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골로새서 3 : 12 - 17
요즘 애완견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한 여학생이 좋아하는 애완견이 병들어 죽게 되니까 연탄을 피워놓고 ‘개와 함께 화장을 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개와 함께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를 동반자라고 한답니다. 개는 쓰다듬어주면 뒹굴며 재롱을 부립니다. 그러나 어쩌다 실수로 꼬리를 밟으면 ‘캥그랑’ 소리치며 주인이라도 물어버립니다. 꼬리가 밟혔을 때 반사적 작용으로 물러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해보고 반응합니다. 버스안에서 발이 밟혔을 때 즉시 화를 내는 것은 개(犬)과에 속한 사람입니다. 누가 어쩌다 내 발을 밟았는가를 먼저 봅니다. 차가 움직여서인지, 너무 복잡해서인지, 술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점잖은 신사인지, 예쁜 아가씨인지 보고 사정에 따라 반응합니다. 만약 힘이 쎈 사람이라면 밟혀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만한 사람이면 화를 내든지 하지만, 예쁜 아가씨라면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아니면 연세가 많은 할머님이라면 오히려 붙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개(犬)과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물론 아니되겠지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좀 되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면서 사람답지 못하고 개과에 가깝기 때문에 ‘사람 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2절에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는 개과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도 안될 뿐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15절 말씀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란 말은 ‘평강’의 주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참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고 평강의 주체’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강을 주십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15). 하나님이 평강을 위하여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불러 주신 목적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부가 내년부터는 모든 국민이 우울증 정기검진을 받도록 한다는 조선일보에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급증하므로 어린이와 청년소년들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건강검진을 받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매년 늘어나기 때문이랍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과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면 우울증이나 정신적인 고통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불평과 불만이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이기지 못할 감정이 폭발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부터 내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답지 못한 짐승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까? 가려운 곳을 글어주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내는 개와 같은 행동들이 자신도 모르게 돌출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비결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용서입니다.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불만’은 ‘혐의’, ‘비난’ 또는 ‘다툼’될 만한 일입니다. ‘용납(아네코마이)’은 자신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제하고 양보하는 것이며, ‘용서(카리조마이)’는 은혜를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이 비난 할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은혜를 베풀라는 뜻입니다.
‘용서’, 쉬운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대신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손해를 보인 사람에게 몇 값절로 손해를 보게 해야 속이 시원하다고 합니다. 내가 복수를 못하면 자식들에게라도 복수하게 합니다. 그것도 안되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는 꼭 할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 분을 내거나 복수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할 때 내 마음에 평강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므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 질수가 있습니다. 용서 없이는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용서를 못하기 때문에 불만이 항상 내 마음에 자리 잡고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13)라고 했습니다. 주께로부터 용서 받은 것같이 우리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시며 용서하셨던 그와 같은 용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성도는 용서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용서할 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대신 내가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은 내게 맡기고’(롬12:19) “너희는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롬12:1)고 하셨습니다. 용서 못 하면 과거도 빼앗기고 미래도 빼앗기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마음에 평강이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만으로 아직 부족합니다. 용서위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고 하셨습니다. 용서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4:8). 용서위에 사랑하는 것은 잘못한 모든 것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기독교의 미덕이며 총체요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소망보다 사랑이 더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른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전 13:13)고 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중요한 덕망이지만 사랑을 소유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케 하며,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지독하게 시키는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떻게나 며느리를 미워하고 구박하고 시집을 살리는지 며느리가 고달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을 찾아가서 자신의 시집살이가 너무 고달파 죽을 것 같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시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니까 ‘예 죽없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면 시어미가 죽을 것이라’고 하며 ‘매일 아침에 밤 세 톨을 맛있게 구워서 시어머님께 잡수라고 석달만 드리면 시어머니가 살이 쪄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죽기를 바라고 아침마다 밤을 구수하게 구워서 시어미께 드렸더니 시어미가 밤을 구워다 주는 며느리가 예뻐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예쁘다면서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다시 그 할머니에게 찾아가서 ‘시어머니가 죽으면 안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이긴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 중에 요셉에게서 용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 종살이를 했습니다. 악한 여인에게 누명을 둘러쓰고 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종살이를 하고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어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한 마디도 형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요셉의 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용납하며 용서하였습니다. 용납이란 형들이 나를 왜 팔았을까를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팔게 된 형들을 어떻게 이해를 하였습니까?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창45:5).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게 된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형들을 통해서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깨달았을 때 형들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을 언제 용서를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양식을 구하려 온 형들을 보니까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용서하였을까요? 그렇다면 형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형들을 미워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으로 알고 형들을 용서했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을 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39:2).
보디발의 종이 되었을 때 요셉에게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여호와의 평강이 요셉의 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고 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면서 ‘왜 내가 형들에게 팔려 애급으로 끌려가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것이며 그 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며 요셉의 마음을 평강으로 주장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형들을 미워하는 생각으로 애굽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과거를 잊지 못하면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손해를 보게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도록 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숨겨진 비밀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면서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고 하셨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면 감사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기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와 사랑을 하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16,17절 말씀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감사가 인색하면 아직도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거룩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16,17절에 ‘하고’, ‘하라’는 말씀이 여러 번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마음에 평강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여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