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작은 자들
마태복음 8 : 23 -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는 위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6) 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해 주셨습니다.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라고, 누가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마태는 믿음이 크고 작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믿음이 있고 없는 것으로 표현을 해서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믿음이 어디 있으냐”는 믿음의 장소적인 의미로 표현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평상시에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사업이 잘 되고 모든 것이 생각대로 척척 되니까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던 분이 갑자기 부도가 나고 건강에 어려움이 오니까 믿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신자처럼 되는 성도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믿음의 크고 작은 것이 쉽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나 없나를 시험해 보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이 있나 없나를 시험해 보실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12명을 뽑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공사역을 시작하면서 먼저 무리들과 함께 산에 올라 팔복을 비롯한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마가나 누가 보다는 마태복음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산에 내려 오시니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가버나움의 중풍병든 백부장의 하인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었고 많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니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18).
.
그래서 제자들은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분주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저물었을 때(막4:36)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셨든지 곧 바로 고물(선미, 배 뒤쪽)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러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물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광풍이 내리쳐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나고 자라고 배 타고 고기 잡던 경험이 많은 제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죽을 정도의 위기를 당한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주무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야단을 하는 데 예수님은 주무시고만 계셨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배안에 너무나도 대조적인 제자들과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와 예수님이 탄 배가 다르다면 같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도 배의 크기나 안전성에 따라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다지만 같은 배에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할 정도의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안히 잠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주무시는 곳이 ‘고물’이라고 했습니다. 앞쪽 보다는 뒤쪽이 더 많이 흔들리기 때문에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풍랑의 위험에서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이 가르쳐주는 중심은 풍랑으로 위기를 당했을 때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여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대한 충고를 주는 말씀입니다.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한 것은 위태로울 때 기도하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본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이 작은 것에 대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서 믿음과 불신의 기이한 혼합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에게 믿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불신이 혼합된 믿음입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과 불신이 혼합된 신앙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뽑아 세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보실 때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을 데리고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팔복을 비롯한 산상보훈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상보훈은 이론적인 교훈이라면 이제 실제적인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쳐 주시는 것과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도 말씀으로 고쳐주시는 것은 보았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마 사람인 백부장에게도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고 말씀하셨던 이방 사람인 로마 사람에게도 놀랄 만큼의 큰 믿음이 있었는데도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없는 제자들을 데리고 공사역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한 훈련을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 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게 하셨고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일으키시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위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큰 광풍으로 배 안에 물이 가득 찰 정도의 위기임에도 예수님이 주무셨다는 것은 자연적인 형상이라고 해석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광풍에 흔들리고 물이 가득차는 데 주무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광풍에 시달리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아시고 주인으로서 제자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호를 해 주셔야 하실 분이 주무신다는 것은 주인으로서, 선생으로서, 또 죄인들의 구주로서는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러한 현실 앞에 주무신다는 것은 계획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려움을 당하고 죽을 정도의 위기를 당했음에도 예수님은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고 주무실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연현상이고 우연이라면 바다를 잘 아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그만한 것은 지난날에 경험을 했고 또 어떻게 하면 풍랑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길 수 없는 대풍은 자연현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계획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당하는 어려움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어려움일 때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될 때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주께서 찾으시는 믿음이 있는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외친 소리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제자들이 외친 소리를 긍정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 제자들처럼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이 외친 소리를 깊이 분석을 해 봅시다. 마태는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8:24)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주여 3창’이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4:38)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부르짖음은 정당한 기도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탓하고 나무라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주무시고만 계시느냐? 왜 우리를 돌보시지 않으시냐? 예수님 당신이 배를 타라고 해서 배를 탓는데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이러한 불만적인 감정에서 나온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서 나병환자나 백부장이나 귀신들린 사람들도 이러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불만과 불신의 말로 외친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나병환자도 고치셨고 백부장의 하인도 말씀만으로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사람도 고쳐주셨는데 왜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시지 않으시고 주무시고만 계셨느냐는 불신과 불만의 감정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혹 제자들의 이런 불신과 불만의 감정이 들어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또 무엇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까? 만약 풍랑으로 배가 가라앉게 되면 예수님은 살고 제자들만 죽습니까? 예수님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은 풍랑으로 인해 죽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구주가 되셔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뿐이지 풍랑으로 바다에 가라앉아 죽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타신 배는 절대로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만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두시고 예수님 혼자 사실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이러한 믿음 없음을 예수님이 아시고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인정할 정도의 믿음이 있었다면 이처럼 광풍으로 침몰의 위기를 당했을 때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 백부장처럼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바다가 잔잔하리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곧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성난 바다도 곧 바로 잔잔하게 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이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본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가”(27)하며 놀랍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것은 제자들의 불만과 불신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없다는 책망을 듣고 자신의 믿음없음을 깨달았을 때 예수님은 성난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제자들을 배에 태우시고 바다 가운데서 큰 광풍을 일으켜 위태롭게 만드신 것 역시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께서 손잡고 할 일을 해야 하겠는데 믿음 없는 우리를 손잡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신앙 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였음에도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고 믿음이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믿음 없음을 아시고 큰 믿음 가지도록 하시는 신앙 훈련이라고 생각하시고 자신의 믿음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여러분을 두렵게 만드는 모든 것을 향하여 꾸짖으시면 더 이상 어려움에서 벗어나 잔잔한 평안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생명이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요, 믿음이 축복입니다.
주께서 인정하실 수 있은 믿음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