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태복음 16 : 24 - 28
어느 여집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니 힘들고, 정직하게 살려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주여 너무 힘듭니다. 내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다.’ 울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꿈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갑기도 했지만 예수님께 한 마디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보이지 않습니까? 부탁입니다만 좀 가볍게 짤라 주세요.’라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그러지’ 하시며 십자가를 짤라 주었습니다. 그래도 무거운 것 같아서 ‘좀 더 짤라 주세요’라고 했더니 또 짤라 주시더랍니다. 이제 십자가는 아주 가벼워 지고 갈 만했습니다.
한참 가다가 요단강을 건너는 데 많은 성도들이 자기가 지고 온 십자가를 걸치고 모두 요단강을 건너가는 데, 여집사는 자기 십자가는 짧아서 요단강을 걸칠 수가 없어 요단강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엉엉 울다가 꿈을 깼다고 합니다.
본문에 가장 심오한 기독교의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 했습니다. 베드로의 귀한 고백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한 제자들에게 비로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21)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향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諫)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하여’란 ‘꾸짖다’ 뜻 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어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있는데 절대로 예수님이 잡혀 죽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고맙다. 그래 너희들이 있어서 든든하구나.’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하시며 크게 꾸짖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심오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호되게 책망하신 후, 제자됨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세 가지 측면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자기를 부인하고,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셋째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자기 부인’은 육신의 타락한 본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는 것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 ‘내가 지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라고 하면 고통, 괴로움, 질병, 슬픔 이러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업이 어려우면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고 싶지 않으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을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는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능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무지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잡혀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것을 결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도 조용히 다녔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무리가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환영을 받으며 들어 가셨습니다. 조용하던 예루살렘 성안에 ‘호산나’ 찬송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귀에도 들렸습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지만 않았더래도 십자가는 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도 조용히 다니셨더래도 잡히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 엎고 채찍으로 매매하는 사람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며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고 하며 무서운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러지만 않아도 예수님은 잡히지도 않을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므로 해서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듣고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죽이꼬 하며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신앙고백서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시고’라고 합니다만 사실상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고자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행정상 책임이 있어서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장본인이 되었지만 사실은 가야바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정면 충돌하셨으니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지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무능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무리들이 모욕하기를 ‘나병 환자도 고치고 중풍 병자도 고치고 남을 구하였으니 자기는 구할 수 없더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하며 희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처럼, 듣지 못한 것처럼 참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피할 수 없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부득불 마지못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자원적으로 선택적으로 당한 고난입니다.
속 썩이는 자녀를 보고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사업이 어려운 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병들어 아픈 것을 주께서 내게 십자가를 지워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자기 십자가에 대한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어쩔 수 없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2:11)고 하시며 순순히 잡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망가는 제자들을 보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버린 가룟 유다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시며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가 다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 입니다. 내 십자가는 내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내가 잘못해서, 아니면 내가 능력이 없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할 수 없어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 부득불 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 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십자가를 주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주셨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느끼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의미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 때 십자가는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지실 수 있었던 것은 죄인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함이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십자가를 지므로 많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의미를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히 십자가를 지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능해서, 내가 잘못해서 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에게 십자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속에 무한한 영광이요 축복이 되는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므로 해서 축복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십자가를 피하면 나도 망하고 다른 사람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장애아를 낳고 기르는 부모들을 봅니다. 다들 아들 딸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행복해 하는 데 어쩌다 나에게는 저런 장애아를 낳고 고생을 하느냐고 하며 한 없이 자신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어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을 때 자신을 희생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아를 정상아 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는 부모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형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저주가 될 수 없습니다.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의로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죄가 있어서 주어진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라고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는 죄가 많아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해서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주신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찬송가 339장에
‘내 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가겠네.
저 수정 같은 길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하겠네.
저 천사 소리 높여서 늘 찬송할 때에 그 좋은 노래 곡조가 참 아름답도다
그 면류관도 귀하고 부활도 귀하다 저 천사 내려 보내사 날 영접하겠네
여러분이 지신 십자가가 무겁습니까? 너무 힘듭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넘어졌습니까? 그래도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갑시다. ‘내 주님 지신 십자가 나도 지고 가리라’ 찬송하며 갑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조금만 참고 가면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올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 무한한 영광이 됩니다. 십자가는 신비가 있습니다. 27절 말씀을 봅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