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휘 지도법 논의를 위해서는 어휘에 대한 양적인 접근과 질적인 접근을 검토함으로써 어휘 지도의 접근 방향을 설정하여야 한다. 보통 어휘 지도는 학습자의 어휘 보유량을 늘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학습자들의 어휘 발달은 대부분 정규 수업 시간의 학습 이외의 상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규 수업 시간으로는 학습자들의 어휘 발달량을 쫓아갈 수 없다. 따라서 어휘 지도에 대한 양적인 접근 자체는 질적인 접근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개별 단어들의 개념적인 의미에서 화용적인 의미까지 가르치는 차원의 질적인 행위는 양적인 접근보다도 훨씬 심각한 양적 빈곤을 안겨준다. 한편, 어휘에 관련된 지식을 가르치는 질적인 접근은 어휘 자체가 특정의 지식과 개념에 대한 언어적 표지라는 점에서 국어교육의 독자성 및 고유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즉, 어휘에 관련된 배경 지식은 ‘사회, 역사, 철학, 지리, 물리, 화학’ 등의 지식 교과의 문제이므로, 국어교육에서 가르칠 고유영역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국어교육에서 담당해야 할 어휘를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 관련된 어휘로 한정짓지는 못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성영(1995; 20~21)은 어휘교육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어휘 사용 능력을 제안했다. 이성영(1995)은 어휘 사용 능력은 담화 상황에서 어휘를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이를 이해 과정 및 표현 과정의 두 부분으로 세분하여, 어휘 사용 능력을 구체화하고, 그에 따른 지도 방안을 탐색한다.
이해 과정에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은 사전적 정보를 이용하는 능력, 형태적 정보를 이용하는 능력, 문맥적 정보를 이용하는 능력으로 나뉜다. 한편, 표현 과정에서 단어를 선택하는 능력은 관습적 용법을 구사하는 능력 및 개성적 용법을 구사하는 능력으로 나뉜다.
이를 도식화한다면 다음과 같다.
어휘 사용 능력
┌ 의미 파악 능력
│ - 사전적 정보의 활용 능력
│ - 형태적 정보의 활용 능력
│ - 문맥적 정보의 활용 능력
└ 어휘 구사 능력
- 관습적 용법의 구사 능력
- 개성적 용법의 구사 능력
사전적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은 단어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인 사전적 의미를 이용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인 지도 방법은 어휘의 개념을 설명하거나, 사전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어휘의 화용적 특성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어휘 사용의 양상을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사전적 정보는 어휘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언어 이해 과정에서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추론하는 단서로서 작용하지 않는다.
한편, 형태적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은 접두사나 접미사 등의 형태적 자질들을 이용하여 단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확장적으로 적용한다면, 국어 어휘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복합어나 파생어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되나, 구성 요소들의 단순 합이 단어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휘 의미를 잘못 유추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다음으로 문맥적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은 단어 의미를 획득하는 일반적인 방법과 연관되어 있다. 문맥 내의 풍부한 정보들은 단어 의미의 원활한 추론을 가능하게 할 것이나, 문맥적 정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을 갖추지 못하거나, 문맥이 구체화되지 않은 문장의 경우 어휘 의미 파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난점이 있다. 우선적으로 문맥적 정보의 활용 전략을 구안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서 제기된다.
어휘 구사 능력 중 관습적 용법을 구사하는 능력은 언어 사회의 일상적인 언어 용법(usage)을 활용하는 것이다. Cruse(1986)가 지적한 것처럼, 낱말은 다른 낱말과 친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친밀성은 통합적 친밀성과 계열적 친밀성으로 나뉘는데, 관습적 용법을 구사하는 것은 통합적으로 친밀성이 높은 어휘들을 연합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밥’이라는 단어는 ‘먹다, 하다, 짓다, 맛있다’ 등의 단어들과 통합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 이러한 면에 초점을 맞추어 어휘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어휘 용법의 조사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며, 어휘들간의 친밀성의 정도를 매기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며, 어휘들의 연어 사전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개성적 용법을 구사하는 능력은 친밀성이 낮은 두 어휘들을 연합시켜,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언어 표현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울음’, ‘타다’, ‘가을’, ‘강’이라는 어휘들은 통합적인 친밀성이 낮지만, 작가는 이들 어휘들을 이용하여,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라는 개성적인 표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적인 언어 사용들이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언어 사용의 전범으로 여겨지지만, 일상적인 언어에도 이와 같은 측면은 충분히 담겨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성적인 표현들을 산출하게 하는 기제는 표현자의 의도, 표현 대상의 속성, 어휘의 통사 방식 등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어휘 교육은 표현력 신장을 전적으로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력 신장에 부분적으로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어휘 교육을 통한 표현 능력의 신장을 위해서는 어휘의 의미 자질 확인 및, 자유 연상 과정을 통한 어휘 의미 자질의 활성화 그리고, 어휘간의 의미 자질의 공통점을 추출할 수 있는 전략이 동원되어야 한다.
Ⅵ. 결론 및 제언
국어교육에서 어휘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교육과정 및 교육 현장에서는 그 위상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본고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휘를 가르치는 의의 및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 속에서 어휘 지도의 방법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언어 사용 능력을 신장하고자 하는 국어교육 내에서 어휘 교육은 독자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육 대상을 어휘소로 설정하고, 지도 내용을 어휘 사용 능력의 입장에서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지도 내용에 따른 어휘 지도 방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실천적인 연구를 통하여 현실화되어 그 가능성을 검증하고, 그것은 다시 교육과정 개발 및 교과서의 개발, 그리고 교사 교육 등의 제도화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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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대비한 국어교육의 현황과 대책*
박 갑 수**
1. 서론
한반도가 분단된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이로 말미암아 남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우리는 같은 민족이면서도 남북의 동질성을 상실해 이민족 국가로 오인되지나 않을는지 염려스럽다.
우리 겨레는 남북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분단의 아픔을 같이 하던 독일이 통일된 뒤 이 소망은 좀더 현실적인 문제로 부상되었다. 그리하여 각계에서는 통일의 가능성을 점치며,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의 통일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통일 이후의 교육에 대한 논의도 자못 활발히 꾀해지고 있고, 언어 문제도 많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 이후의 국어 교육의 문제는 별반 논의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있다면 장막에 가려졌던 북한의 국어교육에 대한 연구와, 남북의 교육의 차이가 다소 논급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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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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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통일원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여기서는 통일을 대비한 국어교육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국어교육의 대상으로서의 언어 규범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고, 나아가 남북의 국어교육의 현황이 살펴져야 하겠다. 그리고 나아가 통일을 대비한 국어교육에 대한 대책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국어 교육의 대상으로서의 언어 규범
2.1 국어교육은 우리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대상인 우리말의 남북의 실상이 어떠한가 우선 살펴보아야 한다.
교육의 대상이 되는 언어는 공용어이다. 이는 남한의 경우 네 개의 규범으로 규정되고 있는데, 「한글 맞춤법(1988)」, 「표준어 규정(1988)」, 「외래어 표기법(1986)」,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1984)」이 그것이다. 북한의 경우는 「조선말 규범집(1987)」에 수록된 「맞춤법」, 「띄여쓰기」, 「문장부호법」, 「문화어 발음법」과 「조선어 외래어 표기법(1956)」에 수록된 「조선어 외래어 표기법」, 「외국자모에 의한 조선어 표기법」, 「조선어의 어음 전사법」이 이러한 규범이다. 다만 「조선어 외래어 표기법」은 1984년 「고친 외래어표기」로 수정이 가해졌고, 이와는 달리 외래어와 외국어를 구분 표기하기 위해 1969년 「외국말 적기법」이 별도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1985년 「외국말 적기법」으로 수정되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규범 가운데 대표적 규범인 맞춤법과 발음법을 중심으로 남북의 공용어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2.2 남북의 맞춤법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이들의 異同은 어떠한가? 두 규범은 통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심각하지는 않다. 그것은 양쪽이 다 종래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형태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칙은 같고 세부적 사항이 차이를 보인다고 하겠다. 이러한 맞춤법의 대표적인 차이점을 북한의 「맞춤법」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의문형 어미를 「-ㄹ가」로 적는 것.(제6항)
② 말줄기의 모음이 「ㅣ,ㅐ,ㅔ,ㅚ,ㅟ,ㅢ」인 경우 줄기 「하」와 마찬가지로 어미를 「-여/-였」으로 적는 것.(제11항)
③ 본딴말에 뒤붙이 「이」가 붙어서 명사를 이루는 것의 어원을 밝히지 않는 것.(제23항)
④ 한자말은 소리마디마다 해당 한자음대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 것.(제25항)
⑤ 한자말에서 모음 「ㅖ」가 들어 있는 소리마디로 「계,례,혜,예」만을 인정한 것.(제26항)
①은 남한에서 의문형 어미를 「-ㄹ까, -ㄹ꼬, -ㄹ쏘냐」와 같이 된소리로 적기로 되어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이고, ②는 북한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형태주의적 원칙을 깨고 표음주의적 표기를 해 달라진 것이다. 「구태여, 도리여, 드디여」도 같은 예이다. ③은 종래의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같은 것으로, 남한에서 1988년 맞춤법을 개정하며 달라진 것이다. 「한글 맞춤법」에서는 「-하다」나, 「-거리다」가 붙는 어근에 「-이」가 붙어서 명사가 된 것은 그 원형을 밝히기로 하여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④는 두음법칙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남북의 표기에 대표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ㄹ」 두음과 구개음화된 「ㄴ」두음의 문제로, 종래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에서는 두음법칙을 인정하던 것인데 북한에서 표기법을 개정하여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⑤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서 「계,례,몌,폐,혜,예」를 인정하던 것인데 북한의 「맞춤법」에서 「몌,폐」를 인정하지 않으며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이 밖에 남쪽의 「한글맞춤법」에 의해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있다.
① 모음이나 「ㄴ」 받침 뒤에 이어지는 「렬,률」을 「열,율」로 적는것.(제11항)
② 부사에 「-이」가 붙어서 같은 부사가 되는 경우 원형을 밝혀 적는 것.(제25항)
③ 「이(齒,蝨)」가 합성어나 이에 준하는 말에서 「니」, 또는 「리」로 소리 날 때에 「니」로 적는 것.(제27항)
④ 합성어에서 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는 것.(제30항)
⑤ 접미사 「꾼」을 된소리로 적는 것.(제54항)
①은 음운론적 조건이 다를 때 변이음을 인정한 것이나, 북한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②는 원어를 달리 사정해 1988년의 개정에서 차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③도 음운론적 조건을 인정하여 그 형태를 달리 사정한 것이다. ④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에서부터 음운론적 조건을 고려하여 합성어에 사이시옷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를 북한에서는 사이표를 치는 단계를 거쳐 오늘날은 원칙적으로 표기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⑤의 접미사 「꾼」은 「한글맞춤법 통일안」에서 「군」이던 것이 국정 교과서의 「꾼」을 거쳐, 1988년의 개정에서 된소리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①③④는 음운론적 조건에 따른 변이형태를 인정해 표기가 달라진 것이다.
「한글 맞춤법」에 포함된 띄어쓰기는 북한에서는 따로 「띄여쓰기」라는 규범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남북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단어를 단위로 띄어쓴다는 원칙은 같으나, 세부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의 큰 차이는 남한에 비해 북한이 많이 붙여 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지면 관계로 「남북 맞춤법의 차이와 그 통일 문제」(박갑수, 1995)로 미룬다.
2.3 맞춤법을 살펴보았으니 다음에는 마땅히 표준어 규정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이 규정이 북한에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북한에는 「표준발음법」만이 제정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표발음법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남북의 발음법도 맞춤법과 마찬가지로 통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심각한 것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표준어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고, 가장 큰 차이는 두음법칙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과 음운 동화의 인정 여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밖의 발음은 대체로 원칙은 같으나 지엽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특히 원칙과 허용의 넘나듦이 심하다. 이는 양쪽의 언어를 차이 나게 할 수도 있고, 통일의 거멀못이 되게도 할 것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차이점을 이번에는 남쪽의 「표준발음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표준발음을 남한에서는 표준어의 실제 발음을, 북한은 문화어의 발음법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제1항)
② 용언의 활용형으로 나타나는 「져,쪄,쳐」는 [저,쩌,처]로 발음하고, 자음을 첫소리로 가지고 있는 「ㅢ」는 [ㅣ]로 발음한다는 것.(제5항)
③ 겹받침 「ㄼ」은 어말 또는 자음 앞에서 [ㄹ]로 발음한다는 것.(제10항)
④ 한글 자모의 이름은 그 받침소리를 연음하되, 「ㄷ,ㅈ,ㅊ,ㅋ,ㅌ,ㅍ,ㅎ」의 경우에는 특별히 [디그시, 지으시, 치으시, 키으기, 티으시, 피으비, 히으시]로 발음한다는 것.(제16항)
⑤ 받침 「ㅁ,ㅇ」 뒤에 연결되는 「ㄹ」은 [ㄴ]으로 발음하는 것.(제19항)
⑥ 「의견란, 결단력」 등의 단어들은 「ㄹ」을 [ㄴ]으로 발음한다는 것.(제20항)
⑦ 용언 「되어」[되여], 「피어」[피여]와 「이오」[이요], 「아니오」[아니요]의 발음을 허용한 것.(제22항)
⑧ 표기상 사이시옷이 없더라도, 관형격 기능을 지니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 합성어의 경우에는, 뒤 단어의 첫소리 「ㄱ,ㄷ,ㅂ,ㅅ,ㅈ」을 된소리로 발음한다는 것.(제28항)
⑨ 합성어 및 파생어에서, 앞 단어나 접두사의 끝이 자음이고 뒤 단어나 접미사의 첫음절이 「이,야,여,요,유」인 경우에는 「ㄴ」소리를 첨가하여 [니,냐,녀,뇨,뉴]로 발음한다는 것. 그리고 「붙임」의 「ㄹ」 받침 뒤에 첨가되는 「ㄴ」소리를 [ㄹ]로 발음하고, 두 단어를 이어서 한 마디로 발음하는 경우에도 이에 준한다는 것.(제29항)
⑩ 「ㄱ,ㄷ,ㅂ,ㅅ,ㅈ」으로 시작되는 단어 앞에 사이시옷이 올 때는 이들 자음만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이시옷을 [ㄷ]으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한다는 것. 그리고 사이시옷 뒤에 「ㄴ,ㅁ」이 결합되는 경우에 사이시옷은 [ㄴ]으로, 사이시옷 뒤에 「이」 소리가 결합되는 경우에는 [ㄴㄴ]으로 발음한다는 것.(제30항)
①은 각각 서울말과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②의 「져,쪄,쳐」는 단모음화 여부가 문제되는 것이고, 자음을 첫소리로 한 「ㅢ」를 「ㅣ」로 발음하는 것은 북한에서는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된소리 자음과 결합될 때는 북한에서도 허용한다. ③은 북한에서는 [ㅂ]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이는 남한의 제10항 「밟-」을 「밥」으로 발음한다고 한 예외 규정과 같다. ④에 대한 북한의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문화어 발음법」의 정신으로 보아 원음을 연음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⑤는 북한에 따로 규정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다음에 제시하는 제5항과 같이 모든 모음 앞에서 [ㄹ]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⑥은 「ㄴ」이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바뀌는 설측음화란 원칙은 남북이 같으나, 예외적인 것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북한의 예외는 다음에 보이는 제23항에 제시되어 있다. ⑦은 북한에서는 발음에 앞서 표기를 바꾼 것이다. 따라서 남쪽에서 허용 아닌 원칙적인 발음을 하게 되면 북한과 발음의 차이가 나게 된다. ⑧은 사이시옷의 규정과 관계되는 것으로 북한의 제28항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들의 발음은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 합성어의 경우에는 된소리를 내게 되어 있는데, 북한에서는 적은 대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일부 어휘에 한해 [ㄷ]소리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바닥, 노래소리, 사령부자리」가 남한에서와는 달리 [개바닥, 노래소리, 사령부자리]와 같이 된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이러한 예이다. ⑨는 음운 첨가 현상을 규정한 것으로 북한의 제26항에 해당한 것이다. 이들은 남한이 원칙으로 하는 규정인데 대해, 북쪽은 허용 기준이라는 차이를 보인다. 「붙임」의 규정은 북한에는 규정이 없는 것으로, 북한에서는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⑩은 북한의 제28항 및 제27항과 관련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사이시옷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이의 발음도 적은 대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일부의 경우 [ㄷ]을, 그리고 [ㄴㄴ]을 발음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 밖에 북한의 「문화어 발음법」에 의해 차이가 드러나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ㄹ」 뒤에 있는 「ㅖ」는 [ㅔ]로 발음한다는 것.(제4항)
② 「ㄹ」은 모든 모음 앞에서 「ㄹ」로, 「ㄴ」은 모든 모음 앞에서 [ㄴ]으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제5항, 제6항)
③ 「선렬, 순렬, 순리익」 등 일부 굳어진 단어의 경우 적은 대로 발음함으로써 닮기 현상을 인정하지 않는 것.(제23항)
①은 남한에서 「예,례」 이외의 「ㅖ」는 [ㅔ]로 발음한다고 「례」의 이중모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인데, 북한에서는 이것을 단모음화한 것으로 본 것이다. ②는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ㄹ」의 경우는 비음화 현상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③은 설측음화가 되지 않음을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한의 경우 발음 이전에 이미 표기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곧 남한에서는 이들은 「선열, 순열, 순이익」이라 표기되는 것이다.
이 밖에 「표준발음법」 제23항 「받침 ㄱ(ㄲ,ㅋ,ㄱㅅ,ㄹㄱ), ㄷ(ㅅ,ㅆ,ㅈ,ㅊ,ㅌ), ㅂ(ㅍ,ㄹㅂ,ㄹㅍ,ㅂㅅ) 뒤에 연결되는 「ㄱ,ㄷ,ㅂ,ㅅ,ㅈ」은 된소리로 발음한다」고 한 규정은 북한 규범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러한 발음을 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기본적인 음운현상이기에 북한에서는 규범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3. 남북한 국어 교육의 현황
3.1 남북한 국어교육의 실상은 어떠한가? 이것은 남북의 교육과정과 교재를 분석 검토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어교육의 목표와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면 국어교육의 목표를 살피되, 초등학교의 목표부터 보기로 한다.
북한의 국어 교육의 목표는 김형직 사범대학에서 1987년 펴낸 「인민학교 교수방법」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인민학교 국어교육의 목적은 우리말과 글을 통하여 학생들을 경애하는 수령님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고 그들에게 혁명적 정서와 사고력을 키워주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기능을 갖추어 줌으로써 그들을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공산주의 혁명 인재로 키우는데 있다.
이렇게 북한의 국어교육의 목표는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공산주의 혁명 인재를 키우는 데」 두고 있다. 이를 위해 김일성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무장 시키고, 혁명적 정서와 사고력을 키워 주고, 우리말에 대한 기초지식과 기능을 갖추어 주는 것을 교육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언어를 혁명적 세계관 형성의 무기로 보는 북한의 언어관을 반영한 것이다. 북한의 고등 중학교 「국어 문학」의 교육 목적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1983년 개정한 과정안을 바탕으로 마련된 고등 중학교 4-6학년용 교수요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등중학교 「국어 문학」 과목 교육의 목적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 주체사상과 주체적 언어문예사상,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의 언어문예방침으로 학생들을 무장시키며 그들에게 언어와 문학에 대한 일반기초지식과 실천기능을 키워주고 혁명적 정서와 사고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께 끊임없이 충직한 혁명전사로 키우는데 있다.
남한의 국어 교육의 목표는 이와 사뭇 다른 것이다. 제7차 국어과 교육과정에는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언어활동과 언어와 문학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언어활동의 맥락과 목적과 대상과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국어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국어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국어의 발전과 민족의 언어 문화 창달에 이바지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기른다.
가. 언어활동과 언어와 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익혀, 이를 다양한 국어 사
용 상황에서 활용하는 능력을 기른다.
나. 정확하고 효과적인 국어사용의 원리와 작용 양상을 익혀, 다양한 유형의 국
어 자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사상과 정서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기른다.
다. 국어 세계에 흥미를 가지고 언어 현상을 계속적으로 탐구하여, 국어의 발전
과 국어 문화 창조에 이바지하려는 태도를 기른다.
이는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인 10학년까지의 「국어」 교육의 「목표」이다. 이렇게 남한에서는 국어과를 「한국인의 삶이 배어 있는 국어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태도를 길러, 정보화 사회에서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국어생활을 영위하고, 미래 지향적인 민족의식과 건전한 국민정서를 함양하며, 국어 발전과 국어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려는 뜻을 세우게 하기 위한 교과」(교육부, 1997)로 보았다. 따라서 북한의 국어교육이 정치 사상 교육에 중점이 놓이는 데 대해, 남한의 국어교육은 언어의 기능 교육에 중점이 놓인다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이라 하겠다.
3.2 국어과 교육의 내용은 교육과정 또는 교재를 분석함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북한의 교육과정은 입수가 불가능한 형편이므로 불가불 교재를 분석함으로 그 내용을 추정하게 된다. 먼저 초등학교의 경우를 보기로 한다.
인민학교의 국어 교과서를 보면 우선 그 교육 내용은 제재면에서 볼 때 문종 및 주제에서 남한과 차이를 보인다. 문종에 대한 조사로는 한국교육개발원 국어 연구실의 분석표가 있다(최현섭 외,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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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게재문종 남한(제재수) 북한
4학년까지 6학년까지 제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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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 149 196 19 11
2 동화 전래 75 110 8 5
창작 69 108
3 시 106 179 40 23
4 쓰기제재 92 139 0
5 설명 81 129 51 29
6 논설 (토론) 30 60 2 2
7 전기 27 46 25 14
8 편지 24 35 3 1.8
9 일기 17 21 3 1.8
10 속담 16 87 0
11 수수께끼 13 14 0
12 희곡 12 26 2
13 기행 11 17 3 1.8
14 말놀이 10 0 0
15 회의록 8 19 0
16 소설 7 15 1 0.6
16 독후감 7 12 1 0.6
18 방송자료 5 0 0
19 기사문 1 0 0
20 이야기 0 0 17 10
21 대화 0 0 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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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 1213 176
이 도표를 통해 남북의 제재는 엄청난 격차를 보이며, 문장의 종류와 빈도에도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빈도의 면에서 북한의 경우는 설명, 시, 전기, 생활, 이야기, 동화의 순으로 빈도가 낮아진다. 그래서 남한과 비교할 때 설명, 이야기, 전기가 높은 빈도를 보이고, 동화, 논설, 생활이 상대적으로 낮은 빈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제의 면에서 보면 북한의 교과서는 언어와 언어 기능에 대한 지식과 문학에 대한 지식 외에 혁명과 건설에 대한 지식과 관련되는 제재가 많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제재는 인민학교 국어 교과서의 경우 100여개가 보인다(이인제, 1996). 북한에서는 글의 갈래를 크게 생활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 논리적인 글의 세 가지로 나누는데, 이 가운데 문학적인 글과 생활적인 글에 이러한 주제의 제재가 많다. 이러한 주제의 제재는 김일성과 김정일 및 그 일가의 업적 찬양과 충성심 고취와 관련된 것이 가장 많아 59.1%를 차지한다. 그리고 혁명의식 고취와 공산주의 사상 교양에 관한 것이 19.1%, 반일·반미의 적개심 고취 및 대남 비방과 왜곡 선전을 주제로 한 것이 11.8%로 나타난다.(이인제, 1996) 이러한 제재의 선정은 사회주의 교육학에서 제시한 원리인 혁명전통 교양의 원리, 증오심 고취의 원리, 김일성 가계의 우상화 원리 등을 중시한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제재 외에도 인민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도처에 김일성 교시와 김정일의 말씀이 담겨 있다.
다음에는 영역별 교육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의 경우는 설명적 교재에 제시된 학습 요소를 보면 말하기 15.2%, 읽기 16.9%, 쓰기 44.1%, 문화어 지식 23.8%로 나타나며, 「련습」 활동에 반영된 학습 요소는 말하기 19.4%, 읽기 37.8%, 쓰기 5.8%, 문화어 지식 37.0%(최현섭 외, 1996)로 나타난다. 따라서 문화어 지식이 가장 빈도가 높고 그 다음이 읽기, 쓰기, 말하기의 순이 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언어 생활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듣기 영역의 내용이 빠져 있다. 말하기는 여러 가지 지식 가운데 발음이 강조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도 연접이 강조되고 있다. 「련습」에서는 「이야기하기」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도 「자기말로 이야기 하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말하기」는 미미한 빈도를 보인다. 남한은 발음보다 화법에 중점이 놓이고, 억양 등 광의의 연접이 강조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박갑수, 1995). 읽기도 북한은 읽는 방법에 관한 것이 주종을 이루고, 글의 이해, 분석, 평가와 같은 고등 수준의 독해는 배제되어 있다. 이는 북한이 원문 통달방식의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북한의 쓰기는 글쓰기, 글씨쓰기, 띄여쓰기로 나누어지는데, 위의 통계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지식 교육을 위주로 하고, 작문 교육은 소홀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쓰기는 텍스트 수준보다는 문장 수준의 지도를, 그리고 짧은 글짓기의 지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남한에서는 쓰기와 관련된 지식으로 쓰기의 과정별 주요 개념, 쓰기의 방법 및 절차에 관한 것은 물론 글의 내용 구조, 표현 방법, 고쳐 쓰기와 관련된 것 등을 교육의 내용으로 한다. 언어 지식에 관한 교육 내용의 선정 기준은 기본적으로 남북한이 같아 큰 차이가 없다. 북한의 언어지식 교육 내용은 새 단어 만들기와 어의 파악 및 문화어와 관련된 지식이 강조된다. 문화어와 관련된 지식은 문화어의 용법과 김일성 부자에 대한 표현이 주종을 이룬다.
3.3 다음에는 중·고등학교의 국어 교육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남한에서는 7차 교육과정에서 일반계 고등학교는 10학년까지 국민공통 기본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교과를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국어」 교육과정은 제10학년까지 적용되고, 그 이후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 연계되는 선택과목은 국어생활, 화법, 독서, 작문, 문법, 문학의 여섯 과목이다.이러한 편제는 북한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북한에서는 고등 중학교 1-3학년에서는 국어를 4-6학년은 국어문학을 학습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어 문학」은 어문학, 특히 문학에 관한 지식 학습과 작품 감상 활동을 강조한다.
국어과 교육의 목표에 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민학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어 교과서의 내용을 제재의 문종과 주제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북한의 고등 중학교 국어 및 국어 문학 교재의 문종을 보면 다음과 같다.(제4학년 교재 제외)
순위 문종 제재수 구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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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50 35.7
2 소설 35 25.0
3 시 24 17.1
4 전기 12 8.6
5 희곡 6 4.3
6 생활 4 2.9
7 기행 3 2.1
8 구연 2 1.4
9 편지 1 0.7
10 기타 3 2.1
북한의 고등 중학교 교과서의 제재는 첫째 설명적인 글의 비중이 높다. 이는 인민학교와 같은 경향으로, 국어과 교재를 통해 학생들이 학습해야 할 개념, 원리, 방법 및 절차에 대해 해설하거나 설명한 것이다. 둘째, 문학적인 작품에는 소설과 시가 많고, 실기, 회상 실기, 덕성 실기, 혁명 가요 같은 생소한 갈래의 글이 들어 있고, 셋째, 생활적인 글 가운데는 선전글, 서정글과 같은 특수한 글의 갈래가 들어 있다.
다음에는 주제면에서 교재의 내용을 살펴보면 국어 교육의 목표인 「충직한 혁명전사로 키우기」 위해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고 혁명사상을 고취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제재가 무려 78.4%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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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소설 동화 이야기 시 희곡 전기 기행 일기 생활문 계
시나리오 편지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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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일가의 업적 찬양과 7 12 4 8 3 4 38
충성심 고취
혁명의식 고취와 10 1 1 7 1 1 21
공산주의 사상 고취
반일 반미의 적개심 고취, 4 2 1 1 1 1 10
대남 비방과 왜곡 선전
기타 6 4 4 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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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5 3 24 6 12 3 2 6 88
이러한 제재는 바로 북한의 고등 중학교에서 「과목 교수에서 해결할 과업」(교육위원회, 1984)으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성취하고자 함이라 하겠다.
첫째로, 모든 학생들을 주체의 혁명적 세계관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 풍부한 정서를 가진 공산주의 혁명적 인재로 키워야 한다.
따라서 이는 「국어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길러 성숙한 문화시민으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하려는 남한의 국어 교육의 제재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 하겠다.
북한의 고등 중학교 4-6학년의 「과목교수에서 해결할 과업」으로는 위에 제시한 것 외에 다음과 같은 것이 더 들려진다.
둘째로, 학생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인 문예사상과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의 독창적인 문예 리론을 깊이 체득하도록 하여야 한다.
셋째로, 우리 문화어의 기초 리론과 문학의 일반적 개념과 본질을 똑똑히 인식하고 문학작품을 자립으로 분석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한다.
또한 우리나라 문학의 력사적 발전과정과 매 시기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서와 세계문학의 기초지식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넷째로, 말과 글을 다루는 창조적 능력을 완성하여야 한다. 살려 읽기와 속 읽기 기능을 완성하여 글을 유창하게 빨리 읽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원고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말하기 기능을 완성하여 당 정책 해설, 토론, 웅변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사회정치 활동에 적극 참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수기, 감상문, 기행문, 벽소설 등을 쓸 수 있는 글짓기 기초 기능을 완성하도록 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영역별 교육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날 입수할 수 있는 북한의 「교수 요강」은 고등 중학교 4-6년용 「국어 문학 교수 요강」 뿐이다. 따라서 고등 중학교 1-3학년의 내용은 해당 학년의 교과서에 제시된 「련습」 활동을 분석하여 내용 체계를 추출하게 된다.
고등 중학교의 말하기는 인민학교와 비교할 때 형식상 말하기 활동이 이야기 활동보다 많아졌으며, 말하기 교육의 내용이 다양해지고 체계화하였다. 북한은 말하기의 기능으로 자세히 말하기, 말할 내용의 조직하기가 강조되고 있는데, 남한은 말하기의 형식이 좀더 다양하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읽기는 북한의 경우 읽기의 원리, 방법 및 절차와 책략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인민학교에서보다 강화된 것이다. 낭독 중심의 내용 선정은 인민학교와 마찬가지다. 읽기와 관련된 지식으로 북한에서 읽기의 방법, 글의 갈래, 글의 종류별 특성, 짜임 등에 관한 것을 교육 내용으로 선정한 것은 남한과는 다른 점이다. 남한에서는 보다 글의 내용을 파악하는 쪽에 중점을 두고 있다. 쓰기는 남한의 경우 쓰기에 관련된 지식, 기능 및 활동, 태도 및 가치의 세 가지 범주를 선택하고 있는데, 북한은 이 가운데 태도 및 가치와 관련된 내용을 결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여전히 텍스트 구성에 필요한 글쓰기를 지도 내용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조건에 맞는 바꾸어 쓰기를 주요 학습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글씨 쓰기를 고등 중학교 1학년에서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좀 특이하다. 언어 지식 교육의 내용은 북한의 경우 학년별로 안배되어 있다. 어휘, 맞춤법은 1학년에, 음운, 문장, 문자는 2학년에, 띄여쓰기는 3학년에 배치한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음운 어휘 문자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제공한 것이다. 남한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학습하게 되어 있는 한글 자모에 관한 내용이 고등 중학교 2학년의 교육 내용으로 선정되어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다. 맞춤법 띄여쓰기가 남한과는 달리 고등 중학교의 내용으로 많이 선정되어 있는데 이는 실용적인 것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에는 남한의 고등학교 과정, 북한의 4-6학년의 국어 문학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북한의 말하기 교육의 내용은 줄거리 말하기와 웅변하기의 두 가지로 남한에 비해 단순하다. 읽기 교육의 내용은 북한의 경우 살려 읽기와 살려 읊기를 그 대상으로 선정하고, 독해 관련 내용을 여전히 선정하고 있지 아니하다. 쓰기 교육의 내용은 북한의 경우 과제 형식으로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정치적 이유에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가사, 벽소설, 영화 문학 등에 대한 쓰기와 관련된 내용이 강조되고 있다. 남한의 경우는 쓰기에 관한 일반지식 외에 글쓰기의 여러 가지 원리 및 실제를 주요 교육 내용으로 하고 있다. 언어 지식은 북한의 경우 학년별로 안배하고 있다. 4학년에 품사와 토, 5학년에 문장의 종류 및 문장 성분, 6학년에 단일문과 복합문을 배치한 것이 그것이다. 북한에서는 또 북한의 언어 정책 및 김일성 부자의 주체의 언어 이론에 따라 교육 내용을 선정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남한에서 언어 자체에 대한 이해는 물론 국어사에 대한 교육을 의도하여 선정한 것과 차이를 보인다. 문학 교육의 내용은 문학에 관한 지식과 작품의 이해 및 감상에 관한 것의 두 가지이다. 북한의 경우 문학에 대한 지식으로는 ①북한문학 일반에 관한 지식 ②당의 문예정책에 관한 지식 ③문학일반에 관한 지식 ④문예작품 갈래에 관한 지식 ⑤창작과 문예사조에 관한 지식 ⑥조선문학사의 전개와 관련된 지식 등이 들려진다. 문학 작품의 이해와 감상의 교육 내용은 주체의 문예이론과, 북한 나름의 논리에 따라 형성된 이론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서 선정되고 있다. 이는 남북한의 문학 교육에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남한에서는 문학교육을 위한 내용으로 문학의 이해와 한국문학사 이해를 위한 내용과 문학 작품 감상을 위한 것이 선정된다. 이뿐 아니라 문학의 이해와 작품의 감상이 교육적 상황에서 유기적으로 관련지어지도록 하기도 한다.
3.4 이 밖에 교육 내용으로 논의 되어야 할 것에 언어가 있다. 이는 2장에서 논의한 언어 규범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표준어의 발음을 논의 하는 자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에는 「표준어 규정」이 제정되어 있지 아니하다. 따라서 2장에서 표준어, 또는 문화어에 대해 논의를 유보하였으나, 이는 반드시 교육의 내용으로서 논의돼야 할 대상이다. 이미 부분적으로 언급된 바와 같이 북한에는 체제와 관련되어 김일성 일가와 관련되는 언어, 혁명의식 고취와 관련되는 언어, 적대의식 고취와 관련되는 언어가 따로 쓰여 이것이 언어 일반 또는 국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 그리고 문화어의 보급도 문제이다. 남북의 어휘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제도의 차이에서 빚어진 것, 지역 방언이 문화어가 된 것, 말다듬기로 차이가 나게 된 것, 어의변화로 차이가 나게 된 것, 표기가 달라 차이가 나게 된 것, 발음이 달라 차이가 나게 된 것, 표기와 발음이 다 같이 차이가 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문체와 문법적 호응이 다른 문장상의 차이를 보이는 것도 있다. 이 밖에 전문 용어로 국어교육의 용어, 교수 학습의 용어도 차이가 나 통일을 대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이에 대한 상론은 줄이기로 한다.
4. 통일을 대비한 국어 교육에 대한 대책
사람들은 남북의 통일을 말할 때면 우선 언어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도 아니니 이것부터 통일함으로 통일의 물꼬를 틔우자고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지만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통일을 대비한 국어교육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언어의 문제는 이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통일을 대비하는 국어교육의 대책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는 여러가지가 들려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여러 가지 가운데 몇 가지 소견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첫째, 언어 규범을 통일하여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표적인 언어 규범인 맞춤법과 표준발음법은 통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심하게 나는 것이 아니다. 맞춤법은 남북이 다같이 1933년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공용해 왔다. 그러던 것을 북한은 1954년에, 남한은 1988년에 개정함으로 차이가 나게 되었다. 이는 앞을 내어다 보고 동질화가 되도록 개정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질화가 되게 개정하였다. 앞으로 개정을 한다면 동질화를 도모하도록 할 일이다. 그리고 통일을 꾀한다면 「표준체제 구안통합」형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표준체제 구안 통합」이란 「통일보고서」의 남북 교육통합의 세 가지 방법 「흡수통합」, 「연방식통합」과 함께 제시된 「표준교육체제 구안에 의한 통합」이란 말을 전용한 것이다. 「표준체제 구안 통합」이란 한글맞춤법은 남북이 같이 쓰던 1933년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정신으로 돌아가 통일을 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다는 말이다. 표준발음법도 「표준체제 구안 통합」 방식이 좀더 바람직할 것이다. 이는 양쪽이 심각한 차이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발음은 맞춤법과 표리 관계가 있으니 다 같이 「표준체제구안 통합」 방식이 바람직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표준어의 문제는 다르다.
둘째, 표준어는 「연방식 통합」을 한다.
표준어의 문제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정신에 따라 서울말을 표준어로 하면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반세기 동안 다른 규범을 학습하고 생활해 온 국민이 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차이가 나는 말을 조사하여 통일의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재사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방법은 「연방식 통합」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정하는 경우 사정해 놓은 낱말의 수용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실용성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의 어휘나 표현이 다른 경우 양쪽을 다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외형상 복수 표준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복수 표준어로 정착하든지, 아니면 적자 생존의 원칙에 의해 하나가 도태되든지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의 어휘를 망라한 통일 국어대사전이 만들어져야 한다.
셋째, 남북 작품을 교재화한다.
언어의 동질화를 꾀하기 위하여는 상대방의 언어에 대해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상호 접촉하는 길밖에 없다. 서로 접하노라면 그 말 또는 표현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친숙하게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의 작품을 교재에 수록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의 언어를 큰 부담없이 이해 학습하게 될 것이다. 남북한의 방송을 녹음하거나 녹화하여 교재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이는 음성언어 동질화에 기여하게 할 것이다.
넷째, 교육 목표에 대한 조정이 있어야 하겠다.
