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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샘

환난의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함

작성자허창수|작성시간13.09.15|조회수26 목록 댓글 0

환난의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한 것

고린도후서 4 : 16 - 18

사람들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매일 얼굴을 가꾸고 화장을 해서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을 완전히 띁어고쳐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은 겉모양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얼굴이 얽은 사람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마마라는 천연두로 인하여 얼굴에 물집이 생겨 흉터 자국이 남아 곰보가 된 것입니다.

한 두살 때 우두(牛痘)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일생을 얼굴에 흉터자국 때문에 흉한 얼굴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일찍 예방주사를 맞았다면 아름다운 얼굴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두 예방주사는 대부분 어깨에 맞습니다. 접종하면 발갛게 부어오르고 곪아 터지는 고통을 얼마동안 당하다 낫으면 흉터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어깨에 우두예방 주사 맞은 흉터가 제법 크게 있습니다. 어깨에 흉터를 남겼지만 그것으로 인해 일생을 아름다운 얼굴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현재의 아픔을 감수합니다. 지금은 잠시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를 통해 얻게 되는 내일의 기쁨과 영광이 훨씬 크기 때문에 힘들어도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보다 나은 내일의 영광과 기쁨에 대한 소망이 현재의 고통을 이길 힘과 용기를 더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세상을 살면서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하는 환난 역시 후일에 있을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능히 감당합니다. 후일에 영원한 영광이 없다면 누가 현재 환난을 당하겠습니까?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환난을 이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겉사람’과 ‘속사람’, ‘환난의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한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잠깐’과 ‘영원함’ 이러한 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기독교의 오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알게 된 바울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16). 이제 우리는 이 말씀에서 깊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16). ‘겉사람’은 병들고 쇠하여지는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육체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속사람’은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겉사람’은 고난과 수고로 인하여 쇠약해지지만 ‘속사람’은 마치 씨앗이 썩어짐으로 그 속에서 새 싹이 터 나오는 것 같이 날마다 생산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중생한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교재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은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사진은 과거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몇 년 전 보다 오늘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너무 빨리 늙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난 해와 금년이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지만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중생한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성도의 속사람은 날로 믿음으로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천국을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로 낡아지는 겉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더욱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겉사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늙음을 방지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늙지 않으려고 합니다. 얼굴에 주름살을 없애주는 화장품을 바릅니다. 좋다는 것은 다 먹고 해롭다는 것은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겉사람의 쇠하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세상적인 겉사람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적인 속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겉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사람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잠깐 보이는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잠깐 보이는 것을 위하다 영원한 것을 놓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은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으로 인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이루게 함’이란 말씀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으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광’이란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영광을 찬송합니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이런 찬송을 부릅니다. 내가 누릴 그 ‘영광’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계시록에 천국의 아름다움을 조금 말씀하셨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표현을 한다 해도 천국의 그 영광의 수억 만 분의 일도 안 됩니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너무 너무 좋다’, ‘엄청 좋다’는 말밖에는 말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영광이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받는 환난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17), 이 말씀에서 우리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 우리에게 이루게 하기 위해서 잠시 받는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은 ‘도리깨질 하다’, ‘키질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은 후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기 위해서 타작을 합니다. 환난은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키질을 해서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만 남는 것처럼 환난으로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를 가려내는 것입니다. 진짜 성도는 환난을 이겨내지만 가짜 성도는 환난을 이기지 못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 문제는 복음은 있는 데 환난은 없습니다. 환난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환난없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환난’은 ‘잠시’, ‘경한 것’이라고 하였고, ‘영광’은 ‘영원함’, ‘중함’이라고 했습니다. ‘환난’은 가볍고 일시적인 것인 반면, ‘영광’은 귀중하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크고 영원한 영광’은 아무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경한 것’을 잠시 받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조선 시대 때 어느 부자가 죄를 지어 관가에 잡혀가서 곤장 오십 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곤장 오십대를 맞으면 반죽음이 됩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돈을 주어 다른 사람이 대신 곤장을 맞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서 ‘평생 부자처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줄터니 내 대신 곤장을 맞겠느냐?’고 하니까 가난한 사람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곤장 몇 대를 맞고 잠깐 까무라치면 평생을 부자처럼 살 수 있기 때문에 곤장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했던 환난을 말했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였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였으며, 박해를 받았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였다’(8,9)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잡혀 수없는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너무 많이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바울의 제자들이 장사 지내려고 할 때 살아났습니다(행14:19). 옥에도 수없이 갇히기도 했습니다. 배고픔이나 추위에 떨어야 했던 일도 많았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같은 환난을 ‘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비교가 안되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난은 경한 것이고 영광은 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어떤 환난도 가볍게 여길 뿐입니다. 어떤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짐을 당하였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중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옥에 갇히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님들은 몇 년을 옥에 갇혀 순교하고 해방되어 출옥하였습니다. 전라도 지방에 여러 교회의 성도들은 집단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 성도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수용소에 갇혀 짐승만도 못한 생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환난을 바울은 ‘잠시’, ‘잠깐’, 그리고 ‘경한 것’, ‘가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장차 받을 영광이 너무나 크고 영원하기 때문에 환난은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암환자가 수술을 하기 위해 수술실로 실려 들어갈 때 마취주사를 맞습니다. 그때 의사가 환자를 보고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마시고 잠깐 주무시면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자는 잠이 듭니다. 환자가 잠들면 의사와 간호사들은 바쁘게 칼로 배를 가르고 창자를 들어내고 암덩어리를 찾아 도려내는 일을 합니다. 아주 긴장된 시간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꿰메고 수술을 마칩니다. 그러는 동안 벌써 몇 시간이 지나 환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환자가 잠든 사이에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로인해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아주 짧은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언재 여기까지 왔는지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써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종착역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 하였나이다”(시90:9)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고 야고보 사도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잠시 잠깐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합니다. 문제는 영원한 영광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보이는 잠깐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함이 더 중요합니다.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 주께서 다 지켜보십니다. 지켜보시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를 보내시든지 아니면 친히 찾아 오셔서 함께 고난에 참여하십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다니엘을 지켜 주셨습니다. 사자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사자의 품에 안겨 편히 잠을 잘 수 있도록 지켜 주셨습니다(단6:22).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던져 졌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신의 아들 같은 분이 불속에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단3:25). 환난을 당하는 성도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주께서 친히 불가운데까지 오셔서 불에 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을 뿐 아니라 불 탄 냄새도 없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영광중에 서 계시는 것(행7:55)을 본 스데반은 돌에 맞아도 아픈 것을 느끼기보다 그 영광을 바라보므로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지금도 환난을 당하는 성도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든지 아니면 주님 친히 찾아오셔서 도와주십니다.

지난 날 한국 교회는 일본의 신사참배 반대로 환난을 받았던 성도들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도들은 환난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환난을 받지 않으려고 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생활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되는 이 진리를 아시고 환난을 이겨내십시오. 그러면 잠시 후에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환난을 이기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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