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교임고]가사의 유형

작성자01사대홈(펌)|작성시간04.01.01|조회수509 목록 댓글 0

가사의 유형

기행가사(紀行歌辭)

대체로 관료들의 자기 임지의 승경을 노래한 것으로 백광홍(1522-1556)의 <관동별곡>과 정철 (1536-1593)의 <관동별곡>이 있다.
이러한 기행가사는 관료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한 것으로 이는 다음에 볼 유배가사와 대가 되는 내용이다. 이러한 가사에서 우선 그들은 그러한 자리를 마련해준 성은에 감사하며 공무에 틈을 내어 자기 임지의 곳곳을 둘러보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노래하면서 아울러 자신의 감흥과 선정을 읊고 다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은 다같이 호남에서 성장하였으며 정철의 <관동별곡>은 백광홍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기행의 진행과정
출발동기 및 행장(출발)-- 목적지까지의 노정과 느낌(노정)--- 목격지에서의 구경과 삶의 느낌(목적지)--회정전후의 느낌과 지은 동기(귀로)

유배가사

기행가사와 더불어 유배가사도 가사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유배가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서는 역시 관료들의 세력 다툼과 관계가 있다. 조선초에는 관료의 자리는 많았으되 양반의 수가 적었으나 그 뒤 한정된 관직수에 비해 양반들의 증가는 대를 더함에 따라 증가되면서 이에따라 자리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어 서로 상대방을 밀어내려는 관료들의 파벌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유배가 생기게 되었다.
유배가사로는 조위의 <만분가>가 있으며 실세 낙향하여 연군을 노래한 것으로 정철의 양미인곡이 있다.

<만분가>: 군주가 계시는 천상 백옥경을 떠나 원지(遠地)에서 군주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스스로 굴헌에 비유하였다. 이와 같이 쓰라린 회포와 아울러 군왕에 대한 끝없는 충성을 나타내어 뒷날 유배가사의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양미인곡>: 사미인곡에서는 님과 자기(여인에 비유한 송강)는 천생연분으로 하늘이 아는 인연을 맺고 있으나 늙어서 헤어진 외로움을 말한 뒤 4계절에 따라 님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고 있다. 속미인곡에서는 이와 달리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님을 그리워하며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을 두선녀의 모습으로 대화체로 노래하였다.

교훈가사
유학을 국시로 한 지배계급은 이것을 실제 생활에 옮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계몽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조로는 <훈민가><오륜가>등이 창작되었으며 가사에도 못지 않은 교훈가사가 지어졌다. 유교적인 덕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교훈성이 너무 높다보니 문학적인 가치를 평가하기 어렵다. 즉 문학이 개성의 독특한 경험이나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면 윙의 교훈가사는 일반적인 유교의 교훈을 율문에 실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전기 가사의 유형

강호가사
이 시기에는 전기의 주제였던 전원생활을 노래한 강호가사가 계속 활발히 지어졌다. 그것은 시대가 안정되고 전기와 다른 생활의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호생활을 노래한 가사로는 이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이황의 <귀곡가> 정철의 <성산별곡> 이이의 <낙빈가><樂志歌> 차천로의 <강촌별곡> 등여러편이 있다.
강호가사는 가사문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본기 이후에도 계속 창작되었다. 그것은 가사 작가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 초기의 가사문학을 주도한 계층은 사대부였으며 그들의 생활은 사와 대부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사는 대체로 그 전개에 있어 일정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서사: 강호에 머무르는 취지
전개: 그들의 생활환경을 다음에 생활양식을 노래. 생활환경은 아름다운 강산에 자리를 잡은 뒤 초가삼간에 정자를 곁들이고 생활양상은 逍遙吟映(소요음영)과 취흥을 즐김을 노래했다.
결사: 강호에 살며 안빈낙도 하겠다는 뜻은 성은에 감사한다는 두 유형으로 나누어져있다.