북한의 교육목표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께 끊임없이 충직한 혁명전사로 키우는 것」이다. 남한의 교육 목표는 「국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국어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국어의 발전과 민족의 언어문화 창달에 이바지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국어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길러 성숙한 문회시민으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가 정치 사상 교육에 중점이 놓이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언어의 기능 교육에 중점이 놓인다. 이는 천양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러한 국어교육의 목적을 고수하는 한 국어교육의 통일은 요원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라가 어느 한쪽으로 흡수 통일되지 않는 한, 국어교육의 목표도 「흡수 통일」될 리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도 「표준체제 구안 통합」이란 조정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전제 국가 아닌, 민주 국가의 교육의 목표가 특정인에게 「충직한 혁명전사로 키우는 것」을 교육 목표로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성숙한 문화시민」으로 길러야 한다. 언어의 기능을 투쟁 아닌 협동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언어관을 바탕으로 교육 목표가 조정되어야 한다.
넷째, 교육 과정의 통합이 있어야 하겠다.
교육은 교육의 내용이 결정되고 이것이 적절한 방법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남북의 국어 교육은 교육 내용이 다르고, 이것을 다루는 방법이 다른가 하면, 그 시기 또한 다르다. 이렇게 되어서는 통일된 교육을 꾀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의 전문가가 협의하여 바람직한 교육과정을 구안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교육 내용이 선정되고, 바람직한 교수 방법이 강구될 것이다. 이것은 교육 목표가 합의된다면 그리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오늘날 남북의 교육과정은 차이만 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점도 많다. 상호 바람직하다고 보이는 요소도 있다. 따라서 상대방의 바람직한 요소는 수용하는 방향으로, 이것 역시 「표준체제구안 통합」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섯째, 관련 학자의 접촉이 꾀해져야 한다.
교육이란 사람을 기르는 것이고, 이는 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접촉이 있어야 한다.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는지는 아직 분명히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 통일을 위해 국어교육도 대비해야 한다. 국어교육의 이질화, 그리고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남북학자가 머리를 맞대고 오늘의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그러노라면 서로를 이해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자, 국어교육학자의 상호 교류 및 학술토론회를 마련하여 국어 교육의 「표준체제구안 통합」의 계기를 하루 빨리 마련하도록 해야 하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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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수(1995), 남북 맞춤법의 차이와 그 통일문제, 국제고려학회 학술총서, 통일을 지향하는 언어와 철학 3, 국제고려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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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사범대학 외(1973), 국어교수법- 교원대학용, 교육도서출판사.
구성주의와 언어학습경험
박수자*
Ⅰ. 도입
20세기 후반 구성주의 패러다임이 부각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그 파급 효과와 전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국어과 교육의 경우에도 현황과 전망에 관해 구성주의적 접근에 따른 해석이 가능하다. 패러다임 전환기와 국어과 교육의 학문적 정체성이 확립되던 시기가 맞물리면서, 철학적 관점과 이론적 기초 제공에 많이 관여한 것이 바로 구성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성주의 패러다임의 광범위한 영향력과 교육적 실천은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널리 호응을 얻고 있는 이론적 타당성에 비해, 현장 적용의 효용성에 대한 실천 연구는 아직 깊이 있게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어과 교육의 구성주의적 전개 양상에 관해 상위 이론에서부터 구체적인 실현 양상에 이르기까지 각 층위를 검토해 보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성적 고찰을 하게 함과 동시에, 21세기를 지향하는 과제와 전망에 대해 타당성 있는 설명을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Ⅱ. 국어과 교육의 관점과 의사소통적 접근
현재 국어과 교육의 실체는 현행 국어과 교육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국어과 교육의 교육과정 구조에 대한 논의는 국어교육학의 이론적 탐구의 변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최근 교육 분야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핵으로 여겨져왔던 ‘지식’의 위상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국어과 교육의 경우에도 가르치는 내용과 목표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하게 되었다.
국어과 교육의 목표는 ‘국어에 대한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국어 지식(언어 지식, 문학 지식 등을 포함)의 학습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국어 사용 활동을 통해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학생들에게 지도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변화는 본질적으로 국어과 교육에서 학습의 초점(문법 지식이나 문학작품 지식의 지도: 지식에 관한 학습)을 새로운 측면(국어 사용 활동에 대한 지도: 지식을 통한 학습)으로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접근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았다.
논점1) 도구교과의 성격을 강조하는 기능주의적인 접근은, 국어과 교육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빈곤과 교수-학습법 상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
국어과 교육의 목표는 학생의 ‘언어능력의 신장’이지만, 이외에 모어교육으로서 학습자의 수준을 고려한 ‘국어 지식의 학습과 문학작품의 감상’도 포함된다. 여기서 ‘언어능력’의 개념이 지닌 모호성 때문에 목표의 구체적인 실현 양상에서 후자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학습내용이 마련되어 왔었다. 그러나 5차 교육과정 이후에는 언어능력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새롭게 시도되면서 학습내용의 구성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시도되었다.
언어능력은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으로서, 언어를 구사하여 인간의 생각을 표현하고 표현된 생각을 이해하는 ‘사고과정과 언어사용과정’을 다 포괄하여 접근한 개념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언어’와 ‘사고’의 밀접한 관계를 전제로 한 언어 사용(표현, 이해) 현상이 재조명되면서, 언어능력 개념에 따른 국어과 교육의 학습내용이 새롭게 마련되었다. 특히 인간의 ‘의미 구성 과정’이 국어과 교육의 학습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는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게 되었다.
화자/필자 표현 → 언어로 된 텍스트 → 청자/독자 이해
1단계 ①
2단계 ② ③
3단계 ④(① + ② + ③ + ?)
종전에는 국어과의 학습 내용이 주로 ①을 중심으로 마련되었지만(문종 위주의 접근), 지금은 ②와 ③(언어 사용 양상/활동)을 주로 고려한다. 매우 심리적인 접근 같지만, ②는 바로 사고(개념 혹은 정보)의 언어화 과정이며, ③은 언어의 사고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개인간 개인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국어과 교육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 차원에서 학습자로 하여금 ‘효율적인 언어 구사자’가 되도록 하고, 동시에 언어가 사고의 수단이기 때문에 언어자료를 통한 ‘사고(지적․정의적 사고)의 계발을 의도하는 언어 경험’을 국어과 교육의 학습내용으로 도입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이후 ②와 ③을 언어학습경험으로 지칭하고, 언어적 의사소통(언어적 사고력)의 신장을 목표로 한 국어과 교육의 내용구조는 ②와 ③을 중심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본다.
국어과 교육이 도구교과라는 말에서 도구교과의 개념은, 언어가 의사소통의 매체라는 측면에서 모든 교과의 기초가 된다는 뜻이며, 언어에 관한 학습(언어 지식 학습)뿐만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학습(언어 사용 기능 학습)에 더 비중을 두는 교과라는 뜻이다. 여기서 언어 사용 기능은 언어 사용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이며, 동시에 언어 사용 활동을 통해서 학습이 가능하다.
따라서 도구교과의 편협성을 지적하고 인간성이 배제된 기능주의적 접근이라는 비판은, 이러한 국어과 교육의 학습내용에서 논의되고 있는 ‘도구’ 개념에 대한 오해와 실용주의적 접근이 주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논점2) 외국어 교육의 접근법인 의사소통적 접근법을 모어교육인 국어과 교육에 도입한 부적절성에 대한 지적
제2언어교육이나 외국어교육으로서의 영어과교육에서 의사소통적 접근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국어교육으로서 영어과교육에서도 그 논의는 활발하다. 따라서 의사소통적 접근이 외국어교육에만 한정된 교수학습법이라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다. 모어교육이든 제2언어교육이든 외국어교육이든지 간에 언어를 가르치는 언어교육은, 현재 1970년대 언어사회학에서 처음 소개된 ‘의사소통능력’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의사소통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언어교육의 패러다임 상 ‘의사소통적 접근’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의사소통적 접근에서 논하는 의사소통 개념은, 단순히 자신의 말을 전달하기 위한 의사 전달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존재하는 기반(개인간의 단순 혹은 복잡한 의사소통)을 지도하고 개인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기반(개인 내 의사소통, 즉 언어적 사고)을 언어학습자로 하여금 형성하게 하는 차원의 개념이다.
이론적으로는 5차 교육과정의 목표부터 의사소통능력의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5차 교육과정에서는 교과 목표인 언어능력(국어능력)을 ‘의사소통능력’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전의 교육과정과는 차별화되는 ‘활동 중심의 언어 학습’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언어 기능별로 분책되어 제시되었다. 이것은 6차 교육과정과 개정된 7차 교육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존속되고 있다.
문제는 패러다임이 바뀐 시점에서 의사소통적 접근의 본질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상황이고, 또 과도기적으로 구조주의적 접근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서 의사소통적 접근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현재의 국어과 교육은 학생의 의사소통 능력의 신장을 목표로 하면서, 실제로는 언어 사용 기능을 교과서별로, 또 차시별로 분리하여, 제대로 된 ‘의사소통 활동의 언어 학습’이 구현되지 못했다. 아울러 교육과정이나 교과서 상에 제시된 학습 내용이 본질적으로는 의사소통능력 신장을 위한 학습 내용으로 부적절하다. 다시 말하면, 현재 국어과 교육은 의사소통적 접근을 시도하려 했으나, 교육과정의 영역 설정이나 교육과정 학습 내용의 선정, 그리고 교과서의 분책 등에서는 여전히 ‘언어 형태’ 중심이나 ‘문종’ 중심의 접근 등, 과거의 관점과 내용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의사소통적 접근을 위(교과목표와 교과 특성)에서는 했으나, 아래(교육과정 내용 항목, 교과서 학습 경험)에서는 구체적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여전히 구조주의적 접근의 그늘에 가려있기 때문이다.
한편 언어 기능을 가르친다는 것과 의사소통적 접근을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언어 기능을 분리하여 지도한 것은 이미 20세기 전반부부터 있었고, 새로울 것이 없는 학습내용이다. 기능주의적이라는 비판은, 언어 기능을 행동주의적 교육관에 따라 언어 기능 요소별로 분리하여 맹목적으로 훈련시키던 시절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가 현재 언어 기능을 분리하여 지도하고, 그리고 그것이 직접교수법과 결부된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적 접근이 아니라, 20세기 전반부 행동주의 패러다임 하에서 언어교육이 행해지던 시절, 즉 언어교육에서 구조주의적 접근이 이루어지던 시기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국어과 교육에 관해 제기되는 문제점들은, 새롭게 도입된 의사소통적 접근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렇게 시대오류를 범하고 있는 구조주의적 접근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으로 시정되어야 한다.
최근에 부각된 열린교육의 교육관이나 총체적 언어 학습은 본질적으로 의사소통적 접근과 매우 부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어과 교육의 대안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오해 때문인 것이다. 오히려 의사소통적 접근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총체적 언어 학습의 관점처럼 언어학습경험의 배열을 ‘전체적 접근 → 부분적 접근’으로 구성해야 한다. 이때 부분적 접근에서는 의사소통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전체적 접근에서 발견된 문제점이나 좀더 계발시킬 부분을 중심으로 하여, 학습자가 갖추어야 할 언어능력을 ‘학습 초점’으로 설정하게 되는데 이 때 특정 언어 사용 기능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적 접근에서도 언어교육의 특성상 당연히 언어적 의사소통이 중심이 되므로, 학습내용의 구성은 언어 사용 기능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해가 빚어질 수 있는데, 분명한 점은 언어 사용 기능을 요소별로 분리하여 맹목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에서 최근 국어과 교육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논점을 짚어보면서, 국어과 교육의 관점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국어과 교육의 변화된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의사소통적 접근의 본질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가) 언어를 통한 표현과 이해는 학습자의 사전지식(스키마)을 기초로 한 능동적인 의미 구성 과정이다.
언어활동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스키마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언어전략의 모의수행(훈련)을 통해 학습전이력을 강조하며, 텍스트 학습시 텍스트 정보 학습이 아니라 적절한 정보수용과 비판적 안목 및 판단력을 전제로 한 정보처리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즉, 지식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지식을 보는 안목에 초점을 두고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지도한다. 또한 텍스트 이해나 표현 과정에서 학습자가 역동적으로 생성하는 의미를 중시한다. 지금까지 이 부분은 매우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
나) 교수 학습 과정을 ‘가설-수정-개방’의 차원에서 보고, 학습자가 수행하는 잠정적인 내용 구성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활동 중심의 교과서를 제작한다.
5차 교육과정부터 교과서를 학습자가 직접 참여하여 풀어나가는 문제 형태의 활동 교과서를 제작하였다. 활동 중심의 교과서의 기능은 학습자 중심의 학습활동 과정을 구현하고, 학습활동 중 학습자의 시행착오를 전제로 학습자간 혹은 교사와 학습자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학습경험의 확대 심화를 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다. 특히 학습자 간의 토의나 토론을 통한 사회적 상호작용은 학습자의 문제해결력을 증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또 현행 6차 교육과정의 초등학교 고학년 읽기교과서의 경우 교과서 지면 구성에서 글 옆으로 도움발문(날개)을 사용하여 학습자의 초인지학습을 의도하고 있다. 이야기가 수록된 자료집 형태의 읽기교과서가 아니라, 읽기 활동을 배우는 읽기교과서라면,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을 다루는 과정에 대한 초인지 학습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는 최근 열린교육과 더불어 각광받는 자기주도식학습과 관련된다.
다) 개인의 관점에서 지식의 유용성(viability) 개념을 도입하여, 학습자의 다양한 반응을 허용하고, 교수자는 그러한 학생의 반응을 중재하고 관리한다.
말하기․듣기에서 정보를 다루는 다양한 담화유형을 도입하고 학습자의 다양한 반응에 대해 정보를 중심으로 하여 비판적 안목을 형성하고자 한다. 특히 문학작품의 이해와 감상 지도에서는 학습자 개인의 가치와 판단력을 존중하고, 문학작품 자체에 대해 이해하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매개로 한 학습자간의 토의․토론을 활성화하여 문학작품에 대한 학습자 개인간의 (지적, 정의적)차이를 체험을 통해 확인하게 하고 동시에 지식의 상대성을 실감하도록 한다.
라) 협동학습이나 토의토론 형태를 도입하여 학습환경의 사회화를 도모하고, 의사소통 중심의 실제 자료를 사용하여 학습경험의 현실성을 지향한다.
언어학습의 학습자료에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실제 자료(authentic text)를 적극 활용하도록 권장하여(NIE활용, 방송매체 활용 등), 협동학습이나 토의토론에서 학습자간의 동료상호작용과 평가를 적극 권장하고, 총체적언어학습과 열린교육을 지향하여 학교와 사회의 벽을 헐고 교육의 실제적인 효용성을 높여야 한다.
이상에서 국어과 교육의 변화를 통해 부각된 사항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1. 국어과 교육의 변화 양상>
Ⅲ. 언어학습경험의 본질과 구성
국어과 교육이 의사소통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때, 구성주의 패러다임에 의거해서 학습 내용을 구성한다면, 그 본질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의사소통적 접근은 학생들의 개별적인 의사소통능력의 신장을 의도하기 때문에, 학습 목표·학습 내용·학습 활동을 ‘언어 형태’ 위주가 아닌 ‘언어 경험’ 위주로 구성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학습 대상이 되는 언어 경험은 학생들로 하여금 학습환경과 현실 세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학습 의욕 고취 및 자발적 학습 참여 유도, 그리고 현실적으로 즉각적인 적용이 가능한 효용성이 높은 학습 내용을 수용하게 하여 학생들의 전이력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의사소통적 접근을 할 때, 필요한 언어 학습 경험은 언어를 조작하는 언어사용자의 경험을 토대로 계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어 경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목록들은 선별적으로 채용되어 학습목표 달성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학습 내용을 ‘언어학습경험’이라고 규정했다. 앞절에서 이미 언어학습경험의 본질에 대해 잠깐 소개한 적이 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자.
‘언어학습경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단계별로 서술을 정교화하여 깊이있게 다뤄볼 수 있다.
1단계 : 언어 - 개념 형성의 언어
2단계 : 언어 학습 - 의사소통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호인 언어 기능의 학습
3단계 : 언어 학습 경험 - 의사소통활동을 통한 언어 경험
1. 언어와 개념 형성 학습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형성하는 구성소이다. 다양한 기호들이 인간의 사고에 관여하고 있지만, 가장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호는 역시 언어이다. 사회구성원으로 합류하는 어린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언어(특히 단어)를 통해 사회의 관습과 제도, 문화적 의미를 배우게 된다. 이것은 일찍이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심리학적, 인류학적 이론에서 제기된 바 있다. 학교교육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것과, 언어를 통해 교과를 배우는 교육의 과정 전반이 그렇게 인간의 사고를 계발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가 외부 환경의 자극을 받고, 사회적으로 접촉한 언어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개념을 형성하여, 점차 머리 속에 복잡한 개념망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더욱 자신의 사고를 심화시키고 정교화시킨다. 그에 따라 구사할 수 있는 언어도 더욱 확장된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에 결합된 개념이며, 경험을 통해 개념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예: 컵 → 물컵 → 우승컵 → 홀컵) 따라서 지속적으로 의미 확장이 가능한 어휘 자원을 제공해 주고, 의도적인 어휘 학습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때 인간은 다음과 같은 단계별 추상화를 거쳐 개념을 형성하므로, 개념 형성을 위해 언어 학습 경험을 배열할 때 참고할 수 있다.
1차적 개념(삼각형, 뜨겁다 등) → 2차적 개념(모양, 색깔)
저차적 개념(색깔, 모양) → 고차적 개념(속성) : 위계 형성
개념 형성 학습을 위해서 어휘지도를 통한 개념 형성과, 텍스트 상에서 개념망을 형성하는 학습을 할 필요가 있다. 이 때 교사와 학습자 간에 개념 전달의 방법을 생각해 보면, 현재 학습자의 스키마와 같거나 낮은 수준일 경우는 설명하는 방법이 적절하고, 만일 현재 수준보다 높은 것으로 판단되면, 예를 제시하여 학습자 스스로가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스키마를 조정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결국 학습자는 일단 직접 경험을 통해, 그 다음으로 토론과 같은 사회적 교류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기존 지식구조를 새롭게 조절해 나가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게 되면 학습자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로운 상황에 연장시켜 적용할 수 있게 된다.
2. 언어의 기호성과 의사소통
가. 기호와 의사소통
의사소통적 접근에 수용되는 언어는 기호로 광범위하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언어라고 하면 ‘언어 형태’를 연상하는데,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의 언어를 기호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구어·문어, 나아가 다양한 대중매체들을 포함하여 언어 활동을 고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호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의사전달
2. 지식의 기록
3. 새로운 개념의 형식화
4. 다양한 분류를 간단히 하기
5. 반영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일
6. 설명
7. 구조의 명시를 돕는 일
8. 일상적 조작을 자동화하는 일
9. 정보와 이해의 재생
10. 창조적인 지적 활동
언뜻 보기에 매우 일반적이고 산만한 분류이지만, 분명한 것은 1-10항이 모두 본고가 규정하는 ‘의사소통’이라는 상위개념으로 묶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기호의 이해는, 기호 체계와 적절한 개념 구조 사이의 상호동화이다. 기호는 궁극적으로 의사소통 자체가 가능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나. 기호의 유형
최근 기호학에서는 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의사소통의 매개체, 즉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호의 실체를 구명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기호사용자와 기호의 관계, 그리고 기호로 형성되는 문화에 대해 다각도로 광범위하게 접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들의 세계에 대한 해석의 통로를 기호를 중심으로 하여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사회구성원들이 기호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해석하고 전달한다면, 그것이 바로 국어과 교육에서 대상으로 삼는 언어 경험이다. 따라서 본고는 언어가 아닌 기호의 차원에서 국어과 교육의 언어 학습 내용을 고찰해야 한다고 본다.
기호학에서는 좀더 전문적으로 기호와 약호를 구별하고 있다. 기호는 의미 작용의 단위이고 약호는 의미작용 단위의 체계를 지칭한다. 약호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서 관습성의 정도 차이를 보이는데, 사회적 차원에서 약호는 관습성의 정도가 높아서 약호사용자간에 문화적 경험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고 규칙의 지속성을 유지시키므로 사회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바로 의사소통의 공유기능이다. 반면 개인적인 차원의 약호는 개인에 따라 텍스트의 ‘읽기’는 달라지게 되고, 독자의 협상 과정이 개방적이거나 폐쇄적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명시적이고 관습성이 높은 약호(논리적 약호)는 텍스트 읽기에서 개인의 수동성을 요구하고, 관습성이 낮은 약호(미학적 약호)는 개인의 보다 적극적인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최근 기호학에서 정리된 약호의 종류는, 기능에 따라 ‘논리적 약호, 미학적 약호’, 약호를 구성하는 기호의 변별적 양상에 따라 ‘단속적 약호, 연속적 약호’, 미디어 수용자의 속성에 따라 ‘폐쇄적 약호, 공개적 약호’, 약호가 사용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수식적 약호, 제한적 약호’ 등 여러 가지로 구분한다.(박정순, 1995)
따라서 의사소통활동을 중심으로 언어 학습 경험을 배열할 때 준거가 되는 것은, 언어 형태(크기)가 아니라, 약호가 되어야 한다.
3. 의사소통활동과 언어 학습 경험의 자원
가. 총체적 언어 학습
최근에는 열린 교육이 현장 초등 교육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하는데, 통합교과를 전제로 한 열린 교육은 초등학교에서는 곧바로 언어 학습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된다. 열린 교육의 교과 내부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총체적 언어(whole language) 학습은 변화된 국어과 교육 학습내용관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앞서 분리된 언어 기능 지도는 분석적 언어 학습과 연관되고, 그로 인해 실제적인 언어 사용 능력 신장에 기여할 수 있는지 회의가 제기 되었다.
총체적 언어 학습은 원래 영어를 모어로 배우는 어린이들의 읽기 능력을 신장시키려는 관심에서 1960년대 초 K. Goodman과 F. Smith에 의해 시도되었다. 여기서 읽기 활동을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보고 통합된 읽기 과정의 이론을 확립시켰는데 이는 사고력과 직결된다. 특히 L. Rosenblatt는 듀이의 반성적 교수 개념(reflective teaching)을 읽기에 적용하여, 읽기를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상호교류로 묘사했다. 이것은 Rosenblatt가 학습자는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고 싶어하고 타인의 경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읽기, 쓰기, 말하기를 익히게 된다고 한 듀이의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상호교류’ 개념은 문학작품 이해 지도와 언어 경험 중심의 읽기 지도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학생들이 읽기 활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 읽기 기능이 더욱 발달된다는 것과 자신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경험에 근거하여 자기 나름의 언어로 만들어진 읽기 자료를 읽을 때 읽기 기능이 발달된다는 가정은 여러 실험 연구를 통해 실제로 뒷받침되고 있다.
열린교실에서는 모든 교과를 통합한 주제 중심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주제학습은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등의 언어 영역을 토대로 다른 교과의 내용을 통합하여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열린교실의 학습활동은 언어 영역을 통합한 ‘총체적 언어 학습’,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과 흥미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하는 ‘학습센터 활동’, 한 주제에 대하여 모든 교과를 통합하여 활동하는 ‘주제 학습’, 서로 돕고 격려하며 활동하는 ‘협력(협동) 학습’ 등이 있다.(박성방, 1995)
총체적인 언어 학습 활동은 언어 기능을 분리하여 차시별로 ‘듣기 -> 읽기 -> 쓰기 지도’ 등의 단계를 거치도록 한 것이 아니라, 통합된 언어기능을 구사하여 수행되는 학생들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고 언어학습 피이드백이 이루어지도록 하므로 실제 언어 사용 현실과 마찬가지의 상황을 교실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를 교실 세계에 끌어들여 학습환경(학습목표, 학습내용)을 조성하므로, 학생들의 동기 유발은 물론 자발적 참여를 통해 자연스럽게 실질적인 언어 경험의 확장이 일어나게끔 하고 있다.
따라서 총체적 언어 학습은 의사소통 활동을 전제로 하고 의사소통 활동을 학습내용으로 하는 언어 경험과 사회적 맥락 중심의 언어교육이라 볼 수 있다. 의사소통능력 신장을 위한 의사소통 활동을 유형화하기란 쉽지 않지만, 박수자(1995)는 의사소통 활동의 유형과 학습 과제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 때의 의사소통 활동은 바로 총체적 언어 학습이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국어과 교육이라면, 아동들은 실제의 의사소통 활동에 참여하면서 언어 사용 능력을 체험/신장시켜야 한다. 특히 의사소통활동을 약호에 근거하여 접근할 때 미디어 문화의 기호 해석 능력, 그리고 구어 구사 능력이나 전자 언어 학습은 현실적인 언어 사용을 도모한 총체적 언어 학습 내에서 가능한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기존의 폐쇄적인(인위적인) 국어과 교육과정의 영역 설정 및 내용 진술은 재고되어야 한다.
나. 미디어와 언어경험
언어교육은 언어의 본질과 언어사용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언어사용자는 원활한 언어 사용을 위해 대면 상황의 구어나, 언어적 맥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문어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언어의 기원이자 본질인 ‘음성언어’에서 활자의 발명을 기점으로 크게 부각된 ‘문자언어’, 그리고 최근의 제 3 세대 언어인 ‘전자언어’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사회의 변화와 맥을 같이해 오고 있다. 그렇다면 국어과 교육도 그러한 변화를 감안해서 국어과 교육의 학습 내용을 쇄신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미디어 문화이며, 미디어 문화는 기호의 효용성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언어가 기호로서 연구되었으나, 최근에는 기호학의 일부로 언어학을 규정할만큼 기호학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체계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다.
최근 기호학에서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호로 규정하면서, 미디어 문화의 다양한 메시지들을 연구하고 있다. 물론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영상(이미지)의 메시지이다. 언어사용자(사회구성원)들이 향유하는 미디어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결국 미디어가 사용하는 기호는 메시지의 해석을 전제로 한 것이고, 메시지는 달리 언어와 무관할 수가 없다. 특히 미디어의 속성은 구어의 특성인, 일회성·순간성·상황성 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령, 대중 가요의 가사, 영화·연극·드라마의 대사, 텔리비전의 방송 언어 등은 맹목적으로 대중의 듣기능력과 상황 속의 기호해석능력에 의존한다.
따라서 구어와 문어는 매체읽기(미디어 리터러시)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국어과 교육의 학습 내용으로서 언어와 언어를 둘러싼 기호의 실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국어과 학습 내용(학생들이 배워야 할 언어 경험)의 확장이다.
기호와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문어와 구어를 재정리해 보면, 문어는 언어적 맥락에 의존하고 언어 추리를 통해 사고력의 증진에 기여한다. 아울러 텍스트 유형(장르)을 중심으로 창조적인 언어 사용이 강조된다. 반면 구어는 상황적 맥락에 의존하고 기호 추리를 통해 사고력의 증진에 기여한다. 구어는 문어와 달리 시간의 제약으로 문화적 관습성에 의존하므로, 언어 사용의 경제성 및 효율성에 의해 지배된다. 가령, 문어의 경우에는 문장 간에 정보 생략이 최대한으로 제약되지만, 구어에서는 상황에 의존하여 최대한으로 정보 생략이 허용된다. 언어 사용의 경제성의 원리가 지켜지는 것이다. 보통의 발화문에서 언어사용자들의 ‘대상(상황)’에 대한 공유 정보가 최소한의 발화로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끔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공유 정보가 없는 제 3자는 일차적으로 이 발화를 이해할 수 없다. 혹은 그러한 발화의 특징을 이해하는 감각있는 사람이라면, 일차적 이해의 실패를 토대로 그 함축적 의미를 추론하여 발화의 공유정보를 복원하기도 한다. 그것이 언어 사용 현실이다.
기존의 음성언어 지도의 내용을 구안함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구어 사용시 지켜지는 경제성이나 효율성의 원리에 일관된 규칙을 설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장르의 문어 학습에 비해 구어 학습 내용은 일상적이고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고, 나아가 사고력 신장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지 회의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문제점들을 바로 음성언어와 기호의 결합, 문자언어와 기호의 결합, 나아가 미디어 리터러시 학습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이란, 그래서 국어과 교육에서 구안할 언어 학습 경험이란, 바로 구어를 포함한 기호 해석/구사 능력의 증진과 한편으로는 문어 해석/구사 능력의 증진, 그리고 매체해석능력(광고읽기, 영화읽기, 미술작품읽기 등)의 향상까지를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다. 언어경험학습의 구성 원리
앞서의 논의를 정리해 하고 기존의 교육과정에 소개된 것을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교육과정의 내용구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가) 내용 요소
(ㄱ) 언어 구조
· 표준어
· 맞춤법
· 문장문법
· 텍스트문법
(ㄴ) 약호의 유형
· 논리적 약호, 미학적 약호
· 사회적 약호
· 단속적 약호, 연속적 약호
· 제한적 약호, 수식적 약호
· 방송 약호, 협송 약호
(ㄷ) 언어 사용 전략
· 담화전략 : 묘사하기, 서사하기, 설명하기, 논증하기, 설득하기, 인용
하기, 비유하기, 요약하기, 조직하기
· 텍스트전략 : 중심내용파악하기, 글구조 파악하기, 언어표현 파악하기
· 인지전략 : 회상하기, 상상하기, 예측하기, 추론하기, 공감하기, 비판하기
· 초인지전략 : 주의를 기울이기, 질문하기, 점검하기
(나) 학습활동
(ㄱ) 과제(task)지향적 의사소통활동의 유형
· 구조 연습
· 유사 의사소통활동
· 작용적 의사소통 활동
· 사회적 상호작용 활동
(ㄴ) 지적 변화 지향의 유형
· 갈등 경험 접근
· 문제해결 접근
언어경험의 축을 약호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언어 형태 위주보다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적인 언어 사용 기능, 즉 의사소통의 매개물로서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다. 의사소통적 접근 하에서 교육과정의 내용구조, 혹은 언어학습 경험은, 의사소통능력의 수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틀을 제시할 수 있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수준 1 수준 2 수준 3
구조적 단계 기능적 단계 경험적 단계
언어(형식)에 초점 언어(담화)에 초점 언어 사용에 초점
구조 연습 담화 연습 실제 언어 연습
구조 통제 담화 통제 상황과 주제 통제
선언적 지식 절차적 지식 조건적 지식
언어 지식 기능과 전략 기호해석력
학습 과제 실제 수행 과제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표2. 의사소통능력의 수준과 언어학습경험의 초점>
이에 따라 본고에서 의사소통활동을 전제로 언어학습경험을 조직할 때 구성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일단 ‘학습목표’와 ‘의사소통활동 유형’의 행렬표에 ‘약호의 유형’을 결합시켜 언어경험의 양상을 만든 다음, 언어 학습 경험에 적절한 테마(주제: 학습제재)를 발굴하고, 그 다음 단원 학습에 필요한(혹은 동원되어야 하는) ‘언어 구조’와 ‘언어 사용 전략’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표3. 학습활동의 구성 원리>
그렇다면 언어 학습 경험의 구성 원리에 따라 참조할 수 있는 학습내용의 자원은 다음과 같다.
1. 언어의 특징을 이해한다.(단속적 약호)
(가) 언어의 기능을 이해한다. - 개념 형성, 의사소통의 도구
(나) 구어와 문어의 차이를 안다. - 발음, 맞춤법, 어법
(다)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안다. - 어휘, 발음, 문법
2. 규칙의 본질을 이해한다.(논리적 약호, 협송 약호)
(가) 약호의 특징을 이해한다.
(나) 약호의 종류와 기능을 안다. - 과학적 약호, 수학적 약호/표음문자, 모르
스부호 체계, 수기체계, 수화체계/표의문자, 상형문자/교통신
호, 고속도로의 약호, 철도의 약호, 항공약호
3. 담화 전략, 텍스트 전략을 익힌다.(미학적 약호)
(가) 담화 유형과 담화 전략을 익힌다.
(나) 텍스트 유형과 텍스트 전략을 익힌다.
4. 인지, 초인지 전략을 익힌다. (수식적 약호)
(가) 생각하며 담화와 텍스트를 처리한다.
(나) 담화와 텍스트의 사용 과정을 점검한다.
5. 의사소통의 매체를 활용하여 의사소통한다.(연속적 약호, 방송 약호)
(가) 유상기호(그림, 사진, 조각 등)를 활용하여 의사소통한다.
(나) 미디어 매체를 활용하여 의사소통한다.
6.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여 의사소통한다. (사회적 약호, 제한적 약호)
(가) 사회적 관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힌다.
(나) 신체언어의 효과를 알고 활용한다.
(다) 사회적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본고의 논의를 토대로 언어 학습 경험이 단원 구성에 도입되면 다음과 같은 예시틀을 상정할 수 있다.(박수자, 1996 참조)
<적용예 1>
· 단원목표 : 약호의 특징을 이해한다.
· 학습초점 : 논리적 약호의 특징, 기호의 자의성 파악
· 학습활동 : 지식의 이해를 위한 유사의사소통활동
· 학습자료 : 모르스부호의 암호문 해독
· 절차 : ㄱ. 암호에 얽힌 이야기를 해 본다.
ㄴ. 모르스부호의 규칙을 알아 본다.
ㄷ. 모르스부호로 된 암호문을 해독한다.
ㄹ. 모르스부호로 된 암호문을 만들어 본다.
ㅁ. 기호와 의미의 관계에 대해 정리한다.
<적용예 2>
· 단원목표 : 설명하기
· 학습초점 : 설명하기 전략
· 학습활동 : 전략의 학습을 위한 작용적 의사소통 활동
· 학습자료 : 모르스부호의 암호문
· 절차 : ㄱ. 암호에 얽힌 이야기를 해 본다.
ㄴ. 모르스부호의 규칙을 알아 본다.
ㄷ. 모르스부호로 암호문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한다.
ㄹ. 암호문을 만들어 조별로 교환한다.
ㅁ. 암호문을 해독한다.
Ⅳ. 언어 학습 경험의 교수학습과 구성주의적 전개
국어과 교육은 학습자의 언어능력 즉, 의사소통능력을 신장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다양한 ‘언어학습경험’을 중심으로 한 ‘언어사용활동’을 ‘수업내용’으로 펼치고자 한다. 구성주의적 관점은 본질적으로 사고의 결과(지식의 저장)보다는 사고의 과정(생각의 진행) 측면에서 사고력의 발달을 의도하기 때문에, 개인별로 과정 중심의 활동을 통한 학습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국어과 교육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언어학습경험은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사고력을 촉진하는 다양한 언어활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구성주의 패러다임하에서 언어학습경험이 교수학습법 측면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실현될 수 있는지를 초점화하여 검토해 보자.
1. 어휘 학습
어휘는 지식의 단위로서, 언어사용자의 지식 수준과 더불어 교육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따라서 어휘학습은 언어학습인 동시에 그 단어가 의미하는 혹은 담고 있는 정보를 학습하는 것이 된다. 종전에는 어휘량을 늘이는 측면에서 매우 단선적이고 비체계적인 방법이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단어 의미에 대한 질적인 접근 방식(의미자질분석법, 문맥 단서 이용 등)이나 독서지도가 강조되고 있는 추세이다. 학습자가 어휘의 본질과 기능을 인식하고, 언어환경에서 어휘 학습을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의미한(유용성이 높은) ‘어휘 지도’가 되어야 한다.
어휘지도에서는 어휘간의 관련성을 비교하고 검토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사전지식(경험)을 이끌어내어 새로운 지식과 만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휘들간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교수학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례1) 의미지도 그리기(semantic mapping)를 통한 어휘지도
어휘지도에서 의미망은 학습자의 사전지식과 새로운 지식이 만나는 과정에서 스키마를 활성화하고 강화하며 변형시키기 위한 유용한 전략으로서, 어휘지도 자체만이 아니라 언어사용기능 신장에 궁극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한 단어를 중심으로 하여 의미망을 만들 수도 있고, 텍스트 상에서 핵심어를 중심으로 하여 의미망을 구조화해 볼 수도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독해력 향상과도 관련된다.
이외에 ‘빈칸메우기(cloze test)를 통한 어휘지도’나 ‘모방과 대체를 통한 어휘지도’가 있을 수 있다. 빈칸메우기는 담화나 텍스트 상에서 일정 빈칸(규칙/변형빈칸, 선정된 어휘항목의 선다형 제시)을 제시하여 누락된 단어(혹은 문장:정보)를 복원하는 과정인데, 학습자의 스키마(기존의 어휘력)와 추리력 등이 모두 관여하며, 동시에 문맥 속에서 새로운 어휘를 학습함으로써 학습 어휘에 대한 심도있는 지도가 가능하다. 대체와 모방은 기존의 텍스트를 쉬운 단어 혹은 어려운(낯선) 다른 단어로 바꾸거나, 그 단어를 이용하여 내용은 유사하되 자신의 글로 만들어 보게 함으로써 이해력과 표현력을 결부시켜 어휘지도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2. 말하기․듣기 학습
음성언어는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는 언어기능으로 매우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상황맥락’의 개념을 도입하여 언어사용의 현실성과 언어학습의 효율성을 지향한다. 여기서 상황맥락은 화자가 단순히 청자와 얼굴을 맞대고 반응하는 시공간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에서 생성되는 것에 주목하고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정보는 말하기를 통해 전달되고 듣기를 통해 이해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청자와 화자의 상호작용이라는 역동적 활동을 통해 생성/창조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기 듣기 학습에서 학습자의 스키마와 사회적 상황의 만남이 동화 조절 과정을 거칠 수 있는 ‘생각하는 말하기 듣기 학습 내용’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말하기 듣기 학습에서 생각을 유도하는 정교한 상황맥락의 체계화가 필요하고, 의사소통시 의미전달에서 언어만이 아니라 비언어적 기호(사진, 삽화, 도표, 혹은 표정. 제스처 등)의 활용을 적극 도입하여 의사소통의 현실성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듣기 학습에서 청음자체보다는 청해 측면을 강조하고, 청자가 가진 사전지식을 활성화하거나 비판적 듣기의 비중을 확대하여 정보의 적극적인 사용 주체로서 학습자의 역할을 강조할 수 있다. 이외에 다양한 듣기 활동을 통해 학습자의 다양한 사고를 유도하며, 듣기 반응을 말하기나 쓰기만이 비언어적 활동(음악, 미술 등)으로도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사례1) 독서토론과 나의 의견
‘6학년 1학기 말하기․듣기․쓰기 교과서 5단원 의견을 모아서’에서는 ‘토론을 듣고, 토론자의 의견을 정리하고, 토론자의 의견을 나누어 보고, 나의 생각을 의견으로 말해 본다.’는 학습내용(1차시분량)을 담고 있다. 세 문항 정도로 학습활동이 진술되어 있어서, 학습활동이 매우 단순해 보이고 1차시 분량으로는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학습활동이 충실하게 수행될 수 있다면 매우 의의가 있는 학습경험이다. 토론 속에서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며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집중해 보게 한다. 말하고 듣는 과정 속에서 학습자의 사고력을 촉진하고 자신의 말로 정리해 보게 하는 활동인데, 토론 내용을 근거로 사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마련하는 과정이 매우 역동적이다. 정답을 찾는 지식학습이 아니라, 언어적 의사소통(상호작용)을 통해 논리적이고 종합적인 생각을 할 기회를 갖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 따라서 교사는 학습자로 하여금 그러한 학습의 흐름을 인식하고, 토론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어야 한다.
