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게 주어진 두 가지 복: 자손과 유업의 번성
성경: 창세기 30장
지난 줄거리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받고서 밧단 아람으로 소망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미래에 아내가 될 라헬과 레아와 또 외삼촌 라반을 만났습니다. 라반과 라헬과의 혼인 지참금으로 7년을 일하기로 약속했으나 라반은 그를 속여서 먼저 레아와 혼인케 함으로 14년을 봉사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통해서 네 아들을 언약 자손으로 주셨습니다. 라반의 속임수 때문에 레아를 아내로 억지로 받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레아를 야곱의 아내로 선택하신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두 가지 복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두 가지 복 주시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의 자손이 많이 번성한 것이고(창 29:31-30:24), 둘째는, 야곱의 재산이 많이 번창했다는 것(27-43)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1. 야곱 자손들의 번성 (29:31-30:24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에 따라 지금 야곱의 자손이 많이 번성케 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야곱의 아내들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마치 서로 자식 낳기 경쟁을 하여 자녀를 많이 번성케 하는 것 같이 보여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자식 낳기를 열망했는가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때 각기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내들 모두가 다 자기 남편이 받은바 그 위대한 구원의 약속을 자기들도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방식은 연약하고 죄악된 모습으로 가득 차 있지만 자기 아들을 통해서 구원자가 오시리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아들 낳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는 방식은 육을 따라 살고 있지만 그 모든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약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가족들을 통해서 언약의 자손들을 어떻게 번성시켜 나가시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라헬의 투기
레아가 이미 자식을 네 아들이나 낳자 라헬은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만이 아니라 성을 내는 외적인 표현으로까지 드러납니다. 얼마나 그것이 절박하고 심했던지 라헬은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해라, 아니면 죽겠다’ 고 협박을 합니다. 여기서 ‘죽겠다’는 의미는 원문의 의미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은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대로 성태하지 못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겠느냐”하고 크게 분노를 하며 책망을 합니다. 야곱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라헬을 통해서 자식을 더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나중에 요셉을 크게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기적적인 출생과 자신도 이삭의 기도를 통해서 20년만에 잉태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태를 열고 닫는 분은 오직 여호와이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혹여 육신적으로 낳았다 할지라도 에서나 이스마엘이 제외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 없이 여호와의 나라에서 들어와 존재를 시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요1:12-13). 라헬은 이미 아브라함의 언약 자손이 받은 복과 그 소망이 어떤 것인지를 야곱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식이 그 언약의 복을 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니는 네 아들이나 낳았는데 자신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식이 없자 부끄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질투도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다른 방식으로 자식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종인 빌하를 첩으로 주어서라도 자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 당시 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서 아이를 낳으면 여주인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라헬의 투기를 통해서 많은 야곱의 자손들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라헬의 시기심은 거룩한 사랑과 반대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많은 언약 백성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빌하는 라헬에게 단과 납달리 두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단 곧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주셨다’ 하고 하였으며, 둘째는 납달리 곧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종의 아들들을 장래 자기 백성의 족장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전에 아브라함 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과 또 리브가를 통해서 낳은 에서는 언약백성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렇게 죄악된 방법으로 종에서 태어난 자들도 이제는 인간들의 죄를 이기고 성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2) 레아의 경쟁