형식: 초기 가사는 앞이 가볍고 뒤가 무거우며 후기 가사가 앞 뒤 균형을 같이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후 비중의 차이에서 오는 율조의 쾌감을 전기 작가들이 즐겼다면 후기는 그러한 비중의 차이보다 안정된 율조를 즐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율조의 균형은 드디어 매너리즘에 빠져 무리하게 억지로 4.4조의 정형을 이루는가하면 그것이 산문의 역할까지 대신하거나 아니면 4음보적인 율조보다 2음보인 율조를 형성하게 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가사 종행이 시조의 종장과 같은 작품이 이 시기에 많다. 이누  곧 가사의 정형을 유지하고 그것의 활용을 즐긴 예라 할 수 있다.

박인로의 가사 「태평사」와 「선상탄」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기 반침략 애국주의 문학에서는 「태평사」, 「선상탄」등 가사 작품들이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사는 15세기 민족시가 형식으로 출연한 이후 주로 자연 경치를 묘사하거나 봉건 유교 교리를 설교하는데 머물렀다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러 반침략 애국 투쟁을 형상하는 데로 주제영역을 확대하게 되었다. 지난 시기 자연 풍경을 노래하면서 현실도피 사상을 표현하거나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그리는데 치중하던 가사가 반침략 투쟁과 애국주의적 사상 감정을 묘사하는데로 형상의 폭을 넓히게 된 것은 이 시기 반침략 애국주의 문학의 왕성한 발전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례의 하나가 된다.
시인 박인로에 의한 「태평사」와 「선상탄」의 창작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기의 반침략 애국주의 문학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가사문학의 주제 영역을 사회정치 생활에로 확장한 데서 의의를 가졌다.
박인로(1561∼1643)는 자를 덕옹이라고 하였고 호를 노계 또는 무하옹이라고 불렀다. (보통 노계로 많이 불리우고 있다) 박인로는 경상동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 살림살이는 그리 넉넉한 편이 못되었다. 어려서부터 글읽기에 힘썼을 뿐 아니라 무술도 열심히 닦았다. 왜적의 대규모적인 침입으로 임진 조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전후에도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 통주사 등으로 군사 부문에 종사하였다.
박인로의 시적 재능은 벌써 1598년 우리 인민이 임진 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지은 가사「태평사」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1605년 통주사로서 부산에 부임할 때 가사 「선상탄」을 창작하였다.
가사「태평사」는 박인로의 창작 계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뿐 아니라 이 시기 반침략 애국주의 문학의 우수한 성과작의 하나에 속한다. 「태평사」는 임진 조국전쟁 과정을 그 시작으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시적 화폭으로 재현하면서 일본 침략자들을 쳐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 낸 기쁨과 감격,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지향과 염원을 격조 높이 노래하고 있다.
「태평사」는 그 구성에서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 부분에서는 하루 아침에 수많은 섬 오랑캐 무리들이 쳐들어 와 서울과 고을들이 승냥이 굴이 되었고 연기와 먼지 속에 해도 빛을 잃었으나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우리 군대의 영용한 투쟁에 의하여 육지와 바다에서 왜적을 쳐 무찌르고 승리를 이룩한 데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가사는 먼저 우리 나라가 동방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예로부터 예의를 숭상하고 문물이 발전하여 큰 나라들에 비길 수 있다는 민족적 긍지를 노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가사는 바로 이러한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왜적들을 쳐부신 우리 나라 군대의 투쟁 모습을 격조 높이 노래하고 있다.

황조일석에 태풍이 다시 이니
용같은 장수와 구름 같은 용사들이
정기폐공하야 만 리에 이었으니
병성이 대진하야 산악을 띠어난닷
병방 어영대장은
선봉을 인도하야 적진에 돌격하니
질풍대우에 병력이 즈채난닷

이와 같이 가사는 수사학적 표현 수법들을 널리 받아들여 우리 나라 군대의 높은 사기와 씩씩한 모습을 두드러지게 그려내고 있다. 용 같은 장수와 구름 같은 용사들, 만 리에 뻗어 하늘을 덮은 깃발, 산악이 떠나갈 듯한 병사들의 고함 소리, 노한 비바람에 벼락이 치는 듯 적진으로 돌격하는 맹렬한 기세, 이 모든 시적 형상들은 조국 강토를 짓밟은 원수들을 쳐부시기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우리 나라 군대의 위용을 부각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가사의 뒷부분에서는 죽을 각오를 가지고 7년 동안을 분주하게 싸워 승리의 날을 보게 된 열광적인 환희에 대하여 노래하면서 나라가 오래도록 평온하고 백성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낭만적 지향을 표현하고 있다.

