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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내용]이성의 몰락과 쇼펜하우어 그리고 마르크스

작성자블루비니|작성시간07.10.21|조회수510 목록 댓글 0

헤겔

 

독일 관념철학의 완성자인 헤겔의 철학에서 이성은 아마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왕좌를 차지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의 본질 뿐만 아니라 우주의 본질이 이성이다. 헤겔에 의하면 사람과 국가와 역사와 모든 문화와 그리고 절대자로서의 하나님까지 소위 이성의 변증법 속에 포괄된다.

 

모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모든 현실적인 것은 또한 이성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성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함에 따라서 인류의 역사도 그와 함께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역사위에 나타난 비이성적인 사실도 '이성의 간계 List der Vernunft' 라고 이를 합리화 했다.  역사적인 영웅이 그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큰 업적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우주적 이성은 이를 그 합리적인 목적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헤겔철학에서 이성은 이와 같이 완전히 신격화됐다. 그러나 가장 높이 올라간 이성은 그 순간에 다시 몰락할 운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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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몰락

 

이성의 몰락은 사실 가장 이성을 존중한다는 계몽주의 속에서 이미 싹트기 시작한다. 계몽주의를 통해서 넓게 퍼진 유물론에 의하면 이성은 다만 물질의 하나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생물학적으로 관찰하는 생물학자들은 이성을 다만 생물학적인 생명 현상의 작용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사람의 절대적인 본질이 될 수 없고, 다른 동물에 비해 정도의 차이를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성의 값이 떨어진 이유는 '감성'의 값이 반대로 올라간데에도 있다. 희랍사람들은 현상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를 분리해서 이원론적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현실세계 속에서 그 의미와 값을 찾으려고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현실의 세계를 직접 감지하는 감성의 값이 높이 평가되게 되었다.

 

 

그 밖에도 심리학 분석과 비판에도 그 이유가 있다. 우리 마음속에 이성이 가장 고귀한 것이고 또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강한 힘을 가졌느냐는 것을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게 되었다. 이성보다 더 근본적인 부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는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낭만주의

 

 

낭만주의자들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무의식의 심층이 표면적인 의식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더 값지고 참된 것이다. 의식은 깊은 생명력의 흐름에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피상적이고 그가 나타내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얕은 꾸밈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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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이성적 인간관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인간관을 발견한다.사람에게 있어서 고귀한 것은 이성이나 혹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의 깊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낭만주의자들의 사상은 그 뒤를 따른 합리주의로 인해서 후퇴했으나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현대 심층 심리학에 의해서 다시 이어받아졌다.  괴테와 그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의 주장이 아무리 두드러진 특징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서양 정신사에 나타난 하나의 경향에 지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


그런데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러면서 현대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철학자로서 사람의 본질이 이성이라는 인간관에 반대한 사람이 바로 쇼펜하우어이다. 그는 세계와 사람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고 의지라고 말했다. 이런 헤겔의 이성과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대립은 우리 동양철학에 나타난 이와 기의 대립을 생각나게 한다.이성과 이 그리고 의지와 기는 서로 다른 철학적 전통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말들이지만 사람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이러한 이원적인 대립은 흥미있는 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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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합리적인 이성이냐 혹은 맹목적인 의지이냐?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그것은 이성이 아니고 의지다. 의지는 이성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더 본원적이고 더 본질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현대 사상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와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충실한 제자들이다.

 

 


마르크스

 

쇼펜하우어가 헤겔의 철학에 반대한 것처럼 마르크스도 헤겔과의 대립에서 그의 철학의 본질을 분명히 드러낸다.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헤겔에 의하면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지만 사실은 반대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이성이 사람과 세계 전체를 움직이고 지배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의식의 변증법 적 발전에 따라서 인류의 역사도 그와 함께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적인 사회 현실이 사회의 의식을 결정하고 지배한다. 따라서 사회 현실이 변화하는데 따라 사람의 의식도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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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와 마르크스를 비교해보면 재미 있는 대조를 이룬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기본 명제에 있어서 두 사람은 공통적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하부구조로서의 존재 위에, 이에 따라서 결정되는 상부구조로서의 의식이 있다는 사상이다. 하부구조로서의 존재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관찰했고,  마르크스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관찰했다.

 

쇼펜하우어는 이성이 의지를 위해서 만들어내는 표상들을 '환상'들이라고 했는데, 마르크스에 의하면 모든 의식 현상들 곧 지금까지의 예술이나 종교나 철학은 다만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그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부구조의 소산으로서 지배계급의 사회적인 정치적인 이익을 정당화하고 신성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문화의 모든 창조는 다만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현실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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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쇼펜하우어와 마르크스는 다시 그러한 하부구조에 의해서 지배되는 이성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참다운 이성 곧 삶의 조건들을 초월한 이성이 있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두 가지 종류의 이성을 구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실용이성과 진리를 위한 자율이성 을 구별했다)

이 두가지 종류의 이성을 구별하는데 있어서 쇼펜하우어와 마르크스는 생각을 달리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성은 본래 의지에 비해서 비본질적인 것이고 약한 것이기 때문에 의지의 지배를 받고 이에 환상을 보여 주는 일을 하지만 다만 위대한 천재와 성인에게 있어서는 이성은 의지의 지배를 벗어나서 삶을 초월한 순수한 '우주이성' Weltauge 이 된다. 이 우주이성으로 천재와 성인들은 마야의 면사포를 꿰뚫고 형이상의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위대한 예술과 종교와 철학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로부터 해방된 참다운 이성의 표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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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의하면 본래의 이성은 지배계급을 대변하거나 하부구조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들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급이 있는 잘못된 사회구조가 이성을 그렇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계급이 없는 올바른 사회가 실현되면 이성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지배계급의 위치를 변호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혁명을 통해서 이성은 자유를 얻고 이데올로기들의 시대는 가고 진리의 시대가 온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쇼펜하우어와 마르크스는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그들의 기본명제와 고전적인 이성관을 불철저하게 배합시켰다.


두 사람 중에 마르크스가 더 고전적인 전통에 얽매여 있다. 그에 의하면 이성이 하부구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은 잘못된 사회구조의 억압된 상태 때문이다. 본래의 모습대로의 이성은 자율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성은 근본적으로 의지에 봉사하는 기관이다. 이성이 진리를 추구하고 형이상의 세계를 직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만 이성 자신의 본래의 성격으로부터의 전환을 통해서 이룩된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고전적인 이성관의 꼬리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의 기본 명제에 불철저한 결과이다.

 

그는 의지가 이성보다 본질적인 것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더 지배적인 힘이라고 해서 이성적 인간관과는 다른 새로운 인간관을 창조하면서 다시 천재와 성인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의지로부터 해방되어 참다운 진리를 추구한다고 했다.

 

이러한 앞뒤의 모순은 그가 새로운 인간관을 말하면서도 고전적인 이성관과 진리관을 전복시킬 용기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태호 ' 철학적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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