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일 [한국문학통사1,2] 요약
⊙배명고등학교 박형석 선생님의 자료를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고전문학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활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문학사 이해의 새로운 관점
문학의 범위
문학은 言語로 이루어진 藝術이며, 예술은 形象과 認識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문학은 말로 된 문학인 口碑文學과 글로 된 記錄文學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그 동안 국문학의 범위를 정하는 데 문제가 되어 온 것은 口碑文學과 漢文學이다. 전자는 문학이 언어 예술이라는 점에서, 후자는 거의 우리말化 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문학이 문학 활동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모두 우리 사회에서 창조되고 수용되어 문학으로서의 구실을 해 왔다는 점에서도 국문학의 범위에 넣어야 한다. 결국 국문학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말로 된 口碑文學, 문어체 글로만 된 漢文學, 그리고 구어체 글로만 된 國文文學이 그것이다.
문학의 갈래
문학의 갈래는 抒情 敎述, 敍事, 戱曲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서정은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자아화이고, 교술은 작품 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이며, 서사는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고, 희곡은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다.
갈래 이론은 엄격한 분류 체계 완성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갈래가 상대적이고 유동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문학사의 실상을 무리 없이 파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 교술 서사 희곡은 갈래 그 자체라기보다는 갈래가 택할 수 있는 네 가지 기본 성향이다.
시가의 형식과 율격
詩歌史 연구에서 줄곧 제기되어 온 문제는 鄕歌, 景幾體歌, 時調, 歌辭 따위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는 그것들이 漢詩의 변형이거나 중국에서 전래된 노래의 정착으로 보는 것으로, 이는 우리 시가의 독자적 형식을 설명하지 못하고 민요마저도 그렇게 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타당한 견해라 볼 수 없다. 둘째는 향가가 일단 성립된 뒤에 향가 경기체가 시조 가사의 순으로 앞의 것의 영향을 받아 생겼다는 것으로, 이는 향가의 성립을 설명해 주지 못하는 난점을 갖는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민요를 근거로 해서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율격에서도 이런 가설은 근거를 갖는데, 민요의 기본 율격은 두 토막과 세 토막 짜리이며, 향가 시조 가사는 모두 두 토막이 거듭된 네 토막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시대 구분의 방법
문학사는 실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므로 실제로 이루어진 변화를 그 뚜렷한 매듭에 따라 토막지워 드러내야 한다. 시대 구분에는 일원론적인 생각과 다원론적인 생각이 있는데, 이 둘을 함께 포용하여야 문학 자체의 현상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 갈래의 변천을 살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문학 담당층의 교체가 중요한 문제이다.
시대 구분의 실제
모두 여섯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대는 원시문학시대로 원시 시대이며, 구비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둘째 시대는 古代文學時代로 고조선부터 삼국 정립 이전까지이며, 建國神話가 주축이 된다. 셋째 시대는 中世前期文學時代로 삼국 남북국시대부터 고려 전기 무신란까지의 시기이며, 詞腦歌가 중심이 되었다. 넷째 시대는 中世後期文學時代로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 임진란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때의 전기에는 景幾體歌가, 후기에는 樂章이 대표적이었으며 신흥사대부가 문학 담당층이 되었다. 다섯째 시대는 中世文學에서 近代文學의 移行期로 조선 후기부터 1860∼1919년까지의 시기이다. 민중이 각성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고, 구비 문학은 도시에 기반을 두고 뚜렷한 주제를 부각시킨 대규모 행사로 변모하였으며, 小說이 중심적 장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시대는 近代文學時代로 시기적으로는 1919년 이후가 된다. 시민이 문학 담당층이 되었으며 한문학이 서서히 사라졌다.
고대 문학, 중세 문학, 근대 문학으로의 구분
고대 문학의 특징은 정복 집단이 자기네의 투쟁과 승리를 자랑하는 건국 서사시가 주축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중세는 보편적 종교가 나타나고, 문명권 전체에 통용되는 공동의 문어가 쓰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근대 문학의 기점은 중세 문학에서 근대 문학으로의 이행기가 시작되면서 나타나며, 이 이행기가 끝나고서야 성립된다. 이 이행기는 서양 근대 문학의 이식이 아니라 그 동안 축적된 역량이 민족 해방 운동으로 발휘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첫째 시대 : 원시 문학
구석기 시대의 문화와 언어 예술
원시공동체였던 구석기시대에는 사냥이 잘 되도록 하는 주술이나 의식이 공동의 관심사였으므로 이와 관련된 사연을 노래나 말로 풀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석기시대로의 전환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농사의 시작이다. 따라서 농업 노동요나 추상적 사고의 상징적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신화 등이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자에서는 노래의 종류나 가창 방식의 기본이 마련되었을 것이며, 후자에서는 수호신의 유래를 무당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 주관하여 굿을 거행했을 것이다.
둘째 시대 : 고대 문학
건국 신화, 국중 대회, 건국 서사시
文學史에서 둘째 시대가 시작된 증거는 建國神話의 출현으로, 이는 국가 성립을 뜻한다. 건국 신화는 정복민이 원래의 신화를 가져와서 선주민의 신화를 보태고, 건국을 위한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 것으로 국가적 질서 수립을 위한 이념까지 표현하였다. 국중 대회는 농사가 잘 되게 하자고 굿을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춘 행사로, 신석기시대 이래 농업 사회의 굿놀이였다. 임금이 무당이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굿과 더불어 건국 시조를 섬기는 굿도 했다. 이때 건국 시조신의 내력을 서사시로 들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의 이념은 중세의 보편주의와 구분되는 자기 중심주의였으므로 어느 정복 집단이든 각기 나름대로 건국 서사시를 내세우고 상호 배타적인 選民意識을 가졌다.
고조선의 경우
고조선의 건국 서사시인 壇君神話는 최초의 건국 서사시이다. 桓雄이 熊女와 혼인한 것은 天神族과 地神族의 결합이며, 天符印은 무당 임금의 권능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부여, 고구려계의 전승
부여의 건국 서사시는 解慕漱 解夫婁 동명 주몽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천신족으로서의 우월감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임금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 지배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迎鼓라는 국중 대회도 있었는데 임금이 무당이 되어 하늘에 제사 지내는 나라 굿을 하였으며, 이 때 건국 서사시도 불려졌을 것이다. 부여의 건국 신화는 古朝鮮의 것과 西나라의 것을 보탠 내용이다. 高句麗의 시조인 주몽은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비정상적으로 출생한 다음, 凡人과는 다른 탁월한 능력을 타고 나서는 어려서 버림 받아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가 양육자에 의해 구출되고,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쳤다가 위기를 투쟁으로 극복하고 승리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영웅의 일생]이며, 후대 敍事文學에서 재창조된다.
삼한, 신라, 가락, 탐라 쪽의 사정
마한에는 나라의 무당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지배자가 있어서 굿을 주관하였지만, 굿 가운데에 건국 신화가 포함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新羅의 赫居世는 하늘에서 바로 내려왔으며, 특별한 고난을 겪지 않고 왕이 되는데 알영과의 관계로 보아 金氏族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연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비해 昔氏族의 유래는 주몽과 같이 脫解는 비정상적으로 태어나서 버림 받았다가 왕이 되는 내력을 갖는다. 탈해는 자신의 조상이 대장장이라고 했는데, 이는 금속을 다루는 정복자를 뜻한다.
駕洛國의 首露는 혁거세의 경우와 흡사하나 배필을 맞는 과정은 탐라국과 비슷하다. 탐라의 건국 시조 高乙那, 良乙那, 夫乙那는 땅에서 솟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밖에 日本과의 관련이 있는 건국 신화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간 것이 많다.
짧은 노래 몇 편
노동요나 굿노래는 본래적인 양상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면서 詩歌文學의 저층 노릇을 해 왔다. [龜旨歌], [公無渡河歌], [黃鳥歌]는 노랫말이 남아 있는 최초의 작품이며, 우리 노래의 기본적 형식을 갖추고 있다.
[龜旨歌]는 굿노래의 한 대목이나, 굿을 하지 않을 때에도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公無渡河歌]의 주인공은 무당이라고 할 수 있다. 무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것으로 작자는 白首狂夫의 아내가 1차적, 麗玉이 2차적 작가이며, 이 노랫말을 한문으로 정착시킨 사람이 3차적 작가이다. 이 작품은 그 유래담으로 보아 우리의 것이 분명하다. [黃鳥歌]는 나라 안팎에 시련이 많았던 流離王이 자아와 세계의 동질성이 흔들린 혼란 속에서 자기 고독을 생각하며 일반적인 사랑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처럼 짧은 노래가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사회적 유대나 질서가 흔들리면서 문학의 양상이 흔들린 증거로 볼 수 있다. 이들 노래는 굿노래나 의식요에 의거해서 부른 것이나 노래 부른 이의 절실한 심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계를 자아화하는 방향을 택해 서정시로 변한 것이다.
전설 민담 시대로의 전환
처음에는 신화가 중요했으나 세계의 자아화를 위하여 전설과 민담이 등장했다. 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세계의 우위에 입각해서 다루므로 자아의 패배를 귀결로 삼으며, 합리성을 추구하다가 더 큰 불합리에 부딪치는 이야기이다. 민담은 전설과 표리의 관계에 있는, 자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이야기이나 전설에 비해 덜 나타난다.
셋째 시대 : 중세 전기 문학 제1기 삼국 남북국시대
한문학의 등장과 그 구실
한자의 수용과 활용
말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정확성을 확보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전달을 위해 생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게 되었다. 추측컨대 우리 나라에서의 경우, 그림이나 부호로 최소한의 기록을 한 것은 중국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며, 다만 중국에서 발전된 한자를 가져오는 편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우리가 만든 것은 글자로 발전시키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한자는 뜻글자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 그것으로 문장을 적으면 말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한자가 수용된 시기는 고조선 시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경우, 건국초 이른 시기에 이미 한자를 사용했으며, 한문으로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을 편찬하였다. 이런 능력은 고구려 자체에서 키웠다기 보다는 고구려 유민이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신라는 한문을 수용한 것이 삼국 중에서 가장 늦었는데, 3세기 경에는 지체가 낮아도 글을 쓰고 계산하는 능력이 있으면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 육두품의 유래를 엿볼 수 있다.
삼국을 건국한 것은 군사적인 귀족이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습을 교정시키며, 전승을 기록하고 글로 계산을 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자를 아는 사람을 발탁해서 그런 일을 맡기게 되었다. 이런 데에서 초기의 한문이 나타났는데 이는 실무 기술적인 면에서나 소용되는 글이었고, 이념적 표현이거나 문학적인 창작은 아니었다. 초기의 한문은 고대 문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현상을 나타내 준다. 고대 문학이 우리말 문학의 시대이고, 문화적인 자기 중심주의의 속성을 지녔다면, 중세 문학은 한문학을 상층의 공식적인 문학으로 삼고 우리말 문학은 기층 문화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둔 시대의 문학이며, 중국에서 다듬어진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 文語와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를 채택하면서 문화적 보편주의를 구현했다는 성격을 지닌다.
