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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경덕, 퇴계 이황도 첩이 있었다

작성자블루비니|작성시간08.01.14|조회수1,168 목록 댓글 0

 

논어, 맹자를 달달 외우고, 애써 도덕군자인 척 했던 조선시대 도학자들도 기생 앞에서는 '고추달린 사내' 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이름난 풍류객들이 그랬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알려진 자식만 해도 23명으로, 기녀 문제로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꾸중을 듣다가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뒤로도 늙어서까지 추문을 뿌렸다.

 

송강 정철 도 술과 기생을 하도 좋아하여 우계 성혼에게 꾸중을 들었고, 애꿏게도 이율곡은 주색에 능락한 정철을 조정에 천거했다 하여 핀잔을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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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품에서 즐거움을 맛본 선비들 중에는 우리가 잘아는, 그것도 거의 '수도승'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인물도 있다. 똘똘한 허균은 기생품에서 '진리'를 깨달았던 모양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곳은 절간도 포함되었다.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는 황진이도 화담 서경덕은 꺾을 수 없었다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서경덕도 첩 소생으로 아들을 둘이나 두었다. 그러기에 남명 조식은 천하 제일로 지나기 어려운 철문관이 '화류관'이라 설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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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대게 관광코스에 절이 한 두 군데 끼듯이 예전에도 절은 산수를 즐길 수 있는 좋은 놀이터로 이용되었다.  참선을 위해 고요해야 할 절은 종종 사대부들이 친구들과 함께 기생들을 불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시끌벅적한 연회장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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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도 묘향산에 놀러가서는 용문사에서 기생들의 검무 구경을 하고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놀았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남긴 기록에도 조선에서 기생과 어울려 노는 곳으로 기생집, 잔칫집과 아울러 절을
지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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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퇴계 이황도 수도승 같은 인물은 아니어서 첩이 하나 있었다. 또 만년에는 단양의 기생 두향과
염문을 뿌린일도 있었다.

 

심지어 허균은 [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내린 것이요, 남녀유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니, 자신은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린 본성은 어길 수 없다] 고 강변하기 까지 했다

 

 

이름난 도학자들이 저랬으니, 보통 양반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물론 대책을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굳이 결과를 더 알아볼 필요는 없겠다. 기녀들은 왕실의 중요한 행사에서도 필요했던 것 같다.

 


태종 때에도 기생을 없애라는 명이 떨어졌는데, 기생 좋아하던 하륜이 강하게 반대하자 태종이 빙그레
웃으면서 결국은 논의를 중지시키고 말았다. 
세종 때에도 관기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크게 일어 시행될 듯하였지만 의외로 도학군자로 이름난 허조가 반대하여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허조의 주장은 그랬다가는 여러 선비들이 양가의 여자들을 탐하여 더 큰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초대 캔터베리 주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가 이미 허조보다 800년 전에 똑같은 논리로 창녀폐지론에 반대했다. 창녀는 하수구 같은 것이라 하수구가 더럽다고 없애버리면 온 궁전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녀제도가 폐지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풍악과 가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 가장 큰 문제는 대비전, 중궁전에서 벌어지는 내연에 남자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외법이 엄격해서 궁궐에서 잔치를 할 때에도 가무를 하는 기녀들은 뜰에서 노래를하고 춤을 추었지만, 악사들은 뜰 주위에 휘장을 두르고 그 뒤에서 연주를 하거나 .....궁중 악사들 중에 상당수는 장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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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의 삶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로다. 어쩌다 대접을 잘 받는 때도 있었지만, 결국 비극적으로 끝난다.

 

 

기생들은 비록 양반관료의 첩이 되어 일시적으로는 호사를 누리더라도 남자의 애정이 시들해지고 나면 다시 이 양반, 저 양반 품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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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남편을 만났어도 남편이 죽으면 집에서 천떡꾸러기 신세가 되어 결국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 때 첩 두명을 두었던 곽연성은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 관기 출신인 작은 첩의 두 손을 잡고는 '내가 죽고 나면 너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겠지' 하면서 머리맡에 둔 칼을 집어 눈을 찌르려고 햇는데, 다행이 첩이 얼른 피해서 눈썹만 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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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를 유혹해서 고을 대사를 쥐락펴락 하던 관기도 나이가 들어 몸매가 망가지고 미색이 바래고 나면 물긷는 수급비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기생은 나이가 들면 3 가지가 없어지가 한 가지만 남는다고 햇으니, 재산과 미색과 명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달콤한 말재간 뿐이라는 것이다. 기생은 길거리의 버들이나 담 밑에 핀 꽃러럼, 지나가는 뭇 남정네 손에 꺾이기 쉬운 연약한 꽃이었고, 시들면 버려지는 서글픈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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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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