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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상과 부인상

작성자mansan|작성시간08.08.05|조회수79 목록 댓글 0

 

 

        ‘거사’상과 ‘부인’상

                             - 불교적 인간상의 제시 -


                                                                   고  영  섭

                                                                (동국대 불교학과)  




  1. 호칭과 지칭


  인간의 정체성은 ‘명명’을 통해 확보됩니다. 이름은 그 어떤 무엇과 다른 나만의 것을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제가 ‘고영섭’이라고 명명되는 순간 저는 다른 누구와 구분됩니다. 동시에 그와 다른 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요청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동물과 다른 사람이자 여자가 아닌 남자이며 크리스쳔이 아닌 부디스트이며 상인이 아닌 학자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때문에 저는 사람이자 남자이며 부디스트이자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 ‘호칭’이 있습니다. 즉 법호, 아호, 당호, 실호, 택호, 본명, 필명, 별명 등이 ‘그’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호칭은 당사자가 보이는 곳에서 ‘불러서 일컫는 이름’입니다. 때문에 가장 넓은 의미의 칭호가 됩니다. 이와 달리 여러 ‘지칭’도 있습니다. 지칭은 당사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리켜 일컫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곳이란 당사자가 의식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이란 당사자가 의식할 수 없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불러서 일컫는 호칭과 가리켜 일컫는 지칭은 ‘그’를 일컫는 정체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호칭과 지칭에는 어떠한 누구와 다른 나의 고유한 특성이 묻어있습니다. 때문에 호칭과 지칭과 같은 ‘명명’에 의해 붙여지는 이름은 대화상황에서 실제의 자신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기 동일성을 일컫는 이름이 다양해질수록 ‘그’의 내포는 단단해지고 ‘그’의 외연은 넓어집니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상은 매우 다양합니다. 불교의 인간상은 우주관과도 상통합니다. 욕망에 붙들려 사는 욕계, 물질에 붙들려 사는 색계, 정신적인 작용에 붙들려 사는 무색계에 상응하는 인간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부처와 보살을 비롯해서 그 아래로는 연각과 성문이 있습니다. 또 그 아래로는 천인-인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인간상도 있습니다. 이러한 열 가지의 인간상은 불교의 공간관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수행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일컫는 호칭과 지칭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부분적이기는 합니다만 지금 불교계에서 일컫는 불교인들의 호칭과 지칭에는 ‘거사’와 ‘부인’, ‘법사’와 ‘선생’ 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거사’와 ‘법사’는 더러 쓰입니다만 ‘부인’과 ‘선생’은 드물게 쓰여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이름과 직분에 상응하는 호칭과 지칭이 많을수록 그 집단의 문화는 풍부해 집니다.

  하지만 불교 경전 속에서 일컫는 불교적 인간상과 현실 속에서 일컫는 불교적 인간상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적 인간상을 제시하고 일반화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불교에서는 불교적 인간상이 드러나지 않아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 속에서는 겨우  몇몇 ‘거사’의 이름들이 전해올 뿐입니다. ‘부인’의 이름도 겨우 몇몇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약 2만 여명의 ‘스님’들을 제외한 일반 불자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지난 세기 이래 교단 내에서 불교적 인간상에 대한 고민이 부재했던 탓이기도 합니다.

  우리 불교계에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불교인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입니다. 정체성은 오늘 여기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남과 구분되는 내 특성에 대한 자각과 인정은 서로를 배려하는 대전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신행하는 이들이 스스로 거사와 부인, 법사와 선생 등의 호칭과 지칭을 사용할 때 불교문화는 좀 더 대중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상 속에서 불교적 인간상으로서의 정체성과 인식틀을 지니고 살아갈 때 불교의 영토는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살은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보살과 같이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붇다의 지혜와 덕행, 자비와 원력을 상징하는 대보살들과 같은 삶은 불자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때문에 지금과 같이 계속 ‘여성 불자’를 ‘보살’이라고 칭하게 되면 불보살의 위격과 혼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성 불자만을 보살이라고 칭한다면 남성 불자는 보살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여성 불자를 일컫는 보살은 ‘보살이 되라’ 혹은 ‘보살처럼 살아야 된다’는 의미 부여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불교계가 사용하는 보살이라는 호칭과 지칭은 불교사에서 사용해 온 ‘거사’와 ‘부인’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불교의 물리적 심리적 영토를 넓히는 지름길입니다.



