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미술의 특징
![]() |
|
| 천마도 | 천마총 |
|
신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외래 문화의 영향을 덜 받았고, 도입된 외래 문화도 백제와 고구려를 거쳐 들어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신라 고유의 향토적인 아름다움을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눌지왕 때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보수성이 강해서 법흥왕 때 와서야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이후 신라에서는 불교 미술이 호국 사상과 결부되어 크게 일어났다. 또한 정교한 금속 공예의 발달도 신라 미술의 큰 특징이다. 신라의 회화는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도 별로 없으나 〈천마도〉와〈기마 인물도〉가 대표적인 그림이다.〈천마도〉는 자작 나무 껍질로 만든 말 안장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이고, 말을 타는 인물을 그린〈기마 인물도〉역시 천마총에서 출토된 고분 벽화이다.황룡사의〈노송도〉를 그린 솔거와 양지라는 화가의 활약이 전해지고 있다. |
솔거 (率居 통일신라, 8C중엽전후?)
|
생몰년 미상. 통일신라시대의 화가. 출생·활동시기·족계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뛰어난 화가였음을 전하는 기록과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그린 것으로 기록에 전해오는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노송도>이며, 이 벽화는 노송을 실감나게 잘 그려 새들이 착각하고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밖에 불교회화로 분황사의 <관음보살도>와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 <단군초상> <진흥왕대렵도팔폭>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관음보살 삼상(三像)을 조각하였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황룡사 <노송도>는 소나무의 그림이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인 채색화였을 것이다. 이 일화는 당시에 사실적인 묘사 중심의 회화가 발달하였음을 입증해주는 사례이며, 또 이는 당대 불교조각의 사실적 묘사수법의 발전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에는 그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채전이라는 것을 두었다. 후대에 화원이니 도화서 등으로 부르던 관청이다. 여기에는 다수의 화공이 소속되어 국가적인 공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화승들도 이 관청과 아마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게 아닌가 싶다. 당시의 사찰은 주로 국가적인 사업으로 경영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에 화승들이 반드시 참가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채전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솔거 또한 이 채전에 소속된 화승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역사상 화가로서 정사의 열전(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사람은 유일하게도 솔거 밖에 없다. 그만큼 솔거의 명성이 대단했던 게 사실일 것이다. 그는 경주의 황룡사에는 노송을, 분황사에는 관음보살상을, 그리고 진주의 단속사에는 유마상을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분황사의 관음보살상은 분황사의 좌전 북쪽 벽에 그려졌던 천수관음으로 생각되는데 (삼국유사 권3),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눈 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을 이룬 그림의 작가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 보면 그는 일반 회화뿐만 아니라 불교 회화에도 뛰어난 인물로 생각된다. 그런데 황룡사에 그린 노송은 너무나 훌륭해 까마귀, 제비, 참새등의 새들이 종종 날아들다 떨어지곤 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중이 단청으로 보충했더니 새들이 다시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설적인 얘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그림은 우선 채색화로서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기운생동하는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또 당시 당나라에서 청록산수화가 유행하였고 일본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야마또에가 형성되고 있었던 사실에 의거하여 한번 더 생각을 비약시킨다면 솔거는 청록산수계통의 강한 채색산수에도 뛰어났던 것이 아닐까 유추된다. 혹자들은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 떨어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솔거의 표현 방식이 오늘날 극사실주의 화법을 추구하는 서구의 하이퍼리얼리즘과 유사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들도 하는데 투시원근법에 의하여 발전하여온 서구식 사실표현방식을 그 당시 솔거가 활용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정화, 홍계, 김충의 등 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