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빌립보서 4 : 4 - 9
‘평안’, ‘평화’, ‘평강’이란 말은 같은 의미를 가졌지만 좀 더 세밀하게 따지면 ‘평안’은 근심과 걱정, 우환질고가 없는 삶이고, ‘평화’는 싸우는 원수와 화해를 해서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구원과 자유와 번영과 건강과 화목과 행복을 의미하는 완전한 축복입니다. ‘평안’도 ‘평화’도 축복이지만 ‘평강’이 더 큰 축복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평강”(7) “평강의 하나님”(9)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평강’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 그 어떤 존재도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평강의 원천입니다. 평강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함께 하신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19). ‘평강’은 ‘샬롬’으로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을 했습니다. ‘평강’은 정신적인 기쁨과 평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독은 결코 평강이 될 수 없으며, 가난도 평강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전한 관계가 평강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7절과 9절에서 ‘그리하면’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평강의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면’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대로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그리하면 ...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기뻐하는 덕을 세울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누구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이라는 말은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2:17)라고 말씀했습니다. ‘전제’란 제물로 바칠 양을 잡아 몸을 쪼개어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에 사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쪼개어 번제물이 되어 불에 사른다 해도 기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고 잡혀 매를 맞고 빌립보 옥에 갇혔을 때, 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며 찬미를 하였습니다(행16:25). 선을 베풀다가 빌립보 옥에 갇혀 손발에 착고로 든든히 채였지만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오묘한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 일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깊은 진리입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빌립보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은 일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선을 베풀다 잡혀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 옥에 갇혔지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기쁨이 없습니다. 먼저 나 자신부터 기쁨을 잃었습니다. 기쁨이 사라지면 슬퍼지고, 슬퍼지면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평강의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시지 않습니다. 기쁨을 회복합시다. 악한 사탄 마귀가 기쁨을 빼앗기 위해서 원망과 불평을 하도록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할 일이 있어도 기뻐합시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기뻐할 수 없지만 주안에서는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불만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주께서 원수 되었던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서 기뻐합시다. 성도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 ‘관용’이란 국어사전에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드리거나 용서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의 자세를 가질 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손해를 내가 갚으려고 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합당치 못합니다. 세상은 되로 받은 것을 말로 갚으려고 합니다. 손해를 본 것에 열배나 갚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너희 관용’이란 손해를 갚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절제를 통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관용’은 무엇보다도 미운 감정부터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관용 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불쌍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감정을 버리지 못하면 마음도 악해지고, 생각도 악해 집니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적인 감정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이미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므로 기회가 왔을 때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죄입니다. 미운 감정을 품고 있다면 절대로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미운 감정을 버리고 용서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관용의 가장 모범적인 사람은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거짓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갇히게 했던 보디발의 아내까지도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의 관용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기에 종이였고 죄수였지만 하나님의 평강이 요셉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셨습니다. 종이였을 때나, 죄수일 때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에게 형들은 원수들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미운 사람들입니까? 보디발의 아내는 거짓 누명을 씌워 옥에 갇힌 죄수가 되게 한 사악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죽이고 싶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조금도 형들을 미워했다거나 보디발의 아내를 죽이고 싶었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요셉의 관용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까이 하신다’는 말씀은 주께서 내가 받은 손해를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아실뿐 아니라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입은 손해를 내가 갚으려고 하면 주께서는 나를 떠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은혜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시는 은혜가 더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관용하여 주께서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아뢰라”(6),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아무것도’란 크고 작은 것의 그 어떤 염려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염려’는 기쁨의 적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의심이며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 안에서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염려의 해결책을 기도와 간구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일반적인 대화와 구하는 것입니다. ‘간구’는 일정한 요구 조건을 들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방법을 세상에서 찾는 것은 ‘염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찾을 때 ‘기도와 간구’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만사형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문제를 세상에서 해결하려는 것은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을 하려고 하는 것이 기도와 간구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염려는 패배로 나타나지만, 하나님께 문제를 내려놓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십니다.
기도와 간구의 조건은 ‘감사’ 입니다. 기도의 필수 조건이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 입니다. 만일 기도에 감사가 없다면 그 기도는 염려와 원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교인은 어려운 일을 당해서 기도할 때 원망하는 것을 들어 봅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는 기도는 합당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감사하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이상과 같이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하며,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와 간구를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기뻐하며 염려를 버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 주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평강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일시적이고 외적인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께로 와서 성도의 마음에 깃들이는 내적인 평화입니다.
‘마음’은 의지와 감정의 중심이며, ‘생각’은 판단이나 지혜의 출처입니다. ‘지키신다’는 말씀은 ‘망을 보다’, ‘호위하다’는 의미로 세상 염려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감정을 지키시고 생각의 판단과 지혜를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마음을 지키시고 생각을 지켜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는 비결을 말씀하시면서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이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8)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가져야 할 여러 덕목들 가운데 ‘무엇에든지’, ‘무슨’이라는 말을 덧붙여 언급을 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참되며’란 성도의 신실성의 덕목입니다. 무엇이든지 진실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란 신앙적이어야 하는 덕목입니다. ‘옳으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에든지 정결하며’는 도덕적으로 거룩하여 흠이 없는 상태입니다.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는 사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입니다.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는 고상한 행동을 함으로 좋은 평판을 얻는 것입니다.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것으로 칭찬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조건을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개인적인 접촉이나, 설교 또는 직접 본을 보임으로써 가르쳤던 것을 교인들에게 행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