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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근대철학을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대별하지만,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경험과 이성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근대철학의 쟁점은 경험과 이성의 대립이라기보다 이성이 경험을 초월하여 구성한 형이상학적 체계의 정당성이었다.
즉 이성이 경험을 초월해 구성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근원적 진리로 간주하여 이것을 토대로 다른 학문을 정립하려는 이성주의자들과, 이성의 인식 가능성을 경험의 한계 안으로 제한하려는 홉스,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경험주의자와 이성주의자의 대립은 계속 이어져오다 칸트에 의해 통합된다. 흄은 경험주의자에 속하며, 흄의 날카로운 지적은 칸트를 잠에서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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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에 따르면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노예일 뿐이어야 하고,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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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정념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 흄이 논고에서 주장하는 자아 개념의 특성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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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에 따르면, 오직 저념만이 인간 행동에 목적, 의도 또는 목표 등을 제공하는데, 이 목적이나 의도 또는 목표 등에 의해서 관념들이 연합된다. 즉 목적이나 의도에 따라 사유나 상상력이 작동한다. 이것이 정념이 이성을 지배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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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자아에서 신체와 별개인 정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신은 외부 대상에 대한 신체의 직접적인 생리적 반응이거나, 그 반응들끼리의 상호작용으로 파생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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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의 정신은 두뇌의 생리 작용이며, 그 결과로 파생된 감사, 분노, 사랑, 미움, 찬동, 부인, 연민, 질시 등 다양한 정념들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 정념들의 역학 관계에 따라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신체의 해체에 따라 정념들도 해체되고 소멸하므로 인간의 정신도 사멸하게 된다.
/ 이준호 ‘데이비드 흄’
다른 철학자들의 바램과는 달리, 흄의 이 주장이 정말로 현실적으로 들린다. 사실 오늘날 기준에서 봐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흄의 이런 주장은 시대를 앞서있다. 이러한 데이비드 흄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사상 속에서도 발견된다. 쇼펜하우어는 실제로 흄의 여러 책을 번역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흄의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