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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내용]쇼펜하우어는 자살 찬양자인가?

작성자블루비니|작성시간07.04.02|조회수7,444 목록 댓글 2

쇼펜하우어가 '자살의 철학자' 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띈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의 입장을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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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쇼펜하우어는 자살, 죽음에 대해 어느 선배 철학자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부친의 자살과 친구의 죽음 등 자신의 인생에서 그러한 일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런 자살의 어려움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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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가 가지는 저항력은 강해서 마치 대문 출구를 지키고 서 잇는 문지기와 같은 것이다. .... 생명의 마지막에는 어떤 적극적인 것이 있는 법인데, 그것은 육체의 파멸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람을 두렵게 하고 공포에 떨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의지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 철학적 단편

 

자살을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소수다. '빨리 죽어야지' 가고 자주 한탄하는 노인들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몰리면 엄청난 공포에 떠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살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의지의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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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신적 고민과 육체적 고민과의 사이에 있는 대립의 결과로서 보면 .... 가령 우리들이 육체적 고통을 아주 심하게, 혹은 계속 느끼고 있을 때에는 다른 온갖 근심은 잊어버리게 되고 우리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게 마련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정신적 고민은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육체적 고통을 경멸하게 만든다. .... 자살을 쉽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에 따르는 육체적 고통은, 그보다 더 심한 정신적 고민에 허덕이는  사람 쪽에서는 그 모든 무게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철학적 단편

 

자기 몸이 파괴되는 일을 신경쓰지 못할만큼 심각한 고민이 자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자살자들의 정신적 고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약간이나마 헤아릴 수 있겠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자살에 대한 종교적 비난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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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성직자에게 무슨 권한이 있길래, 성경에서 아무런 예증도 제시하지 못하고, 또한 아무런 철학적 논증마저 없으면서 설교단상이나 그의 저서를 통해서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자살자에대해서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거나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정상적인 매장을 거부하는 것인지, 이것에 대한 변명을 요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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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자살에 대해서' 에서 성직자들의 궤변에 대해 아주 철저한 반박을 하고 있다.

 

/ 철학적 단편

 

쇼펜하우어는 영국에서 엉터리 신자들이 자살자들을 모욕적인 방법으로 매장하고, 법원에서는 정신이상자로 낙인 찍는 일을 예로 들면서 자살자에 대한 근거 없는 매도를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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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것은 자살이 도덕적인 의미의 잘못이라고 해서 반대하는 것과 기독교 성직자들이 자살은 죄악이라고 낙인 찍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 철학적 단편

 

도덕적인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일과 종교적 죄악으로 낙인찍는 일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도덕적 비판은 소극적이고, 종교적 비난은 적극적이다. 종교적 비난은 단순히 말로만 끝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여러 책을 인용하면서 자살을 긍정하는듯한 주장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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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인생이란 무슨 희생을 치러서라도 오래 끌어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깊은 애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신이 인간이 부여한 가장 최상의 산물이다'

 

... 스토바에우스는 ' 도가 지나친 불행 가운데 있는 착한 사람이나, 또한 너무 행운에 겨운 악한 사람은 인생을 작별해야 한다' 고하는 취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 철학적 단편

 

이런 인용을 보면 쇼펜하우어가 불행에 찌들린 사람들의 자살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에서 자살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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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의지의 부정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의지의 강렬한 긍정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부정의 본질은, 생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향락을 두려워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자살자는 삶을 원하고 자신의 삶이 놓여있는 조건들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현상을 파괴함으로써 삶을 포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삶을 원하고 신체의 장애를 받지 않는 생존과 긍정을 원한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69장'

 

자살하려는 사람은 사실 삶을 원한다. 다만 자기의 환경에 만족을 못할 뿐이다. 이 점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가질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의지의 부정'과 자살은 엄연히 다름을 주의해야 한다.

 

자살한다고 의지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자살은 어떤 면에서는 의지를 긍정하는 일이다. 게다가 '고통을 통한 해탈'이라는 진정한 인생의 목표를 도중에서 포기해버리는 일이다.
고통이야 말로 철학적 통찰의 시작이며, 해탈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도덕적인 이유에서 자살이 잘못된 일이라고 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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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가 이렇게 하여 도피하는 그 고통이야말로, 의지의 억제제로서 의지로 하여금 의지 자신의 부정과 해탈에 이르게 할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보면, 자살자는 자신을 근본적으로 치료해 줄 수도 있는 괴로운 수술이 시작된 다음 이를 끝까지 견디지 못해서 오히려 그대로 병에 결려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병자와도 같은 것이다.

 

.... 즉 고통은 내가 이미 갖기 시작하는 세계의 참된 본질에 관한 인식을 강화하여, 나의 의지의 궁극적인 진정제가 되게 함으로써 나를 영원히 해탈시킨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제 69장'

 

자살하고 싶을 정도의 큰 고통은 해탈을 위한 대수술의 시작이며 생의지의 진정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살자는 이 수술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한 사람이다. 고통과 불행은 동정심을 불러오고 우리를 '사람답게 ' 만드는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이런 포기는 권장할만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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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불행은 동정심이 조건이고, 동정심은 인간애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분노를, 그 분노의 대상에 대해 '불행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 만큼 빨리 진정시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분노가 정당한 것일 때에도 그렇다. 비가 불을 끄듯이, 분노를 끄는 것은 동정심이기 때문이다.

....

 

그 사람이 이제 정신적, 육체적 고통, 혹은 결핍, 빈곤과 씨름하는 것을 본다고 생생하게 떠올리고, 그리고 스스로 '이것은 나의 작품이다' 라고 말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동정심은 분노에 대한 올바른 해독제이기 때문이다.

 

/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저 인간을 갈아마시려고 하기전에 상대방의 어려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저 인간도 알고보면 참 불쌍한 놈이다' 라고 '생생하게' 떠올려보는 것, 이런 동정심은 우리를 진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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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가장 깊은 핵심은 고난(십자가)이 인생의 본래의 근본적인 목적이라고 하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자살을 이 고난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배척하는 것을 당연하다. ....

 

/ 철학적 단편

 

불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십자가도 고난의 상징이며,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며 목적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유대교등에서 볼 수있는  낙관주의는 진정한 종교적 가르침이 못된다.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자살에 대해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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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일종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자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실험이다. 왜냐하면 질문을 하고 그 다음 그 대답을 들을 의식의 동일성 마저 이 실험으로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 철학적 단편

 

자살은 실험이기는 하지만 그 실험결과를 알수가 없다. 자살하면  실험결과를 알 수 있는 우리 개개인의 의식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상 종합해 볼 때,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의 고난에 찬 심정을 이해하면서 이에 대한 일방적 매도를 반대한다. 이와 동시에  그렇게 자살한 만큼의 고통이 동정심을 가진 '진짜 인간'으로 성장하고 '해탈'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데, 자살은 이런 가능성을 포기해버리는 '잘못된 실험'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자살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찬미자는 결코 아니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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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늘거림 | 작성시간 07.04.02 쇼펜하우어가 자살을 선동? 했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건 그가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삶은 살기 위해 존재한다고만 믿기 때문이 아닐까요.. 손가락을 해를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셈이군요.
  • 작성자블루비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4.03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염세주의 = 죽음 이라는 오해가 있을겁니다. 그래서 꺼려하는 사람도 제법 있는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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