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안거/게송 128번 이야기
습빠붓다는 붓다의 외삼촌이자 장인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붓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딸 야소다라를 버리고 출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들 데와닷따 장로를 적대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낮에 술을 먹고 붓다의 탁발을 가로막고 방해하였다.
이 과보로 그는 산채로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 지옥에 태어났다.
그럼 부처님을 모욕한 숩빠붓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속을 들어가 알아차림해봅시다.
부처님을 모욕한 숩빠붓다의 죽음
부처님께서 니그로다 사원에 계실 때 사끼야족 숩빠붓다와 관련해서 게송 128을 설하셨다.
사끼야족 숩빠붓다는 부처님이 자기 딸(야소다라)을 버리고 출가하였고,
자기 아들(데와닷따)이 출가하여 부처님에게 반기르 들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처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부처님께서 공양에 초대받아 가는 길을 못가게 막아버리겠다.'
그는 독한 술을 마시고 길 한가운데 앉아 부처님이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부처님이 비구들을 거느리고 숩빠붓다가 앉아있는 곳에 도착하자 비구들이 그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가까이 오십니다."
숩빠붓다가 대답했다.
"되돌아가라고 말하시오. 내가 그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절대로 길을 내줄 수 없소."
비구들이 부처님이 도착했으니 길을 비켜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어도 숩빠붓다는 계속 똑같이 대답하고 버티며 길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부처님은 외삼촌이 길을 내주지 않자 결국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숩빠붓다는 염탐꾼을 보내며 말했다.
"부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와서 나에게 보고하라."
부처님이 되돌아오는 길에 미소를 짓자 아난다가 물었다.
"부처님이시여, 왜 미소를 짓습니까?"
"아난다여, 사끼야족 숩빠붓다를 보아라."
"보았습니다. 부처님."
"그는 부처님이 가는 길을 막는 큰 죄를 저질렀다. 오늘부터 일주일 후에 자기 저택의 일층의 맨 아래 계단에서
땅속으로 삼켜질 것이다."
염탐꾼이 그가 들었던 말을 보고하자 숩빠붓다가 말했다.
"내 조카가 돌아가는 길에 뭐라고 그러더냐?"
염탐꾼이 그가 들었던 말을 보고하자 숩빠붓다가 말했다.
"조카가 한 말을 내게 위험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내가 증명해보이겠다.
그는 '칠일 째 되는 날 땅속으로 삼켜지리라' 라고 말하지 않고, 분명히 '저택의 일층 맨 아래 계단에서 땅속으로 삼켜질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분명히 '저택의 일층 맨 아래 계단에서 땅속으로 삼켜질 것이다' 라고 죽는 장소를 분명하게 명시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 장소에 가지 않으면 된다. 그 특별한 장소에서 땅속으로 삼켜지는 일이 없다면 그가 한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사끼야족 숩빠붓다는 가재도구들을 모두 칠층 꼭대기로 옮기고 계단을 뜯어버렸다.
그리고 꼭대기 방으로 올라가서 문에 빗장을 걸고 힘센 사람을 두 사람씩 각각의 문에 배치하고 말했다.
"내가 혹시 잊어버리고 내려가려고 하면 나를 못 가게 막고 되돌아가게 해라."
그리고 저택의 칠층 꼭대기의 화려한 방에서 생활했다. 부처님께서 그가 취한
조치를 전해 듣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숩빠붓다가 칠층 꼭대기로 올라갔다고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하늘 높이 올라가 공중에 앉아있거나,
바다 속 깊이 내려가거나, 산솔으로 들어가더라도 소용이 없다. 부처님은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말한 바로 그 자리에서 땅속으로 삼켜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부처님은 게송을 읊으셨다.
하늘 위 바다 속도 아니요
깊은 산 동굴 속도 아니다.
덮쳐오는 죽음을 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128)
부처님께서 공양청을 받아 가는 길을 못가시게 한 그날로부터 칠일째 되는 날 숩빱붓다의 의전용 말이 저택의 일층에서
탈출하여 이 벽 저 벽을 발로 차며 날뛰었다. 칠층 꼭대기에 있던 숩빠붓다가 이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묻자 하인들이 대답했다.
