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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샘

걸어가는 나무 같은 사람

작성자허창수|작성시간21.10.17|조회수150 목록 댓글 0

걸어가는 나무 같은 사람

마가복음 8:22-26 93, 374, 285, 288, 315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복음서에 다섯 차례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에 소개된 벳세다의 맹인은 유일하게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말씀으로, 혹은 손으로 만져 단번에 고쳐주셨던 것과는 달리 벳새다의 맹인에게는 두 번이나 안수하여 고쳐주신 것이 특이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심으로써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시킨 후에, 다시 안수하심으로써 완전히 고쳐주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8장 전체를 아울러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를 거두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8:1-10) 이러한 것을 보고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에게 표적을 다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8:11-12)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시는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 그런데 제자들은 ‘누룩’이란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떡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떡이 없음을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고 실망적인 책망을 하셨습니다.

 

표적을 보았음에도 또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만 탄식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들이 구하는 표적을 다시 보여주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이적을 통해서 그들의 잘 못을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이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라고 묻자 제자들은 ‘열둘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라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오병이어의 이적에서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를 거둔 것과 칠병이어의 이적에서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다는 말씀에서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라는 말씀을 비교하면 ‘바구니’는 작은 것이고 ‘광주리’는 넓고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이적을 베풀었던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떡’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 ‘아직도 깨닫지 못하냐’(21)고 거듭 책망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배고픈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도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능력으로 이적을 베푸시므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자들이 깨닫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가를 제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원했지만, 제자들은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두 마리, 한 어린아이가 먹어야 할 작은 도시락으로 장정 남자만 오천 명(남녀노소를 다 하면 일만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은 것은 엄청난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표적을 베푸신 이가 누구이신가를 깨달아 알아야 했음에도 함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다시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이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으로부터 2년 이상을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하고 깨닫고 알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음으로 예수님께서 크게 실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이 몇 바구니를 거두었느냐고 물었고 제자들은 일곱 바구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묻고 대답하게 하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저 분이 누구시기에 이러한 이적을 배푸시는가’를 생각하고 깨닫고 알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성도들도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먹여 주신 이적만을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의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작은 것을 바치고 많은 것을 받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감사헌금 봉투를 들고 ‘오병이어와 같은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축복 기도하면 성도들은 큰 소리로 ‘아멘’ 합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마치 오병이어와 같은 엄청난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떡’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두 번이나 거듭 책망하셨습니다.(17,21)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을 베푸시고 떡을 배부르게 먹은 오천 명과 사천 명, 그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뽑아 세운 열두제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체험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한 것을 보시고 낙심이 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다시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데리고 벳세다로 가셨습니다. 벳세다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와 고쳐주실 것을 구했습니다.(22) 그래서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다른 맹인들은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벳세다의 맹인은 사람들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맹인들을 고칠 때와는 다르게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셨습니다.(23)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했을 때 맹인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맹인은 생전 처음으로 사람의 형체를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무가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맹인의 눈에 보인 사람들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제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만 있었기 때문에 맹인이 본 그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맹인이 말한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 제자들의 당시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인의 눈에 제자들이 마치 걸어 가는 나무처럼 보이도록 하시므로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걸어가는 나무처럼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는 오병이어의 이적과 칠병이어의 이적을 눈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많은 이적을 베푸시는 실체를 직접 보고 체험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마음이 둔한 상태가 곧 나무 같은 사람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걸어가는 나무 같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도 못한다’(1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단계를 거쳐서 맹인의 눈을 뜨도록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맹인의 눈을 희미하게 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수를 해서 두 번씩 해서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다른 복음서에 기록이 없는 이 사건을 마가가 기록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 ‘나무 같은 것이 걸어 가는 사람’과 같은 영적인 맹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보고서도 알지 못하고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도 기억도 못하는 자들이 나무와 같은 것이 걸어 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영적인 맹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에 다시 안수하셨을 때 맹인의 눈은 완전히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이 밝히 보는지라”,(2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목하여 보았다’는 말은 앞서 본 나무 같은 사람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제자들을 다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보았다는 말입니다. 아까는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으로 보이던 사람들을 주목하여 보니까 밝히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두 차례에 걸쳐 고쳐주시므로 제자들의 깨닫지 못한 영적 상태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맹인의 눈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아사랴로 가시는 길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한 것은 제자들 모두를 대표로 한 대답으로 제자들 모두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자로부터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를 사람들로부터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그리고 제자들에게 비로소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과 사흘 만에 살아나실(31) 구속사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더 이상 제자들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안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살아나실 수가 있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올리워져,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주는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한 반석 위에 세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나무 같은 것이 걸어 가는 영적 맹인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나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을 제일 듣고 싶어하실 것 같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시니이다’라는 말씀을 제일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합시다. 우리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도록 합시다. 주님이 세운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여 그들과 함께 주님 계신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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