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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샘

긍휼을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작성자허창수|작성시간16.07.17|조회수248 목록 댓글 0

긍휼을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마태복음 9 : 9 - 13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을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사람이 모르고 있을 때 가서 좀 배우라고 합니다. 당시 랍비들이 율법을 더 배워야 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가서 배우라고 했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당히 냉소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달했다고 자만하는 바리새인들을 비웃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이 의도하고 있는 핵심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이 없었던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마땅히 알고 행해야 할 긍휼을 모르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긍휼을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세금을 받고 있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리는 유대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해서 로마사람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사람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강제 징수하므로 유대사람들로부터 반민족주의자라는 지탄을 받아 왔습니다. 때문에 세리들은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쳐서 살았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세리를 이름 대신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세리는 공개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세리를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세리가 성전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있을 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세관에 앉아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받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 무엇을 보셨습니까?

 

속된 것 중에 속된 것이 있고, 거룩한 것 중에 거룩한 것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것 중에 속된 것이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가장 거룩한 장소에서, 가장 거룩한 직업으로 봉사하는 바리새인은 거룩한 것 같으나, 그 내면적으로는 가장 속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속된 것 중에 거룩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리 마태는 비록 죄인의 얼굴로 가장된 속된 직업과, 그 환경에 살아가고 있지마는, 인간됨이나 중심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속된 생활의 현장으로부터 마태를 끌어내어 열 두 제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쉽게 넘어갈 이야기가 아닙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로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하필이면 저런 사람을 제자로 삼아야 하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마태는 너무나 감격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엽니다. 그리고 많은 손님들을 초대했습니다. 그 손님들이 누구였습니까? 자신과 같은 죄인취급 받는 세리들입니다. 세리에게 친구는 세리밖에 더 있겠습니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예수님을 주된 손님으로 모신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을 불러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이 같은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창녀 출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세상이 다 아는 더러운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긍휼이 여기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거룩한 몸을 맨 먼저 보이신 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나 베드로에게 먼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보이시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외형이나 신분을 보시지 않습니다. 과거를 묻지도 않습니다. 깨끗한 진실과 믿음, 그 하나만을 보십니다.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리 마태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마태는 감격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잔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베푼 잔치에 예수님은 초대를 받으시고 흔쾌히 응하셨습니다. 마태의 초대를 받아서 그 집에 가셔서 잔치에 참여하신다는 것 자체가 마태에게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요 죄인 취급 받는 그 모두들에게 의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잔치에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에 가셔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신 것은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의를 주는 것입니다. 거룩한 역사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라는 좋지 않은 이름을 평생 달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아주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리의 집은 방문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세리에게는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음식도 함께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세리와의 관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인간성입니다.

 

긍휼이란 성경에서 그 어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긍휼불쌍히 여기다는 뜻이지만 원문에서 모태(母胎)’를 뜻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일정한 기간 자랍니다. 모태로부터 공급해주는 적당한 환경과 영양분으로 자랍니다. 어린 한 생명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긍휼은 환자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인데 그 어원은 창자입니다. 옛말에 창자라고 했습니다. ‘애 끊는다’, ‘애가 탄다라는 말을 하는데, ‘창자가 끊어질 듯 마음이 아프다는 의미입니다. 너무 불쌍해서 창자가 끊어질 듯 애가 탈 정도로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긍휼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위에서 밑으로 사랑하는 내리사랑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은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취급 받는 세리 마태를 긍휼히 여기심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였습니다.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긍휼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긍휼은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가 어떻고 가없습니다. 지난 과거에 어떠한 일도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무조건 아들로 맞아들인 것이 긍휼입니다. 과거에 어떠한 일도 이유가 될 수 없고, 이유가 되지 않는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은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세리 마태만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자신을 죽이는 자들과, 십자가 아래 자신을 조롱하고 저주하는 사람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까지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21: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긍휼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긍휼을 받은 베드로는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 바칠 뿐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는 달려가는 사울까지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9:4)’고 하시며 그를 붙드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을 불러주시고 사도로 삼아주심을 감사해서 사울은 일평생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베푼 잔치에 초대되어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취급 받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았다는 것을 바리새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대표적인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비애국적이며 부정직한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을 받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바리새인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12)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죄인들의 영혼을 치유하러 오신 자이므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영혼을 치유하실 의사인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영혼이 건강한 의인인 채했던 까닭에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스스로 의인인 채하는 자는 결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찾아가 주시고 그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만 의로운 체하는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을 위로하시는 자신의 긍휼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긍휼만 원하시고 제사는 원하시지 않는 말이 아닙니다. 긍휼과 제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사는 타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의 표시로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제사보다 앞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이 결여된 제사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긍휼을 원한다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의인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성결하다는 의미에서 의인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교만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하나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내가 긍휼히 여길 때 나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쌍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면 나 역시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나도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론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오시는 날에 모든 사람들이 심판주가 되시는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을 의미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깊은 진리를 모르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긍휼을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배워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최후 심판의 날에 심판주가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 심판을 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천국 백성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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