3. 읽기 학습
읽기는 독자가 ‘이미 지니고 있는 개념’의 조작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이미 지니고 있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스키마인데, 스키마이론가들은 읽기는 ‘글로부터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상호밀접한 관계에 있는 수많은 정보자원의 조정을 요구하는 복잡한 기술’이라고 규정한다. 새로운 텍스트를 접합으로써(독서), 독자는 지속적으로 스키마를 심화 확대하고, 아울러 사고과정을 정련시키는 학습을 하게 된다.
특히 Bartlett가 20세기 초에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읽기기능의 목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재조직 : 유목화, 개요, 요약, 종합
․ 추론 : 뒷받침이 되는 세부내용 추론, 중심생각 추론, 비교추론, 원인과 결과 추론, 인물의 특성 추론, 결론 예측, 비유적 언어 해석
․ 평가 : 현실과 환상의 판단, 사실과 의견의 판단, 정확성과 타당성의 판단, 적절성의 판단, 수용가능서의 판단
․ 감상 : 주제나 구성에 대한 정의적 반응
이중에서도 특히 추론은 글에서 제시된 정보를 토대로 글에 제시되지 않은 정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언어지식과 독자의 배경지식을 통합하는 정신과정이다. 최근에는 추론적 읽기의 중요성도 재부각되고 있다. 추론과정에 대해 다음 표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구성주의적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발언(언어적 자극) → 모든의미표상(상정스키마) → 적합한 하나의 명제형식 가려내기 →
↑ ↑
(중의성 제거,지시대상부여,의미보충) (명제적 태도)
명제 의미 → 맥락효과 → 해석 → 청자의 세계 표상개선
↑
(구정보 신념 폐기, 구정보 신념 강화, 맥락함축, 합성적 신정보)
또한 비판적 읽기는 글의 내용과 구조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으로 읽기를 하는 능동적인 의미구성 과정이다. 비판적 읽기가 논리적이고 인지적인 차원의 반응이라면, 감상적인 읽기는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반응이다. 둘다 글에 대한 일정한 준거를 나름대로 가지고 객관적으로 읽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외에 창의적 읽기는 독자가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거나 새로운 결과를 산출할 목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재구성하여 통합하고 확장하는 사고의 과정이라고 본다. 창의적 읽기 방법으로 ‘발상의 전환, 고정관념의 타파, 예측하기, 대안마련하기, 글의 내용 다시 쓰기, 같은 내용 비교하여 통합하기’ 등이 소개되고 있다. 창의적 읽기는 설명적인 글에서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주로 문학적인 글을 대상으로 하여 학습자의 주체적이면서도 개방적이고 개성적이며 자발적인 의미구성과정을 권장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소집단 토의를 통한 읽기 활동은 감상자 중심이나 반응 중심의 문학 지도에서 학습자들의 학습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읽기 학습의 내용은 대다수가 글의 사실적 이해에 집중되어 글의 내용을 확인하게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추론적 읽기나 비판적 읽기, 그리고 창의적 읽기의 학습내용이 많이 마련되어야 한다.
사례1)
‘6학년 1학기 읽기교과서 1단원 우리는 하나’에서 본문 첫부분 날개에 ‘제목으로 보아 이 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짐작하며 글을 읽어 보자.’는 도움발문이 있다. 읽기전략 중 예측하기전략으로 제목을 단서로 사용하게 하고 있다. 초등학교 읽기교과서는 새로운 주제나 장르의 글을 싣는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글을 다루는 과정을 교사의 안내를 통해 직접 체험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때 학습내용으로 주목받는 읽기전략은 텍스트 독해 과정에서 스키마를 활성화하거나, 새로운 의미구성과정에 기여하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읽기학습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안목, 즉 초인지학습이 중시된다.
4. 쓰기 학습
종전의 쓰기 지도는 완성된 글의 평가가 주류를 이루는 결과 중심의 작문지도였다면, 최근의 쓰기 지도는 과정 중심이자 학생 중심의 쓰기 지도로 전환되었다. 국어과 교육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더욱 본격적이고 명시적으로 사회구성주의 이론을 도입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분야이다.
잘 정돈된 지식의 배열을 보여주는 성인의 글처럼 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학습자의 사고가 얼마나 자극을 받는지, 다른 학습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어떤 지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지 등이 매우 주목된다. 학습자간의 ‘협의하기’를 중심으로 한 ‘대화 중심의 작문모형’이 개발되었고, 또 그 과정에서 실제 지도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쓰기전략이다.
한편 쓰기 학습은 사전지식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아이디어 생성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전에는 ‘집필과 퇴고’에 많은 비중을 두면서 완성된 글과 그 평가가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생각에서 집필’까지의 과정이 중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휘지도와 관련되며, 본질적으로 개념 형성이나 개념 전달 학습과도 관련된다. 쓰기지도는 글을 완성하기 위해 학습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기보다는, 학습자로 하여금 생각하는 훈련과 사회적으로 의사소통하려는 언어화 과정을 훈련시키기 위해 마련된 학습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사례1) 생각그물을 이용하여 아이디어 생성하기
생각그물은 일종의 마인드맵인데, 마인드맵처럼 지식의 학습전략이 아니라 학습자의 생각을 활성화하여 글을 쓰는 데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동기유발을 하며 글의 내용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학습자들은 보통 글 쓸 내용의 빈곤에 시달리기 때문에, 글을 완성하기 위한 전단계로 도입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서 학습자의 생각을 언어화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훈련이 될 수 있다. 단, 생각그물을 만들 때 확산망(연상에 의한 개방적 사고)만을 고려하지 말고, 수렴망(개념에 의한 논리적 사고)의 기능도 감안해야 한다.
보통 생각꺼내기에만 치중하여 연상에 의한 정보들을 모두 생각그물로 가지치기를 할 경우 나중에 산만하게 되어 정리할 수 없게 되고, 글을 쓰기 위해 또다른 정리 작업이 요구되어 그 실효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생각그물을 작성할 때, 교사가 맵핑의 가지에 단서(제한조건-글의 종류와 특성에 따른, 시간/공간, 반대/비슷한, 상하 등)를 달아서, 학습자의 사고를 일정하게 혹은 유의미하게 학습목표와 관련짓도록 유도해야 한다.
사례2) 문제해결을 위해 생각하는 글쓰기
‘5학년 1학기 말하기․듣기․쓰기 교과서 9단원 생각들의 만남’에서는 토의 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글로 쓴다는 목표가 있다. 예시 상황을 듣고, 문제해결을 위한 자신의 의견을 간단히 말해 본 다음, 친구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고 자신의 의견을 마무리한다는 1차시 분량의 내용이다. 이 경우에도 미리 제시된 문제점을 듣고 해결안을 마련하려고 하면, 문제성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식적인 선에서 해결안을 발표해 보는 데만 그칠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시간도 부족하고 학습 효과도 전혀 없는 단순 활동에 그치게 된다.
이 때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문제 상황을 그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학습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 사회나 학교 혹은 학급에서 현실적으로 처한 문제점을 먼저 간단한 토의를 통해 정리해 본 다음, 조별로 문제점에 대한 조사를 통해 문제점의 원인을 분석하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은 전부 글쓰기로 흔적을 남긴다. 그러한 자료를 토대로 전체 토의를 하면서, 각자 가능한 해결안을 제시하는 종합 과정이 토의를 통해 수업 시간에 이루어진다면, 의사소통활동으로서 언어학습경험의 실효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국어과 교육에 도입된 혹은 도입가능한 내용에 대해 구성주의적 관점을 적용해 검토해 보았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국어과 교육의 내용, 즉 언어학습경험이 ‘언어적 사고력 증진, 언어사용전략의 학습, 과정과 활동 중심의 언어활동’ 등으로 재정비됨에 따라 제기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지식관의 변화로 가르치는 내용 자체가 지닌 포괄성이 교육내용의 불안정성을 야기하고 있다.
구성주의 지식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국어과 교육이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담아내는 언어를 다룬다는 측면이 부각되다 보면, 자칫 언어학습경험이 활동만 있고 내용(지식)은 없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언어적 사고력을 촉진하고, 언어학습경험을 확실하게 체험하게 하는 조직화된 의사소통과제와 학습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더불어 다양한 담화 텍스트 유형에 따른 언어사용전략이 지속적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언어전략의 지도는 언어학습을 수행하는 와중에서 학습자의 학습을 안내하고 관리할 수 있기 위한 일정한 협의점이 되기 때문에, 학습자의 학습이 무의미한 활동으로 산만하게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소통적 접근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한 채 국어과 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둘째, 학습자 중심의 수업에서 교사의 정체성에 관한 회의가 발생한다.
학습자의 개별적인 반응을 적극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학습자의 학습력에 대한 교사의 판단과 적절한 교육적 처치에 관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교사의 전문적인 관리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교사는 수업의 방관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교육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교육과정 및 교과서의 내용이 개선되는 상황과 병행해서, 교사의 전문성을 고양시킬 수 있는 교사양성기관의 전문커리큘럼으로 정제․심화되고, 교육현장에 대한 실무훈련이 강화되어야 한다. 교사양성기관에서 이에 대한 적극적인 예비교사교육과 현직교사의 연수가 강화되지 않으면, 교육의 변화는 발전적으로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셋째, 학습자의 활동이 중시된 수업에서 학습환경의 조직에 대한 부담이 가중된다.
학습자의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학습참여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산만하지 않고 유의미한 학습이 발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교사가 사전에 학습환경의 조직을 체계적이고도 치밀하게 마련하여야 하고, 전문적인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도 교사의 부담이므로, 교과전문가에 의한 다양한 참고자료와 현장교사의 수업에 관한 전문상담이 제공되어야 한다.
국어과 교육에서 의사소통능력의 부각과 지식관의 변화는 교육의 핵심내용인 언어경험의 본질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였고, 교과서의 내용이 ‘언어사용을 위한 학습활동’으로 구체화되어 교육현장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7차교육과정 개정에 이르기까지 교육현장의 점진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구성주의적 관점의 지식관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 지식관이 주던 확신을 교사나 학부모에게 주지 못하고, 교사 스스로도 가르치는 내용의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교수학습상 방법론의 확립도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교사양성기관에서 예비교사의 교과별 실무실습에 대한 충분한 훈련이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도 있을 뿐더러, 언어학습경험이 이미 지식의 확실성의 차원이 아니라, 유용성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시대적 변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인 듯 하다. 그래서 언어학습경험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현재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구성원을 양성하는 제도교육 내에서 교육 내용, 즉 학습 경험의 선정과 배열은 변화하는 사회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21세기로의 전환을 앞두고 국어과 교육에서는 다른 어느 시기보다 언어에 대한 이해, 그리고 효율적인 언어 사용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고 있다. 국어과 교육과정의 개정은 그런 변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국어과 교육에서 선정해야 할 언어 학습 경험은, 변화한 사회의 특성에 맞는 언어관과 언어학습관의 확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며, 그에 따른 학습 경험의 조직, 즉 교육과정 영역 설정이나 학습 내용의 진술 면에도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변화하는 시대에 대처할 언어 능력이란, 또 언어 학습 경험이란 현대 미디어 문화의 특성을 고려한 음성언어 학습 경험의 특화와, 순전히 언어적 맥락에 의존하는 텍스트 학습 경험, 즉 문어에 대한 학습 경험의 특화가 필요하다. 언어 경험의 본질적인 변화와 열린 교육이라는 교육관의 변화를 학교현장의 국어과 교육에 적용하고 실현하는 문제는 지속적인 교과교육 연구 과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20세기 후반의 지배적인 관점인 구성주의적 접근이 국어과 교육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지 소박하게 검토해 보았다. 어느 대안이나 완벽할 수 없기에 이론적인 측면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현장에 적용되어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도 면밀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본 논의는 그렇지 못한 제한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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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 호응에 관한 국어교육적 소고*
-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를 중심으로 -
송 현 정**
Ⅰ. 들어가는 말
성분은 문장 범위에서 격을 중심으로 구성 요소를 파악할 때 지칭하게 되는 문법 용어이다. 격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서 내릴 수 있는 판단, 다시 말해서 누가 그 일을 일으켰는가, 누구에게 그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이 변했는가” 등과 같은 사항에 대한 어떤 판단의 유형을 나타내는 보편적이고 생득적인 개념의 집합이다.(Fillmore, 1968:24) 문장은 이러한 구성 요소들의 유기적 구조체이다. 그리고 성분의 호응이란 문장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이 형식과 의미에 맞게 적격으로 이루어진 관계를 일컫는다.
실상 국어교육에서 다루는 언어는 문장 단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담화의 차원이며, 문장 이상의 단위의 사용 상황이 중요시된다. 그러나 의미 완결의 기본적 단위로 문장을 일컬으며, 특히 쓰기와 같은 문어 텍스트상에서는 문장의 결합으로 텍스트가 이루어진다는 형식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기에, 성분들간의 호응과 같은 문제는 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국어교육 언어 영역의 기초적 내용이다.
본고에서는 성분 호응의 문법적 특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살펴 보고, 초등과 중등 수준의 국어 학습자에게 쓰기와 말하기 같은 언어 표현 영역의 기본이 될 수 있는 내용에 대해 교육적으로 접근하겠다.
Ⅱ. 성분 호응에 관한 문법적 논의
1. 문장의 이원 구조
문장은 성분과 같은 구성 요소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문장은 그 성분인 어휘소나 문법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그 목적 기능인 의미 전달을 하게 된다. 주어와 서술어가 밀접한 관계로 결합할 뿐더러 그것들을 이루는 어휘소들이나 문법 요소들도 일정한 차례와 짜임새로 엮여 있다. 곧 문장은 그 목적 기능인 뜻의 전달을 하도록 여러 성분 요소들이 긴밀하게 짜여진 ‘구조’이다.
성분들의 긴밀한 관계로서 문장의 구조를 파악할 때 보편적인 관점은 주어와 서술어의 이원 구조로 보는 것이다.(서정수, 1996:6-7) 즉 이것은 문장을 주어라는 성분과 서술어라는 두 성분이 결합된 언어 구조로 파악하는 것인데, 주어는 대개 문장의 앞 부분에 위치하며 체언을 핵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서술어는 대개가 주어 다음에 이어지는 풀이되는 요소들을 가리키며 용언이 핵심을 이룬다.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 형식에 대해서 최현배(1971:749)는 다음의 세 종류로 분류하여 제시한다.
· 무엇이 어찌한다. -- 영수가 운동을 한다.
· 무엇이 어떠하다. -- 하늘이 노랗구나.
· 무엇이 무엇이다. -- 그 사람이 범인이라니.
이러한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는 용언의 성격에 따라 네 가지로 볼 수도 있다.(서정수, 1996:298)
· 무엇이 어찌한다. - 동사 또는 움직씨
· 무엇이 어떠하다. - 형용사 또는 그림씨
· 무엇이 있다. - 존재사
· 무엇이 무엇이다. - 지정사 또는 계사
서술어가 되는 용언을 중심으로 문장 구조를 분석할 때, 각 용언은 그 앞에 수식어나 명사구 등 여러 성분들과 결합되기도 하고 그 뒤에 여러 서술 보조소와 어울려서 문장의 서술 기능을 드러내는 데에 핵심 구실을 하기도 한다. 즉 용언은 그 앞 성분 또는 뒷 성분과의 결합 관계를 통하여 서술 기능을 의미적으로나 문법적으로 온전하게 드러낸다(서정수, 1996:300). 용언은 또한 갖가지 다른 성분과 어울려서 서술 기능을 다양하게 수행한다.
서술어가 문장 구성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허웅(1983:248)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월이란 풀이말을 중심으로 하여, 임자말과 부림말, 위치말, 방편말, 견줌말, 어찌말, 인용말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에 이끌려 하나의 통일된 짜임새로 묶어진다.”고 하여 문장에서의 서술어가 차지하는 중심적 기능을 논하고 있다.
위의 논의에서와 같이 일반적으로 문장 구조를 주어와 서술어의 이원구조로 파악하는 구체적인 예를 보자. 서정수(1996:101)는 문장을 명사구와 동사구와 서술 보조소로 이루어진다고 보며, 다음과 같이 구조화한다.
문 장
명사구 동사구 서술 보조소
관형사 명사 정도 양태 동사 시제/상 서법
저 학생 매우 빨리 달리 었 다
범주 문법 또한 문장의 구조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파악함으로써, 문장의 전체 구조를 주어-서술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문 장
자동사
명사구
자동사
명사 명사구
지시대명사 관형사 명사 부사 관형사 명사 타동사
그 늙은 남자는 천천히 그 책을 읽었다.
이와 같이 문장을 주어와 서술어의 주된 관계로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전통 문법의 관점이다. 관점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문장에 대해 동사 중심으로 설명하는 의존 문법적 관점에서는 문장의 구조를 특정한 의미와 형식의 보족어를 요구하는 상위 단위의 능력을 의미하는 결합가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결합가는 형식적(통사적)범주나 내용적(논리·의미적) 범주로 간주될 수 있다. 통사적 층위에서는 문법적 술어(동사)는 논리적 술어에 해당하며, 논항의 통사적 대응물은 보족어라 하여 이를 구별한다. 문장의 통사적 결합가 관계에서는 동사 교점이 문장의 구조적 중심으로 간주된다.(이점출, 1991:39) 이를 구조화하여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동사 (=술어)
누르세요
주어 목적어
(당신은) 082를
이러한 사실은 결합가가 동사에서 가장 뚜렷하고 특정한 보족어를 요구하는 동시에 이들과 함께 문장의 골격을 이룬다는 관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사는 활용, 법, 시제, 태 등 구조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 견해가 완전한 것은 아니다.
언어를 완전하게 기술하고 있는 문법은 없다. 이 관점도 다만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종래의 지배 결속이론에서는 주어가 동사구에서 의미역을 받아 의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았으나, 이 이론에서는 주어가 동사구 안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상의 논의들에서 보이는 일관된 주장은 모두 주어가 술어와 직접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박영순, 1993:281)
위와 같은 여러 논의를 통하여 문장의 성분 구조는 주어-서술어 관계와 그 주변 보조 관계들의 결합으로 설명이 가능함을 알아 보았다.
2. 의존과 지배의 의미 기능
문장은 언어 요소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나 혹은 여러 개의 형태소들로 구성되는 단어들의 구조화된 집합이다. 이 요소들 사이에는 특정한 기본 관계가 성립하는데, 의존 문법에 따르면 문장의 기본 관계는 연결(connection)이며, 이 연결은 상호 공기와 의존의 원칙에 따라 표현된다.(이점출, 1991:21) 그리고 텍스트는 이러한 문장들이 구조화되어 이루어진 집합이다. 이 구조체들은 모두 결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속성과 위계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 요소의 결합 과정에서 요구되는 여러 기능 중 ‘의존’의 개념은 성분 호응의 주요한 관계 기능에 해당한다. 문법 이론에서 말하는 의존 관계(dependency relation)란 서로 다른 계위(rank)의 문법 항목들 사이의 관계이며(영어학 사전, 1990:327), 하나의 성분을 이루는 두 개의 구성 성분 중 전체의 성분으로 대치될 수 없는 구성 성분은 다른 하나에 의존적이게 된다는 개념을 내포한다.
의존은 언어 요소가 독립적으로 고립되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 요소와의 의존적 결합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성분들의 호응은 언어 요소와 언어 요소간의 의존 관계로 이루어진다. 언어 요소들은 의미적으로 상호 의존하게 되는 의존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의존하는 언어 요소의 생략이 문맥 의미를 왜곡하거나 상실하게 할 때 의미의 결여 현상이 발생한다.
호응에 대한 기능을 설명할 때, 의존 관계와 함께 지배 관계(government)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지배 관계란 특정 술어가 심층 구조에 삽입되면 그 존재로 해서 문의 다른 부분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게 되는 성분 관할의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특정 항목에 관한 자배적 선택은 술어의 개별적인 동기에 기초를 둔 다른 자질에 의하여 잉여적으로 지정되거나 기저 격 관계의 성질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통 문법에서 지배의 개념은 한 단어가 다른 단어에 격을 주는 것을 의미하였다.(박영순, 1993:233) 이것은 언어 구성 요소인 단어들의 결합 방식과 관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동사나 전치사는 그 목적어를 지배한다. 그러나 Chomsky에 이르러서 그 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었으며 이는 격이론, 의미역 이론, 결속 이론 등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되었다. 지배 관계를 명시적으로 표상해 주는 것이 격표시이며, 국어에서는 격조사가 그 예에 해당한다.
지배 관계는 하나의 구에서 핵과 그 보어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내용인 성분과 통어의 개념으로 다시 형상화될 수 있는데, X가 Y를 관할하지 않으나 X를 관할하는 처음의 교점이 Y도 지배할 때 X는 Y를 성분통어(c-comment)한다고 한다. 마찬가지 원리로 Y도 X를 성분통어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통어 →
상호 통어 ↔
관할 ↓
문 장
홍삼은 인슐린 성분과 혈당 저하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습니다.
X Y
명사구1 → ← 동사구
홍삼은 인슐린 성분과 혈당 저하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습니다.
↓
X` Y`
→ 명사구2 ↔ 동사
인슐린 성분과 혈당 저하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장의 구성 요소들이 성분 통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이루는데, 문장 차원에서는 조사가 격표시로 기능하며, 이 지배 관계의 인식은 서술어와 관련된 구성 요소들을 관계의 단위로 취할 때 성분간의 호응에 영향을 주는 기능으로 작용한다.
Ⅲ. 성분 호응의 교육적 실제
문장의 전통적인 구분은 문장을 이루는 기본 관계로서의 [주어-술어] 관계이며, 주어와 술어는 문장의 핵심을 형성하는 주요 문장 성분으로 간주된다. 본고에서는 성분의 호응을 문어 중심으로 논하는 측면에서, 문장을 이루는 완결 구조로서의 [주어-서술어]의 이원 구조로 파악하도록 하겠다.
문장에서 그 구조를 가장 뚜렷하게 표상하는 것은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이며, 주어는 문장에서 다루어지는 대상을 가리키고 서술어는 그 주어에 대한 무엇인가를 언급하여 문장 서술을 완결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타의 성분들은 필수적·수의적 속성을 떠나서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에 관련되는 관계 성분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분 호응의 관계 단위로서의 성분이 갖는 역할은 문 구성의 격을 표현하는 언어적 단위이며 이때 주어와 서술어간의 관계에 초점이 주어지게 된다.
1. 성분 호응의 언어 구조적 제한
성분 호응의 언어 구조적 제한이란 언어 구성 요소들이 통사적으로 결속 관계를 이룰 때 있게 되는 환경의 제한 사항을 말한다.
성분 호응의 언어 구조적 제한 문제에서는 함께 실현되는 단위들간의 제한 문제를 동반 제한이라 하고, 함께 어울리고 이어지는 단위들의 문제를 결속 제한이라 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동반 제한
동반 제한은 문장 내의 성분들이 결합 단위로서 함께 실현되지 못하게 되는 형태적 제한 사항을 말한다. 통사 구조상에서 찾을 수 있는 동반 제한은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보다는 서술어와 부사어 등의 성분들이 관계되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성분 호응의 기준 관계 단위로서 서술 기능을 하는 국어 용언의 의미 특질을 상세히 분류하여 다른 성분과의 동반 제한을 설명해 줄 수 있다. 국어 용언의 의미 특질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 서정수(1996:320)의 분석을 보도록 하겠다.
용언의 의미적 특질
상태성 비상태성
비심리성 심리성 과정성 행동성
동사성 비동사성 순간성 비순간성 순간성 비순간성
국어에서 동사, 형용사 등의 용언은 위와 같은 의미적 특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 특성에 따라 일부 한정된 성분하고만 동반하는 제한을 보이는데, 부사어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제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1) 우리 학교 2학년 3반 반장은 매우 예쁘다.
(2) * 우리 학교 2학년 3반 반장은 잘 예쁘다.
‘예쁘다’와 같은 상태성 심리적 형용사는 ‘정도와 상태’라는 의미적 자질을 가진 범주로서 정도 부사와는 자연스러운 성분 호응을 지니지만, ‘잘’과 같은 부사와는 결합되지 못한다. 이러한 간단한 제한 조건들은 용언의 의미 특성에 맞추어 결합되는 동반 제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국어의 동반 제한의 형태적·구조적 특성은 주로 부사어와 서술어간의 제한에서 드러난다.
나. 결속 제한
성분 호응의 언어 구조적 제한을 결속(cohesion)의 관점에서 살펴 보자. 결속이란 표층 구성 요소들이 문법적인 형식과 규칙에 따라 상호 의존하여, 문법적인 통합을 이루게 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결속이란 우리가 보고 듣는 실제 단어들이 하나의 연쇄(sequence) 속에서 상호 연관짓는 방식에 관여되며, 표층 요소들간의 관계를 표시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이 개념 속에 포함된다.(김태옥·이현호, 1991:5)
호응에서 문제시되는 성분간의 결속 문제는 격의 인식, 그리고 이것이 표상화되는 표지의 문제에서 일어난다. 이때 성분들의 결속 제한상은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실현 성분들의 부적절한 결합의 양상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성분 결여로 인한 비호응의 관계가 그것이다. 다음 예문을 통해 부적절한 성분 관계를 알아 보자.
(1a) 민희는 도서관에 갔다.
민희는 도서관을(도/만/까지) 갔다.
(1b) 민수는 극장에 다녀왔다.
민수는 극장을(도/만/까지) 다녀왔다.
(1c) 민철이는 유치원에 다닌다.
민철이는 유치원을(도/만/까지) 다닌다.
위의 (1a), (1b), (1c)에서 [명사+에]와, 각각 [명사+을]과 [가다, 다녀오다, 다니다] 등의 서술어의 관계에서 보이는 의미 차이는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전자는 목표점을 나타내고 후자는 대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 의미의 구별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기는 어렵다.(김기혁, 1995:589)
그러나 다음 (2)는 (1)의 ‘가다, 다녀오다, 다니다’라는 자동사와는 달리 타동사 ‘이기다’로서, 목적 대상이 필요한 경우인데, 위치 대상을 의미하는 조사 ‘-에’가 쓰여서 성분 관계의 비호응을 보이고 있다.
(2a) 3반이 1반을 이겼다.
(2b) ? 3반이 1반에 이겼다.
이것은 다음 (3)과 같은 표현과 관련된 격인식의 혼란에서 오는 문제이다.
(3) 3반이 1반에 졌다.
다음으로 성분의 결여로 인한 호응의 결속 제한을 살펴 보도록 하자. 문장이나 텍스트 구조에서 생략된 부분의 형태 차이는 주로 문법 요소와 관련된 것으로서 모어 사용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생략된 부분의 의미와 형태를 보충할 수 있다. 특히 문 구조를 통해 결여된 요소가 복구될 수 있는 경우를 구조적 생략이라 하고, 이것의 의미 단서는 문맥에서 주어진다.
(4) 날씨도 쌀쌀해지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도 가을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코스모스가 피어난 것을 보고도 ( ? ) 더욱 가슴 깊이 느껴진다.
위 (4)의 경우는 문맥을 통해 ‘가을이’라는 주체 성분을 복원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5)와 같은 서술어의 결여는 문맥을 통해 의미와 형태를 복원해 낼 수 있는 구조적 생략이 아니다.
(5) ? 이제 후레쉬라는 단어도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시기이다. 지금껏 난 무엇을 이루어 왔고 또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 ? )
위와 같이 있어야 할 서술어가 없는 경우 일반적으로는 문맥을 통해서 복원할 수 없으며, 이것은 언어 사용자의 표현 내용에 의존해야 하는 어휘 선택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렇게 볼 때 엄밀히 말해서는 생략과 결여는 구별되어야 한다. 생략은 앞 뒤 문면에 나타난 중복 요소 중의 한 가지를 삭제하는 것이다.(서정수, 1996:775) 이러한 생략은 확실한 복구 가능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런 생략의 복구는 정도면에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다음의 (6)과 같은 경우를 ‘완전 생략(strict ellipsis)’이라 하고, (7)과 같은 경우처럼 ‘누구를, 무엇을’에 해당하는 대상이 생략되어 문맥에서 그 요소를 보충 가능한 것을 ‘일반 생략(general ellipsis)’이라 한다.
(6) ⓐ강아지가 뚱뚱하지만 ⓐ`(강아지가) ⓑ튼튼하지는 않다.
(7)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여러분을) 성공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즉 문맥에서 동일한 요소가 생략되는 것을 완전 생략이라 한다면, 유사한 요소를 생략하는 것은 일반 생략에 해당한다.
(8) 5년전 러시아의 광부들은 파업을 통해 옐친이 권좌에 오르는데 일조했지만 지금 그들은 그에게 괴로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그들에게 갚아줘야 할 수백만 달러를 거부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대가를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지불하고 이 나라가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허약한 경제 안정을 위태롭게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 월드 뉴스 96. 3 >
(9) 저희 레이디 가구에서는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가구점을 페쇄하게 되어 이번 기회에, ⓒ영업이 불가능하게 되어 그동안 성원해 주신 등) 손님 여러분께 보답하고자 최대의 가격 파괴를 합니다.
< 안내 플래카드 >
위 (8)은 ⓑ서술에 호응되는 주체가 결여되어 있으며, 이것은 문장 구조적으로 있어야 할 의무 성분인 주어가 빠져 있는 성분의 결여이다. 따라서 ⓐ의 ‘그것은’과 같은 주어가 보충되어야 한다. (9)는 ⓐ성분의 수식을 받는 서술 성분이 결여되어 있다. 즉 ⓑ나 ⓒ와 같은 서술 성분이 ⓐ와 함께 있어야 언어 구조적으로 적절한 문장이 된다.
국어는 주어가 잘 생략되는 언어 구조이다. 오히려 어떤 문장에서는 주어가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때도 있다. 일반적으로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는 내용은 ‘나, 너, 우리’와 같은 대상 지시이다. 잘 알려진 대상 지시 또는 주체 대상이 주어로 기능할 때 흔히 주어는 표면화될 필요가 없다.
문 장
불량 주화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주어부 서술부
{나는,너는,우리는,당신은,여러분은···,Ø} 불량 주화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생략과는 달리, 구성 요소의 공백으로 인한 형태적·의미적인 부적절한 양상은 결여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분별한 생략 현상으로 인한 결여는 표현과 이해의 이독성(易讀性)과 명확성에 장애를 주는 요소이다.
(10a) 내가 그 친구를 만났던 것도 이런 맑은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했던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현재에 바쁘며, 하루하루에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조금은 우울하게 만든다.
위의 (10a)는 다음의 (10b)와 같이 관계 단위들의 ⓐ와 ⓑ간의 [수식+서술] 관계, ⓒ와 ⓔ간의 [주체+서술] 관계, ⓓ와 ⓔ간의 [객체+서술]의 성분 호응이 요구되는 문이다.
(10b) 내가 그 친구를 만났던 것도 이런 맑은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했던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현재에 바쁘며, ⓐ(앞으로) 하루하루에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를) 조금은 ⓔ우울하게 만든다.
그리고 논항과 서술어 사이에 분명하지 않은 관계나 성분간의 분리와 같은 비연속적인 표현은 이해상의 문제를 야기하며 명확성을 저해한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11) * 쓸쓸한 찬 공기를 느끼며 여기저기서 다가오는 삶의 숨소리를 간직한 채 나는 무언가의 ⓐ공상으로 인하여 한없이 ⓑ걸어만 가고 있다. 어둑어둑해진 밤하늘과 유난히 차디찬 세출의 밤공기, 그리고 나를 감시하듯 눈을 부릅뜨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주위의 어수룩한 ①네온싸인들이 ⓒ나의 정신을 더욱 더 ⓓ환각시키는지 / ②나는 어딘가에 끌려 가듯이 걸어만 가고 있다. < 대학생 작문 중 >
위의 예문은 ⓐ와 ⓑ간의 비호응, ⓒ와 ⓓ간의 비호응, 그리고 ①과 ②간의 비호응이 전체 텍스트의 의미를 혼란하게 하고 있다. ⓐ와 ⓑ의 관계는 ⓐ의 성분 의미가 ‘원인 제공’를 나타내는 ‘-으로 인하여’와, ⓑ의 ‘걸어만 가고 있다’는 행동 서술의 의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둘의 결합이 의미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것은 ‘공상에 빠져 - 걸어만 가고 있다.’ 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의 ‘나의 정신을’과 ⓓ의 ‘환각시키는지’는 ‘나의 정신을-환각에 빠지게 하는지’로 [대상-서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①과 ②의 ‘환각시키는지-걸어만 가고 있다.’의 관계는 ‘환각에 빠지게 하는지-나는 어딘가에 끌려 걸어가고 있다.’로 이루어져야 명확한 의미가 전달된다.
일반적으로 문장 성분의 일부가 생략되어도 문장이 적절한가의 여부는 각 언어 사용자에 따라 주관적인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특히 문맥에 의해 특정한 성분을 임의적으로 생략할 수 있는 국어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므로, 문장 성분의 필수성은 문맥에 의하여 생략될 수 있는 성분의 생략이 아니라 그 성분이 있어야만 문장이 짜임을 이룰 수 있다는 의무성의 문장 성분이어야 한다.(김기혁, 1995:540-542)
2. 성분 호응의 범주화 전략
가. 범주화 전략의 이론적 배경
성분 호응에 관해 초등 수준에서부터 교육적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 부분과 전체의 의미를 분류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범주화 전략을 제안한다.
범주화란 세상의 여러 대상이나 사건들을 분류하여 비슷한 것끼리 묶어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을 말하며, 범주화 전략이란 범주적 사고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언어 사용의 전략을 일컫는 말이다.
어떤 언어 텍스트든 전체의 의미는 부분들의 의미와 부분들이 결합된 방식의 함수이다. 이 원칙을 문장에 적용하면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을 이루고 있는 어휘들의 의미와, 그 문장이 갖는 문법적 구조의 특질이 부여하고 있는 의미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성 어휘가 동일하더라도 결합 관계가 다를 때 문의 의미는 달라지게 된다. 문장의 의미는 어휘가 지니는 의미의 성분과 어휘들이 이루는 문법적 구조가 지닌 의미의 합성으로 결정된다.
성분 호응의 구조는 부분(segment)들의 결합 관계로 이루어진다. 부분은 Chomsky(1986)의 용어로서 상위부가(chomsky-adjunction)에 의해서 얻어지는 구조를 말한다(영어학 사전, 1990:1096). 한 범주 a가 한 절점(node) A에 상위부가된 구조에서, A1과 A2를 각각 부분이라고 하며 A1과 A2는 함께 한 범주를 이룬다. 이때 A1과 A2는 독립된 범주가 아니며, 다음에서 보듯이 구조는 한 범주의 하나 이상의 실현(relization)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A1(부분)
a(범주) A2(부분)
......
이러한 ‘부분’의 개념은 ‘발생(occurrence)’과 개념적으로 동일하다. May(1985)는 부가가 일어날 때 생기는 새로운 절점은 새로운 범주가 아니라 부가의 착지점(landing-site)상의 절점인 범주와 범주적 자질(categorial feature)을 함께 하는 것으로 범주의 일부분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가는 한 범주의 여러 발생의 집합(a set of occurrences of nodes/categories)을 유도한다고 보고 있다.
이를 국어 예문을 통해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관계로 분석된다.
V AP
서술어 서술(부분)
전망하다
NP AP
명사구 서술(부분)
내일은 비가 오다 (+ ㄹ 것으로)
모든 유형의 절에 있어서 하나의 ‘참여자’는 구조적으로 주어로 표현된다. 주어는 언어 기능의 실현에 있어서 정형 동사 요소와 더불어 법의 역할을 충족시켜 주는 명사류이다. 주어는 관점에 따라 행위자를 가리키는 ‘논리적 주어’와, 언어 소통 장면에서 화자와 청자가 택하는 역할과 관계를 말하는 ‘문법적 주어’와, 보다 더 큰 발화에서 메시지로서의 절의 조직과 관련된 ‘심리적 주어’ 등이 있는데, 문법에서 말하는 문법적 주어는 표층 구조의 현상이며 그 이면에는 논리적·의미적 구조나 혹은 심층 구조라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관계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 부여에서 성분 결합의 성분 호응 문제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행위자와 행위의 관계는 주체와 서술의 관계이며, 이것은 문장의 경우 주어와 서술어로 실현된다. 서술어에서 범주화되는 부분들이 문장의 경우는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로 형식화될 수 있다.
