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는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9-13
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과 ‘그때’의 차이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아는 것이 희미하지만 ‘그때’는 온전히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불신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성도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아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아십니까? 오늘 본문 12절에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안다’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만큼 믿음도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1절에 ‘어린 아이’와 ‘장성한 사람’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아주 작은 것만 알게 되지만 믿음이 성장하면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됩니다.
언제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됩니까? “그때에는 ...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종말론적입니다. ‘그때’란 우리가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때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희미하게 알지만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에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오고가는 대부분의 항해하는 배들이 거쳐 가는 매우 발달된 지중해의 항구도시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아덴을 지나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는 무역이 발단된 도시이다 보니 각종 인종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도 매우 번성하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는 로마의 세속 문화가 왕성하여 우상 숭배가 극심하였고 특히 성도덕이 문란하므로 인간관계가 타산적이고 살벌했습니다.
이러한 기질의 고린도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린도인들은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세속적인 문화를 온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바울은 1년 반 만에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바울이 떠나자 고린도교회는 각종 오류와 범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내에서 파당이 형성되어 분열을 일삼게 되었고 하물며 성범죄가 극심했습니다. 성도 상호간에 소송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거룩한 성찬 예식마져도 무절제하게 실시하는 오류도 발생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즉시 디모데를 파송하면서 함께 보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이 보낸 편지에는 고린도 교회의 신앙적 잘못을 무섭게 책망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바르게 고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후서는 오늘의 교회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처리할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은사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구제를 하는 은사를 말하면서 이 모든 은사가 한시적이라고 했습니다. 9절과 10절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은사들은 부분적으로 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그 모든 은사도 폐하여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온전한 것’은 ‘성숙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10)는 온전하신 예수님이 오실 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그때’(12)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우리가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서로 볼 것입니다. 예수님과 얼굴을 대하여 볼 그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됩니다.
그때에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모든 은사는 다 폐하여집니다. “폐하여지다”란 ‘쓸모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은사들이 아무리 크고 위대한 능력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때에는 쓸모없이 폐하여 집니다. 그래서 8절에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예언이나 방언은 교회 안에서 매우 필요한 은사입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을 풀어서 가르치는 말씀의 은사요, 방언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의 은사입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예언과 방언은 가장 큰 은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는 다 폐하여지고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만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한다(8)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은사만은 영원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보다 구체적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의 경우를 예를 들어 말씀하였습니다. 어린 아이 시절에는 미숙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고 깨닫는 데 있어서 서툴며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사물과 사리를 제대로 알고 판단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성장하여 성화되고 드디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세상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때에 가졌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어른답게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은 마치 어린 아이 같이 불완전하지만 천국에 들어가서는 온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아는 것입니다. 유리에 수은을 입혀 만든 거울은 아주 밝고 정확합니다. 그러나 당시 거울은 구리나 금속판을 갈고 닦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선명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 좋은 성도라도 예수님을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아는 것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희미하게 아는 믿음이지만 우리가 구원 받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여러분이 수십 년을 교회에 다니고 말씀을 듣고 배웠지만 천국을 얼마나 압니까? 천국의 일부분을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희미하게 아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되지 못해도 희미한 믿음, 불완전한 믿음이지만 그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엄마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가 엄마를 얼마나 알고 자랍니까? 아주 작은 것을 알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3년이나 데리고 다니며 가르쳤습니다. 성난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기도 하고,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까지 하시며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가르쳤습니다. 하물며 자신이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얼마나 알았습니까?
3년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제자들도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았을 뿐입니다. 유대민족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리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하물며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1:6)라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충만함을 받은 후부터 제자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이 깨어지고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적인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느니라”(요일 4:7,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압니까?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알지만 그때에는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본문에서 놀라운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된다’는 말씀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주께서 나를 아는 것처럼 나도 주님처럼 온전하게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온전히 안다’는 말은 모르는 것이 없는 전지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주님처럼 온전하게 알게 되는 전지성이 회복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들을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창2:19). 나와 여러분이 범죄하기 전에 아담처럼 그때에는 모든 것을 아는 전지성이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희미하게 알지만 그때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때에는 주님처럼 온전히 아는 전지한자가 될 것입니다. 모던 것을 다 아는 자가 될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그때에 우리가 무엇을 제일 먼저 알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서로 마주 볼 때에 무엇보다도 내가 죄인임을 제일 먼저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입술에 발린 말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예수님의 얼굴과 내 얼굴을 마주대하여 볼 때 제일 먼저 내가 엄청난 더럽고 추악한 죄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숨겨진 죄까지도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잊어버렸던 죄까지도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속에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부족했던가를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맡은 직분에 불충성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가증스럽고 부족했던 것을 그때에는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예배에 충실치 못했던 것을 그때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가증스럽고 부족한 자신의 믿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볼 때에 예수님의 인자하심과 크고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멸시와 천대를 참으시고 십자가를 왜 지셨는지를 그때에는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죄없는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는지를 그때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미하게 알지만 그때에는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더러운 죄까지도 다 아시면서 조금도 나무라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보혈로 씻어 용서 해 주신 예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그때에는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찬송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지만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그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얼마나 크신가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를 그때에는 온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말로다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하나 그때에는 내가 온전히 알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