한문의 수용과 발전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우리말 문학에 의한 문화적 자기 중심주의가 기층 문화의 영역으로 떨어진 것은 불행이다. 하지만 문명권 전체의 공동 문어와 세계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지혜를 서로 나누고 고대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사회 변화에 상응하는 이념적 예술적 향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측면이다. 황제를 함께 인정하는 영역 안에서는 지배층에 속하는 문인이라면 누구나가 공동의 문어로 된 같은 격식의 시를 지을 수 있는 데에서 서로의 동질성이 확인되어 중세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환제의 나라에서조차 口語로 된 문학이 일어나 공동의 文語를 불신하게 되자 근대로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문을 가져와 사용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우리말과 어순이나 문법이 아주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런 까닭에 한문 문장과 우리말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여러모로 시도되었고, 따라서 본래의 한문과 우리 말투의 한문 두 가지가 사용되었다.
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문학
삼국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면서 한문을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적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중 한문 수용이 선결 과제였고 불교는 일반 백성들까지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사람이라는 명분론을 담당하였다. 또 차별과 수취를 제도화하고 집행하기 위해서는 유교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문으로 문장을 쓰는 능력이 우선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건국 서사시를 기록하게 되어 비로소 기록 문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국사 편찬에 종사한 사람을 태학박사, 또는 박사라고 했고 신라에서는 문사라고 했다. 이들은 어느 정도 그 직위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는데 후에 신라에서는 이들이 고급 문학을 담당하게 되어 古來로부터 이어온 문학 담당층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군주들은 다투어 碑를 세웠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은 현존하는 문학 작품 중 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것으로,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등, 건국 서사시 이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중원비는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서 신라를 아우의 나라로 삼은 것을 계기로 세운 것인데 이두식 표기도 들어 있다. 신라의 赤城碑는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한 것을 서술하였는데 문체는 한문이라기보다 이두에 더 가깝다. 진흥왕의 巡狩碑에서는 고유 명사에만 이두식 표기가 쓰였고 나머지는 한문으로 되어 있다.
국내외의 정치 문서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한문으로 된 국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는 외교상의 용건을 전달할 뿐 아니라, 문화적 역량을 과시하는 구실까지 했다. 이러한 국서는 넉 자나 여섯 자씩 짝을 맞추는 변려문이어야 하는데 백제의 [七支刀의 名文]이나 북위에 보낸 국서, 그리고 신라의 [致唐太平頌], [答薛仁貴書], [乞罪表] 등에서 잘 보인다. 이러한 외교 문서의 작성자로는 신라의 强首 등이 유명하다. 그밖에 현존하는 최초의 한시인 乙支文德의 [與隋將于仲文詩]는 반어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노래의 새로운 모습
고구려 노래
지배 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상층의 문화와 하층의 문화가 분리되었다. 상층의 문화로 [樂]이 생겨났다. 詩 歌 舞의 종합적인 공연이면서 통치 체제를 상징하고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며, 밖으로 문화 수준을 드러내고 안으로 백성을 감복하게 하는 것으로 舞樂과 歌樂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질서 유지가 특히 중요한 구실이었으므로 禮樂으로 일컬어지기 일쑤였다. 자료로 남은 것은 세 편이다. [來遠城]은 오랑캐가 귀순하면 머무르게 한 성으로, 이를 기념하여 지은 노래이다. [延陽]은 어떤 사람이 남에게 쓰이는 바가 되어 죽기를 무릅쓰고 열심히 일하다가 자기의 신세를 나무에다 비해서 노래한 것이다. [溟州]는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 노래이다.
백제 노래
백제의 음악은 일본과의 교류에서는 뚜렷이 나타나지만 다른 자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高麗史} 樂志에 다섯 편의 제목이 전하는데 산 이름을 제목으로 한 것이 4편, 여인이 지어 부른 것이 4편인 것이 특이하다. [無等山]은 그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한 노래이고, [智異山]은 백제 왕의 폭정을 규탄한 노래이다. [方等山]은 도적에게 잡혀 간 여자가 자기 남편이 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을 풍자한 노래이고, [禪雲山]은 남편이 부역을 나갔다가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산으로 올라가 기다리며 부른 노래이다. [井邑]은 {樂學軌範}에 [井邑詞]라는 제목으로 노랫말이 남아 있다. 형식은 한 줄이 두 토막씩이고 모두 여섯 줄인데, 다시 두 줄씩 합쳐 보면 네 토막씩 석 줄의 형식이어서 시조의 형식과 상통한다. 이는 우리 노래의 기본형의 하나이다.
신라 노래, 이른 시기의 모습
유리왕 5년에 지어진 [도솔가]는 歌樂의 시작이 되었는데, 이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자는 주술, 또는 기원을 곁들이면서 국가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會蘇曲]은 여자들의 길쌈 경쟁에서 불려진 노래다. 본래 樂은 舞 曲 歌를 포괄한 개념이었으나 뒤에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눌지왕이 지은 [憂息曲]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아우가 귀국하자 잔치를 베풀어 지은 것이다. 신라의 궁중 예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풍부해졌고 우륵은 가야금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밖에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노래도 많이 불려졌다.
향가, 사뇌가
향가는 梵聲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서는 우리말 노래이고 國仙之徒가 지어 부르는 것으로 악기 반주는 없었으며 사설이 중요했다. 향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 문학이고 개인 창작시이다. 기본 형식은 두 줄이고, 이를 거듭하면 넉 줄이 된다. 다섯 줄 형식의 첫 예는 [彗星歌]로, 이는 사뇌가라고 불린다. 사뇌가는 신라 귀족 문화가 사상적인 수준을 갖추어 세련되는 단계에 이르러 개인 창작의 서정시가 된 것으로 화랑의 사상을 정신적인 내용으로 하고, 거기에 불교를 보탰으며, 화랑의 무리에 속한 주술사이자 승려인 지도자가 시인 노릇을 하며 주로 창작한 것이다. 사뇌가는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6세기 말경에 처음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며, 사뇌가의 잔존 형태인 [悼二將歌]나 [鄭瓜亭曲]을 고려한다면 12세기 정도까지 지속되었다.
향가의 작품 세계
민요 계통의 노래
[薯童謠]는 진평왕 때 서동이 지은 것이라고 하나 원래 민요였던 것이 향가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상하층을 나누는 사회적 장벽에의 불만이 민요에 고유 명사만을 갖다 붙이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민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風謠]는 민요를 뜻하는 말로 노동요이다. 사설 중의 '서럽더라'는 노동의 괴로움을 말한 것이기도 하고 인생의 무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까닭에 단순한 민요로 남지 않고 향가에 편입된 것이다. [獻花歌]는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부른 노래로 한시로 된 [海歌]와 연결되는 작품이다. 수로 부인을 귀신들이 납치했다는 점으로 보아 수로 부인은 무당이었던 듯하고, 따라서 두 노래는 굿노래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견우노옹'도 굿에 등장하는 인물로 보면 된다. [헌화가]는 상층의 무당이 정치적인 목적과 관련해서 활용하여 향가에 편입된 듯하고, [해가]는 [구지가]를 연상하게 하는 점으로 보아 건국 서사시의 일부가 신라에 이르러 민간에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랑의 노래와 그 변모
[彗星歌]는 진평왕 때 融天師가 지은 노래로 융천사는 하늘의 일을 관장하는 천문관이고, 변괴를 물리치는 주술사인 까닭에 국왕의 고민을 해결해 주면서 화랑의 무리를 위해 노래를 지었다. 주술적 사고 방식 위에 화랑의 기백을 찬양하는 말을 덧보태면서 격조 높은 암시를 한 작품이다. [慕竹旨朗歌]는 죽지랑이란 화랑을 찬양하고 사모한 노래로 得烏가 지었다. [處容歌]와 함께 넉 줄 형식의 노래로 좀더 사뇌가에 가깝다. 이 노래가 지어진 효소왕 때에 이미 통일달성기의 고매한 이상이 무너지고 지배층이 횡포를 자행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怨歌]는 효성왕 1년에 信忠이 지은 노래로 주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주술은 [혜성가]에서처럼 보편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데 쓰이지 않고 개인적인 영달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다.
월명사와 충담사
月明師는 [도솔가]와 [祭亡妹歌]를 지었다. [도솔가]는 경덕왕 때, 정치적인 위기를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대응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왕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두 줄 네 토막 형식이다. 유리왕 때에도 [도솔가]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도솔가'는 노래 갈래 이름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노래이다.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 제를 올릴 때 부른 것으로 다섯 줄 형식인 사뇌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월명사는 화랑이 밀려나는 시대에 태어나 길거리를 방황했고, 고독한 시인으로 미타를 찾아 피안을 희구하는 생각도 가졌으며, 개인의 노래를 지어 내면적인 정서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忠談師는 [安民歌]와 [찬기파랑가]를 지었다. [안민가]는 경덕왕의 요청에 따라 지은 것으로 [도솔가]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노래이나, 보다 정치 상황과 밀착된 구체성을 갖는다. [찬기파랑가]는 몰락한 화랑을 찬양한 것으로 사뇌가의 전형적인 작품이며, 사뇌가가 갖추어야 할 높은 뜻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숭고와 비장이 함께 보이는 노래이다.
불교 신앙의 노래
[願往生歌]는 廣德이 지은 노래로 종노릇을 하는 천한 사람도 불도를 닦으면 관음보살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千手大悲歌]는 승려가 만들어 놓은 기도문을 5살 된 希明으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그 아이가 작자인 것처럼 알려진 노래이다. [遇賊歌]는 승려 시인인 永才가 지은 것으로 이 때에 들어 사뇌가는 하층민에게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불교 문학에서 문제된 이치와 표현
불교사와 문학사
고대적인 자기 중심주의에서 중세적인 보편주의로 이행하는 데에는 불교 문학이 가장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불교 문학은 건국 서사시의 단계를 넘어선 시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방대하고도 난해한 불경의 전래에 의해 삼국의 사상적 수준이나 표현 능력이 전례 없이 향상되었다. 고구려는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고, 한동안 신라에 불교를 가르치는 등,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백제 불교도 번역과 저술을 독자적으로 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 못지 않았던 듯하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었으나 일단 공인된 뒤에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불교가 세속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히는 한편, 불교에 대한 저술도 방대했다.
