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야 네 자신을 고치라
누가복음 4:16-30
23절에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당시 유대 속담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가 콧물을 훌쩍거리고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면서 환자를 고치겠다고 했을 때 환자가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고 말하고 도망간다는 속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라신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신 의미가 무엇인가 알아야 합니다.
14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어디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셨는가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에는 생략했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나 혼례 집에서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시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오시는 길에 사마리아에 들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청함을 받고 이틀을 유하시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은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자라나신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16)란 어려서부터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키셨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장을 비롯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가버나움에서와 갈릴리 지방에서 행하신 일들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행하신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을 비롯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대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어서서 이사야 6:1,2을 찾아 읽고 성경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었습니다. ‘그 맡은 자’(20)는 회당에서 두루마리 성경을 보관하고 지키는 책임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앉아서 읽은 말씀을 풀어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의 중심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예수님 자신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났다는 눅3:22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성령이 임하시므로 메시야로 자격이 공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공적으로 감당할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 된 자를 자유’란 말은 죄의 세력에 포로 된 온 인류를 해방시키고 영적인 자유함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은 마치 토굴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이 빛이 없어 볼 수 없는 그들을 토굴에서 나오게 해서 눈을 뜨고 다시 보게 하는 말씀으로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눈먼 자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란 모든 죄의 세력에 눌러 있던 자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심으로 기쁨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란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은 안식년 주기에서 50년이 되는 해로서 제사장이 나팔을 불어 희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면 가난해서 팔았던 땅이 주인에게 돌아오고 종들이 해방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희년’은 종말론적 의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함에 이르게 하심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지심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즐거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설교였습니다. 설교는 구속사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을 때 회개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주목하여 들었습니다. 호기심과 기대감, 그리고 권위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끌리어 예수를 뚫어지게 주목하고 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고 말씀하심으로 이사야가 예언한 그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므로 이루어 졌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은 22절에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이중적인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아버지가 요셉이고 형제들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권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두가 놀라며 기이히 여겼습니다. 감동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말하므로 예수를 경멸히 여긴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인 네가 어찌하여 메시야가 되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말씀은 23절입니다. ‘너희가 ...네게 말하기를 ... 행하라 하리라’, ‘너희가 내게 말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나사렛 사람들이 하려고 한 그 말을 예수님이 아시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세렛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말했습니까?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로 받아들이지를 않으려고 ‘네가 메시야라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이적을 네 고향 여기 나사렛에서도 해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마치 병든 의사처럼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고 말했다는 말씀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네가 메시야라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이적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요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야로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아주 멋지게 눈이 번쩍 뜰 수 있도록 중풍병자를 고치고, 나병환자를 고치셨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그들은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믿음은 은사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안 믿겠다는 사람을 믿도록 하려고 이적을 해봐도 믿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매일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이적을 행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들은 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그게 올바른 믿음이지 이적을 보고야 믿겠다는 사람은 아무리 기이한 이적을 보아도 또 다른 이적을 요구하며 믿지 않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떡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 내리면 천사가 와서 붙들어 줄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뛰어 내리지 않았습니다. 돌로 떡으로 만들고,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 내려서 화끈하게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또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고 참아내기가 심이 어려운 시험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뛰어 내릴 수 없는 무능력한 자처럼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고 참는 자를 무능하게 보는 것은 참는 자에게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못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서도 참는 것입니다. 참다보면 무식한 자가 되고, 무능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도 하지 않고 행동도 참았는데, 무식하고 무능해서 못하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니 괴로운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은 무능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아니하고 참는 것은 사랑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능력이 많은데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신비한 사랑이요 능력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러하고, 진정한 참된 친구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기 어려운 비아냥과 비난을 들었지만 못 들은 척하시며 끝까지 참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말은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오늘도 기적을 보고야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을 보아도 믿을 사람이 아닙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고쳐만 주면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아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다가 그만 두길래 왜 교회에 안 나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만큼 다녀 줬으면 됐지요’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병든 의사처럼 경멸하는 나사렛 사람들을 보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엘리야가 완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하여 3년 반에 걸친 가뭄에도 오히려 이방사람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환영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아람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수용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사렛 사람들을 격분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은 확실히 보장받았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못하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제히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고 가서 밀쳐 낭떨어지에 떨어뜨리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셨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시니라”(30)는 말씀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권세가 있는 근엄한 예수님의 얼굴은 이성을 잃은 폭도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폭도로 변한 나사렛 사람들이 권세있는 메시야로 당당하게 무리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에게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무사히 그들 가운데를 지나 나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하고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고 말했던 나사렛 사람들과 같은 불행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마치 병든 의사와 같이 경멸히 여기고 배척하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 매우 불행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 모두 지금은 음부 불꽃 속에서 고통중에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자들이 아닐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의심할 바 없는 메시야 이십니다.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구세주 이십니다. 이적을 보고 믿으려고 하는 나사렛 사람들과 같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우리는 골고다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들음으로 믿는 자가 됩시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말씀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