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민수기 14 : 1 - 10
오래전에 부산에서 목회를 하면서 공부를 더 하고자 서울을 2년을 다닌 일이 있습니다. 약 200여명의 학생들 대부분이 수도권을 사는 분이였습니다. 부산 목사님들도 한 두분이 있었지만 모르는 분들이였습니다. 강의실 한쪽에 자리잡고 강의를 듣고 마치면 시간에 쫓겨 부산에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학생회를 하면서 저에게 ‘졸업 추진위원장’이라는 책임을 맡겨주는 것입니다.
학생회장을 서울분이 맡았지만 별로 신임을 받지 못해서 규정에도 없는 ‘졸업 추진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저에게 맡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도 후에도 없는 졸업 추진 위원이 되었습니다.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무거운 직책을 만들어 맡겨주었을 때 매우 당황했습니다.
졸업추진위원장을 맡고 먼저 미국 연수를 가는 것을 추진하였습니다. 학생들 가운데는 미국을 몇 번씩 다녀 온 분들도 있었지만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제가 마치 몇 번 다녀온 사람처럼 준비하여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연수도 성공적으로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졸업여행을 울릉도로 갔습니다. 마침 울릉교회에 사택이 비어서 먹고 자며 큰 부담없이 여행을 잘 마쳤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서울에서 목회하는 분들을 크게 보았고 나는 그들 앞에 작은 존재로 느낀 것입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목사로만 알았는데 학생들이 졸업추진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겨 주었을 때 열심히 노력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바란 광야까지 왔습니다. 요단 건너 멀리 가나안 땅이 보입니다. 모세는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 살 가나안 땅이 좋은지 나쁜지,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고, 돌아올 때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13:17-20).
그래서 열두 정탐꾼은 가나안을 자세히 살펴보고 포도송이 하나를 두 사람이 메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땅은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데 이것이 그 땅의 과일이라’고 했습니다.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여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하며 악평을 하였습니다.
악평을 듣고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함께 갔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했습니다(13:30). 그러나 열명의 정탐꾼들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13:32,33).
특별히 ‘우리는 메뚜기 같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자기들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13:33)고 한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사실은 아낙 자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크게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키가 크기 때문에 마치 그 앞에 자기들은 메뚜기 같이 보았을 뿐입니다. 이것을 ‘메뚜기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메뚜기 자화상’은 자기를 메뚜기 같이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급 자가용 앞에 스스로 작아집니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대형 자가용을 타려고 합니다. 명품 앞에 스스로 작아지는 것입니다. 큰 것 앞에 주눅이 들어 자신이 스스로 나는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특정 상표의 옷이나 운동화에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옷을 입지 않으면 왕따를 당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그런 옷을 입으려고 한답니다. 남들이 입고 다니는 것을 강제로 빼앗고 헌 옷과 헌 운동화를 준다고 합니다. 150-240만원하는 외제 유모차가 유행이랍니다. 그래서 사기꾼이 반값에 판다고 인터넷 쇼핑몰에 광고를 하니까 불과 몇일만에 수억원이 입금되었다고 합니다. 반값으로 사서라도 메뚜기 자화상이 되지 않으려다가 사기 당한 것입니다.
서울에 어느 교회에 여 직원이 매우 소극적이고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두 주간을 휴가를 다녀온 후에 사람이 완전히 180도 달라졌답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우울적이던 사람이 진취적이고 밝고 명랑해 진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돌리던 사람이 쌩긋 웃으며 명랑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상하게 여겨 휴가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여직원이 절대 비밀인데 목사님께만 말한다고 하면서 ‘코 수술을 하였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코가 잘못 생겨 지금까지는 열등감에 빠졌는데 이제 코가 잘 생겼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의 코를 자세히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코가 바꾸어진 게 없더랍니다. 코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메뚜기 자화상은 겸손이 아닙니다. 큰 교회 교인들 앞에 작은 시골교회 교인들은 작아집니다. 그런데 큰 교회 교인들이라고 믿음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작은 교회 성도들이 더 좋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경남노회에 많은 교회가 있어도 아직 교단에 재산 등록도 하지 않은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경남노회에서 제1호로 가입했습니다.
‘메뚜기 자화상’은 자신도 부정적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열정탐꾼들의 악평을 듣고 낙담하여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2,3)고 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메뚜기 자화상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믿음을 떨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밥)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보호자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9),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13:30)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눈으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열 정탐꾼들은 아낙자손이 키가 좀 크다고 해서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네피림’은 노아 시대 때부터 존재하였습니다(창6:4).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에게서 보호자가 떠난 오합지졸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보호자가 떠났고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9).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보는 것은 싸우기도 전에 패하지만 믿음으로 눈으로 보는 것은 싸우기도 전에 이깁니다.
개구리가 뱀이 나타나면 공기주머니에 바람을 넣어 부풀려서 크게 보이게 하면 뱀이 겁을 먹고 도망갑니다. 동물들의 세계는 자신을 크게 보여서 싸우기 전에 겁을 줍니다. 하마들이 싸울 때 입을 크게 벌리는 놈이 이긴다고 합니다.
‘그들은 보호자가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우리의 신앙으로 삼아야 합니다(9). 열명의 정탐꾼들은 키가 큰 아낙자손들 앞에 스스로 메뚜기 같이 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에게는 보호자도 없는 자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웃은 잘 살아도 불행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낙 자손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갈렙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압니다. 메뚜기에 불과할 정도의 열악한 백성들이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백성입니까? 여러분은 누굽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들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의 강포에서 빼 내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홍해를 갈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신 것과 뒤따라오는 애굽의 군사를 홍해에 몰사 시켰던 것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와 시원하게 물을 마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 먹고 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낙자손이라 할지라도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낙자손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라”고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낙자손을 두렵지 않게 된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메뚜기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열명의 정탐꾼들과 두명의 정탐꾼들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과 기뻐하시지 않는 것으로 그들이 우리의 먹이가 될 수 있고, 우리가 그들 앞에 메뚜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메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아니면 기뻐하지 않으시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배와 말씀 순종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와 말씀 순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여러분도 메뚜기 같이 됩니다. 메뚜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예배와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거역하지 말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그 어떤 것이라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그것들이 우리의 먹이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먹(밥)이라’는 말은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의 기죽이는 네피림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 죽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 앞에 작아 질수 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작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스스로 작아지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추악한 죄악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들에게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돌보아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계속하여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나를 두렵게 하는 그것들이 나의 먹이가 됩니다.
이 사건이 이정도로 끝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지켜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11)고 하시며 악평하는 그들과 원망하던 백성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40일동안 정탐한 사십일을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사십년간을 광야를 돌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게하였습니다. 원망하고 악평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잘못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원망과 악평은 자신을 불행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크게 보이는 것 앞에 메뚜기가 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악평을 하지 맙시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메뚜기 같은 무능력한 자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성도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여러분을 두렵게 하고 기를 꺾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여러분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이 믿음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셨습니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