원효
元曉는 [金剛三昧經論]을 지었으며 문학 사상의 근본 문제를 제기하고 철저하게 다뤘다. 그는 유와 무의 구별을 넘어서고, 진과 속을 아우르는 데 진정한 삶의 길이 있다고 하면서 어디 치우치지 않고 거리낌 없는 인간에의 길을 찾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
원측, 의상, 혜초
圓測은 유식학을 꿰뚫어 남보다 앞서 그 이치를 풀어 밝히는 업적을 이뤘다. 義湘은 화엄 사상의 체계를 전개하면서 신라 귀족 사회의 이념을 수립했다. 慧超는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의 견문과 소감을 적은 기행문인 [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게송의 성행
불경 원문에는 산문 서술에 이따금씩 노래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를 偈頌이라고 불렀다. 이는 글을 쓰면서 지을 수도 있고,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서원을 나타내는 노래까지도 포괄하는 높은 개념이다. 불교 문학이 일어나면서 게송도 함께 성행했는데, 게송이면서 일반 문인의 시로서도 높은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설화에 나타난 상하, 남녀 관계
신화적 상상의 유산
설화는 상하층이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고 살아가면서 생기는 일은 무엇이나 소재로 삼을 수 있으므로 문학의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포괄적인 의의를 갖는다. {三國遺事}는 전편이 설화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 시대의 설화는 신화의 유산이 전설이나 민담으로 계승되거나 변모되는 양상을 보인다. 여기에서 불교는 재래의 신화를 새로운 사고 체계에 편입시키면서 본래의 의의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활동을 펴기도 했고, 신화의 필요한 요소는 차용했으면서 자생적 의의를 가지고 전설적 증거물과 결부되면서도 신화적 상징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화적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 뒤에도 어떤 특수 집단에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신화를 한쪽에서 전승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문 신화에서 잘 보인다. 신화의 맥락은 계속 이어졌으나 주된 것은 인간의 하층 무당이 부르는 서사무가로 넘어갔다.
민간 영웅의 투지
영웅 서사시의 시대가 끝이 나면서 상층 집단의 영웅은 사라지고 가공적인 민간 영웅이 민담을 통해 만들어졌다. 민간 영웅은 미천하고 보잘것 없는 인물이 타고난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여 왕이 된다는 것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마퉁이가 백제 무왕이 되었다는 이야기, 김유신 이야기, 그리고 居 知 이야기 등이 그 예이다.
고승의 신이한 행적
불교가 정착되면서 불교 설화에서는 영웅 대신에 고승을 내세웠다. 이는 기록에 남은 어떤 설화보다도 풍부하다. 불교가 재래의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고승전은 고승이란 모든 세속적 욕구나 인연을 초탈해서 오직 불도의 높은 경지에 머무르며, 마침내 그러한 경지에 대한 집착마저 떨쳐버린다는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보양 스님 이야기, 의상대사의 행적 이야기, 혜숙과 혜공 이야기 등이 있다.
백성의 소망과 시련
일반 백성의 일을 다룬 것은 왕과 백성의 관계를 다룬 것과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에 관한 것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그런데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대개 왕과 백성 사이에 남녀 간의 애욕이 게재되어 있다. 고구려의 산상왕이 민간의 처녀를 왕비로 삼은 이야기, 백제 도미의 아내 이야기, 선덕여왕과 志鬼의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이야기도 흔히 있다. 설씨네 처녀 이야기나 金現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이는 趙信의 설화에서 보인다.
설화의 정착과 변모
삼국의 사람들은 설화를 글로 기록하는 것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설화집을 만들어 내었다. 이 과정에서 설화에 수식을 가다듬고 주제도 다소 보태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傳奇나 稗官雜記 野談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은 설화와 소설의 중간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런 설화의 성행도 한문학이 대두되면서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연극의 자취를 찾아서
굿 놀이 연극
건국 신화를 굿과 같은 행동으로 표현하는 행사를 실시하면서 굿과 놀이, 연극은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굿은 사람 아닌 것과 사람의 갈등을 주술을 써서 해결하는 것인데 비해 놀이는 화해와 단합을 꾀하고 공동의 절차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연극은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각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굿이나 놀이에 포함되어 있다가 분화되어 나오는 것이 일반적 추세다. 굿에서 연극으로 이어진 절차는 맞이 - 싸움 - 혼인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고대에서 중요시되던 연극은 중세에 들어와서는 그 의미가 퇴색하여 민간 연극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속극이 생겨나게 되었다. 굿과 연결되는 연극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농악대가 하는 굿이고 또 하나는 무당이 하는 굿이다. 농악대의 굿에서는 탈춤이 생겨났고, 무당의 굿에서는 무당 굿놀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민속극이 생겨났다.
고구려, 백제의 놀이와 연극
기록이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고구려의 가무가 대단했었으리라는 것은 고구려 벽화를 보아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추측해 보면 고구려에서 탈놀음이나 연극 같은 것이 있었고, 꼭두각시 놀음도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에 관한 기록은 더욱 적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伎樂'에 관한 대목을 보면 백제에도 탈춤과 비슷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정황에 의거하여 탈춤은 마을 굿과 관련된 민간 전승에서 하층의 민속극으로 자라났으며, 거기에 기악이나 다른 불교의 놀이들이 2차적으로 첨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쪽의 사정과 처용극
신라의 기록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많이 남아 있다. 유리왕 때에는 한가위를 맞아 歌舞百戱를 했고, 진흥왕 때에는 팔관회를 열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든 온갖 놀이를 벌이면서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면서 화해와 단합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신라에서는 하층민 뿐 아니라 상층 계급에서도 광대가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헌강왕은 신라 초기 이후 민간으로만 전승되던 수호신 굿을 다시 국가적 행사로 부활시켰는데, 處容舞와 같은 것이 한 종류이다. 처용은 神격의 가면을 쓴 사람이 역신의 가면을 쓴 사람을 물리치는 것이었는데 뒤에 역신을 물리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로 성격이 바뀌면서 굿으로의 효과보다는 연극적인 내용이 관심을 끌었다.
다섯 가지 놀이
崔致遠의 시 [鄕樂雜 五首]에 흔히 五伎라고 부르는 다섯 놀이가 나타나 있다. '金丸'은 금방울을 굴리는 곡예로 직업적 재인이 숙달된 재주를 자랑하기에 알맞은 것이다. '월전'은 일종의 연극으로 난쟁이나 꼽추, 선비의 모습을 흉내낸 것이다. '大面'은 금빛 가면을 쓰고 우아한 가락에 느린 춤을 추며 귀신을 쫓는 놀이이다. '속독'은 탈을 쓰고 춘 춤으로 추측되며 '산예'는 사자춤이다. 이 다섯 가지는 오늘날의 오광대와 같이 다섯 과장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공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오기의 기풍은 한 마디로 구김살이 없고 씩씩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국 시대의 상황과 문학
동아시아 문학의 판도
중국에 당나라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 동아시아 전역은 동질적인 문화를 향유했는데 그것은 한문학을 통해 표현되고 구체화되었다. 당나라 문화는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들을 아우른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동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이러한 한문학은 이를 향유하는 나라끼리 외교 문서나 시 등을 교환할 수 있게 하였고, 당나라에서는 주변 국가의 유학생들을 위한 과거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문화 침략에 맞서기도 했으니 신라의 鄕札, 일본의 가나(假名), 월남의 字 이 그 대표적이다. 文에서는 외교 문서와 國史 편찬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자는 각 나라마다 공통적이었으나 후자는 각기 달랐다. 시에서도 한시는 공통된 형식을 지녔으나 자국어로 부른 시를 한자로 옮기는 것은 저마다 달랐다. 한문학의 수준은 신라와 발해가 가장 높았던 반면,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일본은 자국어 문학을 개척하는 면에서는 더 앞섰다.
발해 문학의 위치
발해에 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 수준을 알 수 없으나 신라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발해를 北國이라고 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항상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라에서는 문학적으로 발해를 경쟁국으로 생각했으며, 일본에서도 발해를 고구려를 이은 나라로 인식했다. 두 나라는 당나라와의 교류를 경쟁적으로 했는데 발해를 海東盛國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한문학이 난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발해에서도 당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자를 빌어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貞惠公主墓碑]에 의하면 발해는 귀족적으로 세련된 문화를 존중했다고 할 수 있다.
발해 시인이 남긴 작품
발해 시인으로 전해지는 사람은 高元裕, 楊泰師, 王孝廉, 仁貞, 貞素, 裴 , 裴 등이다. 작품은 모두 11편으로 일본 문헌에 전한다. 양태사는 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송별연에서 일본 문인들의 시에 답한 [夜聽 衣聲]에는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왕효렴의 작품은 5편이나 전하는데 놀이의 정경, 봄날의 꽃 등을 읊었다. 인정은 錄事의 임무를 맡았던 승려로 승려도 글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궁중에서 대접 받은 사연을 적은 작품이 전한다. 정소는 일본 승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썼으며, 배정의 시는 일본에서 지은 한 구절만이 전한다. 배구의 시는 전하지 않으나 매우 수준이 높은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문학과 대외 관계
신라와 唐과의 관계는 밀접했다. 당은 신라를 친당 세력화하려 하였고, 신라는 당의 문화를 수입하고자 했다. 통일 전쟁 기간 중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조금 소원했으나 전쟁 뒤에는 곧 선린 관계를 회복하여 많은 국서가 교환되었다. 이 때에는 특히 당나라에의 유학이 성행했는데 당에서 과거를 통해 급제한 삶도 58명에 이르렀다. 신라 문인이 당에 가서 활동한 자취가 중국 문헌에 전한다. 薛瑤는 당에 가서 장군이 된 사람의 딸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면서 [返俗謠]를 지었다. 金地藏은 신라의 왕자로 당나라에 가서 승려가 되었다. [送童子下山]이라는 작품이 전하는데 짜임새와 묘미를 갖추고 있다. 金雲鄕은 신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 [題遊仙寺]가 전한다.
신라 한문학의 성숙
신문왕과 설총
신문왕은 지방 행정을 정비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며 국학을 설치하는 등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유학을 공부하는 육두품의 관계 진출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골품제의 한계로 인해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고, 그로 인해 육두품 출신의 문인들은 비판 세력이 되어 갔으며 나라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문학을 스스로 개척했다. 설총이 지은 글로 전해지는 것은 [花王戒]이다. 꽃의 이야기를 가지고 임금을 경계한 글로 식물을 의인화했다는 점에서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글이다.
전성기의 수준
신라의 전성기인 성덕왕 때의 이름난 문인으로는 金大問을 들 수 있다. 그는 {高僧傳}, {花郞世紀}, {樂本}, {漢山記}를 지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다룬 범위는 무척 넓었는데 신라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진골 귀족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당시에 金志誠이 쓴 조상기는 현재 전하고 있는데 유가 불가 도가를 한데 아우르는 자세가 나타나 있다. 성덕대왕 신종의 序와 銘은 金弼奧가 지었는데 웅대한 기상과 세련된 표현이 갖추어져 있다.