주병식과하고 세류영 돌아 들제
태평소 높은 소리에 고각이 섞였이니
수궁 깊은 곳의 어룡이 다우난닷
용기 언건하여 서풍에 비꼈이니
오색상운 일편이 반공에 떨어진닷
태평 모양이 더욱 하나 반가올사
양궁거시하고 개가를 아뤼오니
쟁창환성이 벽공에 얼해나다

가사의 전반부가 왜적들에 의하여 짓밟힌 조국의 처참한 관경, 외래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우리 나라 군대의 씩씩한 모습을 주로 묘사한 것으로 하여 격조가 높고 전투적 기백이 차 넘친다면 가사의 후반부는 전쟁 승리의 기쁨, 행복한 생활에 대한 희망 등을 주로 노래한 것인 만큼 명랑한 색조가 지배하고 낭만적 기백이 흘러 넘치고 있다.
가사는 이 후반 부분에서 나팔, 북, 피리 등 악기 소리를 높이 울리고 칼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의 기쁨을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에 대한 염원과 결부시켜 감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가사「태평사」는 왜적을 반대하는 전쟁에서의 승리, 원수를 쳐 물리치고 나라를 지킨 기쁨, 나라의 평온과 안정된 생활에 대한 열망 등을 왕의 '은덕', '혜택'과 연결시키면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을 설교하고 있는 제한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시적 묘사에서 필체가 웅건하고 운율이 활달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문 투의 언어 표현을 많이 사용하여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부족한 점도 가지고 있다.
가사「선상탄」은 늙과 병든 몸으로 조국 방위에 나선 서정적 주인공의 심리적 체험을 통하여 반침략 애국주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늙고 병든 몸을 주사로 보내실새
을사 삼하에 진동영 나려오니
관방종지에 병이 깊다 앉았이랴
일장검 비껴 차고 병선에 구테 올라
여기신목하야 대마도를 굽어보니
바람 쫓인 황운은 원근에 쌓여 있고
아득한 창파난 긴 하날과 한 빛일세

이렇게 시작되는 가사「선상탄」은 배의 발명과 왜족의 기원에 대한 서정적 주인공의 생각과 느낌을 중심에 놓고 시의 머리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조국을 굳건히 지키려는 결의를 뜨겁게 노래하고 있다.
간악한 원수들의 침략을 막고 조국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하는 일념을 지닌 서정적 주인공은 먼저 배가 없다면 어느 오랑캐들이 풍파 만리 밖에 있는 이 나라를 엿보겠는가고 하면서 배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 옛사람에 대하여 부질없는 원망도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배가 없으면 좋은 경치를 보고 흥을 돋굴 수도 없을 것이고 부평초 같은 어부의 생애를 의지할 데도 없었을 것이라고 다시 고쳐 생각하고 오히려 배를 만든 것이 지극히 묘한 일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서정적 주인공은 옛날 전설에 전해 오는 대로 장생불사약을 구하겠다고 동남동녀를 태워 보내 왜족이 되게 하였다는 중국 진시왕의 잘못에 대하여 원망하기도 한다.
가사는 바로 옛 전설과 관련되어 있는 이러한 사연들을 시적으로 엮어나가면서 서정적 주인공이 나라의 안전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걱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사의 첫머리에서 형상된 것처럼 비록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긴 칼을 비껴차고 병선에 올라 불길이 이는 두 눈으로 일본땅 대마도를 바라보는 서정적 주인공의 형상은 그의 애국적 충성심과 원수에 대한 적개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 서정적 주인공은 왜적의 노략질에 통분함을 금치 못해 하면서 몸은 비록 늙었을 망정 조국을 걱정하는 마음은 한시도 잊을 수 없고 의기가 받치는 씩씩한 기운은 늙을수록 더하다고 격조높이 노래하고 있다.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여 원수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슴 들먹이는 서정적 주인공의 기상은 손발이 갖추어 있고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어찌 좀도적을 두려워 할 것인가 하면서 '비선에 달려들어 선봉을 짓치면 구시월 삭풍에 낙엽같이 헤치리라'고 격조 높이 노래하고 있는 데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선상탄」도 역시 「태평사」와 마찬가지로 가을달과 봄바람에 '태평세월'을 누리고자 한다는 것을 노래 부르면서 이것을 왕의 '성덕'과 결부시키고 있으며 옛날에 있었던 '이상 왕국'에 대한 지향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 박인로의 가사「태평사」와 「선상탄」은 일련의 본질적인 사상적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 조국전쟁 당시 일본 침략자들을 쳐 물리친 우리 나라 군대의 씩씩한 모습을 생동하게 재현하고 나라의 안전과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지향을 뚜렷이 표현한 점에서 이 시기 반침략 애국주의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누항사>

