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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강설 오전

창세기 32장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작성자나룻배|작성시간26.06.22|조회수25 목록 댓글 0

창세기 32장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창세기 32)

 

오늘 본문은 야곱이 아비 이삭이 있는 고향,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데, 1절로 2절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나 그들을 마하나임이라고 칭하는 내용이고 3절로 21절은 에서를 만나기 앞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에서의 환심을 사려하는 야곱의 계획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로 32절까지는 홀로 남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축복을 얻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들(1-2)

하나님께서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에 벧엘에 나타나셔서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사자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돌아올 때도 천사들을 보내어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동안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천사들을 통하여 진치고 보호하셨듯이 그가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장이셨습니다. 이것은 악을 멸하는 전쟁에 앞서서 여호수아 앞에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칼을 빼들고 서 있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군대입니다. 이제까지 야곱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호하였는데 이제는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 앞에는 더 중대한 문제가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에서와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욕심과 간교함이 초래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로 인하여 도망가다시피 해서 그 땅을 떠났고, 20여년 동안을 노예처럼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자손과 큰 부를 이루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약속한대로 에서의 마음이 풀리면 다시 곧 부르시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에서의 마음이 풀렸다는 소식은 듣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밧단아람에서 떠나서 가라하셔서 순종하고 떠났지만 지금 그의 마음을 두렵게하고 무겁게 한 사실이 바로 그 사실이었습니다. 아마 야곱은 형과의 화해에 대해서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을 통해서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에 대한 어떤 죄책과 멍애를 늘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늘 마음이 무겁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것이 내 잘못된 행동으로 인하여 그리되었다면 더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형과 대면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에서와 만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군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호위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야곱은 자기를 호위하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편안함, 든든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자 하여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군대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군대들은 야곱의 앞뒤를 호위하였습니다. 즉 뒤편의 라반으로부터와 앞편의 에서로 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야곱에게 이 땅을 떠날 때에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이제 다시 돌아와서 그 약속의 땅 안에서도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영원토록 출입을 지키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에서와의 만남 준비- 기도와 예물 (3-21)

야곱이 에서를 만나서 문제를 해결코자 한 이유가 있습니다. 형 에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형의 분노를 가라앉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마음을 억누르는 그 죄책의 짐도 용서를 받음으로 벗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 형의 복수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하고 자신도 평생 그것이 죄책의 무거운 자책으로 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의 반응을 떠보고자 자기 종들을 보내어서 주의 종이 밧단아람에서 나그네처럼 지내다가 돌아왔노라고 기별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야곱이 형을 속여 그 축복을 빼앗으려한 옛 허물은 야곱으로 더욱 비참한 저자세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 저 자세와 간곡한 화해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종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을 때에 400명의 군대는 보통 큰 군대가 아닙니다. 야곱의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에서가 만약에 마음이 풀려서 환영을 하려고 한다면 굳이 그 많은 군대가 아니라 단지 몇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오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말을 듣자 간담이 녹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에 마음이 답답해지고 초조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른 인간의 술수를 짜내기 시작합니다. 떼를 두떼로 나누어서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는 도망하리라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한 떼라도 건져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불안한 그는 또한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고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과연 주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지팡이만 가지고 건넜더니 이제는 두떼를 이루게 하셨나이다. 그런데 에서가 두렵습니다.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를 칠까 두렵사옵나이다. 그래서 건져주시옵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사 네 씨로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라고 하셨나이다. 만약 해침을 당한다면 그 은혜와 언약이 어찌되겠사옵나이까? 언약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절박한 상황이 되니 그는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에서와 야곱의 모습을 우리가 대조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떠나있는 동안 자기 마음대로 자기 아버지를 떠나 세일 산으로 갔고 이렇게 해서 약속의 땅으로부터 떠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땅의 소유권은 형제 사이의 죽고 죽이는 일이 없이도 야곱을 위해서 임자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에서는 큰 부자가 되어서 떠났는데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여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세일 산에 거하며 왕처럼 군림하였습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사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욕망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야곱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에서는 비록 스스로 그곳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의해 자기가 간절히 소원했던 땅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에서는 현재의 욕망을 따라 살기 위해서 이미 가나안땅에서 떠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 자기 힘으로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 같습니다.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오므로 그는 자기의 욕망에 따라 칼을 의지하고 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아직도 자기 술수를 의지하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하나님의 선택 자와 그렇지 않는 자의 모습이 얼마나 확연히 다르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야곱역시 하나님을 의뢰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에서가 두려워서 인간적인 지혜를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에서와의 화해를 위해서 먼저 에서의 마음을 예물로 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을 통해서 에서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그것도 작은 선물이 아니라 대단히 많은 선물입니다. 무려 이백 마리의 암염소와 이십 마리의 숫염소, 이백 마리의 암양과 이십 마리의 수양, 그리고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 암소가 사십에 황소가 열, 암나귀가 이십에 새끼 나귀 열, 이렇게 해서 거의 육백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화해의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선물을 통해 형의 마음을 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여러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각 떼마다 상당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왜냐면 여러 차례에 걸쳐 선물을 제공하므로 그 분노를 감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지극히 야곱다운 생각이었습니다. 야곱은 생각하기를 여러 차례의 선물이 그 형 에서의 마음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입니다(14-15) 여기서 그는 여전히 인간의 꾀를 쓰고 있는 야곱의 전형적인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아직도 인간의 술수와 지혜를 가지고 에서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22-32)