단문이든 장문이든 가장 기본적인 이원 구조로 범주화하여 의미를 일차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범주화 전략은, 이해 능력이 미숙한 독자나 표현 능력이 부족한 필자에게 시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언어 전략이다.
나. 범주화 전략의 구조
모어 교육은 ‘자연성’의 원리에 가장 충실히 따라야 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성분 호응 지도 또한 주어, 서술어 등의 성분 관계나 부사어의 수식이라는 문법적인 기술보다는 ‘무엇이-어떻게 되다’ 등의 [주체-서술] 관계, ‘무엇을-어찌하다’ 등의 [객체-서술] 관계라는 의미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미 중심의 관계 인식을 위해 다음과 같은 성분들의 결합 관계를 확인하는 자가 인지 확인의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질문을 하여 문제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방법이다.
다음에서 몇 관계를 예로 들어 살펴 보자. 이것은 언어 요소들간의 [주체+서술], [피·사동주+서술], [객체+서술], [수식+서술] 관계에 대한 명확한 성분 호응 인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주체> <서술>
+
<피·사동주> <서술>
+
<객체> <서술>
+
<수식> <서술>
+
한편 성분 호응의 문제에서 성분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의미적 공백을 확인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서 교사는 학습자가 자가 인지를 할 수 있고 범주화 전략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자일 뿐이며, 모든 문제 해결은 학습자 스스로 해야 한다. 성분 호응을 교수 학습하는 과정을 단계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비호응 관계를 인식하여 호응이 되도록 유도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1단계 : 호응 성분과 비호응 성분 관계의 인식[교사+학습자]
2단계 : 성분 비호응 단위의 발견 [학습자 중심]
3단계 : 성분 비호응의 문제 지적·설명 [학습자 중심]
4단계 : 전체적인 형태와 의미 확인·문제 해결[학습자 중심]
5단계 : 성분 호응의 인식과 구문 정리 [교사+학습자]
1단계에서는 교사의 보조적 설명과 학습자의 활동이 함께 이루어지면서 문장에서의 호응과 비호응 성분 관계를 구별하여 인식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성분간 비호응일 경우를 발견하는 단계로서, 여기에서는 학습자의 능동적인 활동이 중요하다. 3단계에서는 비호응 성분의 구체적인 원인과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 다음에 적격한 성분으로 대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단계까지 역시 학습자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분 호응에 대한 인식과 호응 구문에 대한 정리가 교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Ⅳ. 맺음말
표현의 문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성분 호응은, 우선은 주어와 서술어라는 범주화로 인식하는 전략을 기본으로 하여 학습자 스스로 인지해야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교사는 학습자가 정확한 관계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바르게 교정해 줘야 한다. 성분 호응과 같은 문제는 언어 사용자의 관계 인식에 대한 문제이므로, 정확한 표현을 산출할 수 있도록 언어 사용 초기 단계부터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성분 호응의 문제를 접근할 때 가장 우선이 되고 기본이 되는 것이, 주어와 서술어의 적격한 관계를 찾는 이원 구조 파악이라고 보았다. 국어교육에서 성분 호응과 같은 문제는 초등 수준에서부터 비중있게 다루어야 하며, 중등·고등 수준에서도 지속적인 교정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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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교재 구성을 위한 현대시 정전 연구*
A Study on the Modern Poetic Canon for
the Formation of Literary Text
윤여탁**
Ⅰ. 머리말
학교 교육에서 학습자에게 교육되는 내용은 주로 교과서로 대표되는 교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물론 교육의 장면에는 학습 환경적인 요소인 교실이나 교재 등과 같은 물적 요인이나 교사와 학습자라는 인적 요인이, 똑같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 중에서 교육에 작용하는 물적인 요인의 하나로 교육의 내용을 결정하고 구성하는 교재는, 교육 현장에서 특히 강조되어 왔다. 즉 교재에 어떤 내용이 수록되느냐에 따라 교육의 질적, 양적인 성과들이 결정되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그동안 이 기준은 유동적인 인적 요인보다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재에 수록되는 교육 제재의 객관적인 기준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교과서 편찬 지침’이라는 문서에 의하여 교재 선정의 기준은 개괄적으로 제시되는 열린 관점(?)을 지향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교과서에 수록될 작품의 선정에는 교재 편찬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교재 구성에 대한 심의 역시 교육 정책 당국에 의하여 임명된 심의자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교재의 편찬자나 심의자의 특성 ꠏꠏ 연구 성향이나 이념적 성향이 교재 구성에 깊이 작용하게 된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본 연구는 바람직한 문학 교재 구성을 위해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론적인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즉 정전(canon) 확정을 위한 기초 연구를 통하여 정전 수립을 위한 기준을 마련하고, 이런 기준에 의거하여 우리 문학 교재에 수록될 수 있는 정전 목록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동안 영문학을 중심으로 한 정전 논의가 소개되면서 정전의 해체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아직까지 정전을 확정해본 적이 없는 우리 문학 교육의 정전 수립을 위한 이론적 기초 작업과 실제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고에서는 주로 현대시 제재를 중심으로 우리 문학사와 문학 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정전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실제로 우리 문학 교육 논의에서도 이 분야에 대한 원론적인 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 즉 과거나 현재의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시 작품의 정전성 문제를 중심으로, 교재로 선정된 시 작품의 이데올로기성이나 이에 작용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문제 제기와 비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많은 교과서, 예를 들면 국어, 문학, 독서 등은 물론 부교재적인 성격을 지닌 엔솔로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재에 수록된 작품 선정의 기준은 제대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제 우리 문학 교육에서도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비판할 대상이 없이 비판할 것이 아니라 비판할 만한 대상을 우선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현재 문학 교육에서 활용되는 교재들에 수록된 시 작품을 분석, 연구하여 정전 수립을 위한 기준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문학 교재를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여, 우리 문학 교육의 정상화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또한 교수법 차원에서 이런 문학 작품 읽기를 세련화하는 한편, 읽기의 방법을 다양화할 수 있는 방안도 강구하고자 한다.
Ⅱ. 문학 정전 구성의 원리
일반적으로 ‘정전(canon)’은 측정의 도구로 사용된 ‘갈대’나 ‘장대’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의 ‘kanon’에서 유래한 말로, 이 후 ‘kanon’은 ‘규칙’ 혹은 ‘법’이라는 제2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문학적으로는 주로 보존하거나 학습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나 작가의 목록을 말하는 것으로, 20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그 대표성과 객관성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면서 정전 목록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즉 고대에는 읽어야 할 신학의 경전을 중심으로 정전이라는 개념이 정리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육 특히 문학 교육에서 학습할 대상인 고전(古典)을 선정하는 분야로 확대․발전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정전 논의는 주로 학교에서 학습해야 할 문학 텍스트의 목록이나 작가의 목록을 확정하는 부분에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 이는 정전이 어떻게 정해지느냐에 따라 학습의 방향이나 내용이 좌우되기 때문에, 정전 목록의 중요성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정전이 구성되는 방식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정전 자체가 갖는 속성과 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선택하게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권력과 문화적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그들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념적 형식으로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사람들의 의도와 직접적인 관계 없이 더 광범한 문화의 운동 법칙에 의해 구성된다는 견해가 있다.
이 중 첫 번째 관점은 정전적 텍스트가 지닌 고전적 가치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독자나 학습자들에게 모범으로 작용한다는 정전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정전으로 제시된 목록들은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사람들은 이를 학습하여 수용하는 한편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정전은 이를 학습하는 공동체의 공통 이념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그 사회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실체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하여 정전을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로 보는 견해는, 문학을 포함한 문화 현상이 정치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정전 목록은 어떤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실체로,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작성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정전은 항상 유동적인 것으로 권력 투쟁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다른 집단들(예를 들면, 흑인이나 노동자 계급, 여성 등)과의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에 따라 정전은 수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끝으로 문화 법칙에 의하여 정전이 구성된다는 견해는, 학습이 이루어지는 학교나 문화 상품을 생산 보급하는 문화 자본이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문화 재생산의 결과를 반영하여 정전 목록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는 학교나 자본주의 생산과 소비 구조에 작용하는 자본가의 이해가 작용하지만, 꼭 그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거나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전 확정 작업이나 목록 자체보다는 이런 텍스트를 선택하거나 해석․평가하여 학습하는 과정에 이데올로기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견해들은 모두가 정전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이 정전이 어떻게 구성되느냐는 원리에 주목하고 있다. 다만 후자의 두 견해들은 전자의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정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작용하고 있다. 즉 정전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이 아니라는 점과, 새로운 텍스트의 생산과 보급에 따라 정전 목록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정전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생기는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이거나 그것이 유통되는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법칙이 작용한 결과의 산물로 간주된다.
이처럼 정전은 한 번 정해지면 영원히 불변하는 권위를 지닌 성서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터전을 삼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제반 현상과 힘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인종적인 차원에서는 흑인, 계급적인 차원에서는 노동자나 농민, 성(gender)의 차원에서는 여성주의의 관점을 반영한 텍스트가 기존의 정전을 대체하거나 기존의 정전과 더불어 자리를 잡게 된다. 또한 현대 사회의 가벼움과 결탁한 상업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된 통속 문학이나 대중 문학이, 문학 교육과 문화 교육에서 차지하고 있는 기존 정전의 권위를 위협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동안 우리 문학 교육에서는 주로 저항시와 순수시 계열의 텍스트가 준정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이런 경향에 대한 비판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기존의 문학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리얼리즘 계열의 시 텍스트는 물론 모더니즘 계열의 시 텍스트가 교육과 평가의 대상으로 선정되고 있다. 또한 세계 문학 속에서 우리 민족 문학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세계 문학의 경향과 조류(예를 들면, 제3세계의 문학 등)를 학습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문학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론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나타난 것이기도 하지만, 기존 정전에 대한 도전을 통해 새롭게 작성된 정전 목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문학 교육에서도 누구나에게 인정되는 정전은 구성된 적은 없지만, 준정전의 성격을 지닌 텍스트들이 교육 현장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있으며, 그것이 현실이자 실체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이런 준정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문학 텍스트, 특히 시 텍스트의 목록과 성격을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바람직한 정전 확립을 위한 제안을 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이 글에서는 객관적인 정전 목록을 작성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그 가능성과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을 현상적으로 점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거듭 밝힌다.
Ⅲ.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시의 실제
이 부분에서는 현재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시 텍스트의 목록과 작가의 목록을 조사하고, 그 경향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이런 정전 구성의 문제점을 실제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제6차 교육 과정에 의하여 편찬되어 교육되고 있는 18종의 ꡔ문학ꡕ 교과서를 대상으로 하여, 여기에 수록된 시 텍스트와 시인의 목록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준정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교과서 수록 시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기초로 하여, 우리의 문학 정전 논의를 위한 가능성과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여기서 필자가 조사한 자료는 개화기 이후의 근․현대시와 현대 시조이며, 자료의 분류는 작품이 발표된 연대보다는 시인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다만 전체적으로 수록 작품의 내용이나 현황을 파악할 때, 다른 교과서에 중복 수록된 작품들은 각각 개별 작품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통계 처리상 여러 번 중복 수록된 작품을 한 편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런 작품에 대한 조사 내용도 아울러 밝혀 두었다. 자료를 조사하여 분석한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 개관
작품 수록된 시인의 수 : 64명
수록된 작품의 총수 : 136작품
2권 이상의 교과서에 중복 수록된 작품의 수 : 2권(17작품), 3권(15작품), 4권(9작품), 5권(6작품), 6권(3작품), 7권(3작품), 8권(1작품), 9권(2작품), 10권(1작품), 12권(2작품)
수록된 시인의 작품명
구상(초토의 시8 ꠏꠏ 적군 묘지 앞에서)
김광균(외인촌, 추일 서정, 설야, 뎃상, 와사등)
김광섭(성북동 비둘기, 산)
김규동(나비와 광장)
김기림(바다와 나비)
김남조(설일, 정념의 기)
김동환(국경의 밤)
김상옥(사향, 백자부, 옥저)
김소월(진달래꽃, 접동새, 산유화, 초혼,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으면, 먼 훗일, 가는 길)
김수영(눈, 풀)
김억(봄은 간다)
김영랑(북, 내 마음을 아실 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오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
김종삼(민간인)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김철영(애국가)
김춘수(꽃, 꽃을 위한 서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시1)
김현승(눈물, 아버지의 마음, 가을)
노천명(사슴)
박남수(아침 이미지, 종소리, 새)
박두진(향현, 도봉, 어서 너는 오너라, 청산도, 해)
박목월(산도화, 청노루, 불국사, 하관, 가정)
박봉우(휴전선)
박용래(연시)
박인환(목마와 숙녀,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박재삼(울음이 타는 강, 흥부 부부상, 밤바다에서, 추억에서)
백석(여승, 고향, 여우난 곬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공방)
변영로(봄비)
서정주(자화상, 화사, 국화 옆에서, 추천사, 무등을 보며, 귀촉도, 상리과원, 동천, 질마재 신화)
신경림(갈대, 목계 장터, 농무)
신동엽(껍데기는 가라,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신동집(오렌지)
신석정(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슬픈 구도, 작은 짐승, 꽃덤불)
심훈(그 날이 오면)
오상순(방랑의 마음)
유치환(일월, 생명의 서, 깃발, 바위, 울릉도)
윤동주(별헤는 밤, 또 다른 고향, 십자가, 참회록, 쉽게 씌어진 시)
이동주(강강술래)
이병기(난초)
이상(거울, 오감도 시 제1호, 가정)
이상화(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성부(벼)
이영도(신록)
이용악(낡은 집)
이육사(절정, 청포도, 꽃, 광야)
이장희(봄은 고양이로다)
이중원(동심가)
이필균(애국하는 노래)
이형기(폭포)
이호우(달밤, 살구꽃 핀 마을)
이희승(벽공)
작자 미상(독립군가, 심어사)
정완영(조국1)
정인보(자모사)
정지용(향수, 말, 유리창1, 고향, 비)
정한모(나비의 여행)
조병화(해마다 봄이 오면)
조지훈(봉황수, 승무, 풀잎 단장)
주요한(그 봄을 바라, 불놀이)
천상병(귀천)
최남선(해에게서 소년에게)
최돈성(애국가)
한용운(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당신을 보았습니다)
황동규(기항지, 풍장1, 조그만 사랑 노래)
수록 작품수에 따른 시인 분포표
수록된 시인의 경향별 분류표
중복 수록된 작품과 빈도수
이상의 조사 자료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그동안 우리 시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었던 시인들인 서정주, 김소월, 김영랑, 이상, 청록파, 유치환,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등과 그들의 작품이 여러 교과서에 두루 수록되고 있다. 그리고 해금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지용, 백석이 새롭게 추가되고 있으며, 1950년대 이후에 주로 활동한 박재삼, 신경림, 황동규, 김수영, 신동엽 등과 그들의 작품이 다수 수록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문학 교육에서 순수시와 저항시가 여전히 준정전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현대의 시 작품과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계열의 시 작품이 1990년대 이후에 추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순수시와 저항시(또는 민족주의 시) 경향(이상을 제외하고)이 준정전 역할을 하고 있던 점에 대한 비판과 납․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의 영향을 받아, 현재 학습되고 있는 제6차 교과서는 작품 수록의 폭을 시기적으로나 경향적인 측면에서 넓히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 문학 교육에서 준정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목록은 작품에서나 시인의 측면에서 폭을 넓히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 시인의 대표 작품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복 수록된 고빈도 작품을 살펴보면, 김수영의 「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의 「거울」, 이육사의 「절정」,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와 「님의 침묵」, 정지용의 「유리창1」, 김동환의 「국경의 밤」, 윤동주의 「참회록」, 주요한의 「불놀이」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들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 중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이육사의 「광야」 정도가 ꡔ문학ꡕ 교과서에서 고빈도 작품이 아니거나 전혀 수록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다른 교과서의 수록 여부와 교육적인 위계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교과서에 수록된 시인이나 중요한 텍스트들이 주로 근대라고 할 수 있는 일제 강점기에 집중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이들 텍스트들이 발표된 시기를 따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수록된 시인의 작품명’이라는 분석 항목에서 이런 특성은 쉽게 확인된다. 이는 우리 문학 교육의 현장에서는 동시대성과는 거리가 있는 과거의 텍스트를 교수․학습의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런 텍스트들이 준정전의 위치를 확고하게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Ⅳ. 바람직한 정전 구성의 방향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습 현장에서 교수․학습의 내용을 결정하는 텍스트는 거의 모든 국면에 작용한다. 우선적으로 대상 텍스트가 학습의 내용과 실제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습 교재에 수록되는 텍스트를 지칭하는 정전이라는 개념은 문학 교육은 물론 국어 교육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즉 정전으로 채택된 텍스트의 내용이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전 구성이 교육의 모든 국면을 결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정전 구성 문제 외에도, 학습의 구체적인 내용과 실제를 결정하는 데에는 교수․학습의 변인들, 즉 교육 과정이나 평가와 같은 교육 제도는 물론 교사의 학습 방법이나 내용인지도, 교사의 이데올로기 등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전은 다른 어떤 변인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동안 영문학 교육을 중심으로 하여 정전 비판 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면서, 우리 문학 교육에서도 정전 구성을 둘러싸고 논의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영문학에서의 정전 논의와 우리의 경우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먼저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의 경우 정전보다는 정전의 기능을 하는 준정전만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영문학이 처한 상황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에는 기존 정전에 대하여 비판적인 비판 그룹, 즉 민족이나 계급, 성의 차이가 심각하지 않다는 점이다. 적어도 영문학이 직면했던 정도는 아니며, 이런 점은 보통 교육이 모든 국민에게 고루 베풀었지고 있음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의 정전 논의는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우리의 상황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영문학에서의 논의를 충분히 수용하여 정전 목록을 구성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여건에 제대로 부응하는 방향을 정립하여야 한다. 즉 교육이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주체적 인간을 양성하는 역할도 동시에 담당하고 있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래서 정전 구성에 작용할 수 있는 편협된 시각을 극복할 수 있는 열린 시각을 견지하여야 한다. 다양한 가능성과 비판과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유동성을 지닌 정전 개념을 기초로 하는 정전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존재하지도 않은 정전을 비판하는 비판 이론을 넘어서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비판적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정전은 비판의 대상 이전에 학습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특히 기존의 문학 교육에서 대상으로 삼았던 정전 텍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도 있으며, 이런 점들은 새로운 정전 구성에서도 바르게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 변혁이나 혁명만이 대안일 수 없으며, 기존에 정전의 역할을 했던 것들의 정전성이 아직도 유효한가를 검토하여야 한다.
아울러 우리 민족 문학과 문화의 유산을 두루 포괄하면서, 우리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도록 정전을 구성하여야 한다. 이런 점은 주로 고전 교육이 이미 죽은 과거의 유산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도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과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민족 문화의 유산이 현대 사회에도 유의미한 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동시대적인 효용성도 아울러 확보할 수 있도록 정전을 구성하여야 한다. 또한 이런 정전을 교육함으로써 학습자들을 포함한 정전 수용자들이 자신은 물론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정전을 구성할 때, 정전의 위계화 문제도 같이 검토해야 한다. 즉 교육하여야 하는 대상을 결정하는 교과서에 수록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정전 목록이, 학습의 단계를 고려한 위계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그동안 교과서에 수록된 텍스트 구성이 이런 위계화의 문제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교육 과정에 맞는 학습 내용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정전 목록을 구성하여야 한다. 정전 목록을 나열만 할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구성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정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문학 교육에서 적용될 수 있는 정전이 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중의(衆意)를 모아야 한다. 비판 이론 일반이 그런 것처럼 비판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을 통하여 비판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처했던 과거와 처하고 있는 현재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정전을 구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는 정전과 그 교육의 효과는 물론 학습 단계의 위계를 같이 고려한 정전이 구성되어야 한다.
더구나 문학 교육이 문학 작품의 이해와 감상이라는 제한적인 범주를 넘어서, 언어 문화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런 원리에 입각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주체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문학 교육의 내용이자 대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학 정전의 개념과 범주도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정전 목록이 구성되어 효과적인 문학 교육에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런 정전을 둘러싼 여러 문제와 정전 구성의 바람직한 방향을 살펴보았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이 글은 문학 교육 특히 시 교육에서 정전적 위치를 차지하는 텍스트의 실제를 ꡔ문학ꡕ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문학 교육에서 준정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목록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과 목록을 구성할 때 고려할 점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정전 목록에 수용될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하여 알아보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선 이런 정전 구성에는 우리 시 문학사에서 대표적인 시인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을 폭넓게 반영하여야 한다. 즉 문학사적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전 구성의 원칙을 수립하여, 어느 한 쪽만의 편협된 시각을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문학 정전의 구성이 우리 문학사의 일반적인 흐름이나 평가와는 달리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교육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학적 측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시 문학사의 연구 결과가 제대로 반영될 때, 우리 문학 교육의 정전 목록 역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기존의 목록에 포함되었던 순수시나 저항시 중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 청록파, 서정주, 유치환, 이육사, 윤동주는 물론 정지용, 김춘수, 박재삼, 박용래 등과 같은 시인들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아울러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썼던 이상, 박남수, 박인환, 김경린, 김수영, 1960년대 ‘현대시’ 동인 등이나 리얼리즘 계열의 시를 썼던 임화, 이용악, 백석, 해방기 신진 시인, 신동엽, 1970년대 민중 시인인 고은, 신경림, 김지하 등이 포괄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은 텍스트는 물론 우리 학습자들이 현재 접하고 있는 동시대적인 텍스트나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텍스트를 대항 정전 목록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즉 주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의 제한성에서 벗어나 학습자들이 현실적인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텍스트 목록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만 이런 목록은 정전적인 텍스트와의 대결하는 측면을 보여주거나, 정전적인 텍스트가 보이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대항 정전에는 동시대에 인기를 끌고 있는 텍스트와 그 생산자를 적극 포함시킬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 발표된 텍스트들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여, 황지우, 김정환, 장정일, 도종환, 이성복과 같은 동시대의 인기 있는 시인이나 류시화, 용혜원, 원태연, 이정하, 이풀잎 등과 같은 소위 ‘키치’ 시인의 시 텍스트가 대항 정전이라는 차원에서 교육의 제재로 선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시 텍스트는 학생들이 정전적인 시 텍스트만 배우는 교실 밖에서는 더욱 친숙하게 접하여 자기 생활화하고 있는 것들로, 이런 텍스트들을 바람직한 인간의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이라는 더 넓은 틀 속에서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끝으로 정전 목록은 권위를 자랑하는 종교적인 경전 목록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고자 한다. 항상 새롭게 수정될 수 있으며,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당연히 변해야 한다. 더구나 이런 수정이 기존 정전을 대체하는 또다른 정전으로 보거나 기존의 정전에 가중되는 짐처럼 새로 첨가되는 것이 정적(靜的)인 것은 아니다. 학습자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같이 작용하는 역동적(力動的)인 텍스트의 목록이다. 또한 이런 정전은 우리의 문학 학습에 작용하는 자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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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사용 교육과 사고력*
― 텍스트의 이해를 중심으로 ―
이 삼 형**
Ⅰ. 머리말
교육의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목표 중의 하나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는 일이다. 이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으며 예전과 오늘이 다르지 않다. 서양의 그것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규정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로우니라(學而不思則岡 思而不學則殆)’라고 한 공자의 말은 사고의 가치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교육이 성숙한 사고자를 길러야 하는 이유는 개인과 사회의 요구와 이익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면에서 성숙한 사고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일상적인 삶은 문제 해결 과정의 연속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신적․물질적 고통을 감수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민주주의 체제의 성공 여부를 결정해 준다. 문제를 분석하고 사려 깊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개개인의 능력이 남의 권리를 인정하고, 법을 준수하며, 올바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성공 여부는 그 구성원의 성숙한 사고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민주주의의 생산성은 공공의 관심과 이익을 위해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비판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교육의 본질적인 목표가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는 일이라면, 국어 교육의 본질적인 목표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국어 교육에서 사고 교육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또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국어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교실 현장의 모습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손영애(1986)는 국어 수업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사가 교과서를 들고 문장을 하나 하나 읽어 가며, 맞춤법, 음운 현상 및 기타 제반 문법 사항, 낱말 및 구절의 뜻, 글 속의 인명이나 지명, 역사적 사건 등을 하나 하나 풀이해 나가는 것이 아직도 보편화되어 있는 국어과 수업의 현장이다. 대개 관련성 없는 잡다한 단편적인 지식을 나열하는 국어 수업을 하며, 글의 특성이나 단원 설정의 취지에 상관없이 어느 글이나 천편일률적으로 문단 나누기, 대의 파악하기, 주제 찾기 등을 한다. 대개의 국어 수업이 독해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도 그 독해 학습조차 진정한 의미의 독해와는 거리가 먼 실정이다.
손영애가 지적한 대로 기존의 국어 수업은 단편적인 지식을 나열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면, 독해 중심의 수업을 한다고 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의 독해와는 거리가 먼 수업이 되었을 것이며 이런 수업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신장시켜 줄 수 있는 수업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본고에서는 국어 교육을 통해서 사고력을 신장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사고력이라는 측면에서 본 국어 교육의 특수성, 텍스트 이해와 사고의 관련성을 살피고, 사고력을 기르기 위한 국어 수업의 조건을 살피고자 한다.
Ⅱ. 국어 교육의 특수성과 사고
현재의 학교 교육은 각 교과로 나누어져 있다. 교육의 목표를 사고력의 신장에 둔다면, 각 교과는 교육이 추구하는 일반 목표를 달성하는 데 공헌해야 한다는 점에서 각 교과도 사고력 신장이라는 목표에 충실해야 한다. 이를 교육의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각 교과는 교육적 보편성에 충실해야 하는 반면 다른 교과와 구별되는 각 교과의 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교과적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교과적 특수성을 갖지 않으면 교과로서 독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사고력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각 교과의 특수성은 어떤 점에서 확보될 수 있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김홍원(1993)은 이 문제에 대해 ‘사회적 탐구력’, ‘과학적 탐구력’이란 용어는 탐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사회적 탐구력과 과학적 탐구력은 다르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며, 이것은 보편적인 사고의 기능, 작용은 없으며 교과, 내용, 지식의 유형에 따라 사고는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접근을 사고 교육에 관한 ‘교과 모형’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반해 인간 사고의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사고 기능, 작용, 과정을 상정하며 이러한 기능, 과정, 작용들은 교과나 내용, 지식의 유형에 관계없이 어디에나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입장을 ‘일반 모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일반 모형’에 서면 교과적 특수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사고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과정이나 시간을 따로 설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러나, ‘교과 모형’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김홍원의 말대로 일반적 사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고를 문제 해결 과정이라고 한다면, 문제의 성격은 다양하며 문제의 성격에 따라 교과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과학과와 관련된 문제는 자연 현상이며, 역사과와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과거사에 관한 문제이다. 교과의 지식은 교과와 관련된 문제 해결의 결과이며, 이는 좀더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반이 된다. 그렇다면 과학적 사고, 역사적 사고란 무엇인가? 이를 과학적 사고와 역사적 사고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정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에서 탐구하는 문제와 역사과에서 탐구하는 문제의 성격은 분명히 다르며, 문제의 성격에 따라 문제 해결 과정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 사고와 역사적 사고란 개념이 성립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국어과와 관련된 사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국어 교육적 사고란 무엇인가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다. 우리는 위에서 문제의 성격에 따라 교과가 나누어진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렇다면 국어과에서 다루는 문제를 찾는 것이 다른 교과와 구별되는 국어 교육적 사고의 핵심을 찾는 것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언어적 표현과 이해의 문제이다. 과학과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자연 현상이며, 자연 현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이다. 만약, 과학적 탐구 과정과 탐구의 결과를 언어로 보고하거나 설명한다고 가정하자. 이는 과학 문제를 탐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과 환경 호르몬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과학적 문제이다. 탐구 결과 어떤 물질이 증가함에 따라 환경 호르몬이 급격한 감소했음을 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자. 이 결과를 신문, 과학 논문을 통해서 알리려고 한다. 물론,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과학자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과학적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가 국어 교육과에서 관심을 갖는 문제이며, 탐구해야 할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국어 교육과에서 탐구해야 할 문제가 명확해진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어과에서 탐구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텍스트로 표현하고 텍스트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그에 파생되는 문제는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표현과 이해 능력의 발달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표현과 이해 능력의 발달을 위한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수업은 어떻게 구조화되어야 하는가, 표현과 이해 능력의 발달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등등의 문제가 국어과에서 탐구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국어 교육과에서 탐구해야 할 문제가 명확해지면 자연스럽게 국어 교육적 사고도 명확해진다. 텍스트로 표현하고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동원되는 사고가 국어 교육적 사고가 된다. 이것이 국어 교육과가 다른 교과와 구별되는 교과적 특수성이다.
Ⅲ. 텍스트의 이해 수준
건전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의 양성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국어 교육이 다른 교과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이 텍스트의 이해와 생산이라는 점을 수용한다면, 텍스트의 이해와 표현과 관련되는 사고가 국어 교육에서 핵심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국어 교육에서는 텍스트의 이해와 표현을 통해서 사고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이해가 국어 교육의 핵심 과제라고 한다면, 핵심 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이해가 무엇인가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노명완(1989)은 이해를 ‘언어를 의미로’ 바꾸는 것이고 표현을 ‘의미를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정의는 아주 명쾌한 듯이 보이지만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는 못한다.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해를 텍스트의 해독(decoding)으로 보느냐, 텍스트의 내용을 기억하고 아는 것으로 보느냐, 독자의 주체적인 반응으로 보느냐는 목표의 문제이며 그에 따라 수업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아울러 평가의 목표도 달라질 것은 물론이다.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서 알아보자.
(1) 우리 나라의 부모들이나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조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밭길로 나아가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이고 손해일 뿐만 아니라, 최선의 길도 아니다.
예문 (1)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태도와 독자의 가치관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나 다음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① 대학 진학만이 최선의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군.
② 대학 진학에 매달리는 우리의 학부형이나 학생들을 설득시키려고 하는군.
③ 대학 입학에 다시 도전하여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개인의 발전이다. 따라서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낭비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④ 필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있군.
⑤ 대학 진학에 매달리는 풍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학부형이나 학생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반응 ①을 보자. 예문 (1)은 우리의 학부형과 학생들은 대학 진학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낭비라고 했으니 결국 대학 진학만이 최선의 길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①과 같이 반응한 독자는 (1)의 중심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되며, 이런 독자들은 (1)을 제대로 이해한 셈이 된다. 반응 ②는 필자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반응 ②를 보인 독자는 반응 ①에 그친 독자보다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필자의 목적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1)의 내용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만약 (1)의 내용을 잘못 파악했을 경우 필자의 목적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a. 오늘밤 영화 보러 가자.
b. 시험 공부해야 돼.
(2)를 친구 사이인 남녀의 대화로 가정하자. (2a)는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영화 보러 갈 것을 제안을 한 것이고, (2b)는 여자가 남자 친구의 제안에 답을 한 것이다. 여자의 답을 들은 남자 친구가 여자의 발화를 축자적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여자의 발화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여자의 대답은 메시지 내용상으로는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표현도 없고, 제안과 관련된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아 남자의 발화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b)를 들은 남자는 여자 친구가 자신의 제안에 대해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제대로 이해한 것이 되는데, 이는 곧 (2b)의 발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남자는 어떻게 여자 친구의 발화가 거절임을 알 수 있을까? 그 단계의 개략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 남자는 여자의 대답이 적합한 것으로 가정하고(적합성 격률), 그 대답이 자신의 제안에 대한 수용, 거절, 다른 제안인가 중의 하나인가 찾아본다.
2단계 : 여자의 대답은 이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축자적 의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3단계 : 시험 공부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공부할 시간을 빼앗는 결과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세상사적인 지식이다.
4단계 : 그래서 여자는 영화 보러 가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5단계 : 남자는 여자의 발화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2b)의 이해를 (1)의 이해와 관련시켜 보면 (2b)의 축자적 이해는 (1)-①의 이해에 대응되고, (2b)가 제안에 대한 거절이라는 것임을 아는 것은 (1)-②의 이해에 대응된다. 물론 텍스트의 성격이 (1)과 (2)가 같은 것이 아니라서(문어적 텍스트와 구어적 텍스트라는 점에서 다르고, 진술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이와 같은 정확한 일대 일 대응 관계가 성립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b)를 축자적 이해로만 그치는 것은 완전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반면에 (1)에서 ①의 반응에 대해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에서 여자의 발화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단계가 여자가 발화한 (2b)의 축자적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발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발화의 축자적 의미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를 (1)에 적용시키면 (1)-①를 바탕으로 (1)-②의 이해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1)에 대한 반응으로 돌아가 보자. (1)에 대한 반응 ③은 대학 입시에 다시 도전하는 것이 낭비라는 (1)의 의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대학 입학에 다시 도전해 보는 것이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며 개인적인 발전이 된다는 것이다. ①의 이해와 ③의 이해는 텍스트의 내용에 초점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③은 텍스트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①을 바탕으로 독자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결국 ③은 ①보다 수준 높은 이해가 된다.
반응 ④는 필자의 의도에 중점을 둔 비판이다. 만약 ③과 같은 비판이 가능하다면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든 필자의 태도는 비판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필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며(② 수준에서의 이해), 필자가 제시한 방안이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③ 수준에서의 이해). 결국 ④는 필자의 서술 의도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며, 필자의 서술 의도를 비판하고 있으면서 ①②③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보다 수준 높은 이해가 될 것이다.
반응 ③은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비판이고 ④는 필자의 의도에 비판이므로 ‘비판’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①②가 텍스트의 내용과 텍스트에 나타난 필자의 의도 중심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중심 이해(text-based comprehension)라고 한다면, ③④는 독자의 반응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독자 중심 이해(reader-based comprehension)라고 할 수 있다.
반응 ⑤는 대학 진학에 매달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 제시한 것이다. 물론 ⑤에서 제시한 방안의 타당성은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나 (1)의 이해가 이런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⑤ 수준에서의 이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①~④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즉, (1)의 필자가 개인적․국가적으로 낭비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므로 그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아울러 ⑤ 수준에서의 이해는 ①~④ 수준의 이해보다는 텍스트에서 자유롭다. ③④ 수준의 이해가 독자 중심 이해라고는 하지만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비판이고 필자의 의도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모두 텍스트와 관련성을 갖지만, ⑤ 수준은 텍스트를 완전히 벗어난다. 텍스트에 제시된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접근하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인지적 텍스트의 이해는 5개의 수준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은 3개의 수준으로 대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해의 5개 수준은 (1)에 대한 ①~⑤까지의 반응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고 필자의 의도를 확인하는 단계(①과 ②의 이해 수준), 이에 대해 독자가 반응하는 단계(③과 ④의 이해 수준), 그리고 텍스트를 벗어나서 이해의 수준을 확대하는 단계(⑤의 이해 수준)로 나눌 수 있다. ③과 ④ 수준의 이해를 비판적 이해라고 말할 수 있고, ⑤ 수준의 이해를 창의적 이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③ 이상의 수준을 이해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일단 화행 이론이나 화용론의 입장에서는 수신자의 반응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2)에서 볼 수 있듯이 여자의 발화를 듣고 남자가 어떻게 그녀의 의도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창문을 열라는 뜻으로)방이 매우 덥군.”이라는 발화는 청자에게 명령이라는 화행을 수행하고 있지만, 청자가 그 발화를 듣고 창문을 열라는 뜻임을 이해하면 의사 소통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청자가 그 발화를 듣고 창문을 열거나 열지 않는 문제는 언어학적인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이해를 수신자의 반응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한다고 해서 국어 교육에서 그 입장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텍스트의 이해를 텍스트의 내용과 발신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지식에 대한 객관주의적 관점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객관주의적 패러다임에 서면 지식은 고정된 불변의 것이 되며 학습자(이해자)는 정해져 있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를 텍스트의 이해에 적용하면 발신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의도는 고정된 것이고 수신자는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객관주의적 관점은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그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다. 구성주의에서는 지식이나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어서 전달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수신자)가 상호 거래(transaction)를 통해서 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본다. 객관주의에서의 학습자는 수동적인 존재이지만 구성주의에서의 학습자는 능동적으로 의미를 구성해 나가는 주체가 된다. 텍스트의 이해를 텍스트와 수신자와의 상호 거래로 보면, 수신자는 텍스트에서 정해진 하나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의미를 구성해 나가는 구성자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텍스트에 대한 수신자의 능동적 역할이 강조된다.
수신자의 능동적 역할은 사실 텍스트의 내용 이해 단계에서부터 강조된다. 스키마 이론에 의하면, 독자가 글에 대한 스키마를 갖고 있지 않거나 스키마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텍스트에는 모든 정보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많은 정보들이 생략되어 있으며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생략된 정보를 채우거나 암시된 정보를 밝혀 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3) 나는 오늘 아침 늦게 일어났다. 방과후 청소를 하면서 다시는 늦잠을 자지 않아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3)에는 학교에 지각하였다는 정보나 그 벌로 청소를 하였다는 정보는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3)을 읽는 독자는 주인공이 학교에 지각을 하였으며 그 벌로 청소를 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텍스트에 나타나지 않은 이러한 정보를 추론하지 못하면 (3)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되지 못함은 물론이다.
