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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내용]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

작성자블루비니|작성시간07.10.28|조회수4,803 목록 댓글 0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현 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가능성'이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의 죽음이다. 나는 그 어느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삶의 역사를 갖는다. 죽음은 이러한 독자적인 역사를 갖는 나의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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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이렇게 철저하게 나만의 죽음인 것을 통해서 외부에서 나에게 부과되는 모든 낯선 규정은 죽음과 더불어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나에게 절대적으로 고유한 것이 비로소 드러난다. ..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 die eigneste moglichkeit 에 직면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또한 현존재가 이제까지 집착해왔던 모든 일상적인 가능성의 허망함을 드러내면서 그것들을 무료 떨어뜨리는 극단적인 가능성이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통해서 일상적인 가능성은 그 동안 자신에게 부여된 절대적인 의미를 상실하면서 올바른 관점에서 보이고 평가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극단적인 가능성은 다른 모든 가능성에 위계와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실존의 전체성과 통일성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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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의 선구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자신이 집착해 온 가능성인 높은 관직과 보수가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공직생활, 자신의 삶 전체 그리고 자신이 따라왔던 상류층의 관습과 사고방식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의 삶은 생존을 위한 사소한 수단에 불과한 것들인 재산이나 명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했고 진정 목표로 해야 할 인간에 대한 사랑 등은 수단으로 간주해온 전도된 삶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한 가능성인 높은 관직과 보수는 생존을 위한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의미밖에 갖지 않으며, 자신을 비롯한 모든존재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궁극적인 목표에 복속되어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은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불확실해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이 확실하다고 느끼면서도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침입해올 수 있다.

 

죽음은 우리 앞에 끊임없이 박두bevorsthen 해 있는 가능성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안도하면서 죽음이 자신들에게는 아직은 먼 사건인 것처럼 생각해왔다. 이에 반해서 오직 게라심 만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죽음앞에서 도피하지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하면서 일상적인 가능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자각적으로 앞서 달려감' 즉, 죽음으로서의 선구 vorlaufen 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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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죽음의 경험이란 인간이 항상 이미 죽음으로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러한 사실을 한갓 객관적인 사실로서 단순히 머리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방식이 전적으로 뒤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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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공포

 

 

현존재가 태어나자마자 죽음으로던져진 존재인 한, 우리 실존의 근저에는 항상 불안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불안이 대두되지 못하도록 불안을 억누른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는 결국 불안이 대두되지 못하게 억누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전적으로 벗어날 수 없으며, 불안이 전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억압될 경우 공포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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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죽음에 직면한 낯설고 섬뜩한 존재에 대한 나의 불안이라면, 공포는 내가 나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집착하는 특정한 존재자들이 손상될까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공포의 대상은 그러한 존재자들을 손상시키는 특정한 사건들이다.


이러한 공포에서는 죽음마저도 인간을 자신의 적나라한 존재 앞에 직면케 하는 비밀에 찬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집착하는 수명이나 재산과 같은 것들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나타나며 의학의 발전을 통해서 격퇴되어야 할 자연적인 재앙으로 나타날 뿐이다.

 

공포는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서 불안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우리가 아무리 도피하려 해도 공포라는 변형된 방식으로 우리의 실존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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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도 아직 세상 사람의 삶에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 법정에 나가서 일을 하는 등 세상 사람들의  일에 몰두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가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인수하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기만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불안은 이제 세계와 존재자들이 충만한 의미와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 freud 이라는 기분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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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치유력

 

불안이란 기분은 우리가 그 동안 집착해 온 모든 것의 무의미를 드러내면서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의 섬뜩하고 낯선 존재에 직면케 하기 때문에 그 어떠한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을 유발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용기 있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고통은 자신의 치유력을 선사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연옥불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세상 사람이 숭상하는 가치에 연연해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던 외소한 인간에서 모든 존재자가 드러내는 유일무이한 충만한 존재에 감응하는 열린 인간 즉 진정한 의미의 현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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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퇴락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처한 무의 심연에서 도피하여 기만적인 가치에서 삶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경향을 퇴락 verfall 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러한 기만적인 가치들을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빠져드는 우상이라고 했다.