  2. 불교적 인간상


  불교 경전에는 참으로 많은 인간상이 있습니다. 지옥에서부터 붇다에 이르는 열 가지 인간상 뿐만 아니라 불법을 지키는 지킴이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계에서는 불교적 인간상의 제시에 대해 크게 자각해 오지 못했습니다. 불교를 평생 동안 믿어도 자신이 어떠한 인간상을 지녀야 되는가를 알 기회가 없습니다. 불자들 모두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재가에서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불교적 인간으로 사는 것이냐에 대한 물음과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해당 절 주지스님이 모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불교적 인간으로서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는 스님이라면 바로 그 분이 불교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절에 다니는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스님의 삶과 생각을 닮고 배우려는 노력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저절로 불교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 불자들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살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삶을 빠뜨린 채 추상적인 교리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직면하고 있는 ‘사성제’와 ‘팔정도’의 현실과 이상을 가르칠 때 그냥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과 같이 주체인 ‘나’를 빠뜨리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체는 사라지고 사성제가 대상화되어 전달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을 일컫는 십이연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리가 추상으로 흐르게 됩니다. ‘나’라는 주어와 주체를 빠뜨리고 대상화된 채 전달되는 교리는 여전히 괄호 밖의 현실을 얘기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가르치는 이의 주체의식도 없고 듣는 이의 주체의식도 없습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종전의 기억은 사라지고 모두가 대상화되어 휘발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그’가 언제 가르쳤고 ‘내’가 언제 들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교리를 듣는 그 순간이 지나면 그 기억이 모두 백지가 되고 맙니다.

  때문에 화자의 주체를 담은 전달과 청자의 주체를 담은 수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주체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것이 대상화됩니다. 붇다의 화법은 주체(주어)의 복원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어(주체)의 복원은 술어(술부)를 주체적으로 규정해 줍니다. 그리하여 주체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붇다의 화법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붇다는 자신의 설법을 듣는 청자를 현재의 청자로 살게 하지 않고 새로운 화자로 살게 하는 화법을 쓰고 있습니다. “자,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처럼 홀로 선 수행자가 각자의 길을 갈 때 붇다의 가르침은 보다 널리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불교적 인간은 바로 이 대목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붇다를 닮은 인간상입니다. 붇다를 닮고 흉내 내고 따라 배우며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적 인간은 발심하는 존재이자 서원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인간이자, 그러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인연들에게 자신의 성취를 다 돌려주기를 맹서하고 다짐하는 인간입니다.

  불교적 인간은 내가 버리지 않은 휴지 한 장을 남을 눈을 의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줍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를 보살적 인간, 이타적 인간, 즉 ‘호모 부디스티쿠스’라고 부릅니다. 그런 존재가 많아지는 사회가 극락이고 정토이며 천당입니다. 그는 자기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 원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불교가 제시하는 ‘불교적 인간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3. 거사와 부인