이렇게 보면 텍스트의 내용의 파악 단계부터 독자의 능동적인 역할은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독자의 능동적인 역할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단계에까지 나아가는 것이 필수적인가하는 것이다. 이를 대상 인식에 대한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의 관점을 이용해서 설명해 보자. ‘게슈탈트’란 원래 ‘형태’ 또는 ‘전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독일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여기서 전체란 산만한 부분들의 단순한 합 이상의 것, 즉 어떤 의미체로서의 전체를 말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에 의하면, 어떤 자극들을 접했을 때 개체는 일정한 법칙(완결성, 근접성, 유사성의 법칙)에 의해 자극들을 조직하여 의미 있는 전체로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게슈탈트 심리학의 대상 인식을 텍스트 이해에 적용해 보자. 텍스트의 내용은 대개 거시적인 입장에서 문제와 그 문제의 해결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장하는 글은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텍스트에서 그 문제에 관한 논의가 불충분하다거나 잘못된 것일 때 독자는 그 문제에 관해 완결된 논의를 인식하려고 할 것이다. 즉, 기존의 텍스트가 완결된 텍스트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비판적 이해와 창의적 이해가 동원될 것이다. 이를 위에 제시한 예문 (1)에 적용시켜 보자. (1)은 대학 입시에 매달리는 문제에 관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1)에서 제시한 논의의 내용은 대학 입시에 매달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충분한 논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상을 완전하게 인식하려고 하는 독자는 비판적 이해를 동원하고 창의적인 이해를 동원해서 완전하게 인식하려 할 것이다. 그런 이해가 (1)의 ③,④,⑤ 수준의 이해이다.
이렇게 보면 텍스트의 이해는 텍스트 중심 이해(text-based comprehension)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독자 중심 이해(reader-based comprehension), 나아가 창의적 이해의 수준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지적인 텍스트이건 정의적 텍스트이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Ⅳ. 텍스트의 이해와 사고
이해는 그 자체가 사고 과정(thinking process)이기도 하고 다른 사고 과정의 구성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우선 이해는 분석, 비교/대조와 같은 기초 사고 기능들과는 다르다. 이해는 이러한 기초 사고 기능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거시적인 수준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기초 사고 기능들과 구별하여 사고 과정이라고 한다. 아울러 문제 해결과 같은 거시적인 사고 과정은 상황이나 문제의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상황이나 문제의 확인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므로 이해는 이들의 구성 요소가 된다.
텍스트 이해와 사고는 텍스트 이해에 동원되는 사고의 문제로 환원된다. 텍스트 이해에 동원되는 사고를 알아보기 위해, 텍스트 이해를 위해 독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위에서 제시한 예문 (1)을 통해서 알아보자.
먼저, 독자들은 각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문장을 의미 있는 구로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어 첫째 문장을 (우리 나라의 부모들이나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생각한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와 같이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분석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독자들은 각 문장에서 중요한 정보를 선택한다. 첫 번째 문장에서 중요한 정보는 ‘대학 진학’이 될 것이다. 만약, ‘고등학교’를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다음 문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각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매하거나 비유적인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 문장에서 ‘가시밭 길’이 뜻하는 바가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독자들은 각 문장의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도 각 문장을 이해하는 일과 함께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용 표현인 ‘이러한 생각’이 가리키는 내용을 파악해야 하고, 접속어인 ‘그래서’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고, 문장들 간의 의미적 연결을 위해 암시하는 정보를 추론해야 한다. 위의 글에서 첫째 문장과 둘째 문장 사이에는 부모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것을 원했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해야 한다. 독자들은 문장을 연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으려고 한다. 독자들은 글에 제시된 정보를 모두 기억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글의 중요한 정보를 요약하여 기억하려고 한다. 그래서 위의 글을 읽고 난 독자는 위의 글이 ‘대학 진학만이 최선의 길이 아니다.’라는 내용이었음을 파악할 것이다.
이상이 텍스트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기본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독해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과정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제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보다 높은 이해를 위해서는 텍스트의 내용과 필자의 의도를 비판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다시 공부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낭비이고 손해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하는 과정을 상상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을 때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그려보기도 할 것이다. 아울러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동원하기도 한다. 아울러 훌륭한 독자는 자신의 이해 과정을 검토하고 문제가 있을 때, 적절한 개선책을 사용한다. 만약 진로 선택에 관한 정보를 충분하게 갖고 있지 않을 때는, 그 방면의 전문가의 조언이나 책을 참조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의 과정을 정리하면 문장의 이해, 문장의 연결 이해, 글 전체의 이해, 글 내용 상세화하기, 전략적으로 읽기로 묶을 수 있을 것이며 그 하위 과정은 <표1>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표1> 이해 과정과 독자의 역할
<표1>은 텍스트의 이해 과정에서 독자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텍스트 이해 과정과 사고 기능과의 관계에 대해서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많이 있다. 먼저 텍스트의 이해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이 인지적 사고 그것도 정형적 사고라는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실제로 <표1>의 문장의 이해에서 구로 나누고, 중요 단어 선택하기에는 속성 및 요소 파악, 관계 파악, 핵심 아이디어 식별과 같은 분석적 사고 기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문장의 연결에서 연결 관계와 대용 관계 파악하기에는 관계 파악과 같은 분석적 사고 기능 외에 범주화, 순서화, 비교/대조와 같은 조직적 사고 기능이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텍스트 이해에서 정형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비정형적인 사고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형적인 사고와 비정형적인 사고의 개념을 알아보기 위해 다음 (4)와 (5)번 문제에 동원되는 사고를 비교해 보자.
(4) 다음 모임은 7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있습니다. 오늘이 7월 5일 월요일이니 그 날은?
(5) 여름에는 열을 반사하기 위해 흰색으로 변하고, 겨울에는 열을 흡수하기 좋게 검은 색으로 변하는 새로운 지붕을 고안하려고 한다.
(4)와 같은 문제는 하나의 분명한 출발점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 대해 분명하게 자각한다. 물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 이상일 수 있다. 하나의 과정은 지난 토요일로 돌아가 거기서 토요일의 날짜를 계산해 가는 방법이 있다. 5일이 월요일이니 3일이 토요일이었으며, 10, 17, 24, 31일이 토요일이다. 7월은 31일까지 있으므로 31일이 토요일이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월요일의 날짜를 계산해 나가다 토요일을 찾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월요일의 날짜는 12, 19, 26, 33일이므로 토요일은 24, 31일이 될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문제 (5)는 (4)와 같지 않다.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이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도 하나 이상일 수 있다. 문제 (5)의 해결자들은 식용 가오리가 바다 표면에 접근하면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색깔을 변화시킨다는 것과 이런 변화는 색소 세포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색소 세포는 표피를 넓게 하기 위해서 수축하고, 다시 좁게 하기 위해서 이완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러한 점에서 착안하여 문제 해결자들은 뜨거워지면 팽창하고 식으면 수축하는 플라스틱 공으로 된 지붕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붕이 뜨거워지면 플라스틱 공은 팽창해서 지붕을 흰색으로 변경시키고, 지붕이 차가워지면 수축해서 검은 색으로 만드는 지붕을 고안하는 데 성공하였다.
(4)와 (5)의 문제 해결에 동원되는 사고는 매우 그 성격이 다를 것이다. (4)의 문제 해결은 일정한 틀이 있으며, 따라서 (4)의 문제 해결에 동원되는 사고는 정형적인 성격을 띤다. 그에 비해 (5)의 문제 해결은 일정한 틀이 있을 수 없다. (5)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형적인 사고보다 창의적인 사고를 동원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사고는 비정형적인 사고일 것이다.
비정형적인 사고의 극단에 서는 것이 백일몽과 같은 아이디어의 자유분방한 흐름이며, 이들의 정반대에 있는 것이 암산의 경우 일어나는 계산 과정이다. 대부분의 사고 기능들은 자유연상과 암산과 같은 계산 과정의 양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대부분의 사고 기능들은 자유연상과는 달리 목표가 있으며, 계산 과정과 같이 일정한 틀을 따르지 않는다. 문제 공간에서 반드시 어떤 하나의 선택만을 하도록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 선택은 기계적이지 않다.
각각의 사고 기능들을 살펴보면 계산 과정에 가까운 정형적인 성격의 사고 기능이 있는가 하면, 자유연상에 가까운 비정형적 사고 기능이 있다. 분석, 비교/대조, 범주화, 귀납 등은 비교적 정형적인 성격이 강한 사고 기능이다. 이에 반해 유추, 이미지 형성, 상상 등은 비정형적인 성격이 강한 사고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 이해에서도 유추, 이미지 형성, 상상과 같은 비정형적인 사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전쟁’은 국가간에 무력을 사용한 투쟁을 의미한다. 이는 ‘전쟁’의 개념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적 의미를 아는 정도의 이해와는 다른 이해가 있을 수 있다. 즉, ‘전쟁’이 가져오는 인간성 상실, 폐허, 고통 등을 실감 있게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살아 있는 이해임은 말할 것도 없으며 후자에 도달하는 것이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전쟁’에 대한 이해가 그렇고, ‘르완다 내전’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후자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사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르완다 내전에 대한 이해가 살아 있는 이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쟁으로 말미암은 폐허의 실상을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로 인해 당하고 있는 르완다인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범죄와의 전쟁’에서의 ‘전쟁’의 개념은 ‘전쟁’ 본래의 개념과는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범죄와의 전쟁’은 국가 간의 충돌이 아니다. 또한, ‘범죄와의 전쟁’은 두 집단 간의 정면 충돌이라는 일반적인 전쟁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범죄 집단과 국가의 공권력과의 정면 대결이라기 보다는 국가 공권력이 일방적인 우위에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와의 전쟁’을 국가 공권력과 범죄 집단의 대결 양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에는 싸움이라는 측면보다는 범죄 집단을 소탕하겠다는 국가 공권력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바른 이해가 된다.
‘범죄와의 전쟁’을 이러한 수준에서 이해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리와 전쟁을 하는 상대국은 우리의 이익과 대립되는 국가이다.
㉡범죄 집단은 국가 이익에 저해되는 집단이므로 전쟁의 대상이 된다.
㉢현재의 범죄 집단은 그대로 놓아두면 국가에 큰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범죄 집단을 뿌리뽑기 위해 국가의 공권력을 총동원한다.
‘범죄와의 전쟁’은 ‘전쟁’이라는 기존의 의미에서 벗어난 것이며, 이러한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 추론, 생성 능력을 동원해야 한다. 즉, ‘전쟁’, ‘범죄와의 전쟁’ 등의 이해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텍스트의 이해에는 정형적인 사고는 물론이고 연상, 상상과 같은 비정형적인 사고까지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텍스트의 이해와 사고의 문제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정서의 문제이다. 일반적인 사고의 논의는 정서의 문제를 제외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이를 한국교육개발원의 사고 모형이나 마르자노(Marzano et al., 199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사고에서 인지적 능력을 강조하는 전통은 멀리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것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의 기능은 사유하는 것이고, 이성이 제대로의 기능을 다하고 있을 때 최고 가치인 행복의 상태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은 플라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감정이나, 욕망 등과 구별되는 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 즉, 실재를 규명하고 그 법칙과 질서를 인식할 수 있는 심리적 능력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는 감정, 욕망, 의지, 용기 등에 관련된 심리적 작용를 제외한 것이었다(이돈희, 1987). 사고는 고도의 조직성과 형식성을 띤 정신적-심리적 활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성관은 지금도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의 기능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논리적 형식적 사고만이 아니라, 감정, 욕망, 의지, 용기 등을 포함하는 심리적 과정을 마음의 활동으로 보고, 사고의 개념을 그것들까지 포함시켜 생각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이돈희(1987)는, 듀이(Dewey)는 사고를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 즉 갈등과 좌절 등의 상황에서 시작해 문제의 해결에 이르기까지의 지적 활동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듀이에 있어서 고전적 이성의 개념은 문제 상황의 극복 혹은 해결을 주도하는 체계적인 유기체적 반응을 뜻하는 지력의 개념으로 대치되어 버린다. 듀이에 의하면 교육은 유기체적 성장의 지속성을 뜻하며 그 성장은 바로 지력의 성장을 의미하고 지력이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과정이 사고이다. 문제 해결 과정은 단순히 지력만이 작용하는 과정은 아니다. 문제 해결의 욕구와 감정 등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듀이의 사고의 개념에서는 욕구, 감정, 감각, 의지, 충동 등의 감성적 요소들이 배제될 수 없다. 사고는 오히려 이러한 요소들과 더불어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사고와 정서가 별개가 아니라 더불어 진행됨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사회적 규범들에 적합한 행동을 하거나, 죄의식의 발로 등과 같은 도덕성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은 도덕적 행동은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고, 도덕적인 행동 과정이 무엇인지를 구체화하며,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고 자신이 가치를 두고 행하고자 하는 행동을 선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은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신문에서 부모를 잃고 어렵게 살아가는 소녀 가장의 이야기를 읽고 그녀를 돕는 일에 동참했다고 가정하자. 이러한 행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소녀에 대한 동정심과 어려운 상황을 딛고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대견함 등의 정서가 동반되어야 한다. 만약 신문의 기사를 읽고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를 돕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서가 인지적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소녀를 돕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행동이 그녀를 돕는 일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더욱이 그녀에 대한 동정심과 대견함은 신문에 실린 정보를 처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인지적인 사고 과정과 정서적인 반응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 둘의 선후 관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는 정보의 지각과 일련의 인지 과정을 거친 후 정의적인 측면으로 내면화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도덕적인 행동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소망과 관련지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지 규명하고 이해해야 하며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소망이 무엇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추론하는 일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 상황에 대한 정보, 적합한 정보를 포착하고 집중하는 능력, 적합한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 등 인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감정이 일어나기 위해서 위와 같은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회적 상황 등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한 경우에도 위기 의식이나,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경험한다. 아울러 그러한 정서는 인지적인 사고 과정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호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싫은 감정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이 인지적 정보 처리 과정에 영향을 주어 오해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결국 인지적인 사고 과정과 정서는 상호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텍스트의 이해에 있어서도 인지적인 사고 과정과 정서가 상호 작용을 일으킨다고 보아야 한다. 위에서 예를 든 소녀 가장의 이야기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소녀 가장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인지적 사고 과정의 결과이다. 그 소녀에 대해 동정심과 대견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또한 정서의 환기이다. 인지적 사고 과정과 정서의 환기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인지적인 사고 과정과 정서가 환기되어야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위에서 든 ‘전쟁’의 예를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텍스트의 성격에 따라 정서 환기의 강약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학 작품과 같이 정서가 중시되는 텍스트가 있는 반면에 설명문과 같이 정서의 환기가 중시되지 않는 텍스트도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정서의 환기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서 환기의 강약이 있을 뿐이다.
텍스트 이해의 과정에서 정서의 환기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면 텍스트 이해 모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텍스트 이해 모형
인지적 처리 과정과 정서적 반응을 연결해 주는 정신 기능으로 감정이입(empathy), 상상력 등을 들 수 있다. 감정이입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과 하나가 되어 그 대상에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슬픈 사연을 듣고 인식 주체가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식 대상의 처지와 사연에 몰입하여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과 거리를 엄격하게 유지하면 정서적 반응이 일어나기 어렵게 된다. 인지적 처리 과정과 정서적 반응을 연결해 주는 또 다른 정신 과정은 직관과 상상력(imagination)이다. 정서적 반응에는 인식 대상의 처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아울러 그 상황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텍스트의 이해에서 내용을 분석하고, 관계들을 파악하는 정형적인 사고를 동원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연상, 상상과 같은 비정형적인 사고를 동원한 이해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비정형적인 사고를 통하여 정서가 환기되고,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Ⅴ. 텍스트 이해 교육
텍스트 이해에서, 텍스트 중심 이해(text-based comprehension)보다는 독자 중심 이해(reader-based comprehension)가 수준 높은 이해를 이끌며, 정서적 반응에 이끄는 사고가 상상력이며 창조적 반응에 이끄는 사고도 상상력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결과는 텍스트 이해 교육에 시사를 주는 바가 크다.
먼저 텍스트 중심 이해 교육보다는 독자 중심 이해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의 텍스트 이해 교육은 텍스트 중심 이해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머리말에서 인용한 손영애의 진술에서는 물론이고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서도 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중학교 1학년 국어과 교육과정 내용 중 ‘읽기’ 영역의 ‘읽기의 원리와 실제’와 고등학교 국어 과목의 내용 중 ‘읽기’ 영역의 ‘읽기의 원리와 실제’를 보인 것이다.
<중학교 읽기 영역의 읽기의 원리와 실제>
(2) 글에 나오는 단어의 뜻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고, 사전적 의미와 문맥적 의미를 비교한다.
(3) 글에서 각 문장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말하여 보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 관계를 파악한다.
(4) 글에서 지시어를 찾아보고, 지시하는 내용을 파악한다.
(5) 여러 종류의 글을 읽어 보고, 각 글의 소재와 주제를 파악하여 말한다.
(6) 여러 종류의 글을 읽어 보고, 각 글의 줄거리나 주요 내용을 간추려 말한다.
(7) 글에서 사실을 표현한 부분, 의견이나 느낌을 표현한 부분을 찾아보고, 의견이나 느낌이 사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말한다.
(8) 글의 내용을 파악하고, 장면이나 분위기 등에 맞게 효과적으로 낭독한다.
(9) 글에서 인물, 사건, 장면, 사물 등을 설명하거나 묘사한 부분을 찾아보고, 그 적절성에 대하여 말한다.
(10) 글을 읽어 보고, 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을 비교하여 말한다.
(11) 국어 사전이나 백과 사전 등을 활용하여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태도를 가진다.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볼 수 듯이 문장 사이의 연결 관계 파악(3), 지시하는 내용 파악(4), 소재와 주제 파악(5), 내용의 요약(6) 등과 같이 텍스트 중심의 이해가 중심이 되어 있고, 독자 중심의 이해에 관련 있는 것은 인물, 사건, 장면, 사물 등의 설명이나 묘사의 적절성 파악(9), 인물의 말과 행동의 비교(10)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도 본격적인 독자 중심 이해라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말하는 독자 중심의 이해는 독자가 능동적인 입장에서 내용을 재해석, 비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이해를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텍스트의 내용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데 반해, 교육과정의 (9)와 (10)은 텍스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텍스트 의존적이다. 이러한 사정은 고등학교에 와서는 조금 개선된다.
<고등학교 국어 과목 읽기 영역의 읽기의 원리와 실제>
(4) 글의 유형과 읽는 목적에 맞게 읽기의 방법을 선택한다.
(5) 단어의 다양한 의미와 단어들 사이의 의미 관계를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휘력을 확장한다.
(6) 구조가 복잡한 문장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파악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 관계를 말한다.
(7) 글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보고,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연결 관계에 유의하며 글 전체의 짜임을 파악한다.
(8) 한 편의 글을 끝까지 읽고, 중심 내용이나 주제를 파악한다.
(9) 글을 읽고, 경험, 지식, 문맥 등을 활용하여, 생략된 내용이나 세부 내용을 추론한다.
(10) 주제나 소재가 같은 여러 글에서 구성 및 표현의 차이를 파악하고, 그 효과에 대해 평가한다.
(11)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거나 숨어 있는 글쓴이의 의도나 목적을 파악한다.
(12) 글의 신뢰성, 정확성, 공정성 등에 대해 토의하고, 글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13) 여러 가지 읽을거리를 폭넓게 찾아 읽고, 읽은 내용을 정리하는 습관을 가진다.
고등학교 국어과의 경우 (6)~(9)까지는 대체로 텍스트 중심의 이해에 해당하는 내용들이지만 구성 및 표현의 효과 평가(10), 글쓴이의 의도나 목적 파악(11), 글 내용의 비판적 수용(12) 등은 독자 중심의 이해에 해당하는 내용들이다. 여기서도 창의적인 읽기 수준의 이해를 요구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기는 하지만 중학교 교육과정의 내용보다 사정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지적한 교육과정에서 텍스트 중심의 이해를 조장하고 있다는 말은 그 타당성을 의심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지적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저학년에서는 텍스트 중심의 이해에 중점을 두고, 지적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진 고학년에서는 독자 중심의 이해에 중점을 두고 있는 현재의 교육과정은 계열성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육과정 내용의 계열성이라는 측면에서 저학년과 고학년의 차이를 두는 것은 결국은 기능들의 위계와 계열성을 강조하는 기능 중심 교육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초보적인 독자와 능숙한 독자의 차이는 기능의 차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읽기에서의 연구도 또한 참조할 수 있다(Dole et als., 1991). 즉, 초보자라고 해도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지식과 관련된 텍스트는 능숙한 독자처럼 읽을 수 있으며, 능숙한 독자라고 해도 불명확하고 모호한 텍스트에 대해서는 초보자가 된다. 따라서, 초보적인 독자와 능숙한 독자가 학습해야 할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초보적인 독자에게도 그들에게 알맞은 내용의 텍스트를 갖고 내용을 파악하고, 재해석하고, 비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독해 학습이 일어나는 것이다.
텍스트의 수준 높은 이해와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한 교수 원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들은 텍스트의 이해 과정에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상호 협조적인 교실을 만들어야 하며 학생 스스로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교사는 전달자, 관리자의 역할에서 의미 구성자로 그 역할이 전환되어야 하며 협동적 의미 만들기 작업은 적극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둘째, 이해 학습은 총체적이며, 기능적(functional)이며 의미 있을 때 효과적이다. 이해 학습은 어떤 상황과 어떤 목적을 갖는 의미 있는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학생들 자신의 삶과 실체에 관련시키도록 격려해야 한다.
셋째, 이해 학습은 텍스트 중심의 이해에서 독자 반응 중심의 이해로 그 중심이 옮겨져야 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배경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텍스트에서 출발하여 추론, 비판, 상상을 통하여 텍스트를 상세화하는 작업에 참여하도록 한다. 참고로 Wittrock(1990)이 제시한 상세화 목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제목, 장제목, 소제목 등이 없을 경우 만들어라.
2) 중요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 문장은 밑줄, 동그라미를 치고, 체크하라.
3) 질문을 만들어라.
4) 중심 생각을 자신의 말로 다시 표현하라.
5) 텍스트를 자신의 경험과 관련시켜라.
6) 생각들 사이의 관계와 텍스트 전체의 관계를 찾아라.
7) 텍스트 전체 구조에 민감하라.
8) 예, 유추, 은유를 만들어라.
9) 예언, 추론, 결론을 만들어라.
10) 취급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그림, 표, 그래프 등을 그려라.
11)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라.
12) 원리를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라.
Ⅵ. 맺음말
본고는 사고력 신장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을 전제로 텍스트 이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밝혀 보려고 하였다. 텍스트의 이해에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그렇지 않은 수준의 이해가 존재한다. 아울러 텍스트의 이해에는 필연적으로 정서의 환기가 병행하게 되며 이는 텍스트의 깊이 있는 이해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아울러 높은 수준의 이해와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정형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비정형적인 사고도 중요하다. 본고에서 밝힌 이러한 점을 텍스트의 이해 교육에 적용하면, 이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학습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 교사는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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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서의 국어국문학/사회과학으로서의 국어교육 연구:
미디어 교육 연구의 예를 통한
국어교육 연구방법론에 대한 이론적 고찰
정현선*
Ⅰ. 들어가며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우리에게는 그간의 국어교육 연구의 역사를 그 성과와 한계의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돌이켜보는 일이 요구되고 있다. 더구나 학문으로서의 국어교육 연구가 시작된 지 이미 10년이 넘은 현재의 시점에서, 국어교육학은 국어교육 현상의 연구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연구 방법(methods)과 그 근저에 깔린 방법론(methodology)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절실히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글은 이러한 맥락에 바탕을 두고, 국어교육 연구 방법 및 방법론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기초를 이루고자 하는 바람에서 쓰여졌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글은, 국어교육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텍스트(text) 및 문해력(literacy) 개념의 확장과 관련하여 최근 국어교육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미디어 교육(media education)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고자, 영어 교육과 미디어 교육의 연관성에 주목한 최근의 한 연구를 예로 들어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국어교육학 내에서의 미디어 교육에 대한 체계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려는 부수적인 목적 또한 지니고 있다. 이를 위해 우선 미디어 교육의 개념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미디어 교육의 두 가지 개념 및 연구 방법
미디어 교육의 개념이나 그 실천 양상은 각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미디어에 대한 교육(teaching about media)”과 “미디어를 통한 교육(teaching through media)”이 그것이다. “미디어에 대한 교육”은 예를 들어 잡지, 텔레비전, 영화, 광고, 비디오, 인터넷 등 대중 매체에 대한 분석 및 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뜻하고, “미디어를 통한 교육”은 각 교과의 목표에 따라 미디어를 이용하는 교육, 예를 들어 역사 시간에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토론한다든가, 지리 시간에 세계 각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함으로써 학습 동기를 유발하는 등의 교육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 두 가지 접근이 개념상으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미디어에 대한 교육”이 그 근본적인 교육 목적의 설정에 있어 결국에는 “미디어에 대한 교육”을 “통한 교육”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는 점, 또 “미디어를 통한 교육” 역시 미디어가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 이해-미디어 자체에 대한 분석-를 바탕에 두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두 갈래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영어 교육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미디어 교육의 개념에도 역시 이 두 가지의 다른 접근이 혼재되어 있다. 1988년에 제정, 실시되기 시작한 영국 최초의 국정 교육과정(The National Curriculum)-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만 해당되는 과정으로, 독자적인 교육 체제를 지니고 있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지역에는 적용되지 않는 절반의 교육과정임-에서는 16세 이하의 의무 교육 기간 중 제 3단계와 4단계의 학생들에게 일년에 한 단위(약 6주) 이상의 미디어 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비교적 새로운 미디어인 영상 미디어 및 뉴미디어를 통해 문자 미디어를 효율적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접근과, 영상 미디어 및 뉴미디어 자체를 새로운 의사 소통 체제로 보아 이에 대한 문해력을 교육하는 두 가지 접근이 교육과정상에 동시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가지의 미디어 교육 개념 속에는 영국의 미디어 교육의 역사적 맥락이 녹아 있다. 영국 학교 교육에서의 미디어 교육의 역사가, 한편으로는 60년대 이후 현대 사회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경험하는 미디어 문화를 교실 안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통해, 영어 시간에 다루어야 할 텍스트와 문해력 개념을 이론적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해 온 진취적이고 젊은 영어 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이다. 이들의 노력이 영어 교재 개발 및 교사 재교육, 교사들을 위한 비교적 읽기 쉬운 학술 잡지를 발간하는 사업 등을 해온 영어교육센터(The English Centre)-본래는 런던 지역 교육 위원회 산하에 있었던 기관-의 핵심을 이루었고, 특히 이 기관을 1990년에 영어 및 미디어 교육 센터(The English & Media Centre)로 확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이 기관을 1950년 이후 영국 국립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내에 설치된 미디어 교육관(Media Education Officer)과 더불어 학교에서의 미디어 교육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관한 핵심적인 기관으로 자리 매김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또 1988년 제정된 국정 교육과정이 미디어 교육을 영어교육과정 내에 위치 지움으로써 결과적으로 많은 수의 영어 교사들이 미디어 교육을 위한 재교육을 받아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보니, 영어와 미디어를 동시에 가르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의 교과가 만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고민을 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디어 교육을 단지 영어교육의 일부로서만 한정시켜 보는 것은 실제의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될 것이다. 미디어 교육이 영어 교육과정 내에 공식적으로 자리잡기 이전에도, 이미 미디어 자체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분석과 제작을 위주로 한 교육이, 우리 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further education college)이나 대학 교육에서 이미 이루어져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1950년에 발족한 영국 영화 및 텔레비전 교육 학회(The Society for Education in Film and Television: SEFT)가 1970년대 이후 <영상(Screen)> 및 <영상 교육(Screen Education)>과 같은 중요한 학술지를 통해 미디어 교육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연구와 교재 개발을 적극 지원해왔다는 점, 또 이들의 주요 관심이 미디어 자체에 대한 교육에 있었을 뿐 영어교육 내에 미디어 교육을 위치 지우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어교육의 일환으로서만 미디어 교육을 상정하는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고 하겠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두 갈래의 접근을 둘러싼 논쟁, 특히 미디어 교육을 교육과정상 어떻게 위치 지울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교사(재)교육, 교육과정 및 교재 개발 등의 문제와 맞물려 아직까지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영어교사들의 미디어 교육에 대한 관심 역시 미디어를 통한 전통적인 영어 교육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대로 학생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영상 및 뉴미디어를 새로운 의사 소통 및 문화적 매체로 보고, 이를 통해 영어 교육의 내용으로서의 텍스트 및 문해력을 재개념화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관심에서 출발했던 만큼, 영어 교사들이나 영어교육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의 학교 교육적 실천이나 이론화의 측면에 있어 입장이 분분하고, 때로는 심각한 갈등마저 내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최근 10여 년 간 영국에서는, 위와 같이 복잡한 미디어 교육의 개념과 양상이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오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육과정에 다시 영향을 미치려는 관심이 지속되어 왔는데, 특히 연구 방법론의 측면에서 보면 질적 연구 방법론(qualitative research methodology)에 기초한 체계적인 연구가 발전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의 수업 현장 관찰과 교사 및 학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소 추상적으로 문자화되어 있는 교육과정이 과연 실천적으로는 어떤 교육 방법과 학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어떤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는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연구(classroom-based research)들이 교사들 및 대학 연구진과의 공동 연구 형태로 많이 진행되어왔다. 이는 특히 교육과정이나 교재, 교육방법(teaching methodology) 등에 국한되어 있었던 기존의 교육학의 연구 영역이, 그러한 교육과정, 교재, 교육방법 등이 실제 학습자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학습(learning)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 이동해 왔다고 할 수 있는 현대 교육학의 이론적, 실천적 흐름과도 부응하는 것이다.
질적 연구 방법론을 적용한 미디어 교육에 관한 전반적 검토는 또 다른 제목의 글을 요구할 것인바, 본고에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최근에 있었던 연구의 한 사례를 중심으로 양적 연구 방법론과 질적 연구 방법론의 인식론적 차이점을 논의함으로써 국어교육 연구 방법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목적 자체에 충실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 필자가 함의하고자 하는 바는, 국어교육학의 “내용”으로서의 국어국문학과 그 교육의 방법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천적인 “연구”가 각기 “인문학”의 영역과 “사회과학”의 영역에 달리 위치 지워질 수 있다는 것, 즉 국어교육이 과연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보다 엄밀한 사회과학 방법론, 특히 질적 연구 방법론의 도입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물론 교육학 자체가 통일된 이론적 입장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교육 현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접근 방식에 따라 철학, 심리학, 사회학, 교육과정학 등으로 다양하게 연구되는 학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국어교육 연구를 온전히 사회과학으로만 위치 지울 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어교육의 실천적 양상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만큼은 분명히 사회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방법론상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만큼, 필자는 본고의 논의를 통해 앞으로 있게될 많은 이론적, 실천적 논의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Ⅲ. 경험적 실험 연구의 한계
사실 그 동안 국어교육학계에서는 수업 현장에 기초한 연구 경향에 대해 다소 부정적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사실상 그 동안의 많은 “현장 연구”들이 엄밀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이론적 이슈들을 제기하기보다는, 일회적인 현장 방문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연구의 안이함에 대한 비판이 현장에서 경험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낳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연구들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해서 경험적 연구 자체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 역시 잘못일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 삼간을 다 태우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해, 자칫 잘못하면 국어교육 연구가 전반적으로 추상적 이론으로 흐르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는 경험적 연구에 바탕을 두되 인식론 상으로는 분명히 구별되는 두 가지 경향의 연구 방법론-양적 연구 방법론과 질적 연구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국어교육 연구 방법론으로서 유의미한 질적 연구 방법론을 옹호하고자 한다.
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 잘못된 경험적 연구의 한 예로, 지난 98년 11월 런던 영상박물관(Museum of the Moving Images)에서 열린 미디어 교육 관련 세미나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미나는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와 런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 London)가 공동으로 진행 중인 연구 프로젝트, “영상 미디어 이미지와 문해력(Moving Image Media and Print Literacy)”의 중간 연구 결과 발표를 위한 것이었는데, 전통적인 문자 중심의 문해력 교육과 영상 미디어 해석을 위주로 한 비교적 새로운 문해력의 교육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학교에서의 실천에 바탕을 둔 연구였다는 점에서 대학의 연구진뿐 아니라 교사들로부터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었다. 그러나 막상 발표된 연구 결과는 연구 주제 자체의 중요성에는 훨씬 못 미치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이 세미나가 “중간 연구 발표”의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그 성과에 대해 이렇게 섣불리 단정하는 데에는 다소 부당한 면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진행될 연구가 지금까지의 연구 방법을 계속 고수하는 이상 더 이상의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생산적인 논의를 더해가기 어렵겠다는 것-물론, 연구 당사자들의 입장은 그 반대였지만-이 세미나 참석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우선 이들의 연구 목적은 “서사(narrative)”를 가르치는 데 있어 영상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갖는가를 탐구함으로써, 그 연구 결과를 통해 국정 영어 교육과정의 미디어 교육 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실제의 연구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영어 시간에 학생들에게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읽게 한 후 학생들이 그 서사 구조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를 실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체적으로는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으로 학생들을 나누어 실험 집단에 속한 학생들에게는 문자화된 미디어인 소설뿐만 아니라 그림책,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를 동원해 서사를 가르치고, 통제 집단에 속한 학생들에게는 오로지 한 종류의 미디어, 즉 책으로 된 소설만을 읽히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연구 결과는-충분히 예상되는 바와 같이(!)- “소설과 함께 영상 자료까지 함께 시청한 학생들이 소설만 읽은 학생들에 비해 서사 구조를 보다 잘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의 발표가 끝난 후 청중석에서는 즉각적인 문제 제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많은 문제 제기의 공통적 핵심은 “통제 집단과 실험 집단에 각기 다른 변인을 설정해 놓고서 예상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교육 연구인가?”라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러한 비판은 이미 고전이 되었을 만큼 특히 교육 연구에서의 실험 연구의 한계로서 무수히 지적되어왔던 것이다. 철저히 통제된 실험과 통계학적 분석을 이용해 임의로 선택된 집단의 효율성을 측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이러한 양적 연구 방법은, 농업 생산(!)의 효율성을 측정하기 위한 피셔(R.A. Fisher)의 1935년 연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를 “농작물”이 아닌 “인간”을 대상으로 한 교육 연구에 적용하는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리가 있음이 이미 지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홉킨스는 교육 연구에서의 실험 연구 방법의 적용에 대해, 농업 연구와 교육 연구의 차이점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강조하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첫째는 농업 연구와는 달리 교육적 상황에서는 임의적 샘플을 추출하기가 극도로 어렵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농업에서의 효율성 연구에서는 모든 곡식의 알갱이가 똑같은 것으로 취급 받지만, 교육에서는 모든 학생이 개별자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는 점, 다시 말해 농업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결국 “쭉정이”를 버리고 “알찬 곡식”만을 생산해야 하지만, 교육에서는 그 “쭉정이”를 “알찬 곡식”으로 만드는 것에 보다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둘째, 농업 생산의 상황과는 달리 교육에서는 실제의 학교와 수업 상황에 작용하는 다양한 컨텍스트의 변인이 학생들의 성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제의 교육에서는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이나 학생들 사이의 교우 관계가 개별 학생들의 성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인데, 실험 연구에서는 이러한 변인이 대체로 무시된다. 셋째, 예를 들어 벼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과연 어떤 것이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수업인가, 혹은 어떤 학교가 성공적인 학교인가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수업 담당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험에 대비해 암기해 두어야 할 사항을 조목조목 알려주고 매일같이 쪽지 시험을 보게 함으로써 시험에 성공하게 하는 것을 좋은 수업의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학습 대상이 되는 개념에 대한 학생들의 문제 제기를 허용하면서 토론해 가는 수업을 좋은 수업의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실험 연구는 이러한 개념상의 논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위의 세 가지 문제점에 비추어 볼 때 위에서 예를 든 문해력에 관한 연구는, 첫째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 모두에 속한 학생들의 개별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 둘째 교재 선택의 단순성 및 다양성이라는 변인을 제외한 다른 변인들이 수업 효과에 미칠 영향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셋째 과연 이들이 말하는 “영상 이미지”의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또 “서사”를 잘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개념적 성찰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실험적 연구의 고전적인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보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평등한 교육 기회를 가져야 할 학생들을 통제 집단과 실험 집단으로 나누어 인위적인 실험을 하는 것이 과연 교육자의 윤리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해, 실험적 연구는 비판을 넘어선 비난의 대상이 되기까지 해 왔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연구는 그 연구 의도의 정책적 함의가 갖는 긍정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안이한 연구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 연구는 교육 상황에서의 실험적 연구가 갖는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잘못된 연구의 한 예였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는 실험적 방법의 근저에 깔린 방법론(methodology), 혹은 인식론(epistemology) 상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Ⅳ. 양적 연구 방법론과 질적 연구 방법론: 인식론상의 차이점
다시 앞에서 살펴본 문해력 교육에 관한 세미나의 예로 돌아가 볼 때, 그 연구 발표자들은 그렇게 자명한 연구를 무엇 때문에 하느냐는 청중들의 질문에 쫓겨, 결국 그 연구가 국정 영어교육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음을 토로했다. 이 점에서 볼 때 이들의 연구는 그 연구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특정한 컨텍스트 속에 위치한 하나의 사회적 실천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실험적 연구가 자료의 수집 및 해석에 있어서 연구자의 주관성(subjectivity)을 철저히 배제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라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연구 결과로서의 “사실”을 정책 입안에 이용할 의도는 지니고 있었을지언정, 자신들이 적용한 연구의 방법만큼은 절대로 “객관적”이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전혀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들의 연구 목적 자체-그들의 “주관성”-가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을 설정하고 변인을 설정하는 데에 직접적으로 작용했으며, 그것이 바로 의도된 결과를 낳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문제점은 단지 앞서의 연구 사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실험 연구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인식론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는 연구의 절차에 연구자 개인의 주관성 개입을 부인하는 자연과학적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경험주의적 실증주의”는 경험적 데이터의 수집, “엄격하고 체계적인 방법을 통한 일차적 자료에 대한 분석 및 제시를 통해 일반화를 도출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충분한 “양(quantity)”의 데이터를 특정한 연구 “절차(procedures)”를 거쳐 “객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밝혀낸 연구 결과가 다른 사례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에서는 연구의 형식 혹은 절차적 방법에만 관심이 있을 뿐, 자신들이 발견한 “사실(fact)”이 과연 어떤 “컨텍스트”에서 얼마 만큼의 “가치(value)”로 일반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실상 일반화가 찾고자 하는 “예측(prediction)”이라는 것은 교육 현상에서는 너무나 다양한 현실상의 변인들 때문에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특정한 수업 시간에 보이는 특정한 행동이나 태도의 원인에 대해 연구한다고 할 때, 그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과연 어떤 실험이 가능할 것인가, 어떤 하나의 특정 요인을 변인으로 설정하고 다른 모든 요인들을 통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설령 어떤 형태로든 실험에 성공한다고 할 때, 그 실험이 과연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복잡한 효과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등을 생각해 보면 경험주의적 실증주의의 문제점은 오히려 자명해지는 듯하다.
