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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읽기

자귀꽃 필 무렵

작성자솔밭(김용구)|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자귀꽃 필 무렵/박미정

 

자귀꽃 필 무렵

초여름이 깊어가는 길목, 자귀꽃이 피기 시작한다. 연둣빛 잎 사이로 분홍빛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한 꽃송이가 하나둘 고개를 내민다. 꽃이라기보다 누군가 고운 비단실을 한 올 한 올 엮어 허공에 매달아 놓은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바람에도 흔들리고 햇살에도 흔들리며 마치 세상의 모든 부드러움을 품고 있는 듯하다.

자귀꽃은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닮았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진한 향기로 존재를 알리지도 않는다. 그저 초록 잎 사이에서 조용히 피어나 여름의 한때를 물들이고는 어느새 사라진다. 그래서일까. 자귀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늘 지나간 시간과 잊고 지낸 얼굴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마을 어귀에도 자귀나무가 있었다. 장마가 오기 전이면 분홍빛 꽃들이 구름처럼 피어났고, 아이들은 그 아래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꽃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높이 있었지만,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 귀에 꽂고 웃곤 했다. 그때는 꽃 이름도 모르고 지나쳤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그 나무는 여름의 시작을 알려주는 오래된 시계였다.

자귀꽃은 해가 지면 잎을 오므린다. 마치 잠을 자듯 잎을 접고 밤을 맞이한다. 그래서 예부터 합환목이라 불렸다. 서로 마주 보며 잎을 맞대는 모습이 다정한 부부를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자연은 참 신비롭다. 사람들은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만 나무는 잎을 접는 일만으로도 사랑을 보여준다.

꽃 위에 내려앉은 벌 한 마리가 분주하다. 노란 다리에 꽃가루를 묻히고 이 꽃 저 꽃을 오간다. 벌에게 자귀꽃은 생명의 식탁이고, 자귀꽃에게 벌은 새로운 생명을 이어주는 소중한 손님이다. 서로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말하지 않지만 자연은 그렇게 조용히 공존의 질서를 만들어 간다.

문득 사람의 삶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귀꽃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잠시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누군가의 눈길을 받지 않아도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삶의 가치라고.

꽃은 오래 피어 있지 않는다. 여름 한철 짧게 피었다가 바람 속으로 스러진다. 하지만 꽃이 진 자리에는 씨앗이 남고, 씨앗은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한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이어짐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사람의 인연도 그렇다. 곁을 떠난 사람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씨앗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

자귀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니 생각도 난다. 여름 저녁 마당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들려주시던 이야기들, 저녁밥 냄새와 함께 골목으로 번져가던 웃음소리들, 별빛 아래서 듣던 풀벌레 소리들이 꽃잎처럼 하나둘 피어난다. 세월은 많은 것을 데려갔지만 기억은 여전히 꽃으로 남아 있다.

비가 내린 뒤의 자귀꽃은 더욱 아름답다. 꽃술 끝에 맺힌 물방울은 작은 수정처럼 반짝이고, 분홍빛 꽃송이는 한층 맑아진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고난과 시련을 지나온 사람의 눈빛이 깊어지듯 꽃도 비를 맞고 나서야 더욱 선명해진다.

인생에도 비 오는 날이 있다. 뜻하지 않은 이별과 실패, 견디기 힘든 슬픔이 찾아온다. 그 시간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자귀꽃이 비를 머금고 더욱 아름다워지듯 사람 또한 아픔을 지나며 자신의 빛을 찾게 된다.

초여름 숲길을 걷는다. 바람이 잎사귀를 흔들고, 자귀꽃은 연분홍 파도를 만들며 출렁인다. 그 풍경 속에서 문득 삶의 정답 같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각자의 계절에 피고 지며 자기만의 향기를 남길 뿐이다.

오늘도 자귀꽃은 말없이 피어 있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계절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귀꽃 필 무렵이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나의 계절을 잘 살아가고 있는가. 자귀꽃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바람에 흔들리며 분홍빛 꽃술을 반짝인다. 그 모습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꽃은 피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도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출처 천년바 | 자귀꽃 필 무렵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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