말기의 상황과 왕거인
下代에 이르면서 신라의 문학은 더욱 무르익었으나 예전의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지고 文弱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사회의 모순은 격화되어 왕위를 두고 살육전이 벌어지고, 사치와 낭비는 증가되었으며, 백성에의 수탈은 심해졌다. 육두품은 당나라로 진출하는 길을 찾았고, 지방 호족은 후삼국의 쟁패를 준비했으며 불교에서는 지방 호족과 연결된 禪門九山이 생겨났다. 王巨仁은 당시에 세상을 등지고 산, 그러면서도 잘못된 정치에 항거한 인물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민심을 대변하는 생동감 있는 시를 지었다.
최치원의 성공과 번민
육두품 출신인 孤雲 崔致遠은 당나라에 유학, 벼슬에 급제한 뒤 [檄黃巢書]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 신라인으로서 당나라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귀국하였으나, 신라에서도 자신의 뜻을 올바로 펼 수 없음을 느끼고 가야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桂苑筆耕集} 서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영달을 위해 문학에 정진하였으나 문학이 유학이나 불교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는 외국인으로서 당나라에서 느낀 비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 민중들의 생활 등 여러 가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의 작품은 近體詩의 능란한 표현과 함께 내면의 고독과 회한을 오묘한 조화를 갖춘 말로 엮어져 이루어졌다.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최언위
崔匡裕는 {東文選}에 칠언율시 10수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으로 유명했던 듯하다. 그의 작품은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감상을 보태는 것이었는데 개중에는 고국을 떠난 비감을 읊기도 했다. 朴仁範도 최광유와 같은 시기에 당나라에서 급제한 사람이다. 그도 {동문선}에 칠언율시 10편과 贊 2편이 전한다. 문학적 취향은 최광유와 비슷했으나 고사를 많이 동원했으며 불교적 취향에 의거한 새로운 문학을 개척하기도 했다. 崔承祐는 당나라에서 급제한 뒤 귀국하여 견훤을 섬긴 인물이다. {호본집}이라는 문집이 있었다고 한아 전해지지 않고 역시 {동문선}에 칠언율시 10수가 전해온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당나라 말기의 시풍을 지녔으나 견훤의 외교 문서에는 높은 기상과 위엄 있는 면도 보였다. 崔彦위는 당나라에서 급제한 뒤 신라에서 벼슬을 얻었고, 그 뒤에는 고려의 왕건에게 가서 통일을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 신라의 문학은 그를 통해 고려 문학으로 이어졌는데 그의 글은 덕을 내세운 부드러운 어조로 되어 있다. 고려에는 골품제가 없었던 탓에 많은 육두품 세력들이 고려를 택하여 최고 지배층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셋째 시대 : 중세 전기 문학 제2기 고려 전기
창업과 쟁패의 신화적 표현
건국 신화의 재현
신라말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신라를 부정하는 반란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甄萱과 弓裔였다. 새로운 나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세력도 그렇지만 정치 이념이나 문화 역량에서도 상당한 역량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견훤과 궁예는 당시의 다른 지도자들보다 앞섰고, 王建은 또 이들보다 더 나았다.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한 선전 방법 중 설화는 아주 효과적인 것이며,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건국 신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신화의 시대는 지나갔으므로 영웅 전설과 건국 신화의 중간 형태가 요구되었다. 견훤에 관한 것은 네 가지인데 모두 미천한 처지에서 태어났으나 비범했다는 이중성을 띠며, 그 중에서도 가장 뿌리 깊은 것은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들 설화는 견훤을 높이려는 의도에 맞게 변형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궁예의 설화는 한 가지만이 있는데 고대 건국 신화에서 보이는 영웅의 일생과 비슷하다.
고려 건국 신화의 양상
고려 건국 신화의 특징은 선도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그 신화에 왕건 자신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행적이 불확실한 선조들은 신화로써 미화하고 행적이 이미 알려진 자신은 역사에 편입시켜 건국 신화의 위광과 합리적 통치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선조의 신화 중 일부는 神과 혼인했고, 일부는 唐나라 왕과 혼인하는 등, 후대에 위인이 태어날 소지를 갖추었다.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설화는 신라의 玉帶를 전해 받았다는 것을 제외하곤 거의 없으나 그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은 계속 생겼다. 고려 건국 신화의 새로운 점은 설화와 사실을 현명하게 관계 지웠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실 혈통의 위기와 소생
왕건이 주자, 각지의 호족들이 서로 왕권 다툼을 벌이게 되고 7대 목종에 와서는 외척이 발호하게 된다. 8대 현종이 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여곡절 끝에 金氏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고 현종이 등극한 뒤, 그는 法相宗의 사찰인 玄化寺를 지었다. 唯識學 계통의 법상종은 왕권 강화의 뒷받침이 되었고, 후에 그는 고려를 다시 일으킨 두 번째 창업주로 추존받았다. 고려의 왕권은 혈통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서는 이 혈통이 순수하게 유지되지 못했다는 신화가 생기고 이에 따라 고려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향가의 전통과 그 행방
고려 전기의 향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었지만 문화 담당층은 바뀌지 않고 신라의 육두품 세력이 장악했다. 마찬가지로 한시와 향가가 함께 존재했던 문학의 이중성도 그대로 이어진다. 다만 한시는 월등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향가는 오히려 쇠퇴했다는 점은 전 시기와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대표적인 향가의 작자는 均如였는데 그의 시대에는 10구체의 모습이 유지되었지만, 그 뒤의 [悼二將歌]나 [鄭瓜亭曲]에서는 8구체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 쇠퇴한 향가의 형태를 보여 준다.
균여의 [보현십원가]
균여는 신라 때 태어났으나 출생지가 이미 고려에 속해 있었던 까닭에 처음부터 高麗人으로 살아가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출가한 뒤 화엄종을 택해 고려 전기의 사상적 통일과 국가 체제 정비에 적극 기여했다. 마치 신라의 의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의상이 귀족 불교의 영역에 머무른 데 비해 균여는 민심을 장악하고 있던 禪宗에 대항하기 위해 민심 교화에도 힘썼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普賢十願歌] 11수이다. 이 작품에 의해 향가의 영역은 크게 확장되었으나 반면에 순수한 서정을 읊은 작품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보현십원가]는 崔行歸의 한역시와 함께 전하는데 최행귀는 여기에서 향가가 3구 6명으로 이루어졌고, 시를 짓는 이치에서는 향가와 한시가 서로 강약을 가리기 어렵다고 했으며, 우리는 중국 글을 아는데 중국 사람들은 우리 글을 모른다고 하여 문학적 능력에서 우리가 앞선다는 논리를 폈다. 위의 사실들은 모두 赫連挺이 편찬한 {均如傳}에 자료가 전한다.
예종의 [도이장가]
[悼二將歌]는 예종이 八關會에서 申崇謙과 金樂의 두 허수아비를 보고 감격해서 한시와 함께 지은 향가이다. 순서는 한시가 먼저이고 향가는 나중이다. 한시는 내력을 서술하고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었다면 향가는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느낀 벅찬 감격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은 본래의 격식이 무너진, 산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종이 지은 또 하나의 작품으로 [伐谷鳥]가 있다. 言路를 열어도 두려워 말을 하지 않는 신하들을 풍자한 노래로 사설은 전하지 않는데 {시용향악보}에 전하는 [維鳩曲]이 [벌곡조]가 아닌가 추측된다.
정서의 [정과정곡]
음서로 벼슬에 올랐던 鄭敍는 인종이 죽고 이질인 의종이 즉위한 뒤, 의종의 아우를 추대하려 한 혐의로 귀양을 갔다. 그때 의종이 곧 부르겠다고 했으나 세월이 흘러도 부르지 않자 임금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정과정곡]이다. 국문 사설이 전하는 {樂學軌範}에는 곡조 이름을 따서 [三眞勺]이라고 되어 있으며, 형식은 사뇌가와 비슷하다. 내용은 [怨歌]와 맥락이 닿는다고 할 수 있는데, 충신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이해된 까닭에 조선조의 시가나 가사 작품들과 공통점을 지닌다고 인정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록에 남은 것으로는 이 작품을 끝으로 향가는 종말을 맞게 되고 그에 따라 문학사의 한 시대가 끝난다. 문학 담당층도 문벌 귀족에서 무신난 이후 지방 출신의 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이들로 바뀌고, 그 결과 새로운 문학 형식인 시조가 향가를 대신하게 된다.
불교 문학의 방향 모색
고려 전기 불교의 판도
고려는 불교 국가였던 까닭에 불교가 번성했다. 신라말 禪門九山으로 분열된 불교는 고려에 들어오면서 통합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귀족 불교와 민중 불교를 합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각 종파마다 귀족 세력과 밀착되어 서로 경쟁하였다. 이런 가운데 光宗은 僧科 제도를 창설하고 선문구산을 法眼宗으로 통합하고자 했고, 현종은 玄化寺를 창건하면서 法相宗이 융성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문종의 아들인 義天은 화엄종을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나 보다 보편적인 불교의 필요성을 느껴 나중에 天台宗을 표방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교리 논쟁을 중심으로 한 방대한 저술이 이루어졌고, 이는 곧 문학론과도 연결되었다.
균여, 제관
균여는 신라말 希朗의 법통인 北岳의 법손으로 북악과 남악이 갈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북악의 입장에서 남악을 포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승과를 열 때 균여를 정통으로 삼았다. 균여는 저술에 힘을 기울여 화엄종의 교리를 밝히는 글을 많이 남겼다. 그는 이를 글로 쓰지 않고 말로 풀이했는데 이것은 난해한 저술이 널리 읽히기를 원해서 그랬던 듯하며, 같은 맥락에서 사뇌가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술의 핵심은 性相融會로 집약되는데, 곧 화엄종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편을 합쳐 둘이 서로 융통하고 합치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제관은 吳越王이 고려왕에게 물은 내용을 답해 주기 위해 중국에 갔던 인물이었다. 그가 쓴 {天台四敎儀}가 중국에 전하는데, 천태학을 공부하는 데에는 필독서인 것으로 그의 주장은 會三歸一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사람의 등급은 셋이나 아무리 모자라는 쪽도 함께 성불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보살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의천
문벌 귀족이 득세해서 왕실을 약화시키고 있던 때에 출가한 의천은 인주 李氏와 깊이 연결된 법상종을 물리치기 위해 화엄종을 내세워 커다란 성과를 거둔다. 그 뒤 불교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불교 통합을 시도했는데 그러기 위해 天台宗을 표방하였다. 그 결과, 고려 불교가 국제적인 중심체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의천은 불가는 물론, 유가와 도가, 그밖에 제자백가의 설을 택해 그 정수를 취하였다. 그의 주장은 敎觀幷修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교종과 선종의 공부와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응, 혜소, 탄연
계응은 의천의 제자로 천태종을 펴는데 전념했다. 그는 의천의 불교 논리에 따라 산에 들어가 수행을 게속했다. 혜소 또한 의천의 제자로 그는 의천이 이룩한 교단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문벌 귀족과 제휴했다. 탄연은 선종의 승려로 마음의 각성을 시로 표현하여 신선한 경지를 열었다.