앞에서 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실증주의적 연구의 결과로 제시되는 “일반화”는 대개 지나치게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거나 지나친 일반화로 흐르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앞에서의 문해력 연구가 도달한 발견으로서의 “일반화”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당연한 사실-“소설과 함께 영상 자료까지 함께 시청한 학생들이 소설만 읽은 학생들에 비해 서사 구조를 보다 잘 이해한다”-에 그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 실증주의의 문제점은 경험적 데이터의 수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하고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없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객관성과 과학성을 내세운 양적 연구 방법론은, 사실상 모든 연구의 전과정에 걸쳐 피하기 어려운 “연구자의 주관성”의 문제-특정한 실험 내용을 설정하도록 하는 연구자의 실험 목적 자체-를 간과함으로써, 오히려 신뢰성과 타당성이 매우 부족한 연구 결과를 생산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도 강조해 왔다시피, 이러한 경험적 실증주의 연구의 한계를 근거로 경험적 연구 일반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 이러한 경험적 실증주의 혹은 양적 연구 방법론(quantitative research methodology)이 갖는 한계에 주목해 등장하게 된 질적 연구 방법론(qualitative research methodology)은, 대규모의 집단에 대한 계량적 연구를 수행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양적 연구와는 달리, 주로 소규모의 집단이나 개별 사례를 깊이 있게 들여다 봄으로써 “어떻게”, 그리고 “왜” 특정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관심을 둔다. 그리고 연구자의 주관성을 철저히 부인하는 양적 연구 방법론과는 달리, 어떤 연구이든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실천인 이상, 연구자의 주관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오히려 모든 연구의 절차와 방법, 자료 수집 및 해석의 모든 국면에 대한 성찰(reflexivity)을 끊임없이 수행한다. 그렇다면 질적 연구 방법론에 의한 연구는 과연 실제에 있어 양적 연구 방법론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시 앞에서 든 문해력에 관한 연구의 예로 돌아가 이 두 방법론이 어떻게 달리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우선 양적 연구 방법론을 채택한 이 연구자들은 “영상 미디어를 이용한 서사의 교육이 단순히 문자 미디어만을 이용한 교육보다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는 “가설(hypothesis)”을 세우고 실험을 수행한 결과 발견된 “사실”을 “일반화”하려 했다. 이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절차의 객관성을 주장하면서 이 연구에 연구자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철저히 부인했다. 그러나 만약 질적 연구 방법론을 따르는 연구자들이라면, 똑같은 연구 과제에 대해서 “가설”이 아닌 “연구 문제(research questions)”들을 설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학생들을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으로 나누지 않고, 보다 “자연스러운(naturalistic)” 현장에서 학생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설정한 문제들을 탐구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 방법들을 동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들이 탐구할 연구 문제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과연 영상 미디어의 제시가 학생들의 서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 주는가, 학생들이 소설만 읽은 후에 제시하는 서사와 다른 영상 미디어를 통해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이해한 후 제시하는 서사에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연구자들이 사용한 서사 구조 이해에 대한 평가 문항은 “어떻게” 개발된 것이며, “얼마나” 그리고 “왜” 믿을만한 것인가, 연구자들은 “왜”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읽는 수업을 연구하려고 했는가, 그 수업을 연구하기로 선택한 배경에는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문학 작품”에 대한 가정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가정은 어떤 것인가, 학생들은 과연 찰스 디킨즈의 소설과 그 영상화된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가, 학생들이 생각하는 영상 미디어의 개념은 문자 미디어에 대한 개념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학생들은 과연 자신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문자 미디어와 영상 미디어를 경험하며, 그것이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학습과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등. 그리고 질적 방법론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탐구하기 위해 수업을 관찰하고, 교사 및 학생들과 심층적인 인터뷰를 수행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교재를 면밀히 검토하고,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의 평가 기준 등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연구 결과의 발표에 있어서 자신들의 발견을 “일반화”하기보다는 그 발견이 이루어진 사회적 맥락을 충실히 기술함으로써 비슷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비슷한 현상이 반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통해 그 다음 연구 과제를 설정하는데 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을 것이다.
이러한 질적 연구 방법론은 1920-30년대에 걸쳐 수립된 “시카고 학파”의 독특한 사회학적 전통 및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전한 보아스, 미드, 베네딕트, 배이트슨, 에반스 프리차드, 래드클리프-브라운, 말리노프스키 등이 발전시킨 문화/사회 인류학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상당 기간 동안의 현장 연구(fieldwork)를 통해 인간의 집단적 삶에 대해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발전해 왔으며, 구체적으로는 특정한 집단 내에 속한 개인들의 삶의 일상과 문제적 순간들 및 그 의미들을 기술하는 일련의 경험적 자료들의 수집을 위해, 사례 연구, 개인의 경험에 대한 기록, 생애사 연구, 인터뷰, 참여 관찰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이 방법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는 집단이나 개인이 “대표성”을 갖는가에 대한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 집단이나 개인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연구를 시작하며, 양적 연구가 간과해온 연구 대상 및 연구 자체의 사회적 컨텍스트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고, 연구자의 주관성이 자료의 수집과 해석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성찰까지도 연구에 포함시킴으로써 보다 더 객관성을 기하려 한다. 사실 이러한 질적 연구 방법론의 발전에는 문학 이론이 기여한 바 크고, 사실 연구 대상으로 설정된 집단이나 개인에 관한 일종의 “이야기”를 충실히 기술하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매우 문학적인 연구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질적 연구 방법론은 양적 연구 방법론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만한 이야깃거리밖에 안 되는 “비과학적”인 연구 방법이라고 역공격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이 두 연구 방법론이 무엇을 “과학적 연구”로 보는가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 더욱이 그 입장은 패러다임상의 차이로 불릴만큼 거의 화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패러다임이란 특정한 과학자 공동체 내의 규범적으로 공유되어 있는 합의를 뜻하는 것으로,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논의된 개념이다. 쿤은 위의 책에서 과학적 지식 자체가 그 자체로서 보편타당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과학자 집단에서 공유하고 있는 신념, 가치, 연구의 기술 등의 덩어리”임을 과학의 역사를 검토하는 가운데 주장했다. 이 점에서 볼 때, 양적 연구 방법론과 질적 연구 방법론은 각각의 인식론의 측면에서 서로 다른 신념, 가치, 연구의 기술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중 어떤 방법론을 채택할 것인가는 “과학성” 및 “객관성”에 대한 연구자 집단간의 근본적으로 다른 신념 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잠시 연구의 방법(methods)과 방법론(methodology)의 구별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방법론은 “과학성” 및 “객관성”에 대한 인식론적인 차이에 따라 나뉘어지는 것으로, 구체적인 연구에 동원되는 방법들-예를 들어, 설문지, 인터뷰, 관찰, 통계 등-의 상위에 있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양적 연구 방법론과 질적 연구 방법론 모두 개별적인 연구 방법의 측면에서는 똑같은 방법을 이용할 수 있으나, 이는 연구자가 따르는 방법론에 따라 그 방법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양적/질적 방법론 모두 특정한 통계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한국 어린이의 하루 평균 TV 시청 시간이 5시간이라는 통계 자료가 있다면, 이 자료는 양적/질적 방법론 모두에서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양적 연구 방법론에서는 이 자료를 “일반적 사실”로서 인식할 것인 반면, 질적 연구 방법론에서는 이를 자신들이 수행할 “어린이의 TV 시청에 관한 연구”가 일단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연구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 데 그칠 수 있다. 과연 5시간의 TV 시청 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근거로 산출된 것인가, 5시간의 시청 시간 중 어린이가 집중해서 TV를 시청하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그저 TV를 틀어 놓은 상태에서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대화하거나 밥을 먹는 시간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하는 등의 컨텍스트적인 질문이 질적 연구 방법론에서는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앞에서 살펴본 문해력 연구에 관한 세미나 자리에서의 찬반 격론은, 이 연구를 수행한 이들과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이들 사이의 근본적인 인식론상의 충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결론 및 제언
지금까지 필자는 영어 교육과 미디어 교육의 관련에 관한 최근 연구에 대해 방법론상의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국어교육 연구에 동원 가능한 방법론으로서의 양적/질적 연구 방법론에 대해 그 인식론적 차이점에 주목해 논의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질적 연구 방법론의 생산적 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이론적 논의가 따라야 할 것인바, 본고는 그러한 논의를 열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쿤의 패러다임 논의가 함의하는 바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한 학문 내에 필연적으로 있을 수 있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의 공존 가능성 및 그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이 자칫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결국 학문의 발전을 이루어내는 원동력이 되어왔다는 점을 주목할 때, 이를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생산적인 대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이해하고 학문적 논의에 임하는 일 또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다른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이 글을 마무리해갈 무렵, 런던에서는 영국의 교사 교육 제도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의 내용은, 과연 앞으로도 교사 교육을 대학이 계속해서 담당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수업 경험이 풍부한 각급 학교의 교사들에게 교사 교육을 직접 담당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찬반 의견을 토론하는 것이었는데, 사실상 이 논쟁은 과연 대학에서의 교육 연구자와 교수들이 교사들의 수업 기술을 가르치는데 적합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현장의 교사들이 보다 더 적합한 사람들인가라는 문제 설정 자체의 바탕에 깔린 교육학의 근본 문제- “과연 대학에서의 교육 연구가 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를 함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다 엄밀히 말해서는 교육학의 이론과 실천 자체에 대한 첨예한 논쟁을 함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열띤 논쟁은, 대학이 계속해서 교사 교육을 담당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제에 나선 옥스퍼드 대학의 교육 대학원 학장과 이에 반대 의견을 개진한 교육부 장학관장을 필두로 하여, 청중석에 있던 다수의 각급학교 교장, 교사, 교생, 대학 교수들의 상반된 의견 개진으로 이어졌다. 쉽게 결론이 날 수 없는 이 논쟁을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필자가 갖게 된 일종의 희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극단적 논의의 표출 배경에 자리하고 있는 문제 의식 자체가 앞으로 보다 생산적인 교육학 이론의 발전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발제를 맡은 리처드 프링 교수를 비롯해 많은 청중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영국의 교육 연구자들은 대학에서의 교육학 이론과 학교에서의 교육 실천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지난 30여 년 간 진지하게 계속해 왔으며,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는 이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보다 요구되고 있지, 교육부의 주장대로 교사 교육을 대학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필자 역시 공감했다. 왜냐하면 현재 영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교육 개혁의 상당 부분이 오히려 교육의 이론과 실천 간의 이분법을 현실적으로 더욱 강화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교육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이 격론을 거치는 가운데 이 단순한 사실을 새삼 다시 확인해 가는 것 같았던 것이다.
필자는 이 논쟁이 과연 남의 나라의 일만일 것인가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사실이야 어떠하든간에 결국 중요한 것은 교육 경험을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 그 이론화를 통해 어떻게 보다 나은 교육을 추구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문제 모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대학에서의 연구가 보다 실천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당연한 원칙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특히 이런 관점에서 교육학의 이론과 실천을 접맥시키기 위해 현장 연구를 통해 교육의 이슈를 제기하는 데 기여해 온 질적 연구 방법론에 대해 앞으로의 국어교육 연구가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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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에서의 평가
- ‘수행 평가’를 중심으로
최 미 숙*
Ⅰ. 서론 : 수행 평가라는 ‘관점’
이 연구는 국어교육에서 지향해야 할 평가의 방향을 논의하고, 그러한 논의를 토대로 국어교육에서 활용할 수 있는 평가의 원리를 구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평가는 학생의 학업 성취 정도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 교육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가 방법은 교수․학습 방법을 결정하기도 하며, 때로는 “교육의 질과 내용을 결정해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여러 교육 제도를 시도하더라도 대학 입시라는 선발고사와 부합하지 않으면 유명무실해지는 것이 현실”이라는 지적은 교육에 미치는 평가의 결정적인 힘을 잘 드러내 준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국어교육에서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등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이 적절한 평가 방법과 연결되지 않으면 교수·학습 활동에서 간과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국어교육에서 평가에 대한 논의는 단지 평가에 대한 논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어교육 전반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논의를 전제로, 본고는 국어교육에서 평가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며, 그 방향은 어떠한 원리를 통해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수행 평가(遂行評價:performance assessment)’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수행(performance)'이란 구체적인 상황에서 행동을 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를 의미하며, 교육 현장에서 기존의 교육 평가 체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수행 평가란 ‘학생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타낼 수 있도록 답을 작성(구성)하거나, 발표하거나, 산출물을 만들거나, 행동으로 나타내도록 요구하는 평가’를 의미한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행동’이란 단순히 신체를 움직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거나, 듣거나, 쓰거나, 그리거나, 만들거나, 더 나아가서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행 평가는 어떤 지식이나 절차를 아는 차원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국어 활동을 어떻게 구현하는가를 평가하는 데 초점을 둔다.
수행 평가는 그 동안의 평가가 지녀왔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최근 수행 평가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학교 현장에서 수행 평가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수행 평가를 실시하면서 주로 시도하는 평가 방법이, ‘서술형 및 논술형 검사’, ‘실기 시험’, ‘실험·실습법’, ‘관찰법’, ‘토론법’, ‘구술시험’, ‘면접법’, ‘자기평가 및 동료평가 보고서법’, ‘연구보고서법’, ‘포트폴리오법’ 등이다. 이 방법들은 수행 평가 방법으로 흔히 소개되는 것들이기도 한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교과별로 적용해야 할 수행 평가 방법이 객관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국어교육에서는 그러한 방법을 빌어와서 평가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행 평가란 “새로운 기법이라기보다는 평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수행 평가 방법을 시급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어교육에서 수행 평가라는 ‘관점’이 유의미한지 먼저 논의해야 하며, 만약 유의미하다면 그 관점을 구체화할 수 있는 평가의 원리와 방법, 그리고 평가 도구 및 평가 문항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 연구는 국어교육에서의 평가에 대해 수행 평가를 중심으로 논의하되, 구체적인 수행 평가 방법에 대한 논의보다는 평가의 원리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평가의 원리를 구체화한 평가 도구나 평가 문항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를 빌어 논의하고자 한다.
Ⅱ. 국어교육 평가의 반성과 방향
해방 이후 50여 년간 우리 교육에서의 평가는, 교육적 목적보다는 학생의 선별을 위한 ‘상대 평가(규준 지향 평가)’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상대 평가(norm-referenced evaluation)란 “한 개인이 그가 소속하고 있는 집단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성취했느냐 하는 상대적인 서열을 강조하는 평가 체제”이다. 가능한 한 학습자들의 성적을 중복되지 않게 서열지우고, 우수자와 열등자를 구분하는데 중점을 두는 평가이다. 이러한 상대 평가는 학습자의 학업 성취 정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학습 목표의 성취 정도보다는 다른 학생들과의 상대적인 비교에 두며, 학생들이 학습 목표의 달성을 위해 공부하기보다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 공부하도록 하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지금까지의 평가는 이러한 상대 평가를 지향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교육 평가의 기능과 역할을 상실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학습자의 학업 성취도 평가와 관련하여 상대 평가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평가 활동의 결과로서 학습자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였는지, 학습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평가 결과로 표현된 구체적인 점수의 의미, 예를 들면 90점과 70점의 차이가 지니는 구체적인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우며, 그것이 교육의 결과로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는 더욱 어렵다는 점이다. 90점을 받은 학생이 70점을 받은 학생보다 학업 성취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판단, 국어 성적이 좀더 우수하다는 판단, 그리고 몇 명중에서 몇 번째로 성적이 좋다는 판단 등을 하는 데는 유효하지만, 각 학생의 국어 능력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이며 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학생 개개인이 어떠한 노력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평가의 결과를 교수․학습 과정에 어떻게 송환(feedback)시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지닌다.
목표 지향 평가로서의 ‘절대 평가’는 그러한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대안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절대 평가란 “평가 대상자가 사전에 결정된 어떤 수행 기준 또는 목표를 얼마나 성취하였는지에 초점을 두며, 개인의 성취 수준의 유의미성을 다른 사람들이나 규준 집단의 성취 정도와 상대적인 비교에서 찾지 않는 평가”를 의미한다. 다른 학생들과의 비교를 위한 평가이기보다는 유의미한 학습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평가라는 점에서, 절대 평가는 국어교육이 지향해야 할 평가라 할 수 있다. 또 “목표 지향 평가로서의 절대 평가는, 평가 목표 및 내용들을 각각 평가 항목화하고, 각 항목별 성취 수준을 검사함으로써 학생의 우수한 점과 취약한 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전반적인 언어 사용 능력의 수준도 알 수 있다.”라는 점에서 교육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대 평가’라는 특성 외에도, 그 동안의 국어과 평가는 평가의 방법 면에서 선택형 문항 위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선택형 평가 문항을 선호하게 된 것은 평가 관리상의 효율성 때문이었다. 새로운 근대 교육의 틀을 형성하던 광복과 미군정기에 우리의 교육은 선택형 평가 방법을 서둘러 도입했는데, 그것은 바로 영세한 교육 여건 속에서도 대량의 교육을 실시해야 하는 데서 오는 평가 관리상의 효율성 때문이었다. 아직 체계적인 교육 제도 혹은 평가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대규모의 학교, 콩나물 교실로 불리는 대단위 학급 상황에서 최소한의 평가 관리가 당장의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채점상의 객관성을 우선시 하는 선택형 평가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택형 평가 방법은 이제까지 학교 교육 현장에서 중심을 차지하여 왔는데, 평가 방법 개선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선택형 평가 방법은 국어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주관식 평가 문항을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는 했지만, 단답형 문항들을 제작하는 데 그침으로써 그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는 못했다.
선택형 평가는 채점상의 객관성을 보장해주며, 광범위한 영역의 교수·학습 목표의 성취도를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답지 대신 OMR카드 등을 사용하여 컴퓨터로 채점할 수 있으며, 또 결과 보고가 가능하기 때문에 대단위 검사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보듯 선택형 평가는 학생들의 창의력, 문제 해결력, 비판적 판단력, 통합력 등을 평가하는 데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선택형 평가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문항의 특성상, 언어 능력을 분절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등은 여러 기제가 동시에 동원되는 종합적인 언어 활동이다. 그러나 선택형 평가 방법은 그 방법의 특성상 언어 능력을 구성하는 하위 요소를 구분하여 각각의 기능에 대해 측정하고 그것을 종합하여 언어 능력으로 일반화하려 한다. 그러나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므로 선택형 평가 방법에 의한 부분적인 기능 평가의 합이 학생의 전체적인 언어 능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없다. 선택형 평가는 학습자의 실질적이면서도 전체적인 언어 수행 능력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은 선택형 평가이면서도 국어교육의 특성에 적합한 문항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토대로 하여 기본 개념의 이해나 법칙과 원리의 적용, 그리고 문제해결력 등과 같은 인간의 고등정신능력을 측정”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학생들에게 많은 독서와 사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지식 암기 중심의 평가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어떤 지식이나 사실을 단순히 암기하여 해결하기보다는 교실의 학습 과정에서 배운 원리나 지식을 적용하는 능력을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선택형 문항이면서도 종합적인 언어 능력을 평가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학수학능력 시험은 기존의 선택형 문항과는 질적인 차별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항도 결국은 선택형 문항이 원천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 즉 국어교육에서 필요한 언어 수행을 전반적으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앞에서 제시했던 수행 평가라는 ‘관점’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어교육에서의 평가는 절대 평가, 즉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성취 정도를 평가하는 ‘목표 지향 평가’로 나아가야 하며, 구체적인 평가 관점으로는 수행 평가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이제 다음 논의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하여 국어교육에서의 평가의 원리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Ⅲ. 국어 교육에서의 수행 평가의 원리
국어교육에서의 평가 원리를 구안하기 위해서 논의의 전제로 삼아야 할 것은 실질적인 ‘국어 활동의 양상’, ‘평가의 효율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국어 활동의 양상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토대로 평가의 효율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과정이나 결과를 드러내는 활동을 어떤 원리에 의해 평가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것이 주된 작업일 것이다.
1. 언어 수행을 통한 비판적 반응의 평가
국어교육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국어 활동 능력을 신장시켜 국어 생활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목표를 지향하는 국어교육에서의 평가 또한 학생의 실질적인 국어 능력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활동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언어 활동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상황에서 구현하는 학습자들의 언어 활동을 직접 관찰하면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는 ‘언어 수행을 통한 비판적 반응의 평가’를 국어교육에서의 평가 원리로 제안하고자 한다.
일차적으로 ‘반응’이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쓰거나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고에서 국어교육에서의 평가와 관련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반응’이란, 주어진 문제 상황 혹은 질문에 대해 학습자 개인의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의 과정, 구체적으로는 “평가, 판단, 선택” 등의 과정을 거쳐 행하는 여러 형태의 응답을 의미한다. 응답의 형태는 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활동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또 그냥 ‘반응’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할 경우 이러한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판적 반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주어진 답지 속에서 정답을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언어 상황 속에서 학습자가 취하고자 하는 관점이나 사고, 즉 학습자의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을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라는 언어 수행을 통하여 표현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주어진 답지에서 주어진 조건에 맞는 것 하나를 고르거나, 단순한 사실이나 명제적 지식을 떠올리는 것을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학습자로 하여금 ‘비판적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다양하면서도 창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평가 도구와 평가 문항을 활용해야 한다. 이러한 평가를 위해서는 단순히 주제를 제시하고 말하거나 쓰라는 평가 문항보다는 학습자의 비판적 반응을 유도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문제 상황을 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고하고 판단하며, 평가한 후 선택하는 과정을 유도할 수 있는 문항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며, 학습자가 이 문항에 답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판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언어 수행을 통해 그 과정이나 결과를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문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언어 활동의 조건들을 구체화해야 하는데, 이것이 제한된 답만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차원적인 비판적 사고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개방형 질문(open-ended questions)”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학습자가 자신의 비판적 반응을 표현하는 것을 국어교육의 평가에서 강조하는 이유는, 학습자의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력의 신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통해 기존의 권위나 가치관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 혹은 주어진 지식의 무비판적 수용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해 가는 과정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학습자가 문제의 정답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정답을 작성하거나 행동으로 나타내도록 하는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또 이러한 평가를 위해서는, 평가 장면에 있어서도 폐쇄적인 평가 장면을 지양하고 개방적이면서도 다양한 평가 장면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평가 장면’이라고 하면, 책상 위에는 문제지와 답지만이 놓여 있고, 학생은 답안을 작성하고 교사는 감독을 하는 폐쇄적인 교실 상황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평가 문항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평가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가령, 문학 작품이나 여러 읽기 자료를 앞에 놓고, 서술형이나 논술형 문항에 답하거나 혹은 토론하게 할 수 있고, 말하기, 듣기, 읽기 등의 경우, 특정 주제나 제재를 미리 알려주고 그것에 관한 여러 자료를 준비하게 한 다음, 평가 문항에 답하게 하는 장면을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언어 활동의 통합적 수행 평가
제5차 국어과 교육과정 이래로 국어과 교육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이라는 여섯 영역으로 나누어 교육 내용을 선정해 왔으며, 2000년부터 시행될 제7차 국어과 교육과정도 이러한 영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국어과 교육 과정을 여섯 영역으로 나누는 것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이 여섯 영역을 전제로 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평가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인지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에서는 국어교육에서의 평가의 원리로 ‘언어 활동의 통합적 수행 평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논의하는 ‘통합’이란 활동의 연계성에 주목한 것으로서 ‘언어 활동들의 통합을 의미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내용 영역들을 가로지르는 지식과 활동들의 통합’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활동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 활동의 양상을 고려한다면, 각 영역을 고르게 평가하면서도 서로 관련있는 영역을 통합시켜 평가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여기서 통합의 원리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국어 지식, 문학 등 여섯 영역 모두를 무조건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 여섯 영역을 한꺼번에 통합하는 방식이 그리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통합할 수 있는 ‘활동’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이 네 가지 영역뿐이다. 그러나 여섯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교육 과정을 전제로 하여 이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평가할 것인지 논의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논의일 것이다.
그런데 제7차 국어과 교육과정에서 “평가 목표와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경우에는 영역 통합적 평가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영역 통합적 평가 방법을 직접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평가 연구에서도 ‘통합적 접근을 선호하는 언어 교육 평가 연구의 경향’을 지적하면서 “언어 사용은 실제로 통합되어 진행”된다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 동안 영역을 통합하여 지도해야 한다는 논의는 어느 정도 있었는데, 읽기와 쓰기, 듣기와 읽기의 통합 지도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평가 논의에서 통합 평가의 구체적인 논의는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관점이 그 동안의 평가 논의에서 잠재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언어 지식의 활용’ 범주에 대한 평가는 언어 표현, 즉 말하기와 쓰기 기능의 평가와 병행하여 실시할 수 있다. 예컨대 언어 영역의 학습 내용 중 어휘, 문장 등에 대한 지식의 활용 범주는 말하기와 쓰기의 직접 평가에서 사용하는 평가 기준표의 한 요소로 고려하여 평가할 수 있다.(밑줄-인용자)
이 인용문은 ‘언어 지식’ 영역이라고 해서 언어 활동과 분리한 채, 지식 그 자체만을 평가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언어 지식은 언어 표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논의하고 있다. 언어 지식은 궁극적으로 언어 활동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는 지식이며, 당연히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라는 언어 활동과의 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통합이 가능한 경우는 언어 활동의 양상과 평가의 효율성을 고려할 때, ‘활동의 동시성’, ‘활동의 연속성’, ‘활동 원리의 동일성’ 등이 성립할 경우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경우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활동의 동시성’이란 하나의 언어 상황에서 두 개 이상의 언어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럴 경우 동시에 이루어지는 언어 활동을 통합하여 평가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활동의 동시성’이 성립하는 예로는 ‘말하기’ 영역과 ‘듣기’ 영역의 통합을 들 수 있으며,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통합의 방식이기도 하다. 말하기만 하는 경우란 거의 없으며, 그것은 듣기와 항상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말하기와 듣기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 활동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두 영역을 통합하여 평가하면 효율적일 것이다.
‘활동의 연속성’이란 언어 자료나 주제를 중심으로 언어 활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의미하며, 이 경우 언어 활동들을 통합하여 평가하면 효율적이다. 활동의 연속성이 성립하는 대표적인 예로는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문학/말하기/듣기의 통합)하거나 문학작품을 읽고 글(감상문 등)을 쓰는 경우(문학/읽기/쓰기의 통합), 혹은 읽기 제재를 읽고 토론하거나(읽기/말하기/듣기의 통합)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활동의 연속성에 의한 통합은 특히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가 하나의 언어 자료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해당한다. 한편 실질적인 말하기와 쓰기 활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통합, 예를 들면 말하기의 지식이나 쓰기의 지식을 실제 말하기와 쓰기 활동으로 연결시키는 과정도 ‘지식과 활동’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활동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통합하여 평가할 수 있다.
‘활동 원리의 동일성’은 언어 활동의 원리상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을 통합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문학 작품에 ‘이야기의 구성 원리’가 구현되어 있는 글을 읽고, 그것을 실질적인 말하기를 통하여 구현하거나, 학습자가 읽거나 들은 언어 자료로부터 추출한 언어 활동의 원리를 활용하여 말하거나 쓰는 활동을 평가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문학에서의 언어 표현 방식과 일상적인 언어 표현 방식을 원리적으로 동일한 경우, 이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 앞에서 논의한 ‘실용과 문학 사이의 결합’, ‘정보 전달과 상상적 언어 활동 사이의 통합’, ‘교육 요소간 통합적 활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문학 작품의 감상과 창작은 이해와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학습 목표와 원리로 구성할 수 있으며, 이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수행 과정 중심의 평가
국어교육에서는 언어 수행의 결과뿐만 아니라 수행의 과정도 중시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 수행 과정이란 특정의 언어 활동을 계획·준비하는 과정을 거쳐 실질적인 언어 활동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하며, 그 과정에는 주어진 언어 자료 혹은 언어 상황에 대한 학습자의 반응을 스스로 구성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말하거나 듣는 장면, 읽거나 쓴 후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말하기를 준비하는 과정, 글 쓰기를 준비하는 과정, 학습자 스스로 자신의 반응을 구성하는 과정도 중요하며, 그러한 수행의 과정을 평가함으로써 학업 성취 정도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자에게 유의미한 정보도 제공할 수 있다. 결과물뿐만 아니라, ‘적절한 반응을 도출해내는 과정 혹은 복잡한 문제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 또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행 과정 중심의 평가라고 해서 수행 과정 자체를 몇개로 분리하여 평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는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말하기를 평가하기 위해 말하기의 내용 생성, 말하기의 내용 조직, 말하기의 실제 등으로 각각 나누어 그 각 과정을 평가하자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하는 수행 과정 중심의 평가란 말하기의 준비 과정에서부터 실질적인 말하기에 이르는 과정의 평가도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말하기 영역의 평가에서, 말하기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과정, 그것을 중심으로 내용을 생성하고 조직하고 실제로 말하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평가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 수행의 결과만을 평가한다면, 학습의 과정에서 혹은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학생들이 어떤 부분을 탁월하게 수행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학습자가 어떤 과제를 수행했는지 못했는지 자체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있지만, 특히 어떤 부분을 잘 했는지 혹은 잘 못했는지, 더욱이 왜 그것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언어 수행의 과정 또한 평가한다면 이해 활동이나 표현 활동의 어느 과정에서 장애를 느꼈으며, 그 장애를 어떤 과정을 통해 해결했는지, 앞으로 이해나 표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정 평가는 교수·학습이 진행되는 시기에 학생의 학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개선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내서 합리적인 최선의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한 평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정 중심의 평가는 학습자의 학업 성취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측면뿐만 아니라학습자의 학습 결손을 조기에 진단하고 학습자의 학업 성취 수준에 적합한 다양한 학습 방법 및 자료를 제시해 주는 데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측면이 있다.이러한 수행 과정 중심의 평가는 ‘목표 달성 수준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동시에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평가’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앞에서 논의했던 ‘평가 장면의 다양화’ 논의와도 관련된다. 과제를 부여받고 자료를 조사하고 발상과 내용 생성, 조직, 표현 등에 이르는 전 과정이 바로 평가 장면이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평가가 이러한 과정 중심의 평가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만을 평가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언어 수행의 과정도 중시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닐 필요가 있다.
Ⅳ. 국어 교육에서의 수행 평가의 의미
1. 전통적 평가 방법의 계승
최근 국어교육에서 학교 교육 현장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교수·학습 방법이나 평가 방법을 도입하려는 노력과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이 최근처럼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는 없었던 듯하다. 그러한 관심은 기존의 교수·학습 방법이나 평가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수·학습 방법, 그리고 평가 방법을 도입하려는 시도로, 국어교육을 보다 발전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앞에서 논의했던 ‘수행 평가’로서, 수행 평가에 대한 관심은 평가를 통해 학교 현장의 변화를 이루어내려는 노력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수행 평가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러한 형태의 평가 방법 자체는 오래 전부터 우리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수행 평가라는 것이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평가의 일종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수행 평가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거 시험’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었는데 그 때 사용된 평가 방법이 곧 수행 평가 방법이었다. 예컨대 우리 나라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을 살펴보면 문과, 무과, 의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험형태는 주로 시문을 짓거나 혹은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을 실제로 행하거나 혹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을 평가하는 것들이었는데, 이러한 모든 시험 형태는 최근에 논의하는 수행 평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 평가는 최근에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전통 속에서 바람직한 평가 방법이라고 여겨온 것을 오늘날의 교수․학습평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재구조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시대 과거 시험 문제를 보면, “정치나 학문, 사회관습 등 전반에 걸치되 당시의 현안에 대한 해결 방안의 제시를 책문(策問)으로 출제”하고, 그에 대한 ‘대책(對策)’을 답안 형식으로 서술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문제 상황을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학습자의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또 이미 정해진 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수험생 스스로의 견해를 쓰도록 하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논술 시험과 상당히 유사한 평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특히 과거 제도가 ‘가문의 혈통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어교육의 경우 이미 수행 평가를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독후감 쓰기를 성적에 반영한 것은 그 시기가 꽤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적인 평가 혹은 요식적인 평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대학 본고사의 부활이나 논술 시험의 실시, 그리고 면접법의 실시 등 수행 평가를 도입한 예는 있지만 그러한 평가, 그리고 평가의 결과가 교수·학습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국어교육에서의 수행 평가는 우리의 전통적인 평가 방법을 계승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며, 이제 해야 할 작업은 그것을 오늘날의 국어교육의 관점에서 평가의 원리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비판해 왔던 평가의 한계는 “전통 교육에서의 평가 문화를 제대로 발효시켜 현대의 국어교육 평가에 접맥시키지 못한 오류”의 산물인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것이다.
2. 교수·학습 활동과의 관련
‘평가’ 방법의 개선이 단순히 평가 자체의 개선만으로 끝나서는 국어 교육의 개선을 이루기 어려우며, 평가의 개선을 통해 교수․학습 체제 또한 개선시킬 수 있을 때 그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평가 활동은 교수․학습 활동이 끝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평가 활동은 교수․학습 활동과 결합하면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 점에서 “평가 활동과 교수․학습 활동은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통합된 형태로써 한 가지 활동의 서로 다른 두 모습”이라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것은 평가가 교수․학습이 이루어진 후에 사후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학습 과정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교수․학습과 평가 활동을 별개로 인식하거나, 평가는 일정한 학습 기간이 지난 뒤에 학생들의 서열을 매기기 위하여 필요하다거나, 학교 행정의 구색을 갖추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인식은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평가의 대상을 학생 개인뿐만 아니라 교수·학습 체제 전반으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교육에서의 평가는 敎授體制instructional system 전반에서의 활동과 그 결과에 대한 가치 점검을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곧 평가는 학생들의 학습 결과만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 결과에 기초하여 ‘교수체제의 효율성을 점검하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수·학습 과정 및 교수·학습 자료 개선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평가,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교수·학습의 질을 높이기 위한 평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평가 활동은 교수․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평가 결과는 교수․학습 활동을 개선하는 일차적 자료로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예로 그 동안의 국어교육에서의 평가는 읽기 활동에 치우쳐 있었는데, 그것은 국어교육이 읽기 활동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교수·학습이 읽기 중심이었기 때문에 평가도 읽기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평가가 읽기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교수·학습 활동 또한 읽기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언어 수행 자체를 중시하는 수행 평가의 관점을 들여온다면, 당연하게 우리의 교실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수·학습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수·학습 따로 평가 따로식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그 동안 국어교육에서의 평가는 읽기 영역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아왔으며, 읽기뿐만 아니라 말하기, 듣기, 쓰기 또한 고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실제로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평가를 중요시하는 수행 평가의 관점,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여 논의한 평가의 원리는 그러한 비판에 대한 대안으로 적절할 것이다.
Ⅴ. 결론
최근 논의되는 수행 평가는 그 동안 우리 교육의 병폐라고 생각했던 모든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을 국어교육의 관점에서 원리화하지 않는다면, 앞에서 우려했던 것들을 다시 답습하거나, 해결하는 것이 더 요원한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 연구는 수행 평가라는 관점을, 국어교육에서 필요한 평가의 원리를 구안하는 데 참조하여 논의하였다. 수행 평가라는 관점은 평가 방법뿐만 아니라 교수․학습 방법에 대한 논의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교수․학습 방법과 평가 방식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로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논의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자 한다. 그 동안 평가의 중심을 차지했던 상대 평가로부터 벗어나 목표 지향의 절대 평가를 취할 필요가 있다. 상대 평가는 학습자의 학업 성취 정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학습 목표의 성취보다는 다른 학생들과의 상대적인 비교에 두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학습자가 학습 목표의 달성을 위해 공부하기보다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얻기 위해 공부하도록 하는 폐단을 야기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절대 평가는 다른 학생들과의 비교를 위한 평가이기보다는 유의미한 학습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국어교육이 지향해야 할 평가라 할 수 있다. 학습자의 우수한 점과 취약한 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을 더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학습자의 학습 능력 향상뿐만 아니라 교수·학습 방법의 효율적인 개선을 위해서도 필요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평가의 관점으로는 수행 평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수행 평가는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실제적인 국어 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국어교육의 본질에 적합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수행 평가의 관점을 도입하여 본고에서 논의한 평가의 원리로는 ‘언어 수행을 통한 비판적 반응의 평가’, ‘수행 과정 중심의 평가’, ‘언어 활동의 통합적 수행 평가’ 등을 들 수 있다. 학습자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사고한 결과를 비판적 반응으로 구성할 수 있도록 평가 도구 및 평가 문항을 활용해야 할 것이며, 수행의 결과뿐만 아니라 수행의 과정까지도 평가함으로써 학습자의 학습 능력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단일한 활동만을 분리하여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상의 영역을 통합하거나 언어 활동을 통합하여 평가함으로써 언어 활동의 본질에 맞으면서도 효율성을 살릴 수 있는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평가의 결과를 ‘서술식 보고형’을 채택하는 것이 좀더 효율적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좀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종합적인 성취도를 서술식으로 제공하는 ‘특성 진술형 보고 방식’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성 진술형 보고 방식이란 학생들의 다양한 비판적 반응의 구성 방식을 종합하여 서술하고, 학생이 보여주는 장점과 단점을 보고함으로써 교사와 학습자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결과 보고 형식이다.
