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고대 인도의 두 영웅…붓다와 마하비라
#풍경1
2500년 전,
인도에는 두 명의
영웅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붓다,
또 한 사람은
자이나교를 일으킨
마하비라였습니다.
당시
자이나교는
불교 못지않게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마하비라와 붓다가
만났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무소유와 불살생을
강조하는
자이나교는
불교와 무척 닮았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자이나교에는
‘살레카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레카나’는
한자어로 ‘삼매사(三昧死)’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곡기를 끊고,
명상을 통한
적멸의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는 걸
뜻합니다.
#풍경2
1955년 8월,
인도 마하라슈트라주에서
실제로
살레카나가 있었습니다.
자이나교 공의파의
지도자인
산티사가라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살레카나를 했습니다.
자이나교 공의파의
수행자 중 일부는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지냅니다.
그래서
‘공의파(空衣派)’라고 부릅니다.
전적인 무소유를
실천하는 셈입니다.
그는
음식 공양을 통해
하루 한 끼만 먹었고,
발우(밥그릇)도 갖지 않고
자신의 맨손으로
받았습니다.
8월 14일부터
3주 넘게
물만 먹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물을 먹기가 힘들어지자
물마저 끊었습니다.
그렇게
자이나교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았습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살레카나를
수행의 최고 경지로
꼽습니다.
욕망을 이긴
고요와 적멸의 상태에서
죽기 때문에
윤회를 벗어난다고
믿습니다.
요즘도
살레카나가
종종 있느냐고요?
그렇진 않습니다.
살레카나는
아주 드문 일입니다.
2023년에는
자이나교의 승려인
아차르야비댜사가르마하라즈가
살레카나를 통해
죽음을 맞기도했습니다.
요즘은
만약 누군가
살레카나를 하겠다고
선언한다면,
그의 주위에 CCTV부터
설치됩니다.
그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신자들에게
모두 공개됩니다.
철저한 단식을 하는지도
투명하게
검증을 받게 됩니다.
집에서
출퇴근하며
단식 투쟁을 선언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단식 쇼’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숭고한 행위로
여기지만,
사회적으로는
이게 자살인가 아닌가를
놓고서
논란이 일기도 합니다.
#풍경3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자이나교 수행자는
도대체 왜,
스스로 곡기를 끊고서
죽음에 들고자
하는 걸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카르마 때문입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도의 종교 전통에는
카르마(業)의 개념이
있습니다.
전생에 내가 지은
일들의 결과를
이번 생에서
받는 겁니다.
자이나교는
카르마로 인해
윤회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나쁜 카르마를 없애려면
욕망을 차단하고
정신을 정화하는
고행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고행의
최고 경지가
다름 아닌
살레카나입니다.
여러모로
닮은 종교인
자이나교와 불교는
바로 이 대목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벌어집니다.
#풍경4
인도의 달마 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선불교를 전했습니다.
남인도의 왕자 출신인 달마 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선불교의 씨앗을 심었다.
중국 쑹산에 있는 달마상. 백성호 기자 [출처:중앙일보]
달마의 제자는 혜가,
혜가의 수제자는
승찬입니다.
승찬은
한센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전생에 지은 업보(카르마)로 인해
몹쓸 병에 걸린다고
믿었습니다.
승찬도
그랬습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짓을 했길래
이 몹쓸 병에 걸렸을까.
그렇게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혜가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카르마를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승찬이
혜가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전생의 죄로 인해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저의 죄로 인해
너무 괴롭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혜가 선사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의 죄를
없애주겠다.
여기
그 죄를 내놓아라.”
승찬은
죄를 찾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죄를 꺼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지요.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죽도록
자신을 괴롭혔는데
말입니다.
승찬이 말했습니다.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 선사가
한마디 던졌습니다.
“네 죄가
이미 없어졌다.”
그 말을 듣고서
승찬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혜가의 뒤를 이어
중국 선불교의 세 번째 조사(祖師)인
승찬 선사가 됐습니다.
혜가 선사의 답을 듣고서
승찬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렇습니다.
죄라는 게,
카르마라는 게
본래 비어 있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 순간,
자신의 죄의식이
눈 녹듯 사라지고
마음의
본질적 평화와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불교와 자이나교는
길이 갈립니다.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죄의식이라든가,
카르마라는 건
본래
비어 있을 뿐입니다.
그걸 깨치면
카르마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자이나교처럼
육신의 죽음과 함께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
불교는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드는 겁니다.
죽어서
열반에 드는 게 아니라,
산 채로
열반에 드는 겁니다.
그래야만
삶의 평화와
죽음의 평화가
하나가 될 테니까요.
살아서 앉는 자리와
죽어서 앉는 자리가
하나가 될 테니까요.
붓다의 한 마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구름 속에 있을 때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구름을 벗어나면
비로소
앞이 보입니다.
내 삶도 보이고,
주위 사람들도 보이고,
나무와 강과
자연도 보이고,
우주도 보입니다.
붓다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모두
하나씩의 달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에고가 꾸린
착각의 구름을 벗고
이치를 깨치라고
말합니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말입니다.[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