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986년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하루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누군가 벽에다가 왼쪽에는 고려대 법대를 쓰고 오른쪽에는 서울대 법대를 쓴 다음에 부등입을 고려대 법대 쪽으로 커다랗게 벌린 낙서를 해놓았더라구요. (청중 웃음)
그걸 보고 내가 진짜 이 학교에 잘못 왔구나 하는 어떤 게 머리를 쾅 하고 치는 걸 느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열등감을 그 낙서에서 봤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당시 학력고사 점수면에서 볼 때 부등호 입이 고려대 쪽으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낙서한 사람도 알고 저도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건데 제 생각에는 그 친구가 아무도 없는 데서라도 ‘고려대가 서울대보다 낫다’ 라고 절규하고 싶었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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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고려대 법대도 이른바 명문 사립이라 고려대 법대 학생들이 옆에 커다랗게 ‘법대8611.. '
라고 쓴 법서를 가방도 비어 있는데 일부러 손에 들고 다녔어요. 그런데 책을 사거나 자료를 구하러 신림동에만 가면 손에 들고 있던 법서를 살그머니 가방에 집어넣곤 했습니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을 하면 주변에서 제일 재수 없어 하는 학생들이 법대 애들이었어요. 왜냐하면 법대 애들은 동아리에 들어왔다 하면 늘어놓는 푸념이 한결 같이 자기는 이 학교 올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에요. 자기는 학력 고사 때 배가 아파서, 설사가 나서, 몸이 안 좋아서 이 학교 온 거고, 니들은 원래 못 올 학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거라는 태도로 다른 학생들을 대하니 싫어할 수 밖에요. (청중 웃음)
제가 볼 때는 이런 것이 일종의 사이클이에요. 사인 코사인 곡선을 그려서 곡선의 윗부분을 우월감이라고 하고 아랫부분을 열등감이라고 한다면, 우월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열등감도 커요. 이 진폭이 매우 큰 거에요.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하죠.
이런 진폭이 적은 사람이 되는게 우리 사회에서 자유를 얻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극복했느냐 하면 물론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지요. (청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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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연수원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보니 .. 다 마찬가지더라구요. 고려대 나온 애들은 겉으로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이야기 하지만 서울대 출신들을 보면 열등감을 느끼고, 서울대 출신들은 자기들 안에서도 4학년 때 시험붙은 천재들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을 느낍니다.
나아가 그 4학년 때 시험 붙은 사람들은 판사가 된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판사가 된 사람들은 서울로 판사 발령 받은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서울에 발령 받은 사람은 서울 본원에 발령받은 사람에 대한 열등감 …..
결국 열등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는 거에요. 그렇다고 그 1등은 이런 열등감에서 진짜로 자유로울까요? 막상 1등 하는 사람은 얼굴이 못 생겨서 열등감이 너무너무 심할때가 많더라구요. (청중 웃음)
우리 때 사법시험에서 289명인가 뽑혀서 서로 잘 알고 지냈는데, 이런 열등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었어요. 더 나은 대학, 더 나아보이는 지위로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어렵게 자기를 극복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한국 사회에서 학벌에 따라 생기는 열등감 또는 우월감이라는 독소는 거의 초자연적인 어떤 게 개입하기 전에는 치료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이도 하죠 (청중 웃음)
그런 점에서 다 같이 굉장히 큰 정신병원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1등부터 70만등까지 한줄로 주욱 늘어서 본 거잖아요.그 아픈 기억은 치유하기가 어렵죠.
/ 김두식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