균여에서 탄연까지 불교 문학은, 처음 난해한 교리를 풀이하는 데 힘썼으나 뒤에는 시를 숭상하게 되는 커다란 변모를 보였다.
과거제 실시와 한문학
고려 한문학의 출발점
고려가 통일을 이루는 데에는 무력도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문화적 정신적 역량도 큰 구실을 했다. 건국 초기의 대표적 문인으로는 崔彦위와 崔凝을 들 수 있다. 최언위는 신라 육두품 출신으로 왕건의 정치 철학을 충실하게 대변하면서 새 왕조의 이념적인 기틀을 마련하였고 골품제 철폐와 함께 과거제의 시행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다. 최응은 본래 태봉의 문인으로 건국 이념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왕건 자신도 스스로 글을 짓고 지침을 펴서 중세적 지배 질서를 펴고자 했다. 그는 중세적 보편주의를 견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족 문화의 독창성을 계발하여야 한다는 논리로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이 문화 창조의 근본임을 말했다.
과거제 실시에 따른 변화
광종은 과거제를 강력하게 실시하여 호족 세력을 누르고자 하였다. 과거는 누구나 응시하여 벼슬에 나아갈 수 있다는 보편주의를 표방한 것과 함께 문학적 능력을 측정한 것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과거의 시험 과목에는 詩 賦 頌 時務策이었는데 그 중에서 詩와 賦가 가장 중시되었고, 이는 곧 율문 우위의 중세적 문학관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광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과거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官學인 國子監을 만들고, 관리들에게는 月課法을 실시하여 한문학의 수준을 향상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문종에 이르러 私學이 생겨나 몇몇 가문에서 벼슬을 대거 차지하는 현상이 일어나 다시 문벌 귀족이 성행하였고 이후 관학은 부실하게 되었다.
⑶ 조익, 왕융, 최승로
광종은 後周의 귀화인인 雙冀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세 번의 과거에서 知貢擧를 맡았으나 지나치게 등용되었다는 여론이 높았다. 趙翌은 네 번째 과거의 지공거를 맡은 인물로 {보한집}에 그의 頌이 보인다. 王融은 다섯 번째 과거부터 지공거를 맡았다. 광종 때 4번, 경종 때 2번, 성종 때 6번의 지공거를 역임했으나 남은 글은 {동문선}에 실린 敎書 1편 밖에 없다. 崔承老는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문인이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다. {上時務書}에 임금의 바른 도리를 밝혔고, 유학을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代人奇遠]이라는 시에서는 개인적 정감이 듬뿍 드러난다.
현종, 최충, 박인량
과거에서 詩가 중요시되자 고려에서의 시문학은 과거를 보는 데에 급급하여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는 소홀한 감이 있었다. 이에 비해 현종은 마음에 절실하게 품은 바를 별다른 기교 없이 나타내는 시를 남겼다. 하지만 역시 주류는 과거제와 밀착되어 있었는데 海東孔子로 불린 崔沖이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높은 벼슬을 역임하고 치사한 뒤에 사학을 열었으나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자손을 훈계하는 시도 지었지만 내면의 정서도 노래하곤 했다. 그의 아들인 崔惟善은 외교 문서에서 이름을 날렸다. 朴寅亮은 국서도 잘 쓰고 시도 그에 못지 않았으며 설화집인 {殊異傳}을 엮기도 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이름을 떨쳤다.
김황원의 경우
金黃元은 문학이 영달을 위한 수단이라는 데에 반발한 시인이다. 높은 벼슬을 살았으면서도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변려문이 성행한 때에 古文 짓기를 주장했는데 좌천되어 길을 떠나며 지은 시 한 편이 전한다.
설화와 역사 사이
이념 수립의 대립 양상과 설화
고려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설화는 타격을 입었다. 집권층은 설화를 일소하고 명분과 도리를 갖춘 역사를 갖기 위하여 {三國史記} 등을 서술했다. 그러나 민간 전승인 설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아 {高麗史}나 {高麗圖經} 같은 곳에 모습들이 전하는데 이 글은 민족 의식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특히 고려 전기에 이루어진 역사서들은 설화집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종 때 지어진 {駕洛國記}는 다른 데에서 취급하지 않은 가락국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고, 박인량의 {수이전}은 설화적 전승을 다양하게 모은 것이다. 또, 金寬毅가 편찬한 {編年通錄}은 고려 건국의 신화적 내력을 전했으며, 박인량의 {古今錄}과 金仁存의 {海東秘錄}은 구체적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당시까지의 비정통적 자료나 전승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東明王篇}이나 {三國遺事}도 {삼국사기}의 반론이었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는 또다시 유교의 정통적인 사관을 확립시키려는 시도가 확고하게 나타난다.
위대한 인물의 탄생
영웅은 왕실의 인물에서 나는 거이 통례이지만 이 때에는 현종을 제외하면 설화의 주인공이 된 군주가 없다. 최응의 출생 설화는 아기장수 설화의 원형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고려 때에는 신화와 달리 고승에 대한 설화가 없는데 均如만이 탄생 수난 지은 노래의 영험 등에 신이한 사연이 전한다.
가장 영웅다운 인물은 姜邯贊이다. 그의 탄생 설화에는 그의 아버지가 개국 공신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 마치 강감찬이 민간에서 태어난 영웅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큰 별이 떨어졌다는 대목은 謫降小設의 고정 모티프가 되는 것으로, 고려의 설화는 신라의 설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후대의 소설과 연결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락국기의 저술
{가락국기}는 문종 조에 金官 지방에 파견된 벼슬아치가 저술한 것으로 건국 신화로부터 민간 전승에 이르기까지 다각적 서술을 보여 준다. {가락국기}에는 서술을 한 뒤에 銘을 넣는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넉 자씩 60줄로 된 명은 가락국의 건국 서사시인 셈이나 웅대한 기상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이전}에 따르는 문제
{수이전}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 관한 설도 분분한데, 원작자는 崔致遠이었으며 개작자는 朴寅亮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이전}은 여러 사람이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 보태고 다듬은, {삼국사기}와 대립적 위치에서 국풍을 존중하려는 민간 전승의 집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야기는 脫解의 일을 시작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망라하고 있다. 최치원에 관한 것이 가장 많고 선덕여왕과 김유신의 이야기도 두 가지가 전한다. 특히 [최치원]은 傳寄小說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삼국사기}의 위세
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는 설화를 역사를 위한 자료로써 비판적으로 이용한 저술로 전대의 {구삼국사}를 기초로 하여, 묘청의 고구려 정통론을 누르고 신라 정통론을 확보한 책이다. 자주적 기상보다는 유학이나 한문학을 중시하여 민간 전승의 하층 문화를 누르고 상층 문화를 국가적 규범으로 설정하였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列傳인데 여기서는 다른 대목과 달리 설화적 서술을 많이 끌어들였다. 등장 인물은 모두 86명으로 처음엔 높은 지위의 훌륭한 인물을, 다음에는 예사 사람의 본 받을 만한 행실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역의 무리를 서술했다. 86명 중에는 신라인이 56명으로 압도적이며, 김유신에 관한 것이 가장 풍부하게 실려 있다. 이렇게 볼 때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의도에 맞는 부분과 함께 밑으로부터 축적된 민간 전승도 김부식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동안 축적된 역량이 상당했던 탓에 함께 실리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전기 귀족 문학의 결산
예종 시절의 풍류
예종은 시 짓기를 즐긴 임금이었다. 官人이 아닌 處士의 문학을 좋아했으며 도교를 숭상하기도 했다. 그의 시대는 李資謙 일파를 비롯한 문벌 귀족들이 득세하고 있던 때였고, 예종은 이들과 대결하고자 했으나, 결국 홀로 동떨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郭輿는 예종과 두터운 친분을 가졌던 시인으로 자연과 벗하며 살았으나 예종의 시보다는 진솔한 면이 모자란 듯하다. 李資玄은 일족이 부귀를 누릴 때 홀로 벼슬을 버리고 노장 사상을 숭상하면서 시를 지었다. 그의 문학은 은거와 도피의 문학으로 그 맥락이 뒤에까지 계속 이어진다.
동조자와 비판자
朴浩는 국왕이 하는 일을 찬양하던 문인으로 [賀八關會表] 등의 작품이 전한다. 權適은 박호와 같은 글을 짓는 한편, 자신의 내면 세계도 함께 나타낸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현실의 비판은 찾아볼 수 없고 안온한 조화만이 있다. 그에 비해 崔 은 예종의 도가적인 문학관을 비판하면서 도학적인 문학을 주장하였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鄭克永은 최약보다도 더한 비판을 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주장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격동의 와중에서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뒤 조정은 문벌 귀족 세력의 개경파와 하층민의 유대를 가진 세력인 서경파로 분열, 대립되었다. 서경파는 처음 득세하는 듯했으나, 곧 주도권을 개경파에 빼앗겼고 妙淸의 난 이후 무너져 버렸다. 李之 는 서경을 찬양하는, 중국 전래의 춤을 추고 놀이를 할 때 부르는 口號나 致語를 지었다. 그러나 뒤에는 서경파를 비난하고 개경파의 입장에 섰다. 尹彦이는 중간 노선을 견지했으나 김부식 일파의 횡포에는 반발하고 나섰고, 뒤에는 서경 천도파의 주장에 동조했으며 말년에는 불교를 믿으며 참선에 몰두했다. 鄭知常은 묘청과 함께 서경 천도를 본격화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 향토의 정서를 살리면서 아름다운 표현을 쓰고자 하였다. 대표작인 [送人]에서 그러한 시풍을 능히 엿볼 수 있다.
