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교임고]시조의 역사, 명칭, 내용

작성자01사대홈(펌)|작성시간04.01.01|조회수620 목록 댓글 0

시조의 역사 명칭 내용
시조 발생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나, 신라 향가 에서부터 싹이 터서 고려 중엽에 장가의 장이 나누어지면서 고려말에는 3장 12구체의 정형시로 되었으리라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고구려의 을파소, 백제의 성충, 고려의 최충 등의 것이 있고, 고려말의 우탁, 이조년, 이방원의 '하여가', 정몽주의 '단심가' 등 10여 수가 남아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날로 계승 발전되어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노계 박인로 등의 대가를 비롯하여 여류 황진이를 배출한 조선 중기는 시조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양반들에 의해 지어진 이전의 단형 시조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산문정신에 힘입어 양반의 생활권을 넘어 평민계급으로 파급되면서 그 형식은 평시조의 소재이던 자연에서 눈을 돌리어 실생활에서 소재를 구해 장형 시조로 나뉘어지고 있다.
영정조 시대에 와서는 입으로 전해져 오던 시조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1728년(영조 4년) 김천택의 '청구영언'을 시작으로 1763년(영조 39년)에는 김수장의 '해동가요', 1876년(고종 13년)에 박효관과 안민녕의 '가곡원류', 그 밖에 '고금가곡', '동가선', '남훈태평가', '객악보' 등의 시조집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 말기까지의 시조 편수는 2,000여 수에 달하는 방대한 것으로 거기에 담긴 사상과 정서는 그대로 한국의 역사를 시간과 공간으로 꿰뚫어 모은 정신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본래는 시조를 단가라 불러 장가(고려 가요, 경기체가 등)에 비해 짧은 형식의 노래라는 뜻으로 부르던 것이 그 후 단가에 곡조를 맞추어 부르게 됨으로써, 이런 곡조를 영조 때 가객 이세춘이 시조라 하였으나 그 뒤 가사까지를 합쳐 시조라 부르게 되었고, 이 후 곡조는 빼놓고 단순히 작품 내용만을 합쳐 시조라 하기에 이르렀다.
시조란 시절의 노래, 즉 시절가조(時節歌調)를 줄여서 부른 말로서 시절가, 신조(新調), 시조라고도 하였습니다. 한편, 영조 이전에는 곡명이 아닌 작품 내용의 호칭으로서 단가 외에 신번, 영언, 장단가, 시절단가, 가요, 가곡, 악장, 신성 등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으나 역시 단가가 그 호칭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시조(옛시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이별애상 -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
2. 공규원모 - 떠나간 임의 무정함을 원망하면서도 그 임을 못잊어 사모하는 노래
3. 강호한정 - 시골에서의 한가로운 생활을 노래
4. 전가한거 - 시골집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것을 다룬 노래
5. 치사귀전 - 관직에서 물러나 밭일이나 하겠다는 내용
6. 안빈낙도 - 곤궁하게 살면서도 평안한 마음을 노래
7. 연주충군 - 군왕을 사모하여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
8. 학문수덕 - 글을 배우고 덕을 닦는 것을 노래
시조의 형식
시조 형식은 보통 "3장 6구로 되어 있고, 3 4 3 4 / 3 4 3 4 / 3 5 4 3 의 음수율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우리의 수 천수에 이르는 고시조 중 이러한 음수율로 이루어진 것은 8%에 지나지 않는다.
시조는 글자 수를 맞추는 시 형식이 아닙니다. 노래 부르기 위한 가시로서 3장 6구 12마디로 된 음보율의 형식이다. 이 때 한 음보의 글자 수는 대체로 네 자를 기준으로 하나 얼마든지 융통적이어서 세 자, 두 자, 다섯 자 등 다양하다. 말하자면 시조는 12마디 리듬으로 이루어진 시 형식이며, 종장 초구에서는 변화를 주기 위해 기준이 되는 네 자보다 앞에는 모자라게, 뒤에는 넘치게 하여 3과 5가 된 것이다.
또, 사설 시조와 엇시조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그 요건을 두 장이 길어지느냐 한 장이 길어지느냐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사설 시조나 엇시조는 음악적 용어이지 가사의 길이에 따른 명칭이 아니며, 그 길어진 것도 한 장이 길어진 것, 두 장이 길어진 것, 도 석 장이 길어진 것 등 다양하다. 평시조에 대해서 길어진 시조 형식을 모두 장시조라고 한다.
단형 시조
시조를 음악상으로 나눈 하나의 형태.