  초기 율장은 집을 떠나 수행하면서 의식주를 빌어 사는 이를 ‘걸사’(乞士) 혹은 ‘필추’(苾芻)라고 했습니다. 이들 수행자를 우리는 비구와 비구니라고 부릅니다. 비구와 비구니는 붇다 당시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호칭입니다. 이와 달리 재가자들은 우파사카(우바새)와 우파시카(우바이)라고 했습니다. 대승경전은 이것을 청신사(선남자)와 청신녀(선녀인)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거사’(居士)와 ‘부인’(夫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부인은 결혼 유무와 관계없이 여성 불자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거사’를 일컫는 ‘그르하빠띠’ 혹은 ‘가하빠띠’는 붇다 당시부터 ‘장자’ 혹은 ‘부호’ 상인들을 일컫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불교를 믿고 따랐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아난다핀디카 장자와 욱가 장자 등입니다. 대승경전인 『유마경』에서는 ‘비말라끼르띠’ 혹은 ‘유마힐’ 또는 ‘무구칭’을 유마 거사로 불렀습니다. 이에 상응하는 『승만사자후일승대방광방편경』에서는 아유타국왕 우칭(友稱)에게 시집간 ‘슈리말라’를 승만 부인으로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대승경전에서 본격화한 ‘거사’와 ‘부인’은 재가 불자를 일컫는 호칭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유마 거사와 승만 부인은 대승불교가 제시하는 가장 구체적인 인간상입니다. 두 경전에 의하면 유마 거사는 법력이 높아 문수보살 등에게 침묵을 통해 불이(不二) 법문을 하는 붇다에 상응하고 있으며, 승만 부인은 재가에 살면서도 수행을 열심히 하여 성불의 수기를 받는 수행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비달마 불교와 달리 대승불교는 출가와 재가의 ‘가’(家)의 유무에 따라 성불의 유무를 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성 거사 원효대사’와 ‘덕만 부인 선덕여왕’이 가장 잘 알려진 모델입니다. 잘 알려진 거사로는 신라의 부설 거사(진광세)를 비롯해서 고려의 청평 거사(이자현), 조선의 월창 거사(김대현), 이침산 거사(경허 당시), 대한시대의 백봉 거사(김기추), 종달 거사(이희익), 무애 거사(서돈각), 불연 거사(이기영) 등이 있습니다. 부인으로는 승만 부인(진덕여왕), 육영수 부인(영부인), 박주선 부인(정치인), 김경한 부인(법련사 기증), 명원 부인(김미희, 차인)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적 인간인 거사와 부인의 통계는 아직 온전히 집계되어 있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집계가 없다는 것 자체가 불교적 인간인 거사상과 부인상에 대한 조망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자들 저마다가 글을 쓰거나 평상시 말을 할 때 스스로 ‘00거사’ 혹은 ‘00부인’으로 부르고 일컫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금강경』 등의 경전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장로’라는 호칭(또는 지칭)을 1972년 조계종 ‘장로원’이 ‘원로회의’로 바뀌자마자 개신교계에서 쓰면서 이제는 개신교 용어처럼 되었습니다.

  원불교는 ‘교무’라는 호칭을 일반화하고 있습니다. 진각종은 ‘정사’라는 호칭을 쓰고 있고, 기독교계는 ‘목사’ 뿐만 아니라 ‘장로’, ‘집사’, ‘권사’ 등의 호칭과 지칭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거사’와 ‘부인’이 일반화되고 있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조계종에서는 ‘법사’조차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군법사’와 ‘교법사’ 혹은 ‘포교사’로만 겨우 쓸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에 의해 불교의 물리적 영토와 심리적 영토가 점점 위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만학의 제왕이었던 철학이 미학과 윤리학 및 종교학 등에게 봉건영주에게 분봉해 주듯 영토를 나눠주다 보니 남은 영토가 줄어들었음을 반성하고 있듯이, 이제는 불교문화의 회복을 위해 언어와 문화 영토의 분봉으로 탈영토화 된 불교의 영토를 재영토화 해야 합니다. 불교의 영토는 불교 언어와 문화 영토의 수호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언어의 영토를 지키지 못하면 물리의 영토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자리해 왔던 ‘독도’나 ‘대마도’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대자대비하신 예수님!’, ‘자, 이제 축원합시다!’ 등의 용어들이 교회 예배와 성당 미사 등에서 일반화되는 현실을 단지 ‘불교 언어의 수출’이라는 차원에서만 볼 수 있겠습니까? 자산에는 자본과 부채가 함께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무역에도 역조가 있듯이 자본금을 까먹으면서도 수출만을 일삼는다면 언젠가 부도가 나는 일은 자명합니다. 새로운 자본의 창출을 위해 고민하듯이 새로운 언어문화의 창출을 위해 불교계가 좀 더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적 인간상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거사’와 ‘부인’의 호칭과 지칭은 일반화되어야 합니다.