김부식의 시대
김부식 일파는 유학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는 데에서 문학의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金富佾은 송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金富儀는 금나라에 事大할 것을 각각 주장했다. 김부식은 문학이란 도의와 명분을 바르게 하는데 소용이 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내용도 널리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변려문을 삼가고 古文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아 기발한 표현을 하지 못했던 탓에 그의 작품들은 상식적 착안에 고사를 적절히 삽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신 귀족의 말로를 장식하는 정서
인종의 뒤를 이어 방탕한 의종이 즉위하자 그 때까지 이룩된 김부식의 안정도 깨어지게 되고 급기야는 무신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문인들은 왕에게 박해를 당한 쪽과 함께 휩쓸린 쪽으로 나뉘게 된다. 鄭襲明은 의종의 잘못을 서슴없이 간하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한 인물로 [石竹花] 등의 작품이 전한다. 申淑은 내시가 득세하는 것을 비판하다가 나중에는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는데 그 때 지은 시가 남아 있다. 崔惟淸은 처신을 잘하여 어느 쪽에서도 미움을 사지 않았다. [初歸故園]이라는 시에서 시골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는 자신을 노래했다. 高兆基는 이 때 지위와 이름을 얻은 인물로 오언시에 특히 능했다. [珍島江亭]이라는 시가 전한다. 의종 때 득세한 인물로는 金敦中을 꼽을 수 있다. 김부식의 아들로 鄭仲夫의 수염을 그을린 장본인이다. 절을 찾아 근심을 없앤다는 [宿安樂郡禪院] 등의 시가 전한다.
넷째 시대 : 중세 후기 문학 제1기 고려 후기
무신란, 몽고란과 문학
⑴ 시대 변화의 추이
무신란 이후 문학은 이전보다 더욱 활기를 띠었는데 한 시대의 문학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문학의 담당층인 신흥사대부가 대두되었다. 몽고가 침략하자 최씨 정권은 몽고에 항쟁하였고 사대부들은 최씨 정권의 항쟁을 지지했는데 이는 새로운 문학이 진취적이고 민중적인 입장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무신란 이후에 나타난 고려 후기 문학은 중세적 가치관을 현실에 맞게 재편성하였고 이는 조선 전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⑵ 김극기가 택한 길
김극기는 벼슬을 크게 하지는 못했지만 산림에서 노래하며 문인으로서의 이름은 높았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내심의 갈등으로 번민한 李仁老와는 달리 농촌 생활의 모습을 가가이서 표현했다. 과장과 수식이 없이 생동감 있게 농민의 정서를 표출했다.
⑶ 죽림고회의 문학
무신란 후, 산수를 찾아 고결한 문학을 표방하던 吳世才, 林椿, 李仁老 등 7명이 竹林高會를 열었다.
오세재는 상당한 집안의 선비였으나 일거에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신세를 한탄하고 과거에 급하기를 바랐다. 임춘은 가장 불행했던 문인으로 30대에 요절했다. 이인로가 편찬한 {西河先生集}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몰락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갈등과 충격을 생동감 있게 드러내어 문학사의 전환에 기여했으며 [孔方傳], [麴醇傳] 등의 가전체 소설도 지었다.
이인로는 죽림고회의 중심 인물이었으면서도 벼슬이 정4품에 이르는 등, 홀로 성공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데 불만을 품고 좌절된 의지를 문학에서 살리고자 하였다. 최초의 詩話集인 {破閑集}을 지어 문학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표현을 공교롭게 다듬는 것이 가치를 발휘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죽림고회의 다른 시인들과는 조금 다른 문학관을 지녔다. 그의 글은 用事를 중시한 까닭에 현실의 문제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⑷ 최씨 정권의 문인들
琴儀는 최씨 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좌장 격의 인물로 최충헌이 문인들을 기용하도록 하는데 상당한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작품은 없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문인은 아니었던 듯하다. 兪升旦은 [翰林別曲]에 나오는 元淳文의 주인공으로 詩보다는 文에 능했다. {동문선}에 전하는 그의 시는 고려 사회의 모순을 노래하고 있다. 金仁鏡은 시와 부에 능했고, 근체시를 공교롭게 지었다. 은근한 풍자를 지닌 시가 전한다. 陳 는 詩作에 능통했던 인물로 {梅湖遺稿}가 남아 있다. 세상의 모순을 바로 잡으려는 뜻과 민족적 긍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⑸ 이규보의 경우
李奎報는 무신란 덕에 정계에 진출한 신흥 사대부의 선두 주자격인 인물로 죽림고회에의 참여 권유를 뿌리치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문학에서는 옛사람의 표현보다 새로운 착상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여 문학적 평가의 기준을 바꾸어 놓고자 했는데, {東國李相國集}에서 그는 문학 이론과 창작의 여러 면을 보여주고 있어 다방면에 걸친 그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바를 여러모로 천착한 흔적이 나타나 있으며, 사소한 소재도 문학론의 문제 의식과 결부된 표현을 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썼으나 그 지향하는 바는 몇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東明王篇}에서 보여주는 주체적 역사 의식을 표현하면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몽고에 대한 저항 문학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만년에 농민시를 이룩한 것이다. 그는 대몽항쟁 기간 동안 고난을 겪는 농민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어려움을 시로 남겼다. 농촌을 소재로 삼은 시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규보처럼 농민의 항변을 격렬하게 보인 것은 없었다.
⑹ 대몽 항쟁의 문학
崔滋는 몽고와 싸우기 위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三都賦]를 지어 강화에의 천도가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三別抄를 마지막으로 무력 항쟁은 끝났으나 문인들은 지난날의 투쟁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金坵는 그러한 대표적 인물로 그의 문집인 {止浦集}에는 [過鐵州]를 비롯한 항쟁의 시들이 있다. 止, 李穀은 원나라의 가혹한 수탈로 인한 백성의 희생을 처절하게 그렸고, 李承休는 {帝王韻記}를, 一然은 {三國遺事}를 지어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비평 의식의 성장
⑴ {파한집}
비평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잘라 말할 수 없으나 본격적인 비평은 고려 후기 李仁老의 {破閑集}으로부터 비롯된다.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으로 시평이나 작가론, 문학 일반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 박인량 곽여 이자현 정지상 등 당시까지의 시인과 시 중에서 좋은 것을 가려 뽑아 수록했다. '파한'이란 마음의 바깥 일을 사모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 한가한 것이며, 한가함이 온전해야 비로소 그것을 깰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결국 자신의 문학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인정받지 못함을 한탄한 것이다. 이인로가 이 문집을 편찬한 것은 무신란 후, 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옛사람의 모범적인 글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극단적인 형식 주의를 택했다.
⑵ 이규보의 비평
이규보는 비평을 대부분 논설로 내놓아 논리적으로 원론에 접근하면서 때로는 시론을 전개했고, 때로는 풍자하기도 하는 등, 자기 주장을 직접적으로 폈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중시하여 근본에서 말단으로 나아가야 올바른 시가 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문학에 있어서 독창성을 중시하여 복고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또 반어적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펴기도 하였는데, 이런 기법은 [驅詩魔文], [狂辯] 등에서 잘 보인다.
⑶ {보한집}
崔滋가 편찬한 것으로 李仁老의 {파한집}을 보완하면서 李奎報의 문학관을 따랐다. 최자는 유학의 도리에 합당한 것이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를 발현하기 위해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이규보의 농민시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보한집}은 문학의 여러 문제를 다양하게 고찰하였는데, 특히 품격론에서는 21종의 품격을 두고 이를 上, 次, 病의 세 등급으로 나눠 비평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객관화하려 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최자의 문학관은 신흥 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론과 창작 양면에서 구체화되었다.
⑷ 최해의 경우
고려가 원에 복속된 뒤에 태어난 崔瀣는 처음 원나라에 가서 급제했으나 말년에 비참하게 되었을 때 {東人文}을 지었는데 이는 시 산문 변려문을 모아 각기 편찬한 것이다. 그는 [東人文序]에 한국 한문학을 평가하는 기준과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한문은 우리말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하기는 어렵지만 문학은 마음에 갖춘 묘리를 나타낸다는 측면에서는 중국의 명문과 우리의 명문이 대등하다고 주장하였다.
⑸ {역옹패설}
저자 李齊賢은 국사를 편찬하고, 古文을 일으켰으며, 시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기품을 갖자고 하는 등, 고려 문학을 혁신하는 데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다. 정통적 시문을 새롭게 한 {益齋亂藁}도 편찬하였다.
{역옹패설}은 '대수롭지 않은 잡담거리'라는 뜻으로 前集에는 역사를, 後集에는 문학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고려사를 건국 초기, 광종 이후, 무신란 시기, 무신 정권 이후로 나누고 당시의 시대에서는 무신란 시기의 풍조인 문인이 승려와 가까워져 글 다듬는 재주나 자랑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하였다. 또 새 문학은 사대부가 신유학을 이념으로 해야 하여 이룩해야 한다며 經明行修를 내세웠다.
이제현은 이인로의 用事論과 최자의 新意論을 함께 포용하며 조화의 묘리를 얻고자 하는 절충론을 취했는데 이는 李穡에 이르러 방향 전환이 뚜렷이 나타나고 鄭道傳에 이르러서는 강경론으로 나타난다.
불교 문학의 새로운 경지
⑴ 불교 혁신 운동과 문학
고려 전기 주도권을 잡았던 교종은 무신란 이후 쇠퇴했다. 이때 등장한 지눌은 귀족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을 내세워 社라는 신앙 단체를 결성했으며 후에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까지 포괄하여 마음을 수련하는 새 방법을 제시했다. 이를 기화로 불교 혁신 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曹溪宗이 성립되었다.
선종의 저작은 기발한 비유나 역설이 많이 사용되어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어떤 격식에도 매이지 않고 구어체에 가까운 우리말 가사와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후기 선승의 문학과 신흥 사대부의 문학은 시대 의식과 밀착된 중세 후기 문학으로의 길을 여는 사명을 함께 수행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사대부 문학이 불교 문학을 누르고 주도권을 잡았다.
⑵ 지눌, 혜심
知訥은 문득 깨닫는 頓悟와 오래 두고 닦는 漸修를 주장했고 定慧雙修라는 말로 선종과 교종을 융합하고자 하였으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표현 방식을 개척했다.
慧諶은 지눌의 사상을 문학을 통해 구체화하였다. 假傳이나 詩도 썼으며 불교 문학을 정리하고 부흥시키는 데 큰 구실을 했다. 당시대의 사상과 문화의 긴장된 양상에 참여하면서 현실 문제를 직접 다루기도 했다.
⑶ 천인, 천책, 무기
天因은 스승 了世를 이어 천태종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靜明國師詩集}을 지었으며 {동문선}에 상당수의 작품이 전하는데, 장편 고시가 많고 산수에서 수련을 하며 느끼는 흥취를 읊은 것이 주종을 이룬다.
天 은 천인의 후계자로 釋眞靜이라고도 한다. {동문선}에 그의 시 다섯 수가 전하며 {湖山錄}, {海東傳弘錄} 등을 지었는데 정약용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유학과 불교, 문학과 신앙을 관련시키고 견주는 데 관심을 두었다.