평시조(平時調)·단형시조(短形時調)·평거시조(平擧時調)라고도 한다. 3장 6구에 총자수 45자 내외로 된 정형시조이다.
매구의 자수 기준은 7∼8자이고, 종장 첫 구만 3자 고정으로 7·8 ⑺, 7·8 ⑺, 9·7의 음수율을 가진다. 또한 1구를 2분절하여 12분절로 된 3·4·3 ⑷·4, 3·4·3 ⑷·4, 3·5·4·3으로 대부분의 시조가 이에 속한다.
창법은 시조 전체를 대체로 평평(平平)하게 부르는 것으로, 경제(京制)에서는 종장 제1구 2분절의 중간과 종장 제1구인 첫 3음절을 높게 부르는 외에는 평탄하게 부르고, 영제(嶺制)에서는 경제처럼 중장과 종장에서 높은 가성(假聲)을 쓰지 않고 전곡을 평평하게 부르는 시조창이다
장형 시조
시조의 한 형식. 장시조(長時調)라고도 한다.
사설시조(辭說時調)는 조선 영·정조 이후에 서민문학이 일어났을 때 주로 중인(中人)·시조작가·부녀자·기생·상인 등 서민들과 몰락한 양반이 부른 장형시조(長形時調)이다.
형식은 초장(初章)·종장(終章)이 짧고, 중장(中章)이 대중 없이 길며, 종장의 첫구만이 겨우 시조의 형태를 지니는 것과, 3장 중에서 어느 2장이 여느 시조보다 긴 것이 있다. 엄밀히 따져서 사설시조란 창법에 따라서 분류한 시조 형식의 하나로서, 길어진 중장에서 연장법(延長法)을 써 가며 반음정 등을 넣어 변화 있게 부른다.
내용에 있어서는 양반·귀족처럼 관념적·고답적인 것이 아니라, 주변 생활이 중심이 된 재담(才談)·욕설·음담(淫談)·애욕 등을 서슴없이 대담하게 묘사·풍자하고, 형식 또한 민요·가사·대화 등이 섞여 통일성이 없는 희롱사로 변하였다.
엇시조(時調)는 초장·중장·종장 중 어느 한 장이 평시조보다 더 많아진 형태의 시조. 시조창(時調唱) 중의 하나로 일명 중시조·반사설시조·농시조(弄時調)·엇엮음시조라고도 한다.‘엇’은 얼과 통하므로 엇가는 시조, 얼버무린 시조란 뜻으로서,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중간 형태의 시조, 즉 평시조 창에서 벗어나 길지도 않게 중간으로 부르는 창의 시조를 말한다. 엇시조의 형태는 현대시조에서 더욱 다양하게 시도 되고 있다. ‘엇’의 음악적인 특징은 첫부분을 높게 질러내고 초장은 무겁고 점잖게, 중장 이후부터는 흥청거리는 창법으로 부르는 것이다.
정철(鄭澈/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본관 연일(延日). 자 계함(季涵), 호 송강(松江). 시호 문청(文淸).61년 진사시에, 다음 해 별시문과에 각각 장원,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66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78년(선조 11)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곧 이어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珍島)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3년 동안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작품(詩作品)을 많이 남겼다. 이 때 최초의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 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 진주(晉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다음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창평(昌平)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烏川)서원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 《송강집》 《송강가사》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황진이 (黃眞伊/?∼?)
조선시대의 시인·명기(名妓).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서(書)·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윤선도(尹善道/1587∼1671)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다.
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복서(卜筮)·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사후인 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박인로 (朴仁老/1561∼164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안동(安東). 시인(詩人). 자 덕옹(德翁). 호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영천(永川) 출생. 승의부위(承議副尉) 석(碩)의 아들.
어려서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났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막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성윤문(成允文)의 발탁으로 종군, 98년 왜군(倭軍)이 퇴각하자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가사(歌辭)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수군만호(助羅浦水軍萬戶)로 군비(軍備)를 증강하는 한편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퇴관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남기고, 1630년(인조 8) 노령으로 용양위 부호군(龍A衛副護軍)이 되었다.
도학(道學)과 애국심·자연애(自然愛)를 바탕으로 천재적 창작력을 발휘, 시정(詩情)과 우국(憂國)에 넘치는 작품을 썼으며 장가(長歌)로는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독특한 시풍(詩風)을 이룩하고 가사문학(歌辭文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천의 도계향사(道溪鄕祠)에 제향되었다.
문집(文集)에 《노계집(蘆溪集)》, 작품에 《태평사(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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