이러한 우상들로는 돈이나 평판, 민족이나 조국, 혹은 특정한 계급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제도화된 전통종교가 내세우는 신 등을 들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불안

 

 

이러한 우상들에 대한 숭배와 우상들이 제공하는 사이비 위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불안의 소용돌이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현존재는 이러한 불안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것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모든 기만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눈뜨게 된다.

 

불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이러한 우상들이 제공하는 안전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우선은 고통스럽고 섬뜩한 기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불안은 그러한 우상들의 기만성을 철저히 폭로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경험하게 하며 이와 함께 더욱 풍요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불안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하면서 그 안에서 개시되는 현존재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떠맡는 것을 '죽음으로의 선구'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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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가치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지금 이순간 온몸으로 인정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은 그렇게 마냥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자신이 죽음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잊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자기 자신만의 일회적인 시간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 철학자 로베르트 슈페만 Robert spaemann 도 이렇게 말한다.

 

 

'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모든 순간, 모든 기쁨, 모든 인간적 만남이 무의한 것으로 퇴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내일 또 그 다음날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매순간의 귀중함은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다시는 되돌아올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영원한 삶 속에서는 어떤 것도 귀중하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생긴다. 삶의 종말에 대한 불안 sorge 이 없다면, 의미로 충만한 현존재도 있을 수 없다. '

 

따라서 우리의 삶은 죽음에 눈을 감고 삶에 몰두하는 것을 통해서 충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자신의 삶이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 진중한 삶이 되도록 항상 깨어 있는 것을 통해서 충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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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형이상학, 영혼불멸 사상의 한계

 

 

영혼불멸 사상은 현존재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된 사상이지만, 그것은 현존재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을 피안으로 연장하여 무한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기만적인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고 세상 사람의 세계에 물입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 안에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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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형이상학은 육체는 유한하되 영혼은 불멸하고 존재자는 유한하되 존재자의 근거인 이데아나 신과 같은 존재는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전통 형이상학은 사태에 대한 사심없는 고찰을 통해서 이러한 생각에 도달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이데거는 그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죽음을 망각하고 그것에서 도피하려는 현존재의 퇴락에서 비롯된 선입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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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선다는 것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는 시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하는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지속적인 현전의 철학이 아니라 사건의  철학 Ereignisphilosophie 이다.

 

그것은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사건 Ereignis 으로 보는 철학이다. 이 경우 시간적이라는 것은 영원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경험된 영원성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지난 삶의 과오를 고백하는 순간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 하면서 죽음 앞에서 느꼈던 격심한 공포에서 벗어난다. 그는 분명히 죽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넘어선 것이다.

 

이 경우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죽은 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평정심과 자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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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은 돈 버는 데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그는 자신이 돈을 버는 데 필요한 사람들만 만나고, 그러한 사람들을 자신이 돈 버는 데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가 사는 세계는 왜소하고 숨막히는 세계다. 이는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사람 뿐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교나 철학체계를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그러한 종교나 철학 체계만을 절대적으로 선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신봉하는 사람들만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타락한 인간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우상이 제공하는 시야 안에서만 사물들을 본다.  우상숭배적인 태도 속에서 세계는 왜소해지고 사물은 신비와 깊이를 상실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보호하고 그것의 힘을 확장시키는 데 급급할 뿐이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사람은 모든 사물에서 자신이 믿는 교리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뿐이며 사물 자체가 갖는 신비를 보지 못한다.

 

또 이렇게 모든 사물에서 자신이 믿는 교리에 대한 증거를 발견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심연에서솟아나오는 불안을 잠재우고자 한다. 이에 반해서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세계에 개방적인 태도로 임하는 사람은 세계를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신비스런 진리를 드러내는 환히 열린 터로 경험하며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에게 무한한 신비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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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이러한 우상들이 진정한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갓 미봉적인 도피처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주는 사건이다. 따라서 죽음은 최고의 계시력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플라톤이 말한것 처럼 '죽음의 연습' 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 구성이나 종교적인 피안에 의존하는 것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현존재 에게 항상 임재해 있음을 보이면서 우리를 결단 의 칼날 위에 세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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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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