無寄는 천책의 후계자인 而安의 제자로 [釋迦如來行蹟頌]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남겼다.
⑷ 충지
止는 수선사에서 지눌, 혜심의 뒤를 이은 사람으로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남겼고, 특히 {동문선}에는 승려로서는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 혜심이 개척한 선시의 품격을 한시 본래의 수준과 함께 구현하며 조화를 찾으려 했으며, 현실 문제도 다뤄 대몽 항쟁 문학의 최고 성과를 이룩했다.
⑸ 경한, 보우, 혜근
景閑은 [白雲和尙語錄]을 지었으며 예측을 불허하는 기발한 표현으로 기존의 관념을 깨고자 했다. 普愚는 [太古和尙語錄]을 남겼는데 감흥이 떠오르면 거침 없이 읊어대는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썼다. 나옹화상으로 불리는 惠勤은 {懶翁集}을 남겼다. [百納歌], [枯體歌], [靈珠歌]의 나옹 3가가 유명하며 가사의 최초 작품이라고 하는 [僧元歌]도 전한다.
민족사 재인식의 시대
⑴ 새로운 시대의 문제 의식과 동명왕편
무신란 이후, 고려 전기 귀족 문화의 규범이 파괴되면서 동시에 주체 의식이 성장한 결과, {삼국사기}를 부정하는 방향에서의 역사 문학 작품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역사 문학은 중세 문화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고대적인 자기 중심주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작품인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대 영웅 서사시를 재현한 작품으로 동명성왕의 신화가 그때까지 구전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무신란으로 귀족 문화의 기반이 무너지자 이규보는 민족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평가로 이 작품을 서술했다.
⑵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은 覺訓이 지은 우리 나라 승려들의 전기집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중간 쯤의 시기에 지어진 글이다. 불교가 우리 문화에 정신적 지도 원리를 제공했던 자취를 정리해 {삼국사기}의 일방적 주장을 시정하려 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정신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문학적 형상화를 중시한 까닭에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윤색한 부분이 많다. 각 인물 뒤에는 讚을 붙였는데 이를 연결하면 서사시가 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⑶ {삼국유사}
一然의 {三國遺事}는 고려 후기 역사 문학에서 가장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는 글로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춰 새롭게 자각된 역사 의식을 깊이 있게 나타냈다. 대체로 {삼국사기}와는 상반된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자 해서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했으며, 불교에 관한 사항에서는 전기 귀족 불교의 체취가 풍기는 {해동고승전}을 비판하고 민중 문화와 밀착된 불교를 다루고자 했다. 따라서 세속의 역사인 {삼국사기}와 불교의 역사인 {해동고승전}을 아우르고, {동명왕편}에 나타난 새로운 역사 의식의 시각을 다채롭게 구체화하며, 주체성 인식과 민족 문화 평가를 실증으로 이룩했다. 또, 설화에 중심을 두고 역사와 문학을 함께 다뤘으며 사실로써의 근거와 상징적 의미를 함께 이해하도록 하였다. 문장도 우리말에 가까운 한문을 씀으로써 직감적이면서도 절실한 체험을 살리고자 했다.
⑷ {제왕운기}와 그 이후의 상황
고려 후기에 이르러 吳世文의 [歷代歌], 李奎報의 [東明王篇], [開元天寶詠史詩], 李承休의 [帝王韻記] 등 역사를 읊은 詠史詩들이 생겨났다.
{제왕운기}는 상권에 중국의 역사를 적었고, 하권에 '東國君王開國年代'라는 표제로 우리 역사를 서술했다. 단군을 본문의 서두로 삼아 고려까지를 기록했는데, 이 때까지 무관심했던 발해사에 주목하는 등, {삼국유사}보다도 진취적인 면모를 보였다.
당시는 주권을 위협하는 원에 맞서기 위해 국사의 정비가 필요했으므로 李齊賢 白文寶 李達衷이 고려사인 {紀年傳志}를 편찬하려 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양상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조선에 들어와 다시 유학의 합리주의를 기저로 한 역사에 역사 문학의 다양한 모색과 진취적 기상이 사라졌다.
사람의 일생 서술 방법
⑴ 서술 방법의 양상
사람의 일생을 문학으로 표현한 것은 신화로부터 시작되어 그 뒤 金大問의 {高僧傳} 등에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을 다루면서 독자적 전통을 정착시켰는데 이것이 역사책의 열전이다.
열전에는 佛家列傳과 儒家列傳, 道家列傳이 있는데 불가 열전이 유가 열전보다 상상의 폭을 넓히면서 서사 문학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으며 도가 열전은 불가 열전에 더 가깝다. 유가 열전 중 객관적 서술과 공식적 평가를 갖춰 교술 문학 본령에 충실한 것은 行狀과 墓誌이다. 행장은 죽은 인물에 대한 공식적인 서술 평가로 작가가 자기 생각을 나타내기 어려우나 묘지는 고인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표방하는 글이나 격식은 비교적 자유롭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묘지는 傳에 보다 가까웠는데 이규보 최해 이제현 이색 등이 많이 남겼다.
傳은 작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어떤 인물의 행적을 작품에 담은 것으로 새로운 표현 영역을 개척하고자 하는 노력이 함께 나타나 있다.
⑵ 전의 일반적인 성격과 표현 영역
傳을 쓴 동기를 전달 동기와 표현 동기로 나눌 때, 전달 동기가 두드러진 것은 이색의 [鄭氏家傳], 鄭以吾의 [星主高氏家傳] 등이나 표현 방법에서는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여기에 비해 어느 특정한 인물 한 사람을 다룬 것들은 표현 영역이 좀더 확장되었다. 이규보의 [盧克淸傳], 李崇仁의 [草屋子傳], [裵烈婦傳], 이곡의 [節婦曺氏傳] 등이 이에 속하는데, 뒤의 둘은 여자의 행실을 다룬 것이다.
傳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은 이색으로 그는 이 글을 통해 당시의 문학 기풍에 대해 스스로를 비판하고 어디 메인 데 없이 자기를 나타내는 문학을 칭찬했다.
⑶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자신의 전을 가상의 인물에 의탁해 쓴 글을 托傳이라고 하며 여기에서는 자신을 너무 내세우는 것을 금기시 했는데 이규보의 [白雲居士傳], 최해의 [猊山隱者傳]이 있다. [백운거사전]은 자기를 높인 글로 문학을 해서 부귀를 꾀하는 자세를 거부하였다. 이에 비해 [예산은자전]은 자신을 낮춘 글로 자신의 처지가 비참함을 강조하였다.
⑷ 가전의 세계
사물을 의인화하여 지은 傳을 假傳이라고 하는데 {동문선}에 7편이 실려 전하는 등, 고려 후기에 처음 나타났다. 사물에 관심을 두고 잘못된 세상을 비판 풍자하면서 사람의 바른 길을 찾자는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표현 동기가 우세한 교술 문학의 한 갈래로서 景幾體歌의 성격과 비슷하다.
林椿의 [麴醇傳]은 술을, [孔方傳]은 돈을 의인화한 것으로 작가의 처지를 합리화하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작품이며, 이규보가 쓴 [麴先生傳]은 술을, [淸江使者玄夫傳]은 거북을 의인화한 작품이다. [청강사자현부전]은 동물을 의인화한 첫 작품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곡의 [竹夫人傳]은 대나무를, 釋息影庵의 [丁侍者傳]은 지팡이를, 李詹의 [楮生傳]은 종이를 각각 의인화했으나 앞의 작품들에 비해 주제 의식이 부족하다.
{동문선}의 수록 작품 이외에도 대나무를 의인화한 [竹尊者傳]과 얼음을 의인화한 [氷道資傳]은 승려인 慧諶의 작품이다.
속악 가사와 소악부의 세계
⑴ 속악 가사의 성격
樂은 국가에서 행하는 공식 행사에 소용되는 雅樂과 비공식적인 잔치 등을 할 때 쓰이던 唐樂, 俗樂으로 나뉘는데, 당악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고 속악은 국내에서 생긴 것이다. 고려 전기까지 아악과 당악은 풍부한 내용을 갖추며 발달된 데에 비해 속악은 정체되었다.
삼국의 작품 중 [井邑詞]와 [處容歌]가 궁중에서 공연되었고, 고려조의 노래 중 張延祐의 [寒松亭曲], 예종의 [維鳩曲]은 고려 전기의 속악으로 채택되었으며 향가 계통의 노래인 [鄭瓜亭曲]도 속악으로 편입되었다. 그밖에 [風入松], [夜深詞], [紫霞洞]은 한문으로 되었다.
조선조에 男女相悅之詞로 배격된 국문 속악 가사들이 채택된 것은 고려 후기인데, 이의 원천은 하층 문화와 연관을 갖지만 상층 문화로 변모되면서 이중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속악 가사에 민요 계통의 노래가 대폭 삽입된 것은 큰 의의를 갖으며, 구조도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당악 정재의 자극을 받은 속악 정재의 음악적 구성에 적합한 때문이었다.
⑵ [처용가] 계통의 노래
신라 때 노래 춤 놀이의 복합체였던 [처용가]는 고려에 들어오면서 속악 정재로 정리되었으나 굿으로서의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다. 처용을 신으로 섬기며 처용이 재앙을 물리치는 권능을 회복하도록 기원하자는 생각을 강하게 나타내는 한편, 박진감 있는 짜임새는 없다.
⑶ [동동], [쌍화점]
속악 정재에서 부른 놀이 노래로는 [動動], [雙花店] 등이 증거가 발견되는 것들이다. [동동]은 1장에서 신령과 임금을 송축한 뒤, 2장부터는 달거리 형식을 취했는데, 자연을 노래하면서 인생 살이를 문제 삼았으며 형식은 민요와 비슷하다. [쌍화점]은 충렬왕 때 吳潛, 金元祥 등이 음란한 짓을 하며 지어낸 것으로 퇴폐적이고 음란한 가극의 대사이다.
⑷ [상저가], [엇노래]
[維鳩曲], [相杵歌], [엇노래(思母曲)]는 장이 나뉘지 않은 짧은 형태의 세 토막 형식 노래라는 유사성을 갖는다. [상저가]는 두 사람이 절구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던 노래로 어버이와 자식 간의 사랑을 다룬 것이고, [엇노래]는 '어머니 노래'라는 뜻으로 본래는 노동요였다.