그러나 야곱은 식구들을 얍복 강 건너로 보내놓고 자신은 두려움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안절부절 합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야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야곱으로 남아서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고 이스라엘로 변화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로 변화될 때 형 에서와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도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가나안을 상속받고 한 민족을 이룰 거룩한 조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가나안땅을 상속받아 한 민족의 조상이 되기에는 인간적인 꾀를 써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는 자의 인격으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와 씨름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씨름 정도가 아니라 치열한 싸움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끊임없으신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상대하셔서 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놓은 싸움이었습니다.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보시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날이 새니 나로 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말을 듣고 가지 못하도록 꽉붙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에는 야곱이 자신을 다치게 한 사람을 빨리 가게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꼭꼭 붙들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때 야곱은 그에게 축복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씨름을 통해서 야곱 스스로의 꾀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외에는 자신이 살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알기로 야곱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그 축복을 놓고 에서와 많이 싸웠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귀중한 것을 알았기에 그 축복을 받기위한 씨름을 계속 해 왔습니다. 그는 심지어 어머니의 뱃속에서조차 그는 형 에서와 싸웠습니다(25:22). 또 야곱은 자신의 악한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쟁취하려고 미끼인 팥죽을 사용했습니다(25:27-34). 악한 에서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으려고 야곱은 아버지 이삭까지도 속여서 축복을 받았습니다(27:1-29; 참고. 25:28).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 간 후,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했는데, 그는 라헬 대신에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고, 삯을 10번이나 변개했습니다 (31:41). 그러나 그는 라반을 속여서 그에게서 많은 재물을 빼앗아 도망하듯이 피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의 전체 생애를 돌아보면 야곱은 부단히 사람들과 씨름했고,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살아가는 인생의 전체 모습이 바로 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고 싸우는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의 인생의 두 개의 큰 대적에 끼여 있습니다. 그의 뒤에는 야곱이 하란을 떠나도록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유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라반이 있습니다(31:44-55). 그는 언제 약속을 깨고 뒤통수를 칠지 모릅니다. 그의 앞에는 400명을 거느리고 인사하러 오는 에서가 있었습니다 (32:6). 바로의 군대와 홍해 사이에 끼였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야곱은 얍복 강 앞에 앞뒤의 대적 사이에 위험하게 끼여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인생이 최대의 위기의 분기점을 맞이합니다. 야곱이 어떤 신비로운 사람으로부터 밤에 처음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그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혹 라반이 마음이 변하여 다시 자신을 죽이려고 공격한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 반대로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공격한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자 그가 밤새 씨름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그의 일생 내내 씨름을 한 것이 에서와 라반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을 해 왔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야곱은 그동안 에서와 라반을 통해서 야곱을 대적하도록 하신 분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야곱을 그동안 여러가지 대적하는 자들을 통해서 고난의 상황에 둠으로써 시험하고 훈련하고 완전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과 함께 계속해서 동행하면서 함께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에서와 라반을 야곱에게 대항하도록 보내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야곱을 낮추시고 그의 자아를 깨트리고 그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당한 여러가지 고난의 일들은당하신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셨던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로 만드시고 계신 것입니다(2:10).

이렇게 야곱이 그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은 결코 주님과의 황홀경이나 신비로운 대면 가운데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야곱이 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의 일상 가운데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고용주에게 억압을 받는 직장인 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비판적인 배우자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남편이나 남편으로부터 난폭한 말로 구타를 당하는 아내일 수 있고, 말을 안듣고 반항하는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반항적인 자녀를 교훈하려는 부모일 수 있고, 혹은 잘못된 길을 가는 성도를 권면하고 꾸짖는 목회자 일 수도 있고 입만 열면 목회자를 비난하는 교인일 수도 있습니다. 또 교회에게 큰 상처를 주는 목회자일 수 도 있습니다. 또 자기가 교회의 주인인양 행세하는 교인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파산이나 때로는 질병의 어려움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모양과 여러 형편들과 어려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고, 그의 자기 백성들을 보다 자기를 부인하게하고 성숙하고 완전하게 하시는 도구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에서는 누구이고 라반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환경이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보내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들에게 여러 에서와 라반과 더불어 씨름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우들이 당하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이나 고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함께 하시면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시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고후 4:10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고난들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고후 4: 16)