이 연구는 이제까지 국어교육에서의 평가의 원리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이러한 원리를 적용한 평가 도구 및 평가 문항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인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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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의 ‘자기 반성’ 서사 전략
최 인 자*
Ⅰ. 서론: 생산지향적 서사쓰기 교육과 ‘발산적 사고’
문학교육에서 창작 교육이나 글쓰기 교육에 대한 논의가 새삼 붐을 이루고 있다. 대학에서의 문예창작과 활성화라는 제도적 조건도 그 발단을 마련했겠지만, 문학교육 내부에서 보면 수용자 중심의 문학교육이라는 문제의식의 발전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자 중심의 문학교육이 문학 작품의 이해와 감상에서 학습자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강하게 부각시킨 것이라면, 창작교육은 “문학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완성 단계”로서 “(학습자)의 문학 문화 생산과 향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학습자의 위치를 생산의 위치로까지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창작교육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쓰기 교육이라는 특정 언어 기능 영역을 넘어서, 문학교육이 대상으로 하는 문학 자체에 대한 재개념화를 비롯하여 문학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포괄적 관점까지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창작 교육의 질적 개념을 규정한다. 이와 관련지어 김대행 교수의 논의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그는 ‘실체 중심의 문학’은 ‘완결성을 지니는 것이기에 그것의 수동적 경험에만 교육이 제한되고 만다면 주어진 작품이나 관습의 이해에만 머물기를 강요하게 될 것이므로 수렴적 사고 위주, 절대주의적 교재관이 빚어내는 피동성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하고 ‘문학을 과정으로 설정하게 되면 발산적 사고를 통한 수행의 능력을 경험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보다 본질적이며 확산적이게 된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수렴’과 ‘발산’의 이분법은 문학작품을 정전화하고 이에 대한 수동적 이해와 학습을 요구하는 기존의 문학교육과 학습자의 능동적인 수행 행위를 통해 계속적인 생산적 버전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학교육에 각각 대응하고 있다. 창의성이라는 것이 무에서 유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장르의 변형, 굴절, 문제제기, 의문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라면 발산적 사고는 창의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발산적 사고는 고정된 규범이 구체적인 언술 행위 속에서 다양하게 분화, 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대화적 열린 사고를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대화적 사고 역시 창의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창작 과정 속에서 이 발산적 사고, 대화적 사고를 적용시켜 본다면, 곧 기성의 장르, 의미화 체계, 의미 관습 등에 대한 혁신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메카니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카니즘은 문학사 내에서 전통과 혁신의 계기, 또 일상 장르와 문학 장르의 상호교섭에 의한 새로운 생산으로 나타난다. 특히, 소설 창작 행위의 중요한 핵심이 ‘발산적 사고’에 있음을 지적한 바흐찐은, 장르 개념을 문학적 장르 뿐 아니라 일상적 발화 장르까지 확장하여 소설 창작 행위를 ‘언어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다양성의 확장이란 곧 타자화된 경험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현실에 대응하는 서사 행위의 원론적인 기능까지도 포괄한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작가들의 창작 방법을 원리화하여 ‘학습’자들에게 제공하는 식의 교육만으로는 창작교육의 지향성에 충실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정전화된 장르 문법이나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특정의 문학성을 향유하고 수행하는 문학 주체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학습자의 활동은 기성 문학 문화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 스스로 문학적 문화의 당당한 생산 주체가 되어 새로운 장르, 새로운 문학적 체험을 ‘생산’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창작교육의 이념적 지향은 오히려 문학교육에 대한 ‘생산적 지향적 관점’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산적 지향적 관점’은 독자들이 문학적 생산의 과제를 부여받음으로써 작가와 독자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지양하고, 문학적 형상화의 가능성을 전유함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사고를 표현하는 데 이를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심은 문학이 아니라 주체의 문학활동이며 그로써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문학에 두어진다. 문학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하기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생 스스로 “문화적인 활동을 수행”하여 “학생은 창조적 인간이 되고 학교를 문학적 삶의 현장”이 만든 것이다.
생산적 논점을 창작 교육에 적용하였을 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창작 행위 결과가 아니라 생산 과정이며 작가 개인의 장인적 노력보다는 사회․문화적 제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 교육이 연구 대상으로 하는 전문 작가의 글쓰기 활동 역시 ‘과정’적 생산 활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는 이른바, 작가의 글쓰기를 의미화 실천의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당대 문학적 전통, 사회․문화적 조건이라는 ‘이미 만들어진 기성’의 의미체계에 대해 작가의 독특한 생산 활동의 과정을 구조화하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생산적인 문학교육의 과제는 글쓰기의 형태론적 분류 뿐 아니라 글쓰기 생산 과정에 대한 탐색에도 있디 할 것이다.
본고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타난 자기 반성의 서사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설에서 ‘반성적 내면’의 문제는 ‘인식’이라는 개념과 함께 근대소설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논의되어 왔다. 자신의 내면 자체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 소설을 자기 반성적 서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20년대의 염상섭에서 30년대 이상, 박태원, 50년대 손창섭, 60년대의 김승옥의 계보를 떠올릴 수 있다. 특히 김승옥은 새로운 문체의 확립을 통해 새로운 내면의 반성양식을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가 개척한 60년대 문학의 새로움은 그에 대한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된 바 있다. 그 새로움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해명되었다. 첫째, 역사나 사회 등의 거대 담론이 아닌 내성적 자의식, 자기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 둘째, 기성 질서에 대한 강력한 반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 셋째, 감각적 문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본고의 문제의식에 따른다면, 이 새로움은 기성의 전통, 일상 장르를 창조적 변형 과정을 거쳐 문체화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이념적 의도를 실현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고는 김승옥이 자기 반성을 위해 채택하고 있는 서사전략, 그 서사전략의 문체론적 효과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무진기행’이 왜 여행기의 형식을 채택하고 있는지, 그 형식적 효과는 무엇이며 또 이로써 가능한 자기 반성의 양상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기존 논의에서는 ‘여행기’의 형식보다는 ‘고향’과 ‘서울’의 대립 구도에 주로 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실제 작품을 보면 이보다는 ‘지은이의 여로 과정에서의 반성’ 행위가 중점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논의과정을 통하여 필자는 창작 행위가 기성의 언술 장르들을 자신의 예술적, 이념적 의도에 맞게 변형, 굴절, 문제제기하는 발산적 사고를 통한 새로운 언술 장르를 생산 과정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나아가 자기 반성 서사의 전략들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로써 생산지향적 창작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Ⅱ. 일상적 자아의 내적 대화화를 위한 서사 전략: ‘여행기’ ‘산책기’의 문체화
1. 일상적 자아의 여행, 그 ‘열림과 닫힘’의 이중성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여행기를 문체화(stylization)한 작품이다. 제목부터가 ‘기행’ 형식임을 표나게 내세우고 있을 뿐 아니라, 돌아옴과 떠남이라는 여행기의 일반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에서 시작하여 무진에서 밤과 낮을 둘러 본 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로 끝나는 여행 구조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심한 부끄러움’이라는 심경의 변화를 수반함으로써 자기 반성 형식을 이루어낸다. 여기서 ‘여행기의 장르’는 주인공에게 반성을 제공하는 문체적 장치로 활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체화의 과정에는 작가의 이념적이고 예술적인 가치평가와 의도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동일한 일상 장르도 작가에 따라,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주제를 표현하는 문체적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행기는 한국 소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여로 형식’ 혹은 ‘길’의 모티프에 속한다. 그만큼 소설사를 관통하는 모티프가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60년대의 김승옥이 창조적으로 수용한 방식에 대해 묻게 된다. 60년대 식의 김승옥은 현대화된 도시를 살아가는 일상인의 여행, 그것도 60년대의 급작스러운 현대화에 의해 시골사람에서 도회인으로의 존재변동을 겪은 일상인의 고향 찾기 여행을 모티프화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여행과 도시화, 현대화를 살아가는 자아의 실존적 내면을 상호관련시키는 것이며, 현대의 자기 소외의 문제를 귀향의 여행 형식으로 들추어 내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전형적인 도회인이다. 그는 신문으로 아침과 저녁을 마무리하고, 정해진 스케줄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자랑스러워할 틈도 없이 바쁜” 도시의 일상을 생활로 하고 있으며, 또, 폐병으로 불우한 청춘을 보내고, 동거한 애인과 이별한 어두운 과거의 소유자이면서도 제약회사 사장의 딸과 결혼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속물적인 견해도 가지고 있다. 그는 곧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일상적 존재의 모습이다. 현대화의 결과 우리의 일상은, 객관적이고, 형식적인 기능과 법칙들에 의해 질서 정연한 의미로 구획되어 왔다. 여기서 시간은 계산 가능한 추상적 단위들로 분리되고, 정돈되며, 공간 역시 사회활동과 결부되어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의 엄밀한 분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화된 일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 그 자체가 관리된다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은 ‘한정된 책임’ 속에 살아야 하고 또 살 것을 맹세하며, ‘전보’ 한장에라도 언제든지 호출당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도회인의 일상적 자아에게 고향 ‘여행’은 독특한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곧 잊고 살았던 ‘과거의 자아’를 기억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 과정은 자신의 의미깊었던 과거 기억을 되찾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
“스물 아홉입니다.” --박은 소년처럼 머리를 긁었다. 4년 전이니까 그해의 내 나이가 스물아홉이었고 희가 내곁에서 달아나 버릴 무렵에 지금 아내의 전념편이 죽었던 것이다.
그 기억들은 현대 도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망각의 기제, 파 놓은 함정에 의해 사라졌던 것들이다. 병역 기피자의 수모와 분노, 폐병 환자의 소외감,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은 자의 고독 등은 매우 어두운 것들이다. 여행은 물질적, 신체적 자극을 가함으로써 기억을 촉발시켜 내고 있다. 이 기억들 속에서 “옛날의 내가” 된 “나” 역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꿈꾸고, 과거 청년 시절의 비합리적인 충동들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여행은 제한된 공간과, 반복적이고 조직된 시간에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가능케 하는 열림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열림으로 말미암아 자동화된 일상적 관습은 낯설게 인식되고, 통념적 질서는 전도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자 나는 이 모든 것이 장난처럼 생각되었다. 학교에 다닌다는 것,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사무소에 출근했다가 퇴근한다는 이 모든 것이 실없는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160면)
그러나 도시가 감옥과 동시에 보호막의 구실을 함과 마찬가지로, 일상 역시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이지만 또한 그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일상적 자아의 여행은 열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닫힘으로 귀결된다. 전보 한 통에 호출되는 마지막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그는 돌아오기 위해 떠났던 것이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여행의 종결구조는 곧 도회인의 일상 구조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무진기행」에 수용된 여행 형식의 창조적 변형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여행의 ‘열림과 닫힘’이라는 이중성의 활용이 그것이다. ‘고향으로의 돌아감’을 지향하는 일반적 귀향형식이 아니라 ‘고향에서 떠남’과 ‘서울로의 돌아옴’, 다시 말해 “서울의 일상으로부터의 떠남--일상으로의 돌아옴”이라는 형식은 현대적 일상의 강박성, 이율배반성을 이율배반적인 형식으로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닫힘을 전제로 한 열림, 열림을 통한 닫힘의 이중적 구조는 바로 일상적 자아가 반성한 자기 내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 주인공의 위선적인 모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일상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반성 형식은 무언가를 발전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거꾸로 ‘내면적 자아가 어떻게 규율되고 있는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가를 그 부조화적인 모습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현대 도시에 사는 일상적 자아의 허위의 비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성을 위한 여행기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경계선의 시․공성에 위치하기
‘여행기’의 장르로서의 매력은 시,공성의 다양한 조합 가능성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새로운 해석이자, 새로운 서사 모형의 탐색으로 이어진다. 시․공성(chronotope)은 인간 경험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면서도 소설의 육체를 구성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의 특정 사건, 인간의 행위가 특정한 시공적 아우라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가령, 고딕소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성’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왕조 계승과 세습적 권리의 이양, 인간들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모든 것, 예를 들어 건축술, 초상화 전시실, 무기, 가구 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전설과 전통을 살아 있게 하며, 이로써 고딕소설 고유의 서술구조는 풀어지고 매듭이 만들어 진다. 또한 시․공성은 사회적 경험을 이해하고 인간의 사회적 삶을 가시화하고 표현하기 위한 배경의 역할을 한다. 우리의 신체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것들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과정을 조직해야만 한다. 서로 다른 사회적 행위와 그 표현은 다른 종류의 시간과 공간을 추정하는 것이다. 조립 생산 공정, 농사일, 거실에서 나누는 대화 등은 일의 리듬과 공간적 조식에서 현저히 다르다. 우리의 사회적 경험은 다양하고도 경쟁적인 다층적인 시․공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무진기행」에서 활용되고 있는 ‘여행’의 시․공성은 소설사의 가장 대표적인 흐름을 관통해 왔던 ‘길’의 시․공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에 대한 창조적 변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시간적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공간적 변이를 거치면서 변화를 창출하는 전통적인 ‘길’이 아니라, 돌아옴을 상정한 순환적인 ‘길’, 그리하여 진정한 변화와 생성보다는 내면적 반성의 공간을 중층화하는 ‘길’이다.
이는 여행자를 ‘경계선’의 시․공성에 위치지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경계선의 시․공성은 문턱, 현관, 계단 등 두 곳을 이어주는 공간으로 위기와 급변, 파멸 등의 급진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곳이다. 주인공의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을 앞에 두고 이루어졌으며, 마지막의 경우도 시골 출신 룸펜에서 출세한 사회인, 도시인으로 편입되기 직전, ‘문턱’(threshold)의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여행은 시골 청년이 도시 중산층으로 확고하게 자리잡는 경계선에, 그 급진적 변화와 위기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경계선에 존재하기에 우유부단함이 결정적이 되며, 용감함이나 혹은 경계선을 넘어서는 데 대한 두려움이 심오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시간은 지속력을 갖지 못하고, 위기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 지연 속에서 내면의 심층의 말을 유발시킨다. 도시에서는 단순하게 일상생활을 유지하던 그가 무진행을 결정짓고 난 뒤부터 자신에 대한 깊은 사색에 빠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적 자아가 묻어두었던 과거 청년기 자아의 목소리, 그 심층의 목소리를 현재적 생활 속에 불러 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심층의 말은 자기 내의 또 다른 가능성을 되찾아 사색과 반성의 원천을 이루게 된다. 곧 번듯한 도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심층들, 즉 또 다른 가능성들, 다른 목소리들과 마주 대하게 함으로써 깊은 반성과 사색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공간화’ 경향은 바로 이 문턱, 경계선의 시․공성과 관련지을 수 있다. 위기의 순간에서의 망설임과 내적 대화가 변화의 시간적 진행들을 지연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행의 시간은 단 하나로 정리될 수 있는 직선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동시에 개입하는 중층적인 것이 된다. ‘병치’의 기법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햇볓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2)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쓴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무진이 가까웠다는 것이 더욱 실감되었다.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
(3)“당신 안색이 아주 나빠져서 큰일났어요. 어머님의 산소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가 오세요. 주주총회에서의 일은 아버지하고 저하고 다 꾸며 놓을게요. 당신은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쐬고 그리고 돌아와 보면 대회생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되어 있을 게 아니에요?”.(155면)
(1)은 버스 안에서의 공상 (2)는 버스 안에서의 현재적 자아의 의식 (3)은 서울 아내의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진의 공상과 서울의 아내로 대립되는 병치를 확인한다. 주지하다시피, 병치는 유사성 속에서의 불일치를 자각함으로써 당연한 지각을 낯설게 하는 기법이다. 여기서는 ‘전문 제약회사의 전무’에 대립되는 두 개의 관점, 즉 공상과 서울에서의 아내의 말이 불일치됨으로써 병치 구조가 성립된다. 아내의 말을 단선적으로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상 중간에 불쑥 끼워 넣음으로써 일상과 공상을 대립하면서, 일상의 담론들을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동화된 일상의 의식들을 탈자명한 것으로 유도하면서 반성의 힘을 불어 넣는다.
이 두 가지 대립되는 시점--세계에 대한 인지 방식--은 그 관여성의 기준을 분석하면 더욱 명료해 진다. ‘공상’에서는 ‘상쾌함과 상쾌하지 않음’이 유의미한 대립이며, 상쾌함이 의미와 가치의 핵심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상쾌한 ‘잠’을 선사할 수 있는 소금기와 저온, 햇볕으로 만들어진 ‘상쾌한 약’을 만드는 제약회사 상무가 되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아내의 말에서는 ‘전무가 됨과 되지 않음’이 유의미한 대립이자, 차이이다. 두 목소리는 중요한 것, 의미있는 것을 구별하는 관점이 다름을 보여 주고 있다.
‘무진’의 환상 공간적인 특징 역시 이러한 경계선적 위치를 잘 드러내 주기 위한 장치이다.
무진은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라는 표현과 같이 존재하면서도 실존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안개와 같이 분명한 실체는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져질 수 있는 구체적인 곳이 아니다. 무진으로의 여행 역시 ‘입몽’과 ‘각몽’의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무진에서의 경험이 현실적 경험인지 혹은 그의 욕망의 발현에 의한 가상인지 그 경계가 애매모호해진다. 그 애매모호함은 일상적 자아와 탈일상적 자아, 합리적 자아와 비합리적 충동의 자아가 동시적으로 현존하여 서로를 문제적으로 대비시켜 나가는 환상의 경계선적 사유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환상은 불가능한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표상하고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문제적으로 대비함으로써, 현실 원칙에 의해 자유의 행복이 부과된 한계를 수락하기를 거부하고 “무엇이 가능한가”하는 질문을 끝까지 추궁한다는 점에서 현실 비판의 기능을 갖는다. 이를 적용한다면, 주인공의 무진에 대한 환상적 체험은 바로 현실원칙을 가능성과의 경계선 위에 위치지음으로써 주어진 현실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는 성인과 청년, 도시인과 시골인이라는 경계선의 문턱에서의 자신의 현실적 한계에 대한 비판, 반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계선의 시․공성은 자아 내부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이질적인 두 가지 목소리를 현존시킨다.
3. 내면의 탈승화, 내부 타자성과의 대화화
이 두 목소리는 무진과 서울,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로 대립이며 충돌로 나타난다. 이 충돌은 바로 도시 일상적 자아의 내면에 은폐되었던 비합리적 충동의 자아들을 불러 일으켜 일상적 자아와 대화화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묻어 두었던 과거의 자아들이 거침 없는 솔찍함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는 바로 여행기의 문체적 힘이기도 하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는 여행체험이, 일상 생활을 유지해 주는 의식을 해체하되 은폐된 내면의 자아를 불어 일으키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턱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애써 힘을 빼고 버스를 타고 있으며, 긴장해서 버스를 타고 있을 때보다 피로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열린 차창으로 들어와서 나의 밖으로 드러난 살갗을 사정없이 간지럽히고 불어가는 유월의 바람이 나를 반수면 상태로 끌어 넣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154-155면)
바람과 햇볕, 저온의 적당한 기온, 이 속에서의 반수면 상태는 이완된 의식의 가장 명료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외부 세계의 충격을 방어함으로써 생활이 요구하는 긴장과 질서에 적응한다. 이른바 일상적 자아가 ‘종합적 기억’ 대신 파편화된 기억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제도화된 근대적 일상 속에서 의식은, 생존을 위해 자기 경험의 연속성이나 외부 세계에서의 종합적 인상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행은 생활의 세계로부터의 벗어나 생활 세계를 오히려 관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여기에는 노동 대신에 여가가 중심이 되며, 긴장된 의식 대신에 이완된 의식과 감각의 개방이 세계를 이해하는 지각 방식이 된다.
주인공이 ‘뒤죽박죽’의 엉뚱한 공상으로, 그리고 명료한 의식 대신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감각으로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체는 무중력 상태에서 외부의 사물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의 흐름을 맡기고 있다. “철공소에서 들리는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버스로 달려들었다가 물러났다. 어디선지 분뇨 냄새가 새어 들어 왔고 병원 앞을 지날 때는 크레졸 냄새가 났고, 어느 상점의 스피커에서는 느려 빠진 유행가가 흘러 나왔다.” 등의 무진에 대한 인상은 그야말로 순간순간 유동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포착한 내용들이다. 이 문장에서 행동주가 모두 사물들인 것은, 반수면의 탈중심화된 주체가 사물을 지각하는 상황을 가장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 상황은 한마디로 명료한 의식이 가정하고 있는 전제들의 탈자동화이다. 자동화가 전제된 인식적 가정들의 반복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반수면 상태에서는 의식의 자동화된 기제들이 작동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공상과, 충동, 기억의 세계는 일상적 관습을 유지하는 의식의 망각 기제를 거부한 것이다. 무진이 주인공에게는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며, “엉뚱한 생각”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 내곤”하는 곳인 이유는 바로 이 망각 기제로부터 벗어났기 떄문이다. 그리고 이는 통일적 자아를 유지해야 하는 일상에서 배제되었던 경험이 개방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여행의 탈중심화된 자아상태로, 규율되지 않은 내면의 자아는 솔직한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본능이 문명의 압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탈승화 (desublimation) 상태의 것이다. ‘절규’와 ‘광녀의 냉소’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무진의 냄새’, 그리고 골방에서의 수음행위, 소모성 질환 결핵 요양, 동거녀와의 이혼 등의 문제가 솔직하게 까발려진다. 김승옥 특유의 이러한 세계는 ‘무진’의 안개 이미지로 상징적 표현을 얻으며, 내면의 탈승화에 시적 정취까지 부여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들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해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154면)
안개는 시야를 불투명하게 하고, 사람들과 단절시킴으로써 익명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정체가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힘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만들어 놓는다. 익명과 단절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규율하는 타인의 시선에 대항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선은 대상을 분석하고, 전체화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상징한다고 할 떄, 타자의 시선은 바로 우리의 사유와 행동에 사회적 강제력을 부여함으로써 지배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 찾은 무진에서 중년의 주인공이 불륜의 사랑 행각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비와 안개에 의한 세계와의 철저한 단절이 바탕에 깔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인과적 해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안개에 의한 단절은, 일상세계에서 관리되지 않은 내면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며, 세계와의 접점을 상실한 대신 자기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들이 응출하는 곳인 셈이다. 그 목소리와의 대면, 대화로 무진에서 바라 본 서울에서의 일상은 오히려 낯설고 무의미한 실체로 다가온다. “나를 전무님으로 만들기 위해 전무 선출에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 호걸 웃음을 웃고 있을 장인 영감을 상상했다. 그러자 나는 묘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라는 진술이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외재적 공간을 빌어, 내면을 탈승화된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김승옥이 일구어낸 특유의 자기 반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골방’ ‘바닷가의 집’ ‘방죽’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전선’과 대립되는 ‘골방’에서 그는 ‘더러운 옷차림’과 ‘누런 얼굴’로, 골방에 항상 처박혀 ‘뒹굴고’ ‘멍하니’ ‘거꾸러져’ 있었다. 그가 한 일라곤 ‘신경질, 공상, 수음, 독한 담배’ 등과 함께 비명같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이 행동들의 특징은 열정적일 만큼 소모적인 낭비들이고, 무절제한 방종이며, 일종의 자기 포기 행위라는 데에 있다. 이것은 생활과 질서의 규율에서는 배제된 것들이다. 또 ‘바닷가의 집’은 전염성 질병 폐병을 다스리던, 마을로부터 떨어진 곳이다. 여기서 그는 젊은 시절에는 바다 빛깔의 엽서에 ‘쓸쓸하다’란 단어로 일관된 엽서를 띄웠고, 중년이 되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불륜의 사랑을 나눈다. 이 역시 질서의 바깥이다.
이 단절의 공간에서의 행위들을 단순하게 좌절에 빠진 존재가 보여주는 체념이자, 일상으로의 활기찬 복귀를 위한 일시적인 퇴행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서울에서 안정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가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는 우울과 좌절, 그리고 서울로 되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상처’에 대한 해명은 공백으로 남는다. 따라서 골방에서의 무절제한 자기 포기는, 생활을 위한 일상의 수행 원칙에서 벗어나 타자화된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행위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타자화된 내면의 복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의 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수행 원칙은, 의식의 검열 기제를 동원하여 생활을 위해 필요한 노동의 조건으로 모든 리비도를 재조정한다. 문명이 자기 유지를 위해 만들어 놓은 메카니즘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리비도 경제학의 원리는, 자신들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고유의 욕망’을 계산 가능한 추상적 형식의 틀로 환원한다. 문명 질서 속에서 생활하는 일상인들은 자기 유지를 위해 스스로의 자기 규율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공동체 속에서의 책임과 긴장, 질서는 모두 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규율은 자기 내면의 고유한 자연의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고, 배제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문명의 질서가 행복의 원칙과 대립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골방을 이해하자면, 그것은 단절의 힘으로 말미암아 생산을 위한 자기 규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기 검열의 의식을 해제할 수 있다. 이는 문명의 메카니즘에서의 ‘동질화된 추상적’ 영역으로부터 은폐된 ‘질적인 고유함’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선에 나가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우선시하는 것, 또 사회적 윤리 대신에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는 것, 건강한 사회인의 생산성 대신에 폐병의 소모성을 감내하는 것 등의 주인공 행위는 바로 이와 맞닿아 있다.
이와 같이 내면의 타자성을 복원하는 것은 현재적 자아와는 ‘다름’을 주장할 수 있는 자의식을 불러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일상적 자아가 대화의 상대로, 곧 불일치할 수 있는 논쟁적 상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 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179면)
‘전보’와 ‘나’의 대화는 곧 현재적 자아와 과거적 자아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무진에서의 ‘나’가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서울에서 오리엔테이션화된 정체감을 이제는 재분류(re-classification)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 ‘출세’의 범주에서, 속물과 순수, 가짜와 진짜의 범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성공’ ‘출세’의 범주에 의한다면 ‘나’는 ‘조’, 그리고 ‘장인’과 ‘아내 ’와 동일한 부류에 속하겠지만, 무진에서 ‘그’는 오히려 광녀의 비명과 창녀의 죽음, 속물들 앞에서 유행가를 부르는 여선생과 동일 부류가 된다. 아내와 장인 등은 오히려 자신과 무관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들은 ‘속물’이기 떄문이다. 따라서 그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재분류는 당당한 또 다른 목소리의 창출에는 실패한 채 상처와 환멸만을 남기고 만다. 주인공은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무진과 서울, 속물과 순수, 책임과 무책임으로 대립되는 경계선에서 흔들림을 맛보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의 불연속성이며, 불일치이며 대화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자아의 생성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현재적 자아에 대한 ‘dis-orientation’의 계기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현재가 오히려 자신을 배신하고 있음,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현대 사회의 모순과 역설이 비극적으로 자리잡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Ⅲ. 자의식의 대화적 반성 구조
이제, 김승옥의 ‘여행기’ 형식이 제공하는 자기 반성의 양상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원래 ‘반성’이란 개념은 자율 주체의 자기 대상화, 관조, 거리화, 비판 등과 맞닿아 있는 가장 근대적 개념이다. 반성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독백주의, 자연주의 등 독단성으로부터의 탈피, 비판, 의심이다. 그것은 현존의 대상에서 가시화되지 않은 본질을 끌어 낼 수 있는 사유이며, 또 사유하는 자신의 인식틀을 다시 문제삼을 수 있는 메타적 사유이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반성이 담화 전략, 혹은 문체론적 장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도르노가 논증적 사유에 대한 급진적 비판의 대안으로 ‘병렬적 글쓰기’를 제안하고, 페터 지마가 이론적 자기 성찰의 담화 전략을 연구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사실, 모든 글쓰기는 사실 자경, 자성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경험, 의식을 언어화하는 과정은 곧 자신을 상위의 관점에서 대상화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 반성의 과정에는 반성을 유발하는 문체의 힘 역시 적극 개입함을 놓칠 수 없다.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고, 구성하는 방식에 개입하여 다양한 효과, 기능을 불러 들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그것이 사회․문화적 관습으로 고정된 경우 한 시대가 마련한 주체 관리의 방법에 활용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떄, 김승옥의 여행기 형식을 통한 자기 반성의 양상은, 여행기 형식이 제공하는 서사 전략과의 연관 속에서 그 해답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김승옥의 여행기 형식은 도회인의 일상적 자아에 대한 반성을 유도, 그 자아의 허위성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되었음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것은 자기 내부에 은폐되어 있는 목소리를 끌어 냄으로써 자의식을 발동시키는 동인이 된 바 있다. 고향으로의 여행을 통해, 평소에는 애써 잊고 살던 망각 속의 기억들을 불러 일으키고 이로써 현재의 일상적 자아를 반성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첫째, 자의식에 의한 대화적 반성 구조이다. 자의식은 자신을 타자의 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인식하고, 그 다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대화적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은 현재 나를 인식함에 있어 타자의 의식, 타자의 눈과 대립하려는 대화적 긴장 속에서 자기만의 고유 세계에 대해 탐색하도록 한다. 그 고유세계는 대화적 대립 속에서 가장 솔직하고, 적나라한 표현을 얻고 있으며, 이로써 일상적 자아가 은폐하고 있는 이면의 심층적 목소리를 복원하고 있다. 여행의 형식은 감각적 층위의 복원, 새로운 시․공성의 구성으로 은폐되었던 심층의 목소리를 복원시키는 데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우리는 그 자기 세계의 유의미성, 가치성을 논하기 전에 자의식이 내면을 대화화하는 역할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응당 그러하다는 자명성의 논리와 항상 그러해 왔다는 반복의 논리로 어떠한 성찰도 쉽게 용납하지 않은 일상적 자아의 자동화된 의식을 반성 대상으로 올려 놓는다는 점, 특히, 현대적 교환가치에 의해 ‘질적 고유함’을 상실하는 일상적 자아에 대한 ‘다름’을 주장하는 논쟁적 불일치를 유도한다는 점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대화는 자아에 새로운 생성,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보다, 일상적 자아의 모순을 모순 그대로 이율배반적으로 인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대상화하는 상위의 주체를 상정하지도 또 다른 자아를 두어 거리를 두어 관조하지도 않음으로써, 자기 파괴와 자기 생성의 반성적 운동을 유보한다. 대신, 일상과 탈일상, 안정과 자유의 적절한 배치 속에서 일상적 자아를 혼란에 빠뜨리는 부정적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부끄러움’이라는 부정적 심리가 그것이다. 이 부끄러움은 일종의 상처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기 검열의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과는 다르다. 이는 자기 소외에 대한 반성이자 자의식에의 확인이며, 나아가 자기에 대한 위기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 다른 출발’을 제시해 주는 긍정적 반성이라기보다, 주어진 형성된 자아를 뒤흔듦으로써 안정된 것, 고정된 것의 변화 가능성만을 탐색하는 ‘반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과의 논쟁적 대결을 유도해 냄으로써 ‘순간적으로나마 자기의 진실을 끌어낸다. 이러한 반성의 양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의 열림과 혁명의 닫힘을 동시에 체험한 4. 19세대의 자의식의 모습이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안정과 확신이 허위라고 할 때 이러한 반성 양상 역시 유의미한 것이 된다.
이러한 반성의 양상은 작가, 김승옥의 60년대적 경험에 대한 나름의 서사적 대응에 따른 것이다. 서사쓰기 교육이 자기 반성적 서사 문법 그 자체를 학습의 대상으로 고정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작가가 여행기 형식에 대한 창조적 변형을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열어 나가고자 했던 역동적 과정 자체를 투시하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기 떄문이다.
Ⅳ. 결론
본고는 창작교육은 생산지향적 문학교육이라는 포괄적 관점에서 이해될 때라야만 그 질적 개념을 담아 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고정된 장르 문법을 수렴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대신 기성의 장르를 변형, 문제제기, 굴절하는 역동적 과정에 참여하는 발산적 사고를 교육해야 한다는 입론에서 출발하였다. 이 전제는 문학 창작이 이루어지는 구조, 곧 기성의 의미체계와의 대화화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문체, 장르를 창조해 나가는 문학사의 역동적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창조 행위의본령에도 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소설 쓰기는 일상 발화장르의 문체화 과정, 그 창조적변형 과정을 통해 역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에 주목하고,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타난 여행기 형식의 문체화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 결과, 「무진기행」는 소설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행기’ 형식을 창조적으로 변형함으로써, 일상적 자아의 반성적 서사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무진기행」에서 여행기 형식은, 일상의 열림과 닫힘의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현대적 일상의 경험을 형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열림은 합리화된 사회 속에서 억압된 또 다른 내면의 충동을 불러들여 자기 자신과의 대화적 관계를 맺도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자아를 포기하고 새로운 생성을 해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닫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상적 자아의 자명성, 고정성은 탈안정화되면서 위기와 혼란에 빠뜨리게 함으로써 자신의 허위를 반성하게 된다. 이는 시․공성을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는 여행기 형식의 특징을 활용함으로써 내부의 모순적 이중성을 모순적인 모습 그대로 투시해 낼 수 있음으로써 가능하였다. 이는 반성의 일반적 양상, 곧 관조, 거리화, 자아 대상화와는 다른 모습이다. 열림과 닫힘의 이중 구조 속에서 존재한 4․19세대의 자의식과 의미론적 실천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서사쓰기 교육에 활용한다면 크게 두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소설 구성의 일반적 패턴이었던 ‘길의 형식’ ‘여행기’를 다양하게 변형하게 함으로써 발산적 사고를 유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습자 스스로가 또 다른 문체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편지, 일기, 여행기, 일상의 대화 언어 등 일상 장르의 특징을 활용하거나 변형하여 서사 쓰기를 일상화하는 것이다. 이 역시 자신의 표현적 의도에 적합하게 일상 장르를 변형하는 과정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문학 문화의 생산 주체로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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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청자와 감상의 논리
최지현*
문학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이 왜 비판을 받게 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문학교육이 교육의 이름으로 혹은 문학의 이름으로 골몰했던 것은 문학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설명 방식을 傳授하는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대행, 「손가락과 달 : 時調 形式을 통해 본 文學敎育의 指標論」
1. ‘손가락과 달’ 그리고 이론의 실천성
1994년에 발표한 「손가락과 달」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논문에서 김대행 교수는 시조 형식의 구조 원리로 <대상-관계-의미>라는 인식론적 구도를 지닌 ‘ORM’ 원리를 주장하였다. 일찍이 ‘병렬과 접속-종결 구조’라는 원리를 주창한 바 있었으며, 게다가 시조 형식의 미학적 기반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명백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 논문에서 대상에 대한 문학교육적 관심이 인문학적인 관심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필자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진술의 의미가, 그리고 이를 위해 사용한 ‘손가락과 달’이라는 은유의 함축이 ‘실천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닌 ‘이론 그 자체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필자에게는 문학교육에서 선언적 차원이 아닌 실천적 차원에서 경쟁할 이론적 상대가 등장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98년 겨울, 이 논문의 서론을 쓰면서 필자는 아직도 그의 문제 제기에 힘입고 있다. 이것은 문학교육을 위한 정당한 이론을 구축하겠다고 골몰하는 문학교육학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핑계 삼아 말하자면, 문학교육적 관심을 온전한 문학교육이론으로 구축하기 위해 요구되는 방법론적 접근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도 아직 충분하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나 현대시교육의 영역에서는 이론이나 지식에 개입한 형이상학적 완고함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운율, 이미지, 화자, 은유, 상징, 이런 용어들에 대한 문학교육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째서 그러한가. 합리성, 혹은 과학성이라는 이름의 이론적 정교함 덕분에, 감상 없는 교육의 심중한 문제들이 잘못된 실천의 탓으로 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교육이론의 어떤 개념이나 범주도 감상의 원리로서 도출되어야 하고, 그것이 이론의 실천성을 담보하는 합당한 길이라 한다면, 문학교육에 종사하는 학자와 교육자로서 제 몫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현대시교육에 동원되는 이론과 여기에 쓰이는 개념 및 범주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라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의 하나로, 필자는 여기서 ‘화자론’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논증하고 주장하려는 것은, 대부분의 교과서와 교수-학습 과정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화자(話者)’라는 문학이론의 범주가 정작 실제의 교육 상황에서는 풍부하고 박진한 감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감상교육을 위해서는 불가불 독자-청자의 위치에서 담론으로서의 시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말하자면 그 동안 논의의 공간 밖으로 내몰았던 시인의 문제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화자론의 문제 의식과 그 한계
시에 대한 여러 논의들 속에서 화자는 시인의 태도(Kayser, 1982)나 어조(Brooks & Warren, 1976), 또는 경험(Richards, 1987)을 나타내는 기능이나 장치로 여겨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브룩스와 워렌이 말한 대로 화자가 시의 연극적 패턴(dramatic pattern)에서 비롯된 창조적 산물이며, 고쳐 말해 시의 본질이라고 했을 때에도, 연구자들은 목소리의 근원으로서 시인에 대해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신비평의 영향으로 교사들이 화자와 시인이 같지 않음을 학생들에게 강조할 때에도 곧잘 진술 내용의 참됨과 거짓됨을 따지는 근거를 시인으로부터 이끌어 와야 했으며, 그만큼 화자는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담론 이론이 등장하게 되자 모호한 위치를 점하던 화자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전언(傳言)을 중계하는 대리인으로서 양자(兩者)의 약호화-해호화 과정에 일치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되는 상호작용적 해석의 담지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시교육의 영역에서도 이를 수용하여 시를 일종의 담화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80년대 후반 이후로 현대시교육이론에서 화자에 대한 논의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이론적 심도(深度)도 깊어지게 되었다.