⑸ [이상곡], [만전춘별사], [정석가]
[履霜曲]은 여러 형태를 종합한 듯한 모양을 지니고 있는 노래로 여자가 오지 않는 님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滿殿春別詞]는 장이 나뉘어져 있으나 여음은 없으며, 여러 양상의 사랑을 표현한 노래로 '만전춘'과는 다른, 어디서 따 오거나 지어낸 구절을 모아 새로운 노래말을 만든 까닭에 [만전춘별사]로 부르게 되었다. [鄭石歌]는 정과 돌이라는 악기를 사람처럼 일컬어 지은 노래로 임금 앞에서 벌이는 놀이에 쓰였다. 마지막 5장의 일부 사설이 [西京別曲]에서도 보이는 것은 출처가 서로 다른 노래를 모으고 짓고 보태서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된다.
⑹ 소악부
李齊賢과 閔思平이 小樂府라는 이름으로 남긴 17편의 한시는 속악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를 한문으로 옮긴 것으로 우리말 노래의 전체가 아니라 개요를 옮겼거나 어느 한 대목만을 번역한 것이다. 소악부는 한시이면서도 우리말 노래, 특히 민요의 진솔한 사연을 담고자 한 까닭에 민족 문학으로서의 적극적 의의를 갖는데, 조선 후기에 특히 융성했다.
설화, 무가, 연극의 양상
⑴ 설화
고려 후기에도 많은 설화가 있었으나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격하되었다. 그것은 신유학의 관점에서 합리적이고도 비판적인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던 까닭에 이념 수립에 관련된 긴요한 것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것들도 원형을 그대로 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奎報와 一然은 당시의 추세에 구애받지 않고 이른 시기의 설화를 재인식하여 설화를 모으고자 하였다.
고려 후기에 등장한 詩話는 설화의 판도를 바꾸었는데 이는 수록된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하므로 자연스레 설화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 때문이다. 李仁老의 {破閑集} 이후의 시화집은 시화 이외의 잡록 등을 수록하였는데 상층부의 관심에 의해 보은담, 孝友 烈女 方技 등이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몽고란 이후의 설화 중에는 중국인이 나쁜 짓을 하여 돌아가는 길에 그를 산신의 아우가 죽였다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란 이후의 소설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⑵ 무가
신유학을 숭상하는 신흥사대부가 등장하면서 무속이 적극적으로 배제되었으나 고려 후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언자이며 구세주로 자처하는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무속에 대한 탄압은 조선에 들어 더욱 심해졌으나 고려 후기부터 전해진 무가가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문제성이 있는 사설은 정리되고 곡조를 보아 채택하였다.
⑶ 연극
나라 굿놀이라고 할 수 있는 八關會, 燃燈會, 儺禮 같은 행사에는 歌舞百戱가 따랐는데 이중에서 연극적 요소의 발견 가능성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전문적인 놀이패가 있어 연극을 공연했고 궁중에서도 연극이 있었으나 후대로 이어질 만큼 자리잡지 못했으며 연극의 주류는 민간 연극과 하층 연극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길거리에서 하는 풍자적 연극이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河回 탈춤 등의 탈춤과 꼭두각시놀음도 민간 연극으로 전승되었다.
경기체가, 시조, 가사의 형성
⑴ 고려 후기 시가의 새로운 양상
무신란 이후, 문벌 귀족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향가를 이을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고 문화 담당층으로 신흥사대부가 나서서 시가 문학을 새로이 일으키고자 한 결과, 景幾體歌 時調 歌辭가 등장하였다.
경기체가의 첫 작품인 [翰林別曲]은 속악 가사와 비슷한데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대목씩 부르다 그 표현 방법이 이어져 경기체가의 틀이 생겼다. 이 경기체가는 사물을 중시하고 자아를 세계화한, 표면으로 부각된 최초의 교술시로 신흥사대부는 [한림별곡]의 전례가 자신들의 사고 방식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조선 전기까지 발전시켰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에 속한 것과 원리를 이루는 것을 함께 추구하면서 理氣哲學을 이룩하자는 모색이 심화되고 밖에서 들어온 학설을 적용하였다.
시조는 서정시의 필요로 인해 발생하였는데 네 토막 형식으로 그 원형은 [井邑詞]나 [滿殿春別詞]에서도 보인다. 가사는 고려 말에 성립되었는데 현전하는 최초의 작품은 나옹화상의 [僧元歌]이나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한문으로 전하는, 비슷한 형식의 노래도 있다. 이들은 모두 그 연원을 민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음이 삽입되며 장이 나누어지는 형식의 민요는 속악 가사의 일부와 경기체가로, 여음이 없는 짧은 형식의 민요는 향가를 거쳐 시조로, 그리고 여음이 없는 긴 형식의 민요는 가사로 각각 변천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들이 존재했던 시기를 가지고 시대를 구분해 볼 수도 있는데, 경기체가 시조 가사가 공존했던 시기는 중세후기문학기, 경기체가가 붕괴되고 시조와 가사가 공존하던 시기는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가사가 탈락하고 시조만 남은 시기는 근대문학기라고 할 수 있다.
⑵ 경기체가
첫 작품인 [한림별곡]은 최씨 정권에 참여하면서 정권에 진출한 문인들이 득의에 찬 기상을 돌아가며 부른 노래로 경기체가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 작품은 개별적인 사실이나 사물을 하나씩 열거하다가 한데 모으고 그것을 하나의 명사로 포괄하고는 景을 붙여 어떤 광격을 생각하게 하는 말의 짜임새와 '334, / 334 / 444 / 위……景…… / 4444 / 위……'의 율격적 형식이 계속 이어진다.
安軸의 [關東別曲]과 [竹溪別曲]은 혼자 정착한 경기체가의 첫 예로 꼽히며 신흥사대부가 경기체가를 통해 새로운 사고 방식을 표현한 명백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관동별곡]은 강원도에 벼슬아치로 나가 민심을 살피고 시대의 병폐를 파헤친 기행시이며, [죽계별곡]은 작가의 고향인 순흥의 경치를 찬양하고 거기서 놀며 공부하는 흥취를 표현한 작품이다.
⑶ 시조
고려 말에 나타났으며 작품은 몇 백 년 간 구전되다가 조선 후기에 국문으로 기록되었다. 많이 작품 중에는 후대인의 의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도 있으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작가가 많이 나타나는데 禹倬, 李兆年, 李存吾, 崔塋, 李芳遠, 鄭夢周 등이 유명하다. 사설시조도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邊安烈의 [不屈歌]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말의 정치적 격동과 관련되어 창작된 작품으로, 이로 미루어 볼 때, 시조가 그만큼 큰 구실을 하는 동시에 절박한 상황에서도 묘미있는 표현이 개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⑷ 가사
가사의 첫 작품으로는 나옹화상 혜근의 [승원가]를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작품 이전에도 원감국사 止의 [臂短歌], 태고화상 普愚의 偈頌 등도 뒤에 가사로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가사는 처음에 구전되는 불교가사로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으나 申得淸의 [歷代轉理歌]를 볼 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사대부 문학의 방향과 문제 의식
⑴ 사대부의 성격과 사고 방식
신흥사대부는 본래 지방의 중소 지주에 지나지 않는 향리 출신으로 그들은 권문세족에 비해 불리한 처지를 사상적이거나 문화적 역량으로 극복, 역사 창조의 방향과 논리를 휘어잡을 수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원나라 수도를 자주 드나들던 사대부 문인들은 古文과 新儒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고 방식을 구현하며 문화의 혁신을 꾀하였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그곳에 사는 하층민의 처지를 대변하였고 그로 인해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켰으며,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전제 개혁을 단행, 토지 분배의 실현을 위한 문학을 추구하였다.
⑵ 최해, 안축, 이제현
성리학을 표방하면서 고려 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는 安珦, 白 正, 禹倬 등인데 이들은 저작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전개할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崔瀣는 {東人文}을 지은 사람으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발견을 위해 문학 활동을 하였는데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읊은 농민시도 있다. 安軸의 문집으로는 {謹齊集} 네 권이 전하는데 그의 작품은 실제 삶의 현실에서 접한 고민과 뉘우침이 들어 있어 감명을 주나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李齊賢의 문학은 원나라를 지향하는 뜻과 고려를 지향하는 뜻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앞의 것들을 수단으로, 뒤의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했다. 원나라에 가서 당시 최고 수준의 문학 활동을 하며 고려의 이익을 위해 힘썼고 다양한 문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문학의 근본 정신은 고문에 힘쓰면서 신유학의 도리를 구하는 데에 두었는데, 꾸밈이 없는 가운데 실속 있고 공감을 주는 문학을 이룩할 것을 주장하여 신흥사대부가 택할 독자 노선을 실제 창작을 통하여 분명하게 하고자 하였다.
⑶ 이곡, 윤여형, 백문포, 정포, 전녹생
李穀은 이제현이 이미 제시했던 방향을 더욱 구체화하여 유학의 도리를 근거로 삼고 교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尹汝衡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농민의 처지를 심각하게 다룬 시를 써서 변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상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白文寶는 윤여형이 농민의 처지에서 절실하게 부딪친 문제를 이념적인 방향에서 정립하고자 하였다. 鄭 는 사대부로서 유학의 도리를 밝히려고 했으나 구체적 경륜을 갖고 현실과 대결하지 못하고 나그네로서의 심정을 지니고 인생을 보냈다. 田祿生은 권문세족의 폐해를 시정하려고 앞서나아가다가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⑷ 이색, 이달충, 정추, 김구용
李穡은 이제현과 이곡을 이어 신유학을 발전시켰으나 불교를 온통 배격하지는 않았으며 사상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도학을 本道로, 문학을 外道로 생각하여 문장은 마음의 도리를 일깨워줄 때 가치를 갖는다고 하였다. 그는 문학이 특권 의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고 우리의 풍토나 생활과 관련된 시를 지었다. 李達衷은 시대의 고민과 적극적으로 부딪치고자 했으나 시련을 개탄하기보다는 그에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찾는 것이 더 긴요함을 역설하고, 왕조가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백성들의 의연한 자세에서 찾고자 했다. 鄭樞는 신돈에게 죽을 뻔하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내쫓긴 뒤, 백성의 고난에 동참하여 나라를 근심하며 시를 지었다. 金九容은 그림 같은 정경을 읊고, 신선을 찾아 멀리가고 싶은 생각을 표현하였다.
⑸ 정몽주, 이존오, 이숭인, 이종학
圃隱 鄭夢周는 시의 소재를 확대하고 참신한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신유학의 도리를 굳게 지키고 대의명분을 분명히 하고자 하면서 철학적인 시로써 도리를 밝혔다. 李存吾는 신돈을 규탄하다가 겨우 살아 은거하면서 시대를 걱정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시를 지었다. 李崇仁은 은거를 동경하는 기품에 따라 험난한 세상을 벗어나 숨고자 하는 마음을 시로 나타냈다. 李鍾學은 이곡의 손자이고 이색의 아들로 정도전에 의해 피살되었는데, 귀양과 관련된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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