  4. 선생과 법사


  불교인으로서 출가를 하지 않은 재가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호칭과 지칭은 ‘거사’와 ‘부인’입니다. 즉 거사와 부인은 재가에 머물며 불교를 신행하는 불교적 인간입니다. 이와 달리 선생과 법사는 거사와 부인과는 위격이 다른 호칭이자 지칭입니다. 선생은 ‘퇴계선생’, ‘율곡선생’, ‘다산선생’과 같이 스승의 역할을 한 분들을 일컫는 호칭(지칭)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란 존칭을 객관화시켜 ‘님’을 빼고 일컬은 것입니다. 

  만해를 ‘선생’이라고 해야 하느냐 ‘선사’라고 해야 하느냐고 논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찍이 그는 결혼도 한 뒤 출가를 했고 불교의 포교를 위해 승려들의 취처를 허용해달라고 조선총독부에 건백서까지 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통 비구 승단에서 만해는 도외시되었습니다. 하지만 문단과 재야 등에서 ‘만해선생’으로 알려지면서 ‘만해’는 전국적인 인물로 거듭났습니다. ‘만해축전’에서 기획된 ‘만해대상’을 시상하면서 만해는 국제적인 인물로 부각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비구승단 내부에서도 만해를 ‘선사’로 일컬어서 되찾아와야 된다는 자성이 일고 있습니다. 만해의 경우에서 보듯이 불교 전통에서는 법적인 ‘결혼의 유무’가 여전히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구한 말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에 의해 도성입성금령이 해제되면서 시작된 취처 문제는 일제 식민지 시대 내내 문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그 문제로부터 비구-대처 분규가 일어나면서 한국불교는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여타 종교의 소극적 청산과 달리 불교계는 과도하게 일제 잔재를 청산하면서 큰 댓가를 치렀습니다. 그 상처와 후유증이 오늘의 한국불교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핵심에는 ‘결혼’ 문제와 더불어 ‘종권’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정치와 성의 문제는 언제나 함께 해 왔습니다. 종교계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불교는 이 두 주제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도덕성이 생겨나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 주제로부터 부자유함으로써 도덕성을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만해(한용운)와 효당(최범술) 등은 ‘스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선생’이라는 지칭이 익숙합니다. 이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출가자이면서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정치와 성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불교인이면서도 시대의 한복판에서 역사의 문제를 껴안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문제는 당사자의 의식이 문제입니다.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지키는데 있어 결혼 유무가 문제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당사자 스스로가 출가자 또는 재가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 경우 그를 어떻게 규정해야할 것이냐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한국불교계의 출가자 다수가 외국 유학 이후 환속하여 결혼했습니다. 환속하여 결혼하여 사는 이들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느냐에 20세기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 여부가 달려있습니다. 이들을 ‘법사’로서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선생’으로 일컬을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들에게 ‘속성’(俗性)을 붙여 부를 것인지 아니면 아호 혹은 법호에 선생을 붙여 부를 것인지가 여전히 정리되어 있지를 못합니다. 불교 교단은 이 문제의 해결에 깊이 고민해야만 합니다.

  당시의 지성이자 지도자였던 만해(한용운), 퇴경(권상로), 지암(이종욱), 포광(김영수), 응송(박영희), 효당(최범술), 범산(김법린), 백성욱, 뇌허(김동화), 효성(조명기), 법운(이종익) 등을 여전히 출가자로서 규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법사’ 혹은 ‘선생’으로 일컬어야 하는지 아직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문제는 20세기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주요한 잣대입니다. 동시에 21세기 한국불교를 밝혀나갈 지남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불교적 인간상으로서 ‘거사’와 ‘부인’의 호칭과 지칭을 통해 불교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이 급선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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