"전하의 의전용 말이 풀려나와 날뛰고 있습니다."
숩빠붓다를 제외하고 그 말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숩빠붓다는 그 말을 잡으려고 앉아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문이 저절로 열리고 계단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문에 배치되어 있던 힘센 장정들이
그의 목을 잡아 아래로 던졌다.
이와 똑같이 칠층 문이 모두 저절로 열리고 계단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고 문에 배치되어 있던 힘센 장정들이
그의 목을 잡아 아래로 던졌다.
그가 일층 아래의 계단에 도착하는 순간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를 집어삼켜버렸다. 그는 즉시 아비지옥에 태어났다.
게송 354번 이야기
부처님께서 까삘라왓투를 떠나 사옷티의 제따와나로 되돌아 오셨다. 이때 신神들 사이에 네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신들은 결국 삭까천왕에게 몰려가서 질문했으나 천왕은 이 문제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모든 신들을 데리고 부처님에게 내려와서 질문을 했다. 팔만 사천 신들이 법문을 이해하고 삼보에 귀의했다.
삭까 천왕의 네 가지 질문
부처님이 제따와나에 계실 때 삭까 천왕과 관련해서 게송 354번을 설하셨다.
어느 날 천신들이 삼십삼천에 모였을 때 네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① 어떤 보시가 최상의 보시인가?
② 어떤 맛이 최상의 맛인가?
③ 어떤 즐거움이 최상의 즐거움인가?
④ 갈애의 제거가 왜 모든 것 중에서 최상인가?
한 천신이 다른 천신에게 묻고 다른 천신이 또 다른 천신에게 묻는 식을 모든 천신들이 서로에게 물었지만 단 한 명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십이 년동안 천신들이 일만 천상세계를 돌아다니며 물어보았지만 한 명도 대답하는 천신이 없었다.
결국 일만 세계의 천신들이 사대천왕에게 몰려갔다. 사대천왕은 그들을 보고 물었다.
"친구들이여, 무슨 일로 나에게 몰려왔습니까?"
"네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는데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질문이 무엇입니까?"
"보시 중에서, 맛 중에서, 즐거움 중에서 각각 최상은 무엇인가? 갈애의 제거가 왜 모든 것 중에서 최상인가?
이 질문들은 우리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왕은 문제를 수천 가지로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지혜와 공덕이 훨씬 뛰어납니다. 그분에게 함께 갑시다."
사대천왕은 천신들을 모두 데리고 삭까 천왕에게 갔다. 삭까 천왕이 그들을 보고 물었다.
"친구들이여, 무슨 일로 몰려왔습니까?"
삭까 천왕은 그들의 방문 목적을 알고 대답했다.
"친구들이여, 부처님을 제외하고 이런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범부의 영역이 아니고 부처님들의 영역입니다.
부처님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제따와나에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가십시다."
삭까 천왕은 밤중에 모든 천신들을 데리고 제따와나를 환하게 밝히고 부처님께 다가가서 삼배를 올리고 한쪽에 섰다.
부처님께서 그들을 보고 물었다.
"대왕이여, 무슨 일로 이 많은 천신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부처님이시여, 신들 사이에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었는데 부처님을 제외하고 이 문제를 대답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명확히 밝혀주십시오."
"대왕이여, 이런 의심을 풀기 위해서 나는 바라밀을 닦으며 다섯 가지 위대한
포기를 하고 일체지를 얻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① 보시 중의 최상은 법 보시입니다.
② 맛 중의 최상은 법의 맛입니다.
③ 즐거움 중의 최상은 법의 즐거움입니다.
④ 갈애를 제거하면 아라한과를 성취하기 때문에 모든 것 중에서 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게송을 읊으셨다.
