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혜안, 성경과 통하다…“굉장한 파워” 천부경 81자
#궁궁통1
우리 민족에게는 『천부경(天符經)』이라는
오래된 경전이 있습니다.
예부터 동이족에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걸
고조선 시대에 비로소 ‘녹도문자(鹿圖文字)’로
기록했다고 전해집니다.
‘녹도문자’가 뭐냐고요?
사슴의 발자국과
사물의 형상을 보고서
단군 왕검 대에 지었다고 하는
고대 문자입니다.
실제 문자의 생김새가
사슴 발자국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거북의 등껍질에 썼다는
갑골문자와도 좀 닮았습니다.
‘천부경’은 처음에 녹도문자로 기록돼 전해졌다고 한다.
‘천부경’은 한민족에게 구전돼 내려오다가 단군 왕검대에 이르러
녹도문자로 기록됐다고 한다. [중앙포토]
예부터 쭉 내려오던 천부경을
신라의 최치원이
묘향산 석벽에 전문(全文)을 새겨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걸 근대에 들어서
탁본으로 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천부경』은
무언가 안갯속에 있으면서도
무언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그런 묘한 경전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거기에 담긴 내용입니다.
#궁궁통2
천부경은 가로 9자, 세로 9줄로
구성돼 있습니다.
모두 합해 81자입니다.
아주 짧습니다.
81자를 모두 써놓으면
9×9의 네모난 모양이 됩니다.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앞으로 읽어도 ‘일시무시일’이고,
뒤로 읽어도 ‘일시무시일’입니다.
하나(一)는 없음(無)에서 시작되고,
없음(無) 또한 하나(一)에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 다섯 글자에
이 우주 만물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중앙포토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경전의 양이 방대하고,
또 방대합니다.
그 방대한 양을 줄이고,
또 줄이면
무엇이 될까요.
270자의 『반야심경』이 됩니다.
『반야심경』은 아주 짧은 경전이지만
팔만대장경에 담긴 광활한 이치가
모두 응축돼 있습니다.
그런 『반야심경』을 추리고,
또 추리면
딱 여덟 글자가 됩니다.
다름 아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손에 만져지는
이 세상과 만물이 ‘색(色)’입니다.
불교는 그 색의 실체가
‘공(空)’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색(色)=공(空)’이고,
‘공(空)=색(色)’이 됩니다.
이건 과학 중에서도 최첨단 과학인
양자 물리학에서 던지는
핵심적 화두와 통합니다.
“이 세계는 입자인가, 아니면 파동인가.”
불교식으로 풀면 이렇습니다.
“이 세계는 색(色)인가, 아니면 공(空)인가.”
『천부경(天符經)』의 첫 구절에는
이런 이치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하나는 없음과 통하고,
없음은 하나와 통한다.
다시 말해 있음과 없음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양자 물리학이 더 발전하면
입자와 파동이 둘이 아님도
과학적 증명이 되는 날이 오겠지요.
#궁궁통3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니라는 게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그건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변에 불과한 것 아니야?”
꼭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일상에서 올라오는 짜증이나 분노 때문에
힘들어 하실 테니까요.
또 세월이 흘러서
노년이 되면
이 세상과 작별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실 테니까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갖는
본질적 두려움을
똑같이 안고 사실 테니까요.
그런 분들도
내 안의 분노 때문에
사는 게 힘들었는데,
어느 날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 분노의 정체가
사실은 공하구나.
그걸 알면
사는 게 얼마나 수월해질까요.
사는 게 얼마나 가뿐해질까요.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니라는 건
단순한 관념적 사변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궁궁통4
『천부경』에 대한 해설서를 썼던
김백호 선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때 불교 출가자였던 그는
뜻한 바가 있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인물입니다.
『천부경』에 대한 그의 평은 이랬습니다.
“굉장한 파워다.
이건 한마디로 깨달음의 글이다.
진리의 글은 짧으면 짧을수록 더 좋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선(禪)’이 나온 것이다.
경전의 수가 많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천부경』의 저술 연대와 작자,
혹은 책의 진위 여부 등에 대해서
세상에는 갑론을박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이 ‘깨달음의 글’이란 것입니다.
세상과 우주의 이치를
확연하게 꿰뚫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는
글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그게 언제이든,
『천부경』에는 깨달은 자의
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겁니다.
사실,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천부경』의 저자가 누구인지,
저작 연대가 언제인지,
누구에 의해 발굴됐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책에 진실한 이치,
다시 말해
진리가 담겼는가.
이게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만약 진리가 담겼다면
우리의 마음도
그 소리를 따라서
발걸음을 뗄 테니 말입니다.
#궁궁통5
『천부경(天符經)』의 첫 문장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입니다.
둘째 문장도 놀랍습니다.
‘析三極無盡本(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천일일지일이인일삼)’
본래인 하나가
하늘과 땅, 사람의 순서로
쪼개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셋으로 쪼개졌어도
근본 다함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과 땅과 사람의 본성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천부경』의 이치가
불교의 이치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이치와도
맥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하느님(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에서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사람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셋으로
쪼개어졌지만,
신의 속성은 이 셋에
모두 깃들어 있습니다.
하늘도 신의 속성과 통하고
땅도 신의 속성과 통하고
사람도 신의 속성과 통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다.”
『천부경』에 녹아 있는
하늘과 땅과 사람에 대한
깊은 눈이 참 좋습니다.
거기에
한민족의 혜안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