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과 평안함
역대하 14:1-8
편안과 평안은 흡사하면서도 크게 다릅니다. 편안은 노력하지 않고 편리하게 사는 것이지만 평안은 마음의 안정을 의미합니다. 일을 많이 하고 피곤할 때 편안을 원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편하다고 해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편안함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평안할 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입니다.
노 전대통령께서 임기를 마치고 봉화 마을로 내려와서 환영하는 사람들 앞에 ‘야 좋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야 좋다’는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복잡한 국정에서 벗어나게 편안하게 된 것을 좋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좋다’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저는 모르기 해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최신식으로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안함은 있었지만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편안해도 평안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봅니다.
부모님들이 시골 오두막집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녀들이 논밭에서 일하고 불편한 옛날 집에 사는 부모님을 아파트로 편안하게 모시고자 해도 부모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편안한 아파트 보다 시골 오두막집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지난날 보다 매우 편안해졌습니다. 어릴 때와 비교하면 아주 편리한 세상입니다. 살기가 좋아지고 편하다고 해서옛날 보다 평안하냐는 것입니다. 편안하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많고 자살을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살펴보니까 ‘편안’, ‘편안함’이라는 말씀은 찾아 볼 수 없지만 ‘평안’, ‘평안함’이란 말씀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되지만 ‘편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6), “주께서 우리에게 ... 평안을 주셨느니라”(7)는 말씀을 보면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안의 복은 하나님이 주실 때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아비야가 유다 왕으로 있는 동안에서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비야가 죽고 아들 아사가 유다 왕이 되므로 “그의 땅이 십년동안 평안하”였습니다(1).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평안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평안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아사가 어떻게 해서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까?
아사는 왕이 되고 제일 먼저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었습니다(2,3). 평안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방신의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아세라 목상을 찍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왕의 모친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모친이 만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다는 것입니다(왕상15:13). 이것은 아사의 종교 개혁의 의지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합니다.
모친이라도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겼기 때문에 태후의 위를 폐한 것입니다. 모친이라도 왕궁에서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사에게 있어서 대단한 믿음이요 용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귀신은 평안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유다에 평안이 없었던 것은 이방신과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므로 해서 평안이 없었습니다. 평안의 반대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아사가 왕이 되어 하나님 보시에게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신을 섬기던 제단을 없이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상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기는 모친까지도 왕궁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고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였습니다(4).
이것은 아사의 종교개혁이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던 백성을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율법과 규례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평안함을 얻었습니다’(5).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에 평안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것이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은 결코 평안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사방의 평안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사렛 동네에 마리아에게 천사가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을 때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하며 매우 당황하였을 때 천사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때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남자도 알지 못한 마리아에게 잉태가 되었다고 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그 마음이 불안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하나님은 평안의 복을 주시므로 조금도 불안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충격적인 일을 당하였을 때 매우 불안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면 불안하기보다 오히려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4:8)고 다윗은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평안의 복을 주실 때 세상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평안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사는 하나님으로부터 평안의 복을 받아 누리므로 예루살렘은 평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아사는 어떻게 누리며 살았습니까?
편안은 할일이 없는 삶이지만 평안은 할일이 많습니다. 아사는 평안하기 때문에 일없이 놀고, 먹고 자는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성읍을 건축하고(7), 큰 방패와 창을 잡는 큰 용사들을 훈련시겼습니다(8). 일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다고 하면서 불평하는 말을 들어봅니다. 그러나 편안은 일이 없이지만 평안은 일이 많은 것입니다. 쉴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하는 것은 평안의 복입니다. 일이 없어 편안하지만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병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평안할수록 할일이 많아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 교회에 편지를 할 때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안하다고 할 때, 안전하다고 하여 할일을 하지 않는 것은 불행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편안은 기도 하지 않는 삶이지만, 평안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평안하다고 해서 기도할 것도 없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편안함은 기도할 문제도 없는 삶이지만 평안함은 기도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평안하다고 해서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편안한 사람은 이겨낼 수 없지만 평안한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누리는 아사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군사와 삼백승의 병거를 거느리고 유다를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사의 군사 창 잡는자 삼십만과 활 당기는 자 이십팔만명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비교할 수 없는 적은 군사지만 구스의 백만 군사를 마주 나아가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아사는 하나님께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11)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기도의 말씀은 중요하게 여기고 배워야 합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구스의 많은 군대를 ‘사람’으로 그리고 아사의 적은 군대를 ‘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받은 백성을 ‘하나님으로’, ‘주라’고, 평안의 복을 누리는 백성을 치는 구스 사람을 ‘사람’으로 비유한 것은 아사의 놀라운 믿음에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대적할 수 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무리와 병거를 보았을 때 편안한 사람은 두려워하고 불안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평안의 복을 받은 아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평안입니다. 도저히 비교도 안되는 적은 숫자로 많은 군사를 대적하면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평안입니다.
평안의 복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른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충격적인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암 선고를 받았는데도 놀라지 않고 불안하게 여기지 않고 평안할 수 있는 평안, 놀라운 사건을 당했을 때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하게 여기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평안의 복을 받은 성도입니다.
아사는 믿음으로 기도를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구스 사람을 쳐서 패하게 하시므로 구수 사람은 한 사람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편안함은 물질적인 소득을 받을 수 없지만 평안함은 물질의 소득을 많이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스 사람을 치시고 아사를 도우시므로 심히 많은 물건을 노략하였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평안의 복을 받은 성도라고 해서 대적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적하는 자가 있어도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막아 주심으로 승리할 뿐 아니라 많은 물질의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평안의 복을 받은 성도에게는 불행한 일이 있어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더 유익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아사가 구스 사람을 치고 대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여호와께서 두렵게 하시므로 아사는 그랄 모든 성읍을 치고 매우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짐승과 양과 낙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14). 구스 사람뿐 아니라 그랄 모든 성읍 사람들까지도 치고 더 많은 물건과 짐승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사가 평안의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적과 싸워 승리하는 복을 받았고 또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고 이방신을 버리고 우상을 제하고 우상을 만드는 태후까지도 폐위시키는 아사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안을 주실 뿐 아니라 아무리 강한 대적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시고 풍족한 물질적인 복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안하므로 불행하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안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