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정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1년간 연구하면서(기독교용어연구위원회 -위원장: 정장복 교수) 우선적으로 기도, 예배, 장례, 회의, 교회생활 분야에서 32개 용어들을 바로 잡은 연구내용이 제 86회 총회에서 보고되어 채택된 내용입니다.
1. 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 ->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간구를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
2) 기도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한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으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명사에 호격조사가 붙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이여’,‘~이시여’를 붙여서는 안 되고 그저‘주님’,‘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 등등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5)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라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보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서 사람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고마우신 예수님’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의 호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
7)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가 성경에 많이 있는데 참 좋으신 하나님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바 대로 표현한 말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8)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단 한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가 아닌 ‘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2.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1)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사회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으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의 개념을 넘어 예배인도자로 부름이 타당하다.
2) 성가대 -> 친양대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우리‘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
3)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 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한 결과,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4) 대예배 -> 주일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5)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6) 예배 봐준다 -> 사용불가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 봐준다’는 표현은 예배를 신학적으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7) 준비찬송 -> 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데,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
8) 예배/예식/기도회 -> 주일예배, 주일저녁 찬양예배, 교회학교(주일학교)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경건회(각종 회의 시작 전)
구별사용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의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9) 헌금 -> 봉헌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은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
10) 축제 -> 잔치(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 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 으나 이가원과 임창순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 지내고, 그 다음날 사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 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 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과Festival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 놓고 떠들고 소리 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숫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면 성령 축제->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 ->부활절 절기행사, 상탄 축제->성탄 축하행사 등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11)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이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개역 한글판 창12:3)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하나님! 복 주시 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
12)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자체에 記, 言, 歌등이 있어‘書’자가 의미상 과잉표현이 되므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13) 시편 절 ,장 -> 절 편
시편 몇 장과 몇 절은 산문에서만 쓸 수 있다.
14)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존대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에 기도를 할 때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도, 그‘사랑하시는’이란 동사의 주체를 말하는 이 자신을 가리키는 뜻으로 말하는 경우라면, 즉,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라면 옳지 않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경우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의미는 흔히‘사랑하시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말하는 이(화자)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면,‘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 해야 분명하다.
15)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예배시에 성도들은 결코 주기 도문을 단순히 외는(외우는)것, 즉,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뜻을 바로 새기면서 음송(吟誦)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표현은‘다같이 주님 가르 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16)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구약의 제사는 모든 제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신약시대에 들어 예배로 내용과 형식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교회는 지금도 예배를 제사의 의미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기도의 제단에 나와서, 작은 제물을 바칩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으로서 제의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점을 지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신화, 민속, 종교의식 등이 모두 제단 근처에서 성육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구약의 제사용어를 예배 속에 그대로 사용 하면서도 부자연스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국교회 역시 제의적인 문화의 영향을 벗어 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제사는 ‘예배’로, 제단은‘성단’으로, 제물은‘예물’로 바꾸어야 한다. 한편, 제단은 ‘강단’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이것은 성례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교만 이루어지는 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므로‘성단’이라 함이 적절하다.
17)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을 가리켜 ‘송구영신’ 또는 ‘송영’이라 한다. 이 의미가 예배의 성격 및 내용과 일치하므로‘송구영신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송영’은 ‘송구영신’의 준말이지만, 찬양에서의‘송영’과 동음이어서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18) 기도로 폐회합니다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폐회합니다’는 교회 안의 각종 회의에서 끝날 무렵 사용하는 것으로 예배에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19)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의탁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긴다’는 의미이다.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할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거의 ‘그가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이 예배를 도리어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필요할 시는 ‘이 예배를 주장하시고’또는‘이 예배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로 쓸 수 있다.
3. 장례와 관련된 용어
1) 소천(召天)하셨다 ->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나는 소명 했다.’고 말하지 않고‘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 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
2)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부활의 소망을 ...."과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
3)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4) 칠성판(七星判) -> 고정판 또는 시정판
칠성판의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고정판(固定板)’ 또는‘시정판(屍定板)’ 으로 부름이 타당하다.
5) 영결식, 고별식 ->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6) 삼우제(三虞祭) -> 첫 성묘(省墓)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 목적 이다.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 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본 교단에서는 삼우제를 ‘첫 성묘’로 부르도록 하는 것이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
4. 교회생활과 관련된 용어
1) 당회장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당회장’ 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또는‘담임목사’로 부름이 타당하다.
2)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 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아 공회의에서는 제2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는 제3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 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 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3)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 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 라는 용어를 '부활절 절기행사','성탄 축하행사' 등으로 바꾸어 써야 할 필요성을 밝혔으므로, 부활절 전날 밤에 갖는 행사도 당연히 '부활절 전야제' 대신 '부활절 전야 축하행사' 라고 불러야 한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전야제' 대신 '전야 축하행사'라고 하여 제사의 성격을 배제하고, 밤 깊은 시간까지 축하한다는 순수한 의미를 담는 것이 좋겠다.
