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전각 중의 하나는 향원정입니다. 정자의 이름 ‘향원(香遠)’은 중국 북송시대의 학자, 주돈이의 한시, <애련설>의 한 구절인 ‘연꽃 향기가 멀리 갈수로 더욱 맑아진다’는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온 것입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매년 5월 말에서 6월초가 되면 향원정이 있는 연못, 향원지 북동쪽의 수면은 바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일렁입니다. 그 원인은 연못 속의 커다란 잉어나 붕어 등 물고기들 때문입니다. 평소 수중 음식만 즐기던 물고기들에게 이 시기 연못 밖에서 주어지는 성찬으로 푸드 페스티벌이 벌어지거든요. 물고기들이 즐기는 메인 디시는 바로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입니다.
향원지 북동쪽에는 흉고직경 60cm, 수고 15.6m에 이르는 뽕나무 노거수가 있고 <경복궁(칠궁포함) 덕수궁 종묘 수목조사 연구보고서, 2025, 국가유산청>, 그 뽕나무 노거수에서 잘 익은 오디가 연못 가장자리는 물론 향원지 안으로 떨어집니다. 동 보고서에 의하면 경복궁에는 총 66본(뽕나무 46본, 산뽕나무 20본)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경복궁도 그렇지만 궁궐마다 뽕나무가 적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국가에서 백성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길쌈을 장려하고자 국모인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 ‘친잠례(親蠶禮)’를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농상(農桑;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임금은 직접 농사 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례’를, 왕비는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친잠례’를 거행했습니다.
실제 경복궁에서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1767(영조43)년 3월 10일 친잠례를 거행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듬해 영조는 ‘정해진참(丁亥親蠶)’ 4글자(그림9)를 써서, 이를 새긴 비와 비각을 경복궁 안에 짓도록 합니다. <홍현도, 조선 후반기 경복궁의 관리와 운영 연구, 2024>
때문에 상기 친잠례 이후 그려진 조선전기의 경복궁을 그린 평면도, <경복궁도>에는 ‘정해친잠’비의 위치가 강녕전 동쪽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한양여성, 궁 밖을 나서다, 서울역사박물관>
친잠례를 실시한 당일(1767. 3. 10) 영조실록의 친잠례 절차를 보면,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경복궁의 강녕전 터 동쪽에 제단과 ‘채상단(採桑壇)’을 만들고 왕비는 단 위에서 갈고리를 이용, 5가지의 뽕잎을 따고, 혜빈(혜경궁 홍씨)과 왕세손빈(효의왕후 김씨)은 7가지의 뽕잎을, 내ㆍ외명부는 각기 9가지의 뽕잎을 단 아래에서 땁니다. 이렇게 뽕잎을 따는 것을 ‘채상(採桑)’이라 합니다. 이후 혜빈 이하는 왕비가 지켜 보는 가운데 잠실로 가서 내명부 소속의 여관(女官)이 잘게 썬 뽕잎을 누에에게 뿌려주어 먹게 하는 것으로 예가 끝납니다.
친잠의식에서 중전(왕비)은 국의(鞠依)를 입고 의례에 참석하는데 국의는 국화의 황색과 같습니다. ‘국의’의 한자, ‘공 국(鞠)’의 뜻 중에는 국화(菊花)도 있으며, 국의가 황색인 이유는 뽕잎이 처음 돋을 때의 빛깔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영조대 친잠례 시행과 의의, 임혜련, 2011>
경복궁에서 진행 된 친잠례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은 임금들이 뽕나무 식재를 명하는 기록이 많이 보입니다. 특히 세종실록 1423(세종5)년 2/16일자 기사에는 [“경복궁 안의 뽕나무 3,590그루, 창덕궁 안의 뽕나무 1,000여 그루, 밤섬의 뽕나무 8,280그루로 누에씨(씨를 받을 누에의 알) 2근 10냥을 칠 수 있습니다.” 하니, 경복궁과 창덕궁의 두 잠실에 각각 누에씨 21냥씩을 주라고 명하였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지금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의 뽕나무가 세종의 명으로 심은 뽕나무일 수는 없습니다. 뽕나무 수령의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경복궁을 비롯한 창덕궁과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업의 장려는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이었기 때문에 뽕나무 노거수가 여전히 궁궐 곳곳에 남아 있으며, 특히 창덕궁 후원에는 지난 200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뽕나무도 있습니다.
향원정 북동쪽의 뽕나무 노거수 한 그루는 향원지 연못의 물고기들에게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 향원정을 즐기는 최고의 장소 중 한 곳이 바로 이 뽕나무 노거수 아래로 10월 말에서 11월 초 이 곳에 오시면 뽕나무 주변의 단풍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단풍과 함께 향원정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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