이것을 본 레아도 자기의 잉태가 멈춤을 보고 경쟁하여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갓 곧 ‘복되도다’ 였습니다. 그리고 또 아들을 낳으매 아셀 ‘기쁘도다’ 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때 르우벤이 자기 어머니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인해서 합환채를 갖다 드렸습니다. 이 합환채는 마치 인삼 뿌리와 같은 것인데, 곧 남자의 기운을 돕고 여자의 임신을 돕는 약용으로 쓰인 것입니다. 아이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던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제발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내게 줘요’하고 부탁했습니다. 그 대신에 “오늘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고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레아가 야곱에게 ‘내가 당신을 확실히 샀노라’합니다. 그 밤에 야곱이 레아에게로 들어가므로 레아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잇사갈 곧 ‘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아들을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낳으니 스불론 곧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셨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딸 디나를 낳았습니다. 여기서 레아 안에서만 여섯 아들을 낳았고 또 종의 아이까지 여덟 아들을 낳으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 그녀를 통해서 더 크게 번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마지막에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여기‘생각한다’[자카르, 기억하다]는 낱말은‘언약’의 언어인데, 하나님이‘언약을 기억하심’을 뜻합니다[참조. 레 26:42, 45]. 대홍수로 인류가 다 망한 때에 하나님이 노아를‘권념’[생각]하셔서 마침내 물이 감하게 하신 것처럼,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의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참조. 느 5:19; 시 25:7)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서 결코 라헬도 제외시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라는 장자권을 이어 받을 아이를 주시기 위해서 라헬을 인내케 하신 것입니다. 그녀가 아이를 낳자, 그 이름을 요셉 곧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여호와께서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불임은 그녀에게는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에서 죽은 자와 같아서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헬에게 아들을 주심으로 그녀의 모든 부끄러움을 해결하셨습니다. 이렇게 약속의 아들을 주심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일시에 제거하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며, 죽은 자를 살려서 영예의 자리에 앉히시는 분이십니다(삼상2:5-10,눅1:46-56). 그녀는 또 하나의 아들을 더해주시기를 소원하면서‘요셉'(24)이라고 이름합니다.‘그가 더하신다'(he increases)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청원한 라헬의 소원을 담은 이름입니다. 이 소원은 가나안 땅으로 가서 벧엘을 지났을 때 그녀의 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35:16-20). 거기서 그녀는 죽었지만, 약속에 참여한 여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아들들의 이름을 모두 하나님과 관계해서 지었는데 이것은 아들 얻음의 의미를 하나님과 자기들의 구원의 소망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 때문에 이들의 다툼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위 다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지위 다툼은 나중에 요셉과 형제들과의 다툼으로도 나타납니다. 장자의 명분을 갖기 위한 신령한 싸움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라헬과 레아 사이의 투기와 서로 경쟁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열두 방백의 조상들이 탄생하게 되어 하나님이 벧엘에서 약속하신 야곱 자손의 번성이 이루어졌습니다. 곧 인간 사이의 애증과 갈등, 사랑과 미움, 시기와 질투, 다툼과 경쟁등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조차도 사용하시어 자신의 선하신 뜻과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이 일이 결단코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처럼 풍성하시다 는 말이지 우리의 죄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하나님께서는 레아와 라헬의 투기와 경쟁심을 통해 그 뜻을 이루셨으나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악함을 정당화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약속을 신실히 이루어 가시는 분이신가를 강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2. 야곱의 귀향 표명(25-26절)
이제 번성하리라는 벧엘의 약속처럼 열한 아들을 낳게 되고 그때 야곱이 라반에게 약속한 봉사의 기한 14년이 다 차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창세기 30:25-26절) 25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26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그가 귀향 표명을 한 것은“요셉을 낳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곧 앞으로 이스라엘의 장자로서 구원자 그 아들을 낳은 때였습니다. 그때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내 고향 내 본토’로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동안 야곱은 결코 이곳을 영원히 머물곳으로 여기지 않고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비록 그곳이 약속의 땅은 아니었어도 그곳에서의 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로 알고 성심을 다하여 일을 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방땅에서의 그의 일도 하나님의 벧엘에서 하신 약속을 이루는 기간이요, 그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불철주야 힘써서 험한 고생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동안 그런 험한 고생 속에서도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반드시 그에게 하신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루시기까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요셉도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환상의 계시를 본 것이 틀림없이 노예 생활과 투옥 시기에 그 계시가 그를 격려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는 고백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할 수 있느냐 하는 “하나님 앞에”의식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시련의 욥처럼 우리는 “나는 그의 입의 말씀을 나의 일용할 양식보다 귀히 여겼노라”(욥 23:12).
