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우심
누가복음 19:40-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전에도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지만 이번 방문은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한 방문이셨습니다. 공생애를 마감하시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의 첫째 날(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전에 와는 달리 이번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제자 둘을 벳바게 마을로 보내시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평화의 왕임을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자 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을에 들어가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보고 풀 때에 그 임자가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기에 제자들은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했더니 임자는 더 이상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나귀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에게는 예수님이 앉으실 만한 안장이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자기의 겉옷을 나귀 새끼의 등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나귀 새끼 등위에 앉게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도 역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슥9:9).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길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어 펼쳐 놓았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기뻐하며 큰 소리로 ‘찬양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양하며 환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찬양은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날 밤에 하늘의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하였던 것과 같은 찬양이었습니다(눅2:14).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고 이제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에게 찬양하는 무리를 책망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40).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고 기뻐하는 것을 예수님은 마땅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나귀를 타고 많은 무리들의 찬양과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수많은 무리들의 축제 분위기와는 달리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몇 군데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요11:35).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비통히 여기시고 우셨습니다. 죽음이란 비통하고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은 자 앞에는 누구나 다 슬퍼하고 웁니다. 죽음이란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값으로 주어진 비통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우시며’란 원어는 단순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 통곡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소리를 내어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42)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안에 모여든 무리들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웅장한 성전과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 든 무리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성전에는 제물로 바치는 양들의 울음소리와 제사장들은 양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한 쪽에는 양과 비둘기를 사고 팔고 있었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 돈을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따르는 무리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울어야 할 일이 아니라 웃고 즐기며 축복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은 네 눈에 숨겨졌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의 성 예루살렘이 평화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명절 분위기였고 평화를 노래하였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 하시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리는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는 유대인의 정지적인 왕으로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참된 하나님의 평화를 포기한 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환영하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무리는 평화를 부르짖고 있었지만 평화가 아닌 멸망을 받아야만 하는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의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43,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 토둔을 쌓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대단히 튼튼했습니다. 그러나 대적들은 토둔을 쌓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토성을 쌓고 성을 포위하여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기근과 질병으로 죽게 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날이 아니라 저주와 멸망의 날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은 네 눈에 숨겨졌도다’ 라고 하시며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참된 평화의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와 여러분을 보시고 예수님은 우시지는 않으시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과연 어떤 평화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세상적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은 우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처럼 정치적인 평화의 왕으로 예수님을 찬송하는 무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평화의 왕’이란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허시고 화목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세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왕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 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신 두 번째 이유는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에 무서운 살육이 행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식들이 땅에 메어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살아남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황폐화된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은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튼튼한 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헤롯 왕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웅장한 성전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아직 완성도 되지 않았지만 제자들도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했습니다. 튼튼한 예루살렘 성과 웅장한 성전을 보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며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을 능욕하고 돌로 쳐 죽이는 강퍅한 범죄를 아무 거리낌 없이 행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예수님은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13:34) 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루살렘의 죄악과 멸망을 매우 애통하시고 우셨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모여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48). 예수님은 이렇게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과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성전 안에서 악을 도모하는 저들이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아타까워하시며 우셨습니다. 심판의 날에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살핌을 받는 날’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게 되는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어떤 저주도 받지 않도록 보살핌을 받게 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들이 당할 무서운 멸망을 생각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아무리 죄악이 가득찬 예루살렘이지만 갑자기 멸망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자들을 보내어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면 멸망을 면하게 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보살핌을 받는 날’이란 ‘권고 받는 날’(개혁성경)로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시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에 보내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능욕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심판의 날에 보살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보살핌을 받는 날에 보살핌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보살핌을 받는 날에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우십니다.
참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한다면 오늘도 예수님을 그를 보시고 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예수님은 우셨지만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은 우셨지만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토의 침략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전은 불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대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므로,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하므로 튼튼한 성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고 성전을 불타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참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심판의 날에 멸망을 받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읍시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보살핌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평화를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