논의의 초기에는 주로 의사소통이론적 관점에서 제기된 문학과 언어학이 화자론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시적 담화에서 ‘화자-메시지-청자’ 관계에 주목하였던 야콥슨의 경우(Jakobson, 1979)에서나, 텍스트성에 주목하였던 언어학자인 보그랑데와 드레슬러의 경우(Baugrande & Dressler, 1991)에서처럼, 화자론은 텍스트를 정보성, 수용성, 상호텍스트성 등의 조건들을 통해 독자로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시를 확정적인 의미 연관을 갖는 독립적 존재로 규정하는 대신 시인과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적 발화체로 규정하였다. 의사소통이론적 관점에서 제기된 화자론은 시인과 독자 사이의 신뢰성, 혹은 진정성을 이론의 가장 가치 있는 전제로 삼았다. 만일 시인의 진술이 진실하며 그의 능력이 신뢰할 만하면, 이를 통해 생산된 정보는 가치 있다는 전제가 그것이었다.
의사소통이론적 관점에서 제기된 화자론에서 화자는 시의 의미 형성에 독립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화자는 시인과 원리적으로 동일한 인격을 지닌 것으로 가정되었던 것이다. 이는 화자의 말이 시인이 했을 법한 진술과 전혀 다르게 나타난 경우라 할지라도, 독자가 화자의 표현 속에서 시인의 진정한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는 관점을 형성시켰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화자론은 이상적 독자나 잡음(noise)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였는데, 또한 이것들은 시를 적절한 규약에 따라 해독(decode)해야 할 객관적인 메시지라고 보는 가정을 필요로 했다.
문학에서의 담론 연구가 초기에는 주로 소설을 중심으로 수용된 까닭에 몇몇 서사이론들도 화자론 등장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물론 이 이론들 역시 기저에는 의사소통이론적 관점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를 차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서사 담론에서 화자의 문제가 인물과 서술자 사이에서 각기 다르게 기능하면서 작가(어떤 때에는 내포작가라 불리기도 하는)와는 독립적인 주체로 설정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수용하는 쪽에서는 작가에 대한 혼란도 있기 마련이어서, 굳이 실제작가와 내포작가(어떤 때에는 서술자와도 혼동되는)를 구분하는 문제까지 발생하기도 하였으므로, 이를 차용한 화자론이 시의 화자와 시인을 분리해 생각하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을 갖는 화자-시인 분리론이 시를 자족적이고 완결된 예술품으로 보는 입장에서의 화자-시인 분리론과 성격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굳이 성격을 가르자면, 시인의 본래 목소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관점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는 특별히 바흐친(M. M. Bakhtin)의 ‘다성성(heterglossia)’이라는 범주를 담론 주체와 관련해서 해석한 90년대 전반기의 서사문학 연구 경향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담론으로서 시의 화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데, 이때 가장 많이 인용된 채트먼(Chatman, 1990)의 도식은 기본적으로 발신자-수신자 모델과 일치하면서도 시인과 독자 사이를 단선적인 관계 대신 중층적(重層的)이고 다초점적(多焦點的)인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시라는 담론에 상대적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었다.
채트먼의 도식과 관련하여, 시인과 독자 사이의 소통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들은 독자에게 말하기 위해 시인이 동원하는 화자의 등장 방식과 시인-화자 관계에 주목하였다. 예컨대 위의 도식에 나타난 ‘서술자’를 화자로 볼 것이냐, 혹은 시적 화자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인물, 혹은 현상적 화자로 볼 것이냐 하는 다양한 분화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화자의 기능이나 역할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화자의 본질적 속성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해석상의 원리로 구축하려 했던 시도가 김창원(1993, 1994)에 의해 이루어졌고, 유영희(1994, 1996)에 와서는 유형 분류와 구체적인 적용 사례가 검토되었다.
김창원(1993)에 의해 수정된 위의 도식이 갖는 장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해석의 결과를 보증하고 또 그 과정의 적절성을 검증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이 도식에서 독자는 텍스트에 기능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의사소통의 성공이 대화의 이상(理想)이듯이 텍스트의 이상은 독자의 참여를 통한 해석의 완수라고 평가된다. 이 때문에, 의사소통이론적 관점의 화자론이 갖는 교육적 함의는 수용이론 이래로 매우 독특하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텍스트 분석과 의사소통의 양주체에 대한 고려를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자론이 제기하고 비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화자론이 문제 제기했던 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시를 시인의 창조물이요, 어느 누구도 훼손시킬 수 없는 자족적인 생명체요, 완결된 예술품이라 여겼던 유기체론적 문학관이었다. 그리고 가장 열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표상이든, 혹은 집단적 무의식, 혹은 욕망의 표현이든 간에 독백적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시교육의 가능성을 막아 버렸던 귀족주의적 교육관이었다. 어느 쪽이든, 궁극적으로 그것은 시인의 내면 표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시인-작품의 비분리(非分離)를 전제로 삼고 있었다. 이를 비판하면서, 화자론은 독백의 담론을 대화의 담론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하지만, 시인을 대신하여 화자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면서 화자론은 이른바 ‘개성론’(박동규․김준오, 1986)이 지니고 있는 의도주의적 오류를 그대로 계승하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예컨대, 화자론의 이론적 배후 중 하나인 텍스트 언어학에서는 텍스트가 소통 과정의 일부로 나타날 때에만 화용론적 범주로서 텍스트 기능을 갖는다고 보고 있는데(고영근, 1993), 이 말은 규범화된 상황 맥락에 따라 텍스트를 이해하는 우리들의 관습이 소통 과정에서 텍스트가 산출된 것처럼 가정하는, ‘자기논증적 가정’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텍스트를 의사소통행위로 가정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적 맥락에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소통행위는 상호간의 협력과 준칙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혹은 그렇지 않으려는 발화들에 대해서는 텍스트 규정을 적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의사소통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텍스트 분석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기란 실현되기 어려운 법이다. 지마(Zima, 1992)가 의사소통이론을 평가하는 가운데 이 이론이 <약호 공동체communauté de codes>를 문학적 전언을 성공적으로 전달하는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비판은, 비유컨대 의사소통이론적 방법이 사용가치로서의 문학 텍스트를 교환가치의 척도로 재단(裁斷)하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화 참여자로서 개개인의 공정한 거래를 가장하고 있는 것에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를 포함하여 비판적 의사소통이론가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랑그(langue)의 인정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언어적 발화 맥락으로부터 텍스트의 의미를 확정지을 수 있다는 모든 가정에 대한 비판의 관점은 타당하다고 본다.
시 텍스트에서 화자를 분석할 때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분석이 서정 양식 본래의 것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서사 양식의 틀을 원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숭원, 1995). 화자 논의로 원용되는 서사 이론이 과연 시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은 현재로서도 풀리지 않은 과제일 뿐 아니라 앞으로서 오랜 동안 남겨질 과제라는 점에서 문제로 남는다. 예컨대, 상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면, 작가나 시인이 대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의 차이가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면, 혹은 시나 소설 작품을 읽는 독자의 참여 방식이나 양상이 사실상 같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 이를 건너뛰고 적용시킬 일반 이론을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유용함의 정도가 클수록 무리한 유추가 낳을 오류 가능성에 대해 좀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들이 화자로 인해 시비를 거는 서정시의 문제, 다시 말해 시인의 내면적 고백, 혹은 독백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시에서 시인의 목소리로 들으려는 독자를 의도주의적 오류라고 억누르는 것은 독자가 듣는 모든 소리를 독자의 목소리라고 말하게 되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이 의사소통적 상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시를 썼을 경우에도 독자에게 감상하고 해석할 여지가 남겨지는 것처럼, 어떻게 위장을 하든 간에 시인 자신의 목소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울려나오게 되어 있다. 화자론은 시인을 대신하여 위장을 벗기려고 했지만, 그것이 위장인지, 또 위장이라면 어떤 은폐의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밝히는 데는 성공했다고 자임할 수 없다.
필자는 시를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를 시의 형식이 아닌 시라는 담론의 실현 과정에서 찾는 것이 옳다고 본다. 시는 철저하게 독백일 수 있다. 동시에 시는 매우 난해한 수사적 책략이 동원된 정치적 대화일 수도 있다. 여기에 화자론이 일정하게 성취한 바가 있었다면 그것은 시를 대화로 읽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고, 또한 화자론이 일정하게 한계를 드러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대화의 주도권을 화자에게 넘김으로써 대화로서 시의 작용이나 효과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의 감상은 화자의 진술과 그 진술에 담긴 감정과 태도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화자를 동원하는 시인의 진술과 그 진술에 담긴 감정과 태도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그 동안 독자를 발화 행위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부인해 왔기 때문에 독백으로서의 시, 혹은 시인의 주관적 자기 표현으로서의 시라는 관념이 생겼다면, 독자가 화자를 통해 시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는 기왕의 시 감상 방법에 대한 대안을 삼기에 불충분하다. 그것은 시를 독자의 몫이 되게 할지는 몰라도, 그 결과 독자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다시금 독백(獨白)의 동굴로 들어서는 모순을 스스로 만들고 만다.
화자와 시인이 일치하느냐, 아니면 서로 다른 존재냐 하는 것은 독자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독자가 시인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독자의 세계 지식(world knowledge)의 여하함에 따라 화자와 시인이 일치하거나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자론이 화자와 시인의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을 보였다면, 독자와 청자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은 그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독자는 시인이 요구하는 청자의 입장이 반드시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반면에 만약 독자가 특정한 위치의 청자로서 화자의 진술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때는 시인의 대리 표상이든, 아니면 시인이 가공한 진술 주체이든 화자를 통해 진술의 의도와 방식을 파악할 가능성이 열리며, 감상 또한 가능해진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계속 논의한다.
3. 이중 청자의 기반과 존재 방식
필자는 ꡔ님의 沈黙ꡕ(1926)에 실린 머리말과 맺음말의 진술이 서로 어긋나고 있음에 주목하여 「나룻배와 行人」을 분석하면서 한용운의 시가 ‘이중 청자’를 두고 있을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다. 이것은 그의 시가 일반적으로 읽혀 왔던 대로의 구도시로서뿐 아니라 제도시(濟導詩)로서의 담론적 실현이 이루어지기도 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나’의 발화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르게 발현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며 동일한 상황에서 다르게 발현하는 여러 목소리라는 점이다.
하나의 시에서 ‘나’라는 주체가 구도자/제도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님’이 조국일 수도, 절대자일 수도, 지상의 애인일 수도 있는 진술의 다의성과는 성질을 달리한다. 여러 목소리, 곧 다성적 목소리의 주체는 실은 서로 다른 주체들의 각기 다른 지향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바흐친(M. M. Bakhtin)이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바흐친은 「언어학, 문헌학, 인문과학에 있어 텍스트의 문제」(1959-1960)라는 논문에서 ‘초(超)청자’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여기에 사용된 ‘초(超)청자’라는 용어는 발화자의 진술을 듣는 실제적인 청자인 제1청자, 그리고 발화자 자신이 역할하게 되는 제2의 청자와 구분하여, 발화자가 감지하고는 있지만 그 존재가 드러나 있지 않은 제3의 청자, 곧 타자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흐친은 발화자가 일회적인 발화 속에서도 실제적인 청자와 제3의 청자 모두를 의식하여 말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서의 발화가 화자와 청자 사이의 끊임없는 조정 과정임을 강조하였다.
바흐친의 ‘다성적인 목소리’가 어째서 서로 다른 주체들의 각기 다른 지향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라깡(J. Lacan)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겠는데, 특히 그의 논의에서는 바흐친보다 한 걸음 나아가 화자보다 앞서 존재하는 청자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라깡의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화자인 ‘나’의 진술 속에 이미 타자의 목소리가 들어와 있다는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타자’, 이 익명의 존재는 감시하는 존재이다. 푸코(M. Foucault)의 용법을 빌면, 그 자신은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시인을 특정한 ‘개인’으로 주체화하는 규율 권력이다. 권력의 작용은 있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는 ‘보이지 않으므로’, 주체의 복종은 자발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곧, 발화를 구성해 가는 절차들 속에서, 그 사유의 가능성과 제한 속에서, 빠롤(parole)을 일정한 랑그(langue)에 귀착시켜 가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자발적 복종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다.
일상의 언어 행위들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일반적이기에, 담론으로서의 시에서도 예외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담론으로서의 시는 이러한 상황에 의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성적인 목소리를 처리하는 독특한 방식들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이는 시의 어조나 태도, 또는 대상에 대한 거리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페르소나(persona)’라든가 ‘탈(mask)’ 같은 화자의 존재 방식이 아니라 이 논문에서 밝히고자 하는 ‘이중 청자’라는 청자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이중 청자, 곧 화자가 지목하고 있는 청자 외에도 또 다른 위치와 관계를 갖는 청자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자가 본질적으로 시인에 대해 우위에 놓여 있는 담론적 상황에서 비롯된다. 이 상황은 시라고 하는 담론이 지닌 의사소통적 성격, 곧 독자의 비확정성에 의해 규정된다. 묻지만 답(答)해 주지 않고, 답하지만 평(評)해 주지 않는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시인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이 존재에 의해 좌절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진정한 청자’가 따로 있더라도, 시인은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청자를 향해서만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청자를 향해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진정한 청자’가 자신의 진술을 듣게 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또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는 구체적인 작품의 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간에 이중 청자의 존재를 느끼는 시인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대할 수 있다. 먼저 윤동주의 「참회록(懺悔錄)」을 검토해 보자.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주리자.
-- 만 이십 사 년(滿二十四年) 일 개월(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 「참회록(懺悔錄)」, ꡔ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ꡕ, 1948)
1연의 ‘어느 왕조의 유물’은 이 시를 역사적 맥락에서 양심적 지식인의 자기 반성으로 읽게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하지만, 필자는 타자에 대한 시선이 ‘참회(懺悔)’라는 행위 속에 잠입해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참회’란 ‘죄의 자백’이며 ‘회개’이다. 시인 자신은 결단코 이 진술의 상대역을 맡을 수 없다. 참회한 이에게 죄 사함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절대성을 지닌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시를 종교적으로 승화된 정신 세계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보기에는 참회록을 두 번이나 쓰는 행위를 하게 될 것이라고 예감하는 화자의 이율배반적 자기 폭로는 여간 심각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성과는 성격이 다르다. 타자의 절대성이 존재하는 동안 개인은 주체가 아닌 대상일 뿐이며, 그때에는 참회는 사라지고 구속(救贖)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존재를 자각하면서도 시인은 그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시키면서 그 절대성을 상쇄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의 편에서 보면, 이는 시인에 의한 타자의 지각과 화자를 통한 그것의 유보가 명료해지는 매우 의식적인 행위 과정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
한 편에서 「참회록(懺悔錄)」처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청자로 독자를 고착시켜 가는 시인의 뚜렷한 시선이 존재하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정지용의 「유리창1」처럼 은폐되어 잘 보이지 않는 시선이 있기도 있다. 여기서 호명된 청자인 ‘너’, 곧 죽은 자식을 향해 말하던 화자가 그 절절한 고통의 와중에 느닷없이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고 짐짓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기법의 문제로 보기에 어색함이 너무도 크다. 따라서, 김소월 같았다면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하고 울부짖었을 법한 이 시의 정황 속에서 어찌 보면 매우 냉담한 느낌을 주는 이 진술은 통제되지 않는 타자ꠏꠏ아마도 이것은 남성의 애상적 감정을 금기시하는 가부장적 질서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ꠏꠏ에 대한 시인의 방법론적 대응으로밖에 볼 수 없는데, 이것은 화자라는 기능을 작시의 중요한 장치로 사용하여 유기체적, 일원론적 세계관에 대항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시의 논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화자라는 기능을 부리는 시인에게는 그가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혹은 그 자신이 일치하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타자의 존재가 텍스트 생산에서 부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시인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이 독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시를 창작하거나 혹은 그 자신이 창조주로서의 절대성을 믿고 있지 않는 이상, 자신의 진술에 개입하는 명명되지 않은 타자의 존재에 대해 의식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이란 그가 관여할 수 있고, 심지어 지배할 가능성도 갖는 청자를 이러저러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화자가 있기 전에 청자가 생기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상황이 이중 청자의 기반이다. 이중 청자는 시인에 의해 호명된 청자와 호명되지 않은 청자로 구성된다. 이때 호명되지 않은 청자란 시인에 의해 감지되기는 하였으나 무시․기피․은폐되는 검열자로서의 타자이다. 그것은 절대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많은 시들이 독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한 그 가운데 일부는 ‘사실상’ 시인 자신이 독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들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태도 여하에 관계 없이, 텍스트 생산에는 시인 자신이 독자로서 검열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불가불 존재하며 더구나 작품으로 불리게 되는 모든 텍스트는 이미 독자에 의해 읽혀졌어야 할 것이므로, 독자는 여전히 우세한 지위를 유지한다. 심지어 화자와 청자가 모두 텍스트 뒤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 ‘함축적 화자’와 ‘함축적 청자’를 지닌 시 가운데 일부는 진술의 표면에 나타나는 무관심적 태도로 인해 오히려 대상에 대한 시인의 집착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능으로서의 화자가 드러나거나 그렇지 않은 표지를 지니고 있을 경우에도 목소리는 화자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목소리에 의해 화자가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같은 화자가 다른 목소리를 위해 사용되거나 다른 화자가 같은 목소리를 위해 사용되거나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호명된 청자라 해서 반드시 텍스트의 문면에 청자의 호칭, 다시 말해 대상화될 수 있는 이름이나 혹은 대명사화된 지칭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청자의 신원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암시만으로도 호명된 청자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시인에게 청자는 실체에 속하지만, 독자에게 화자는 기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른 담론적 과정은 시인-청자, 화자-독자의 교차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화자나 청자가 시의 표면에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혹은 ‘나’-‘너’의 관계이든, 그와는 다른 관계이든 간에, 독자는 화자의 위치나 존재 방식이 아닌 독자 자신이 조정한 이중 청자의 위치, 곧 호명된 청자와 호명되지 않은 청자 사이의 거리와 그 관계에 의해 시적 상황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4. 이중 청자를 통한 감상
시를 읽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중 청자의 위치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독자는 시인에 의해 호명된 청자와 호명되지 않은 청자의 거리와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화자의 진술에 대응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를 전제로 하여 독자가 이중 청자의 위치에서 화자의 진술에 어떻게 대응해 가는지를 살필 수 있다면, 감상의 과정과 그 방식에 대해 논리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독자의 세상사 지식과 정서체험구조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일 수 있으며, 또한 감상의 전략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 화자론이 전개한 것과 같은 고정된 유형화를 시도하는 것은 정작 독자의 감상에는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히려 이 분석 과정은 독자의 다양한 체험의 과정과 그 방식에 대한 조력자, 특히 교사의 이해를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독자가 청자의 위치를 정하는 데 있어서, 시인에 의해 호명된 청자와 그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 독자 자신이 호명된 청자로서 화자의 진술을 단일한 목소리로만 받아들이고 이에 반응하게 되는, 말하자면 <독자=호명된 청자=호명되지 않은 청자>의 상황과 ㉡ 독자가 호명된 청자로서 자신을 향하지 않는 또 다른 목소리를 감지하면서도 그것이 향하고 있는 ‘호명되지 않은 청자’와 호명된 청자인 자신이 갖게 되는 거리의 문제성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의미만을 부여하게 되는, 다시 말해 <독자=호명된 청자≠호명되지 않은 청자>의 상황으로 나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독자가 시인에 의해 호명된 청자가 아닌 또 다른 청자, 곧 ‘호명되지 않은 청자’로서 화자의 진술에 대응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는 독자가 호명된 청자의 위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그 거리의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나뉘어지는 두 가지 상황이 존재할 수 있다. 이는 ㉢ 독자가 자기 자신을 호명된 청자로 보지 않으면서도 호명된 청자에 동일시하거나 혹은 매우 친밀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시인의 진술에 공명하여 호명된 청자에 감정 이입하게 되는, 말하자면 <독자=호명되지 않은 청자∽호명된 청자>의 상황과 ㉣ 독자가 호명되지 않은 청자의 위치에서 시인의 진술을 감시하며 호명된 청자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를 대상화하는, 다시 말해 <독자=호명되지 않은 청자≠호명된 청자>의 상황으로 나뉠 수 있다.
이상의 상황을 이제 청자가 아닌 화자의 측면에서 다시 살펴보면, ㉠과 ㉡은 독자가 화자의 진술과 수사적 책략 안에서 호명된 청자로서 반응함에 따른 것으로, 그리고 ㉢과 ㉣은 독자가 특정한 청자를 호명하려는 시인을 직접 심문함에 따른 것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격은 각기 달라서, 독자가 화자에 반응할 때에도 그 자신을 호명된 청자에 동일시하게 되느냐 아니면 호명된 청자에 위치에 자신을 투사하느냐에 따라 망각이나 개인화(personalization)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혹은 시인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고 할 때에도 독자가 호명된 청자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생기느냐 아니면 호명된 청자를 대상화할 정도로 거리와 관계의 벌어짐이 커지느냐에 따라 역전이(counter transference)나 자기 검열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 제시된 기본적인 감상의 방식들을 작품을 통해 구체화하기로 하겠다.
㉠ 서정주의 「춘향유문(春香遺文)」에서는 허구적인 인물로서의 ‘춘향’과 ‘도련님’이 각각 화자와 호명된 청자의 배역을 맡고 등장한다. 이렇게 화자와 호명된 청자가 ‘나-너’의 관계가 아닌 타자들의 관계를 이룰 때에는, 독자가 화자의 진술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지가 문제 된다.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허구적인 인물인 화자가 또 다른 허구적인 인물인 청자에게 건네는 말이 일정하게 대상화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양상을 지닌 시들에 대해 ‘아니마/아니무스’나 ‘퍼소나’, ‘탈’ 같은 용어들을 분석을 위해 동원했던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보여주는 목소리의 근원에 대한 연구자들의 의식은 결국 배역이 있든 없든 간에, 그리고 그 배역이 전일적으로 통합되어 있든 아니면 분열되어 있거나 소외되어 있든 간에 말하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독자의 문학 체험을 놓고 보더라도, 이러한 시적 상황을 대상화하게 되는 것은 일부의 경우에 국한된다. 문학 체험이 대상에 대한 상상이라기보다 체험 주체인 자신에 대한 상상임을 고려할 때, 만일 독자가 자신에 대한 상상을 더 이상 전개시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독자 역시 시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청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이리저리 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 춘향(春香)의 말․3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서정주, 「춘향 유문(春香遺文)」, ꡔ서정주 시선ꡕ, 1956)
자신을 다른 인물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것을 두고 정신병리학에서는 해리장애(解離障碍)에 속하는 다중인격으로 보거나 혹은 망상이라고 판별하지만, 이런 병리적 현상이 아니고도 영화 관람 같은 몰입적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사람도 얼마든지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다. 이 경우 현실과 영화(혹은 꿈) 사이의 경계, 특히 시간 경계를 망각하게 되는데, 이 때에는 대상 인물의 고유 명사는 지워지고 ‘나’라든가 ‘우리’와 같은 대명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춘향유문(春香遺文)」에서 호명된 청자가 ‘도련님’이라고 해서 이와는 다른 신분이나 지위를 갖고 있는 독자가 이 시를 누군가가 제삼자에게 하는 남의 이야기로 들을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예컨대, 생활에 찌든 중년의 기혼 여성이 그 대상이었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독자인 그녀가 이 시를 마치 자신에게 전해지는 연가(戀歌)로 받아들일 개연성을 얼마든지 있다.
이 점은 화자가 자신을 ‘춘향’이라고 밝힌 것과 관련해서 말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칭하기 위해 객관적인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행위로 인해 우리 자신이 객관화될 수 있다고 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보이게 될 것이라고 믿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지칭을 객관화하는 것은 대개 자신의 지위라든가 청자와 자신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인데, 많은 경우 이러한 이름 부르기는 청자에 대한 친밀감의 표현이다. 이럴 때에는 독자 또한 이에 반응하여 허구적인 존재인 청자에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독자가 젊고, 미혼이라 하여 더 쉽게 청자에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가 정상적인 인격을 지니고 있다면, 어떤 젊은 남성 독자도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화자가 ‘춘향’이라고 해서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역으로 모든 독자들이 청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상상을 통해 ‘도련님’으로 불려지는 청자에 동일시 될 수 있는 개연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도련님’은 단지 청자를 부르는 지칭으로만 기능하지, 특정한 인물형을 구성하게 되지는 않는다.
독자의 편에서 볼 때, 이러한 감상의 방식은 화자가 호명된 청자로서 자신 외에는 어떤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다. 독자는 화자의 진술을 따지고 분별해 내어야 할 부담을 지지 않기 때문에, 쉽게 자신을 청자에 동일시할 수 있게 된다.
㉡ 오장환의 「성씨보(姓氏譜)」에서는 ‘나’라는 화자가 드러나 있음에 비해 호명된 청자는 드러나 있지 않다. 드러나 있지 않았으므로 호명된 청자는 시인의 위치에서 볼 때 화자의 고백을 들어줄 사람이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방임된 엿듣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고, 호명된 청자의 존재가 시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주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니, 호명된 청자에 대비해야 하는 화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못했거나, 상징적인 의미 부여와 같은 수사적 책략을 썼다거나, 혹은 은폐하거나 과도하게 강조하는 기만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뿌리에 대한 자기 폭로적인 진술은 부끄러움이나 모멸감이 아닌 단호한 자기 긍정을 담고 있어서 고해 성사(告解聖事)라 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와 함께 ‘성씨보’에 대한 반감 또한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으련다’ 같은 결의에 찬 다짐보다는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는 식의 훨씬 여유 있는 자기 방임으로 표현되어 은폐나 기만으로 보기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진술은 이보다 정확히 3년 후에 같은 <시인부락> 동인이던 서정주가 「자화상(自畵像)」(ꡔ시건설ꡕ 7호, 1939.10)에서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하고 말한 것과 맥락이 일치한다.
- 오래인 관습,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내 성은 오씨(吳氏).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룰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 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구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오장환, 「성씨보(姓氏譜)」, ꡔ조선일보ꡕ, 1936.10.10)
이 시를 읽는 독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인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일 수도 있고, 어쩌면 부정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가 자신을 검열관으로 삼는다면 그는 무엇에 의지해 공감에 바탕을 둔 감상을 할 수 있겠는가. 독자가 검열관으로서 시인의 진술을 직접 심문할 때에는 불가불 가계보를 중시하는 ‘똑똑한 사람들’의 위치에 서야 할 것이니, 이것은 감상의 방식이 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시인 자신이 호명하지 않은 청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조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독자가 시인에 의해 호명된 청자의 위치를 취해 화자의 고백을 그의 진술 맥락대로 충실히 수용하려고 하였다면, 개인화나 역전이, 특히 앞의 것을 통한 투사가 필요하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호명된 청자로서 독자는 「성씨보(姓氏譜)」를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하여 듣는다. 이 패러프레이즈의 과정은 시의 내용을 이해하거나 구조를 파악하거나, 나아가 화자의 정서 상태를 유추하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시를 충분히 감상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감상은 아직까지는 일면적이다.
㉢ 해방후 ‘후반기’ 동인으로서 현대 의식과 도회적 감수성을 시에 담았던 김경린의 「국제열차는 타자기(打字機)처럼」에서는, ‘나’와 시조(時調) 종장의 첫 구에 나옴직한 ‘아해’ 같은 성격의 ‘그리운 사람’이 각기 화자와 호명된 청자로 등장한다. 이 시에서 호명된 ‘그리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여기서의 문제이다. 어째서 ‘거울처럼 그리운’ 것일까 그것은 그가 바라볼 수는 있지만 잡을 수 없는, 어쩌면 바라보는 것조차 가상의 것이 되고 만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돌아오는 벗’도 아니요, 텍스트의 어디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존재도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미정(未定)의 상태 때문에, 이 시에 호명된 청자는 존재하지만 독자가 이 역할에 동일시하거나 투사하게 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 설정된 시적 상황에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가까이 있되 부를 수 없는 청자, 짐짓 남에게 이야기하듯 하지만 은연중 의식하고 있는 청자, 따라서 독자 쪽에서 보더라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엿듣는 청자로서 역할을 설정하였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 가고
보랏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街路)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說話)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不安)과
예절(禮節)과 그리고
공포(恐怖)만이 거품 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다시
먼 앞날에
추락(墜落)하는 애정(愛情)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氣流)를 안고
투명(透明)한 아침을 가져오리.
(김경린, 「국제열차는 타자기(打字機)처럼」, 9인 시집 ꡔ현대의 온도ꡕ, 1957)
이 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를 읽으면서 독자는 화자가 어째서 확정되지 않은 청자를 호명하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러한 화자를 동원해야 했던 시인의 문제 상황과 대처를 고려하게 된다. 이때 독자는 시인이 독자에게 자신이 놓인 처지와 내면 상태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청자의 위치에서 시를 읽어주길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독자는 그러한 위치에서 시적 상황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사회적 상황이 바뀌어 이미 공감의 거리와 관계가 멀어지게 된 상태라면 독자 쪽에서는 호명된 청자에 동일시하기 어려워진다. 시인의 진술 전략은 당대성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독자는 호명되지 않은 청자의 위치에 서서 시를 감상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에서처럼 화자의 진술을 검열할 만한 단서를 얻기 힘들다면, 다시 말해 화자가 그 자신을 향해 진지하고 솔직한 진술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독자는 이제 시인의 진술에 직접 공명하는 것이 이 시의 진술에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시인이 일치시킨 화자를 거쳐 호명된 청자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여기서 독자는 자신이 호명된 청자와는 같지 않음을 알면서도 잠정적으로 그것에 감정 이입을 하려는 심리적 유보를 겪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감정 이입이라는 감상의 방식은 동일시나 투사와 흡사해 보이면서도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곧 동일시나 투사가 독자와 청자의 비분리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전면적 상상의 국면을 갖게 되는데 반해, 감정 이입은 독자와 청자의 분리를 전제로 부분적 상상의 국면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종군(從軍)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구상의 「초토의 시 8」에서는 ‘나’와 ‘너희’가 각기 화자와 호명한 청자로 등장한다. 대개의 서정시가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호명된 청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일종의 벙어리 상태에 놓여 있다. 어쩌면 그것은 화자의 진술이 유지될 수 있기 위한 최선의 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전국적 국면은 화해될 여지가 없는 깊은 골과 거리를 지닌 정치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생명을 건 싸움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한편에서는 죽지 않았더라도 죽음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 적군 묘지 앞에서 --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구상, 「초토의 시 8」, ꡔ초토의 시ꡕ, 1956)
그런데 이 시에서는 이미 호명된 청자는 죽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는, 그래서 오히려 평화가 가능해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를 해소하는 방편으로 시인은 기독교적 윤리관을 제시한다. 하지만 화자나 청자가 모두 짐 지고 있는 운명과 마찬가지로, 만일 독자가 호명된 청자로서 이 시에 참여한다면, 그는 과연 이러한 해소의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 이 시를 읽어 가는 데서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감상을 하려고 애쓰는 독자는 호명된 청자의 입장에 서기가 매우 곤란하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 차원의 자기 검열을 통해 청자를 대상화해 버린다. 만일 이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원한다면, 그는 화자의 진술에 반발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우선 독자는 한 차례의 감상 과정에서는 이상의 상황들에 선택적으로 반응하지만, 그렇다고 그 감상이 반드시 고정된 청자의 위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는 같은 독자가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다르게 접근함으로써 다른 청자의 위치를 갖게 되고 그에 따라 다른 감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상의 다양성이 원칙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둘째는 반드시 하나의 텍스트에 대해 고정된 하나의 청자로 접근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과 ㉣의 상황에서 독자의 특정한 청자로서의 참여는 각기 호명된 청자, 곧 ‘작은 주체’와 호명되지 않은 청자, 곧 ‘큰 주체’로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청자로서, 혹은 다른 청자와 일정한 거리와 관계를 맺으면서 감상이 이루어질 개연성은 비교적 작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독자의 감상이 자의적일 수 없다는 것도 이러한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감상의 안정성이 뜻하는 바가 고정된 감상과는 내포하는 함축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앞에서 다루었던 오장환의 「성씨보(姓氏譜)」가 어찌 ㉡의 방식으로만 감상되겠는가. 독자는 화자의 내밀한 목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복화술처럼 대신 말할 수도 있으려니와--그리하여 그것과는 다른 목소리에 대해서는 무심해질 수 있으려니와--, 거기서 한 발 물러서 시인이 어째서 화자로 하여금 자조 섞인 진술을 하게 하였는지 심문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직접 듣기만 가능했던 ㉡의 방식에서와는 달리 엿듣기가 필요하게 될 것이므로 감상의 위치는 불가불 옮겨질 도리밖에는 없다. 어째서 엿듣기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앞서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이중 청자의 참여 방식을 개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호명된 청자가 되어 참여하는 방식
㉠ 망각을 통한 동일시 : 독자=호명된 청자=호명되지 않은 청자
㉡ 개인화를 통한 투사 : 독자=호명된 청자≠호명되지 않은 청자
- 호명되지 않은 청자가 되어 참여하는 방식
㉢ 역전이를 통한 감정 이입 : 독자=호명되지 않은 청자∽호명된 청자
㉣ 자기 검열을 통한 대상화 : 독자=호명되지 않은 청자≠호명된 청자
이것들은 모두 청자에 대한 상상된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 직접 듣기와 엿듣기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 필자는 ‘역할 설정’과 ‘내면화’라는 공감적 조정의 전략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최지현, 1998).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중 청자의 두 위치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이나 ㉡만이 이루어지거나 혹은 ㉠과 ㉡의 연속적 과정이 이루어지거나 할 수밖에 없다. 이 중 후자의 체험에는 필수적으로 교사의 ‘개입’이 요구될 것이다.
이를 토대로 살펴볼 때, 감상 활동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독자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화자에 일치시키거나 혹은 거리를 두고 화자의 진술을 살피는 대신, 시인이 호명하거나 혹은 호명하지는 않았더라도 감지되었음이 분명한 청자의 입장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5. 결론 : 현대시 교육을 위한 청자론의 요구
모든 이론은 본질적으로 실천이다. 문제는 어떤 실천이냐 하는 점이다. 이론의 실천적 의의는 그것의 기능성에 부여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론적 대상의 획정(劃定)이나 그에 대한 대응에서 상상력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가능성의 세계를 근원적으로 보장해 준다는 데 있다. 그러나 만일 이론적 대상에 대한 상상을 제한하고 그것을 통해 이론 자신이 상상된 가설의 체계임을 은폐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실천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 자신을 이론의 지위로부터 교조(敎條)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교조를 비롯한 모든 형이상학은 그 자신을 실천과 분리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시교육에 동원되었던 구조시학적 개념과 범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문학의 자율성, 혹은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한때 시와 시인을 연계하려는 시도는 비판받거나 심각하게 회의된 적이 있었다. 필자는 그 믿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시에서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 시와 시인을 혼동하는 것이거나 혹은 그러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 점을 전제해 두고 말할 때, 필자는 시 감상이란 결국 시에서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이며 시 교육은 이 과정을 이끌어 주는 실천 행위라는 데 동의한다.
왜 그러한가. ‘읽기’를 통한 감상이 지배적이게 되었다고는 해도, 시는 근원적으로 구술 문화적 전통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 배역(配役)이 지닌 성격이나 태도, 생김새, 행동, 대사 등을 통해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에 공명(共鳴)함으로써 새로운 인물을 탄생시키는 데 공조(共助)하게 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연극이나 영화가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 배역이 아닌 배우에 대한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작품을 회상하게 되는 것처럼, 시 감상에서의 정서체험은 화자를 통한, 또는 화자에 의해 은폐된 시인의 목소리를 찾아 들으려 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 현상하는 것과는 달리, 그것은 ‘듣기’의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시 감상교육에서 독자인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가 말한 것이 무엇이었는가’가 아닌 ‘그가 왜 그렇게 말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런데, 전자(前者)는 읽기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후자(後者)는 읽기만으로는 밝혀지지 않는, 어조나 태도, 거리감 등에 대한 탐조(探照)가 필요하다. 현대시 감상교육에서 청자론이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청자론이 요구되는 다른 까닭은 시의 의미와 정서를 독자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적 문제 상황 때문이다. 실은 이러한 문제 상황 때문에 화자의 유형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반복해서 시도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의 의미와 정서를 결정할 만한 어떤 기준이나 근거도 화자의 진술은 확정해 주지 못한다. 이른바 ‘현상적 화자’나 ‘함축적 화자’는 화자의 양상을 지칭하는 분류상의 편의성은 지니고 있을지 모르나 그것으로 시인의 진술 행위와 그에 대응하는 독자의 감상이 설명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화자에 초점을 둔 해석이나 감상이 갖는 자의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화자에 선행하는 청자의 존재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청자에 대한 좀더 풍부하고 엄밀한 논의가 감상의 객관화를 위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청자에 대한 논의가 풍부해져야 할 몇 가지 이유를 더 찾을 수 있다. 시 쓰기의 문제 상황에서 청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맡기려는 시인의 책략을 분별해 내기 위해서, 그리고 화자의 기능을 인정할 때에도 화자의 진술이 수반하고 있는 정서 상태와 태도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나아가 시의 억양, 어조, 어투, 어감 등의 비문자적 자질에 대한 독자의 감지력을 높이기 위해서 청자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조의 판단, 태도(pose)와 표정(gesture)의 구분, 공감과 거리감의 설정 등에 대한 세분화된 논의들까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난해함에 대해 독자들이 너무 빨리 그 자신을 호명되지 않은 청자에 일치시키는 것은 앞서 감상의 방식으로 언급한 바 있는 ‘자기 검열을 통한 대상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필자의 생각을 덧붙여 둔다. 난해함이란 독자가 이중 청자의 위치를 확정짓지 못한 까닭임을 뜻하는 것이기는 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 자신이 호명된 청자가 아님을 확정짓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을 특히 독자인 교사와 학습자는 유념해야 하리라 본다. 이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시에 거리를 취하며 이리저리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에 의해 호명된 청자와 그렇지 않은 청자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다양하게 조정해 가면서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이 논문을 매듭짓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논의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정작 이 논문은 여기서 매듭을 지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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