야곱과 하나님이 밤새 씨름을 하다가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자 야곱의 환도 뼈를 쳐버렸습니다. 그리고 환도 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이 나로 가게 하라고 하자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야곱은 자기 이름을 야곱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때까지 한 평생 남을 속이고 남의 발목을 잡는 자로 살아온 부패하고 간교한 자니이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야곱의 죄악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뿌리깊은 죄악이었습니다. 그는 매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타락한 인간의 지혜와 술수로 장자 권과 축복을 빼앗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환도 뼈를 부스러뜨립니다. 그는 무력한 자 곧 스스로 힘을 쓸 수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근본적으로 꺾어 버리사 그가 그처럼 집요하게 자기 힘으로 하나님과 겨루려는 자세가 헛됨을, 무의미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야곱이 의지한 모든 힘을 일시에 꺽어버림으로써 자기 힘과 꾀로 하나님과 겨루려는 생각을 아예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환도 뼈를 얻어맞고 패배한 야곱, 더 이상 싸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 무력한 야곱에게서 우리는 전혀 다른 야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더 이상 스스로 형의 발꿈치를 잡는 야곱처럼 살아서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고 이스라엘로 변화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으로 이스라엘로 변화될 때 형 에서와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언약도 보존되고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가나안을 상속받고 한 민족을 이룰 거룩한 조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거룩한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을 상속받아 한 거룩한 민족의 조상이 되기에는 자기 힘으로 남을 속여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는 자의 그런 모습으로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대적으로 나타나셔서 그와 씨름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놓은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야곱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는 야곱이 네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축복을 선언합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시고 그렇게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이 이 이름을 주시는 것은 그의 이름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길, 하나님이 주도하시길, 하나님이 이기시기를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동안 야곱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하나님까지도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야곱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이제부터는하나님이 야곱을 대신해서 싸워 주실 것이다을 약속하는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주어로 하고 '싸운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으로 만들어진 명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앞으로는 계속해서 다스리시고 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모든 적과는 물론 에서와도 주도적으로 싸워주실 것이라는 점을 밝혀 준 셈입니다. 스스로의 모든 노력을 다해서 사람들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싸우면서 살아온 야곱을 대신해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대신해서 다스리시고 싸우시겠다는 말입니다. 싸움의 주체가 야곱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이름입니다.

그는 천사에게 울면서 은혜를 간구합니다. 호세아서 12:4야곱은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울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부패한 지혜와 속임과 술수로는 결코 그가 사모하던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오직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은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려서,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축복뿐인 것을 고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에게서 얻어 맞고 철저히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패배하고 나서야 그가 사모하던 축복을 얻었으며 승리자로 선언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옛사람 야곱을 새사람으로 만드시고 축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도적질하던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가려면 새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새사람 만드시고 약속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는데 야곱이 그만 너무 급히 일을 이루려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많은 방해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이기적인 수단과 방법들 때문에 지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출생시에 벌써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기적인 수단과 방법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많은 방해를 받았고 그 일은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렀을 때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때문에 하나님은 40년을 더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과도한 인간적인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게 되며 그 일이 지체되곤 합니다. 이런 면에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듯이 육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에로의 변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옛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얍복 강 이후에 그의 생애는 옛사람이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삼촌 집에서처럼 다시는 속이고 뺏고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 즉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자기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형 에서에 대한 공포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약속의 땅으로 새사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연약하고 흠이 많던 야곱을 선택하시고 복 주신 것은 세상 구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목적 아래에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도 계속 야곱이기를 고집하던 죄많은 자를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십니다. 언약의 땅에서 인간 야곱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변화된 이스라엘이 필요할 뿐입니다. 세상 구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큰 일에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셔야만 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은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들, 그리고 모든 족속들에게 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환도 뼈를 먹지 않습니까? 그것은 곧 야곱에게 일어난 일이 이스라엘 백성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일어나야 할 일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생활에서의 적용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이 세상 올 때부터 언약하시고 선택하시고 지키시고 돌아보시고 그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진치고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앞뒤에서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못 보나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진치고 함께 진행하고 전진해 나가십니다. 이것이 아마 첫독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애굽이나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그들을 보호하시고 호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옛 사람, 곧 하나님도 의지하지만 자기 술수와 의지하고 사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할 뿐입니다. 지체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철저히 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옛사람의 속성이 우리 스스로 버려지지 않을 때 참 괴롭습니다. 그것까지도 주의 은혜로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과 평강을 누리게 되며 참되게 사람들과의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지며, 참된 약속의 유업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내 꾀를 내고 조급하게 내 육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이 자기의 마음을 답답하고 두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직장의 문제들, 혼인의 문제들, 가정의 부모의 문제들, 자식의 장래 문제들, 경제적인 문제들, 또한 교회의 장래 문제, 여러 가지 문제 앞에서 누가 더 염려하시고 누가더 잘되기를 바라시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더 바라시는 일이기에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은혜가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철저히 체험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께서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하나님까지도 믿음으로 이기는 삶을 살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

천사들이 나타난 것은 무엇을 보이신 것입니까?

야곱과 에서의 자태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야곱의 씨름은 어떤 씨름이었습니까?

왜 야곱의 이름을 물었습니까?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변화된 뒤의 야곱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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