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요한복음 21:19-2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9).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순교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말씀으로 늙어서 순교하기까지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의 뜻을 따르고 나아가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도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 말씀은 베드로 뿐 아니라 함께 한 제자들에게도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의 제자된 모든 성도들에게와 나아가서 오늘 나와 여러분들에게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 가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열심히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주님을 따랐으며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함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돌이켜 요한이 일어나 따르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요한 자신의 이름 대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20절에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누구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리기도 하지만 함께 음식을 먹을 때도 예수님의 무릎을 베고 비스듬히 눕기도 했던 것을 보아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사랑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다가 베드로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는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여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대신 ‘그가 사랑하시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 본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어 본 것은 본래 절친한 친구로서 늘 함께 있었던 제자였으므로 자신이 죽음이 순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요한의 죽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과 요한의 죽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비교하여 예수님께 질문 것은 합당치 못한 질문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부정으로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를 당한다면 요한도 자기와 같은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를 당한다면 요한도 같은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쭈어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주는 대신 그 같은 호기심을 버리고 오직 맡겨준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며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요한은 죽지 아니하겠다’고 말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그가 죽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하셨습니다(23).
그러나 베드로의 이와 같은 적절치 못한 질문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한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가 초대 교회에 급속도록 퍼져 나갔습니다. 더욱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다 순교를 하였지만 요한은 에베소에서 100세 가까이나 장수하고 있었으므로 초대 교회 당시 이 와전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 같은 오해는 심지어 300여년 후인 어거스틴의 시대에도 요한은 죽어 무덤 속에 묻혔지만, 에베소에 있는 요한의 무덤 위에 뿌려진 흙이 가볍게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있었고 그래서 요한은 무덤 속에서도 살아 숨을 쉬고 있다는 헛된 전설을 남길 만큼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 올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세상 끝 날까지 살아서 내가 오는 것을 볼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내가 올 때까지 요한이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내가 맡겨준 사명에 충실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이야 어떻게 살다가 죽든지 너는 상관하지 말고 네게 맡은 일에 충실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요한이고, 베드로 너는 네가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과 함께 부름 받고 제자로서 충성했다고 해서 죽음까지도 같은 순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자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저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앞날보다 다른 사람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저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네 맡은 일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신앙생활하며 같은 교회를 섬겼다고 해서 맡은 사명도 같을 수가 없고 죽음까지도 같은 모습으로 죽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함께 했던 친구가 순교를 했다고 나도 그와 같은 순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내가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순교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늙어서 조용히 자연사 하는 것도 순교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교단과 총회를 위하는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교회를 섬기는 것만이 성공하는 성도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교회를 말없이 섬기면 충성하는 것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큰일을 맡아서 성공적으로 하는 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큰일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맡은 작은 일이라도 말없이 충성하는 것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할 일이 있고, 요한이 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고, 요한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순교를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지만, 요한은 오랫동안 살아서 늙어 자연사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잡혀 아무도 살지 않은 험악한 밧모섬에 유배되어 밤에는 짐승들을 울음소리를 들으며 추위에 떨었고 낮에는 더위에 힘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밧모섬에서 고난당하는 요한에게 하늘문을 여시고 천국과 지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여 주신 것을 요한은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고 있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에는 세상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잘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심판 후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감히 베드로가 상상도 못했던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계시를 요한은 보았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순교가 아니라 자연사를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의 관계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특별한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올라가셨고(눅9:2),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릴 때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셨습니다(눅8:51).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 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함께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날 밤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른 제자들은 멀리 두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하시며 함께 기도하셨습니다(마26:38).
베드로와 요한은 어려서부터 죽마고우입니다. 갈릴리 벳세다라고 하는 작은 어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이고, 요한과 야고보가 형제로서 어려서부터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부모들이 고기 잡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 야고보 형제들은 동업자가 된 어부였습니다(눅5:10). 예수님으로부터 부름 받던 그날도 밤새워 수고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고 시몬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조금 떨어져 고기 잡는 요한의 형제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해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형제 야고보에게 ‘사람을 취하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서 마치 경쟁이나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잘 따르고 순종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누구보다도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먼저 무덤으로 달렸습니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무덤 안에는 베드로가 들어갔습니다(요20: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까지 찾아 오셨지만 제자들은 예수신줄 알지 못했지만 요한이 먼저 주님이신 줄 알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니까 베드로는 즉시 바다에 뛰어 내려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요한이 먼저 예수신줄 알았지만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르고 섬겼던 제자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경쟁이나 하듯이 예수님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이러한 경쟁은 시기 질투하는 경쟁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더 잘 섬기고자 하는 선의의 경쟁이었습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서로 이기기 위해서 경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쟁은 상대자가 있어야 서로가 노력을 하게 되고 더욱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경쟁자가 없으면 발전이 없고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경쟁자와 선의의 경쟁을 하면 피차간에 신앙성장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와 요한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물었다는 것도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까지도 경쟁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외경에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 충성하다가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죽음도 어떻게 죽었는지 성경에는 없지만 외경에는 로마 황제 네로에 의해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죽음보다 더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베소로 돌아와서 계시록을 쓰고 100세를 가까이 하고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무덤은 아직도 에베소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고난을 당하고 순교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순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죽든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을 듣고 열심히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따르고 충성합시다. 그래서 주님 부르실 때에 어떻게 죽든 죽음으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