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후설은 무기력해진 철학을 혁신해 단지 철학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에 방향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철학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그는 믿었다.
후설은 철학의 혁신 방법으로 ‘무전제성’이라는 현상학의 방법론적 이념을 제시한다. 무전제성이란 현상학적 탐구에서는 어떤 의심스러운 전제나 가정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뜻한다.
가령, 가장 객관적이라고 하는 과학적 지식이 보편타당한 지식인가? 냉정하게 말해서 언젠가는 다시 오류로 판명될지 모르는 지식들은 아닌가? 과학적 탐구 활동은 그 출발점에 모종의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가설들이 언제든 거짓으로 판명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무전제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직 우리 의식에 주어진 것만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구체적 실천 강령을 내놓는다. 그것이 현상학 운동의 모토로 잘 알려진 ‘사태 자체로!’ 이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사태 자체로’ 강령은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대로 아무런 왜곡 없이 드러나게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어떤 문제를 모든 상황적 조건을 떠나 투명하게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후설에 따르면 어떤 무엇이 대상으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이미 우리 의식이 모종의 의미부여 작용을 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후설은 ‘환원’이라는 절차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바꾸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1913년 후설이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인식하는 주관이 자신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단계까지 진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동안 후설에게 의지한 젊은 현상학자들 상당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초월적 상태는 근대 철학의 전매특허 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정한 앎만이 우리 삶에 방향성을 부여해줄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신념은 후설에게서 다시 반복되었다.
실존주의
반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종래의 철학이 인간을 왜곡했다고 보았다. 인간은 후설이나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결코 이성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물론 그런 관심은 이미 18세기의 낭만주의가 그랬고, 더 가까이는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이 그렇다. 실존주의는 그와 같은 반주지주의적 전통에 서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실존주의는 과학과 대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의 문제의식에 잡히지 않는 문제들에 주력했다. 달리 말해 철학을 전통적인 학문의 목적인 진리 탐구와는 다른 길로 인도했다.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전통철학, 특히 형이상학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존재’가 무엇인지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존재를 물어가는 방식의 잘못에 있었다.
전통철학은 존재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존재자의 배후에서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그 어떤 ‘것’을 물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는 존재자의 배후에서 다시금 존재자를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따라서 존재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채, 계속 은폐된 채로 남고 말았다. 이것이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 망각의 역사’이며, 철학이 황폐해진 이유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한다. 따라서 철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존재의 문제를 다시 제대로 해명하는 것이다.
전통 철학에서 주목한 인간의 상황은 무엇이었는가? 인간의 본질, 즉 이성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 귀결은 바로 철학과 인간의 위기였다. 이성적 인간이 인간 본질의 구현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은 곧바로 추상되고 만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현실이다.
오히려 그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사르트르의 선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그런 현실에 대한 고백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은 결코 삶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이성으로 무장한 인간 그것은 허구나 기만으로 보였다. 실존주의자들은 당대 젊은이들이 겪었던 삶의 위기에 철학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그 삶의 주체인 인간, 특히 보편적 존재로서의 이성적 인간이라는 개념적 규정이 삶의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한계상황 그리고 죽음
역설적이게도 한계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죽음은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특히 죽음은 인간이 상황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증거이다. 현실의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한계상황은 우리를 두 갈래의 선택으로 내몬다. 하나는 그나마 익숙한 것에 의지하거나 안주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포기한 채, 누군가 가자는 곳으로 그저 하염없이 떠밀려 따라 가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자신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담대한 여유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느날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고 하자.
한동안 그는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든 부인하려고 한다. 더러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다. 그러나 이렇게 부정하려는 그 상황이 바로 자신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그렇게 고통을 가중 시킬 뿐이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자신에게 남겨진 며칠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한다. 실존주의가 주목한 것은 그렇게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그 순간이었다.
실존적 인간
실존적 인간에게 기성품 인생은 없다. 그는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미리 정해져 있는 길을 간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 가치의 삶은 이미 만들어진 삶일 뿐이다.
한계상황을 견딜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기성품의 안락함 속에서 자신을 숨겨버린다. 무엇보다 기성품 인생에서는 책임이라는 거추장스런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 책임은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의미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한계
아무도 자신을 구속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이 모든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상황이 언제나 유쾌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선택에 대해 자신이 최종 책임을 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자유는 저주와도 같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결국 실존적 존재는 마치 무인도에 혼자 남은듯한 삶이다. 이 실존주의가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진 것도 아무런 방향성을 제시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존주의자는 그 방향성을 스스로 찾으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뭔가를 지을 수는 없다. 혼자서 계속 뭔가를 도모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더 한계상황으로 내몬다.
결국 실존주의가 삶의 진지함을 위해 내건 슬로건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전통적 가치의 붕괴, 전쟁, 암울함, 굶주림의 시대를 위로하려 했던 실존주의는 오히려 사람을 더 벼랑끝으로 내몰아가는 것이 아닐까?
/ 박승억 ‘찰리의 철학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