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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샘

세례 요한의 기쁨

작성자허창수|작성시간18.01.28|조회수392 목록 댓글 0

세례 요한의 기쁨

요한복음 3:22-30

 

웃을 일에 웃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웃지 않아야 할 일에 웃는 사람은 실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울어야 할 일에 우는 사람은 인격자입니다. 울지 않아야 할 일에 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뻐하며, 어떤 때에 기뻐하며, 얼마나 기뻐합니까? 대체로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 때에 그 성취감으로 기뻐합니다. 또한 칭찬을 들었을 때 기뻐합니다. 남이 알아주는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어떤 귀중한 물건을 삿을 때 판 사람에게 손해를 많이 보게 하고 삿을 때 기뻐합니다. 아니면 어떤 물건을 팔 때 속여서라도 비싸게 팔아 많은 유익을 보았다고 좋아 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올바른 기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기쁨을 즐기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그 시각에 다른 사람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내가 얻는 순간에 다른 사람은 잃었습니다. 내가 웃는 순간에 다른 사람은 울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세례 요한이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기쁨은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세례 요한의 기쁨은 질투나 시기가 없는 기쁨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시기심이 발동해 배가 아픈 사람이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실패를 내가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통쾌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말라기 이후 약 40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400년을 암흑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해성처럼 광야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3:2). 광야에서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시고 복음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으로 가서 세례를 베푸시고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을 따르는 무리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을 랍비여라고 부르며 깊은 존경심을 표현한 반면 예수는 은근히 무시하는 심중을 드러내 보인 것처럼 선생님과 함께 있던 자’,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 ‘...’, ‘그에게라고 말한 것은 요한의 제자들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무시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당시 헤롯 왕을 비롯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과 일반 유대인들까지도 예수를 무시했습니다. 하물며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라고 말한 바도 있습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400여 년 동안 말씀을 외치는 자가 없다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고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 요한은 정의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지만 아무도 왕을 책망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왕의 부정을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백성들이 두려워 죽이지를 못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요한복음1:19-21에 보면 당시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유명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니까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고 요한은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였고 또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을 때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1:21). 이것만 보아도 당시 세례 요한을 얼마나 존경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요한을 따르는 무리보다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고(1:40)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많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는 것에 대하여 요한의 제자들은 상당히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인간적인 면에서 예수보다는 요한이 더 존경을 받을 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투와 분노로 초조하게 묻는 제자들에게 요한은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의 선구자다운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하나님께로부터란 의미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가 세례를 베푸는 그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에 대하여 시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28)고 분명히 자신의 정체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1:23)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1:26,27)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역사하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대제사장 사가랴이며 어머니는 엘리사벳입니다(1:5).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도 잉태를 못하였습니다.

 

사가랴는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지낼 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너의 간구함을 들었노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말합니다. 그때 사가랴는 내가 늙었고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라고 말하니까 천사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1:19)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말을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말을 못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1:31)고 말해 줍니다. 마리아는 두려워하며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말하니까,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놓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36)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어 여섯 달이 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유대에 사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을 문안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문안을 들은 엘리사벳의 복중에 아이가 뛰놀았습니다. 이때 마리아의 복중에 이제 갓 잉태된 예수와 엘리사벳의 복중에 여섯 달이 된 요한이 복중 상봉을 하고 서로 기뻐하며 뛰어 놀았습니다(1:44).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이미 복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대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고, 예수는 나사렛에 사는 목수였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대로 잉태되었고, 이름도 잉태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지어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났고, 광야에서 외치는 것도 예수님보다 요한이 먼저 외쳤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베푸는 것도 요한이 먼저 베풀었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이신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원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요한이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요한의 세례를 고집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예로 사도행전에서도 에베소에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들 가운데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18:25)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자신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로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요한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유대의 혼인관습과 관련된 비유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며, 신랑은 그리스도이며, 신랑의 친구는 세례 요한 자신을 가리킵니다.

 

유대의 결혼 풍습에 있어서 신랑의 친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혼례 전에 중매자로 활동하고 신부를 신랑에게 안전하게 데려다 주며 결혼식에서는 신랑의 들러리가 되고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도 신랑의 친구가 합니다. 이러한 비유를 들어 세례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랑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마치 신랑의 종과 같은 태도로 세례 요한은 신랑되신 예수님을 철저하게 섬김으로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모이는 것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 기쁨은 시기나 질투가 없는 순수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참된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파서 불행하고 기분이 나빠서 불행한 것입니다.

 

한 수도사가 홀로 광야를 걸어가고 있을 때 마귀가 그 뒤를 따르면서 수도사를 시험 합니다.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동행하여 유혹하기도 하고, 돈과 명예를 주겠다고 속삭여도 봅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시험을 했지만 그 수도사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의연하게 갈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귀는 그 수도사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수도사여, 당신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도 의연하던 그 수도사의 안색이 별안간 싹 달라졌답니다. 동생이 자기보다 더 높은 주교가 되었다는 것을 시기와 질투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시험이 바로 시기와 질투입니다. 우리는 가장 고차원적인 마귀의 시험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를 죄 아닌 줄로 생각하는 데서부터 우리는 구제불능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불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에게 모여들던 사람들이 줄어들고 예수님께로 다 모인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몹시도 불만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마음속에는 전혀 시기와 질투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정체감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즐겁고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사라지듯 참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나타났으니 자신은 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은 그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세례 요한과 같은 기쁨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없는 기쁨이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세례 요한처럼 시기도 질투도 없는 기쁨이 충만한 자가 됩시다. 참된 행복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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