4) 사모 =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
5)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 또는 죽은 사람을 가리켜 '천당에 갔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천당'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물질로 된 유형의 집 또는 공간으로 이해하기 쉬운 천당의 개념이나 서술이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 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 땅의 종교 문화를 형성한 타종교에서 유래된다. 한민족의 일반적인 종교개념이나 사전적 풀이에서는 천당을 "하늘 위의 신의 궁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인 정토(淨土), 즉, 깨끗한 국토, 곧 부처와 보살이 사는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천당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천당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즐겨 쓰는 '천당'이라는 어휘보다 한글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이 온전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하늘나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
6) 입신(入神) -> 사용불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입신(入神)이란, 무속종교의 표현으로서 무당에게 신이 내려 인간으로서의 자아의식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전에서는 입신(入神)을 한 인간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신의 경지에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 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입신(入神)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
7) 하나님의 몸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하나님의 몸된 교회’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와의 관계에서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8) 수양회 ⇒ 신앙수련회
‘수양’이란 도덕적 품성을 닦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용어를 가지고서는 현대의 다양한 행사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다. 교회의 공동체 훈련이라는 목적을 잘 드러내면서 다양한 행사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신앙수련회’ 가 적합하다.‘수련’은 마음과 몸을 잘 닦아서 익힌다는 사전적인 뜻을 갖고 있으며, 특히 정신을 닦고 기르는데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로도 익숙하다. 여기에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뚜렷한 목표를 앞에 내세우게 되므로 가장 합리적인 명칭이다.
9) 태신자 ⇒ 전도 대상자
생소한 용어가 교회 안에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바로 ‘태신자’가 그것이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어느 사람을 지칭하면서 장차 태어나게 될 신자라는 의미로 즉,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전도해서 꼭 신자를 만들겠다고 속으로 작정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태신자’라고 하고 있다. 임산부의 태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를 태아라 부르는 것에 연유하여 태안에 들어 있는 신자라는 뜻으로 ‘태신자’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태아가 임산부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생명 체일진대 그러면 ‘태신자’는 과연 누구의 뱃속에 들어 있다는 말인가? 만일‘태신자’를 용납한다면 장차 목사나 장로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그 사람을‘태목사’,‘태장로’라 해도 괜찮다는 무리한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태신자’라는 용어대신‘전도 대상자’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10) 안집(‘안수집사’의 줄임말) ⇒ 사용불가
집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안수하여 임직한 이들을 가리키는 직분인데, 서리집사와 구별 하기 위하여 안수집사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그 명칭을 줄여‘안집’이라는 생소한 말로 부르거나 기록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11)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 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
‘이름’은 누구를 대신하여 부르는 말 또는 누구를 대신하여 지시하는 말이므로, 그 사람의 권위와 인격의 임재를 동반하게 된다. 그러므로‘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고 말할 때, 그 서술어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의 동반을 의미요소로 하는 용어이어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은 더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과 인격과 능력을 동반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다는 뜻인 ‘문안’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것은 어색하다. 다시 말하자면,‘문안’이라는 행위는‘예수님 이름을 대신하여’혹은‘예수님 이름을 빌어서’ 비로소 성립되는 것일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또한,‘이름으로’에 쓰인 격조사 ‘~으로’는‘수단, 방법, 도구, 기구’등을 나타내는 말이므로‘누구의 이름으로 문안 드리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12) 일요일(공일) ⇒ 주일
그리스도인은 일요일(공일)을‘주의 날’(계1:10)을 뜻하는 주일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총회 헌법의 예배와 예식에 주일이 안식일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별도의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
5. 회의부문
1) 고퇴→고퇴 또는 의사봉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고퇴'라는 독특한 이름 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에서만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다.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나는 은으로 띠를 띤 견고한 '마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 토록 대한장로교노회의 마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합해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했고, 이것을 길선주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 으로 지어졌고,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해,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만을 '고퇴'라 부르고 그 외에는 '의사 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꿔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2) 자벽→지명, 임명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 버린 말을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벽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해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 함으로써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기에 이 용어의 사회적 의미나 정서는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이 용어를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또는 '회장 지명'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
3) 증경→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 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 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 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고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 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 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 총회장' 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4) 휘장 분배→꽃 증정
총회나 노회에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 '휘장 분배'라는 순서를 갖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총회장들과 주요 임원들이 일제히 단상으로 올라가 도열하면 이어서 고운 한복을 차려 입은 여성들이 등장하여 임원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드리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표지(標識)'라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익숙해진 영어 단어로 '배지(badge)'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회의 초반에 원로회원에게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고자 배지 대신 가슴에 꽂아 드리는 꽃은 결코 휘장이라 할 수 없으며, 이 순서 또한 매우 형식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분배(分配)'라는 용어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분배는 고르게 나누어준다는 뜻이므로, 원로들에게 표지를 고루 나누어주는 순서라는 의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굳이 이 순서를 사용하려 한다면 '꽃 증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
출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