박인로는 통주사의 직무에서 해임된 후 고향에 돌아와서 가난하게 살면서 시가 창작에 힘을 넣었다.
가사「누항사」는 시인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살고 있을 때의 생활 체험을 읇은 시이다.

어리고 우활할산 이내 위에 더는 없다
길흉화복을 하날에 부쳐 두고
누항 깊은 곳에 초막을 지어 두고
풍조우석에 석은 짚이 섶이 되야
서홉 밥 닷홉 죽에 연기도 하도할샤
설 데인 숭늉에 빈 배속일 뿐이로다.

가사는 시골 구석의 초막집에서 끼니조차 변변히 하여 이어 가지 못하며 밭갈이를 할래야 소를 구할 길 없는 서정적 주인공의 생활 처지 심리적 체험에 대한 시적 묘사를 통하여 임진 조국전쟁 이후 시기 인민들의 어려운 생활 형편을 예술적으로 재현하였다.
가사「누항사」는 당시 인민들의 가난한 생활 형편을 비교적 진실하게 그려내면서도 그것을 타개할 방책을 제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술밥과 한모금 물이 족하다고 하면서 당대 현실을 '태평천하'라고 묘사하고 유교적인 '삼강오륜'을 설교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시인은 당시 반동적인 통치배들에게 불만을 가졌고 가난한 인민들에게 일정한 동정을 표시하였으나 이러한 세상에서 '옳게'사는 길은 어지러운 사회 현실에서 물러나 봉건적 유교교리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고 그릇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가사「영남가」,「노계가」를 비롯한 그의 시 작품들에 봉건관료의 '어진 정치'에 의하여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대한 지향과 현실도피 사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사상적 제한성으로부터 흘러 나온 것이다.
박인로는 가사 작품들 뿐 아니라 60여 수의 시조들와 많은 한자시들도 지었다. 그의 시조들과 한자시들은 대부분 봉건 유교적인 도덕 관념을 설교하였거나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은거생활을 읊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일부 시조와 한자시 작품들에는 '깨끗하고', '대바르게'살아 가려는 시인의 심정이 표현되고 있으며 당시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 처지와 조국 산천의 아름다운 풍경이 반영되어 있다.
박인로의 시가 작품들은 1800년에 3권 2책으로 간행된 「노계집」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박노계의 문학사적인 위치

전기가사와 후기가사를 잇는 과도기적인 위치사대부의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으며 안빈낙도하는 심회와 생활상을 읊은 작품이다. 사대부의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를 직시하고, 현실 생활의 빈궁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조선 전기의 가사가 보여 주었던 자연 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가사는 자연 속에서 안분지족하는 삶이 주내용이나 <누항사>는 거기에다 현실 세계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한문어구를 상징적으로 쓰면서도, 일상 언어를 대폭 허용하여 구체적이고도 절실하게 묘사함으로써 가사 문학에 현실 인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형식적인 면에서 비정격이 많이 드러난다.

노계 가사에 대한 평가

노계의 가사는 열정과 자구의 세련미에 있어서 송강에게 일보를 양보한다 하겠거니와 특히 그 시가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한자나 고사 성어, 전고가 너무 많이 사용된 단점이 있으나, 수사나 조어의 묘는 송강 가사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점이 다분히 보이며, 더욱이 초기의 작품은 풍부한 어휘에 그 필치가 웅렬하여, 무인다운 기상이 가득차 있으며, 신선미와 기백이 잘 드러나 있다. 시가 문학사상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가인으로 꼽힌다.
노계의 가사로는 <태평사>·<사제곡>·<누항사>·<선상탄>·<독락당>·<영남가>·<노계가>등이 있고 이들은 「노계집」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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