어떤 보시보다도 법 보시가 가장 뛰어나고
어떤 맛 보다도 법의 맛이 가장 뛰어나고
어떤 기쁨보다도 법의 비쁨이 가장 뛰어나고
갈애를 제거하면 모든 괴로움을 이겨낸다. (354)
* 게송에 대한 해석 *
어떤 보시보다도 법 보시가 가장 뛰어나고 : 갈색 가사를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과 벽지불과 아라한들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뭇 중생들에게 사구게송 하나 설하는 것이 더 낫다.
가사 보시는 사구게송 하나 설하는 것의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법을 설하고 법을 암송하고 법을 듣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시방세계의 무든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들의 발우에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담아준다 해도
이런 음식 보시보다 법문을 듣게 해주는 공덕이 더 크다.
발우에 버터기름, 꿀 등을 가득 담아준다 해도 이런 약 보시보다 더 크고, 마하위하라(대사원) 나 로하 빠사다(구리 누각)와 같은
거대한사원을 수십만 개 세워 기증한다 해도 이런 거처를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크다.
아나타삔디까와 같은 대시주자들이 많은 재산을 사용하여 사원을 짓고 그 과보로 받은 복덕보다 더 크다.
이 막대한 공덕보다 게송을 암송하며 법문을 듣게 해주는 법보시가 훨씬 더 크다.
왜 그런가?
법문을 들었기 때문에 공덕을 짓는다. 법문을 듣지 않으면 공덕을 짓는 법을 모른다.
이 세상의 중생들은 법문을 듣지 않는다면 한 국자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도 보시할 줄 모를 것이다.
이 때문에 법보시가 다른 보시보다 뛰어난 것이다.
사실, 부처님들이나 벽지불을 제외하고 사리뿟따와 같은 비구들은 한차례 쏟아붓는 빗방울의 숫자를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수다원과나 그이상의 도과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비구들은 앗사지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장로들이 설하는 한 두 구절의 게송을 듣고 수다원과를 성취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보시 중에서는 법보시가 최상이라고 말한다.
어떤 맛 보다도 법의 맛이 가장 뛰어나고 : 설탕과 같은 달짝지근한 맛에서부터 천상의 음식에서나 맛볼 수 있는 감로미甘露味에 이르기까지 중생들은 맛에 탐착하여 맛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윤회를 하며 괴로움을 겪는다.
그러나 깨달음을 돕는 서른일곱 가지 필수품(37조도품三七助道品)을 이해하는 것에서 아홉 가지 출세간의 법들(수다원도와 과,
사다함도와 과, 아나함도와 과, 아라한도와 과 그리고 닙바나)을 얻는 순간 느끼는 법의 맛은 모든 맛 중에서 최상이다.
어떤 기쁨보다도 법의 기쁨이 가장 뛰어나고 : 아들딸에 대한 즐거움,
재물에 대한 즐거움, 애인에 대한 즐거움, 춤추고 노래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들에 집착하여 중생들은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고 영원히 붙들 수 없어서 괴로움을 겪는다. 그러나 법문을 듣고 경전을 암송하여 깨달음을 얻을 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은 기쁨과 평온에 들게하고 환희의 눈물을 흐르게 하고 지복을 느끼게 하고 윤회를 끝내게 하고 구경의 경지인 아라한과에 도달하게 한다. 그래서 즐거움 중에서는 법의 즐거움이 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갈애를 제거하면 모든 괴로움을 이겨낸다 : 마지막으로 갈애가 제거되면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갈애를 제거하면 윤회의 괴로움을 모두 제거한다.
그래서 갈애를 제거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시여, 법보시가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부처님께서는 지금까지 왜 우리 천신들에게 법문을 들을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법문을 설하실 때 우리에게도 법문을 들을 기회를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삭까 천왕의 요청을 듣고 비구들을 모아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오늘부터 공식적인 법회에서 법문하거나 일상적으로 법문하거나 간략하게 법문하거나 공양을 끝내고 감사의 표시로 법문할 때에도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다 초청하여 법문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여라."
[출처] 사띠스님의 붓다의 생애 80 어떤 보시가 최상의 보시인가?|작성자 제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