그렇게 야곱은 20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라고 뻐기지 않고 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으면서 죽도록 충성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창세기31:38-40절) 38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40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야곱은 외삼촌의 일이라고 14년만 때운다는 생각으로 일하지 않고 비록 부당한 삼촌의 일이어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로 알고 전심을 다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힘써 일할 때 복을 내리사 잘 되게 하시지, 일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나는 축복의 약속을 받은 자이니 거저 복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님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손의 수고 위에 임합니다. 야곱이 불철 주야 삼촌의 양을 치는 동안에 자녀들을 번성케 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수고에 축복을 하셔서 나중에 라반에게 속아서 빼앗긴 유업들을 하나님께서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참고 묵묵히 속임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일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 한 것이 그의 인내의 근원이었습니다. 때로는 당장에 수고한만큼 무슨 보상이 안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약속의 자손들은 그 일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하여 부지런히 손의 수고를 하면 주께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는 주지 못할 하나님 나라의 빼앗기지 않은 영원한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3. 야곱 재산의 번성
그렇게 떠나겠다고 하는 야곱에 대해서 라반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7절을 읽읍시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라반까지도 야곱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큰 복을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는 달리 야곱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밧단 아람 땅에까지도 확산되었습니다. 그것을 라반까지도 알았습니다. 가나안땅이 아닌 이방 밧단 아람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상속자 야곱으로 인해서 축복이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복,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고 그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는 그 복이 이방 땅에 임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허물이 많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손이 있는 곳은 이방 땅까지라도 곧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야곱의 약속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방 땅에까지 축복이 임할 것을 예고편처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로 인하여 이방 땅에까지 여호와의 복이 임하게 하시는 선취적인 사건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리했습니다. 칼빈의 그 가르침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사회, 가정 모든 영역에 미치므로 서구 사회가 여러 면에서 새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관계하는 가정, 직장, 사회, 정치, 문화, 경제, 학교 그 모든 곳에서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 교우들도 여전히 죄를 더해가는 죄인들이어서 그들이 비록 이 땅에서는 별로 아름다운 모양이나 흠모할 모양도 없고 여전히 많은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커서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라반은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라반은 야곱의 돌아갈 수 없는 약점을 붙잡고 불평등한 계약을 잘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품삯을 정하여라. 그래서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자”고 말합니다. 라반은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임을 알았을 것이고 그 야곱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축복을 하셨는데도, 라반은 하나님의 언약 따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야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만이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는 언약의 복보다는 야곱을 통해서 자기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고자 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이용해서라도 세상에서 부귀와 번영을 누리려는 기복신앙적인 욕심에 가득차 있는 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이제 자기도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는 유업이 있어야 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라반은 “내가 네게 무엇으로 품삯을 주랴” 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양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염소 중에 점있는 자와 아롱진 것을 가려내어 그것으로 자기의 품삯을 삼자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라반은 쾌재를 부르고 쾌히 동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원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양 중에 아롱지고 점이 있는 것은 우량종이 아니고 또 별로 많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양이나 염소는 숫자도 적을뿐더러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창31:11-12절)
(창 31:11-12)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라반은 그날에 수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 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양 중에 검은 것들을 가려 아들들의 손에 붙여 야곱과 사흘 길을 뜨게 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아롱진 염소나 검은 양을 가질 수 없도록 아예 여지를 없앴습니다. 그것은 아롱진 것과 검은 것이 자기의 순 색 양들과 교미하지 못하도록 꾀를 부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야곱에게는 남은 자기의 양떼를 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 역시 하나님의 약속도 있었지만 자기의 경험과 꾀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여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베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덜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무늬 있는 양과 라반의 양을 따로 두어서 섞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한 양이 새끼 벨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가지를 두어서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베개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약한 양은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제는 심히 풍부하여 노비와 약대와 나귀도 많게 되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야곱이 라반에게 이용당한 것 같지만 그들의 욕심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 주십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여 품삯을 마음대로 바꾸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꾀를 무너지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부자가 된 원인이 그가 꾀를 써서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라반의 짐승이 야곱의 짐승을 낳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31:7-12참고). 하나님은 야곱이 라반에게서 불의를 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불의한 처우 속에서 야곱을 지키시며 야곱의 집을 세우도록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함께 계시며, 지키며, 이끌며,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28:15, 31:3참고). 이러한 사실이 31장 7-9절의 야곱의 말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 31:7-9절)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8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원래 라반은 야곱이 수고한 만큼 당연히 야곱에게 정당한 품삯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야곱을 이용해서 자기의 재산을 불리는데 이용만 했지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수고한 수고의 대가를 라반에게서 빼앗아서 주도록 하신 것입니다.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 오셨다는 사실을 더욱 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공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셔서 복을 주신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반은혜 속에 사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이 법은 적용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수고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세상의 법도 세상 나라도 바르게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일반은혜의 영역 속에서도 바른 법이 세워지도록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그런데 라반과 야곱 사이에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인 세상 구속을 위한 일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을 복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비록 야곱이 여러 가지 연약이 있고 잘못된 것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구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간섭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야곱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오늘 우리 역시 부르심을 입었고 계속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붙드심을 힘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이 많은 재산을 얻게 하신 것은, 그가 많은 자녀를 얻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벧엘에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처럼 야곱에게 많은 자녀와 재산을 주신 것은,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약속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살라고 우리에게도 온갖 선한 것을 다 주십니다. 설령 우리 눈에 악한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면, 틀림없이 주님이 그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에 당하는 고난이고, 믿음을 위한 시련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것이 실로 선한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아내들의 연약함 조차도 사용하시어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연약함조차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이 일이 결단코 야곱의 아내들의 죄나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처럼 풍성하시다 는 말이지 우리의 죄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것을 두고서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인간의 허물과 약점을 정복하시고, 당신의 은혜로 무가치한 것을 채우신다” 고 하셨습니다.
또 여호와의 축복이 야곱의 수고위에 임한 것처럼 우리의 손의 수고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인 우리도 세상일이라고 하여서 소홀히 하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당장에 무슨 보상이 안 돌아오고 수고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약속의 자손들은 그 일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하여 부지런히 손의 수고를 하면 주께서 세상에서는 주지 못할 하나님의 나라의 것으로 보상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야곱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내의 근원입니다. 야곱이 허물이 많고 약점이 참으로 많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서 이방 땅까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곳이 되게하셨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에 그 하나님의 교회로 인하여 이방 나라에까지 여호와의 복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도 여전히 죄를 더해가는 죄인들이어서 비록 이 땅에서는 별로 아름다운 모양이나 흠모할 모양도 없이 많은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커서 우리가 머무는 곳에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거룩하신 주님, 저희들을 주께서 부르시사 우리가 수고한대로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수고하지 아니한 영원한 나라의 복을 영생을 죄사함을 하나님의 나라를 넘치도록 주셨사옵나이다. 그리고 저희들의 연약함이나 죄악이 많음에도 주님의 은혜가 커서 우리의 죄를 이기고 능히 은혜를 베푸심을 인하여 찬미하옵나이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의 일이라도 할지라도 세상의 일로 생각지않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여 주께 충성하므로 그것을 통하여도 하나님의 유업을받아 누리게 하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연약과 부족이 한 없이 많음에도 교회가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우리가 함께하는 가정이나 사회나 정치나 문화나 경제나 교회나 직장이나 학교에 주님의 복이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창세기 30장 복습 문제
1.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육신적인 일을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2. 하나님은 인간의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3. 야곱은 이방 땅에서라도 자신의 직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습니까?
4. 야곱의 억울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보상을 하십니까?
5. 하나님의 백성의 복은 어디까지 임하는 것입니까?
*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은 바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