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성의 마음은 욕계 마음인데, 욕계 마음이 어떻게 열반을 대상으로 할 수 있습니까?” (본삼매 속행과정 Q&A)
작성자위뭇따 vimutta작성시간23.08.08조회수45 목록 댓글 0아비담마 길라잡이 4장 의문인식과정 중 본삼매 속행과정과 관련하여 의문이 들었던 부분을 질문하고 답변 받은 내용을 공유한다.
답변 해주신 분은 선배 도반 분과 우 실라 사야도이다.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필자가 답변을 받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잘못 이해한 것일 수 있다.
Q.
본삼매 속행과정에 들어가기 전 일어나는 준비, 근접, 수순, 종성의 마음들은 지혜와 함께한 8가지 욕계 유익하거나 작용만 하는 마음 중 1개 마음이 4가지의 각각 다른 역할로 불리는 것이 맞을까요?
예를 들어 ‘기쁨과 지혜가 함께하고 자극이 없는 마음’이 본삼매 과정 전에 일어나는 경우, 이 1가지 마음이 준비, 근접, 수순, 종성의 마음 모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A.
예.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실 것입니다. ‘준비, 근접, 수순, 종성’은 모두 같은 종류의 마음이고 역할만 다른 것으로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준비, 근접, 수순’은 불리는 이름까지도 동일하게, 즉 ‘반복’으로도 ‘준비’로도 ‘근접’으로도 ‘수순’으로도 불릴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만 ‘종성’은 이름을 ‘반복 등’으로 이들과 같게 부르지 않습니다. 종성은 ‘열반’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겠지요.
Q.
종성의 마음은 도와 과의 증득과정에서는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는데, 마음의 법칙에서 어떻게 욕계 마음이 열반을 대상으로 할 수 있습니까?
A.
본삼매 속행과정에서 선정을 증득하는 과정의 경우 '준비, 근접, 수순, 종성, 본삼매'의 마음의 대상은 모두 똑같이 닮은 표상입니다.
대상은 똑같지만 앞의 마음들은 근접삼매이고, 종성의 마음 이후 본삼매로 전환됩니다.
도와 과 증득의 과정에서 욕계 마음들(= 준비, 근접, 수순)은 세간의 대상, 종성의 마음부터는 출세간 대상(= 열반)으로 대상이 다릅니다.
특히 바라밀이 부족한 존재는 종성의 마음에서 도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Q.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22쪽의 해설을 보면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본삼매 속행과정에서는 이들 각 찰나의 자와나(속행)들은 각각 다른 종류일 수 있고, 일어나는 곳(bhūmi)까지도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욕계의 한 인식과정에서 나타나는 일곱 개의 자와나들은 반드시 같은 종류의 자와나이다.” 라고 스님들은 적어주셨습니다. 이 문장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지 못해 여쭈려 합니다...
A.
...아무튼 ‘각 찰나의 자와나(속행)들’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을 나열해 본다면 아래와 같은 것입니다.
① Jh(본삼매)인 경우
② Jh(본삼매), Mg(도), Ph(과)인 경우
③ K(준비단계의 삼매), Uc(근접삼매), An(수순), G(종성), Jh(본삼매)인 경우
④ K(준비단계의 삼매), Uc(근접삼매), An(수순), G(종성), Jh(본삼매), Mg(도), Ph(과)인 경우
①②보다는 ③이나 ④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본다면 문제의 문장인 “본삼매 속행과정에서는 이들 각 찰나의 자와나(속행)들은 각각 다른 종류일 수 있고, 일어나는 곳(bhūmi)까지도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라는 것은 ‘K(준비단계의 삼매), Uc(근접삼매), An(수순), G(종성), Jh(본삼매), Mg(도), Ph(과)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들은 각각 다른 종류일 수 있고, 일어나는 경지도 욕계의 경지인 마음, 색계의 경지인 마음, 무색계 경지인 마음, 출세간 경지인 마음으로 다를 수 있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Q.
본삼매 속행과정에서 다른 경지의 삼매를 닦으려면 출정해서 그 경지의 삼매로 다시 마음을 전향해서 입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때 본삼매를 처음 증득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바왕가-전향-(준비)-근접-수순-종성-본삼매’를 거치는 방식일까요, 아니면 처음 증득할 때와 달리 ‘바왕가-전향-본삼매 자와나’로 바로 흘러가는 것일까요?
A.
출정과 입정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본삼매 자와나가 이어지고 있는 중간에서 경지를 바꿀 수 없습니다.
입정 시 처음 증득했던 때와 같이 해당 단계를 다 거쳐야 합니다. 이는 마음의 법칙 입니다.
Q.
위빳사나는 유위법인 상카라를 명상하는 것이므로 욕계의 마음으로 알고있고, 마른 위빳사나를 닦거나 선에서 출정한 뒤 그 집중력으로 위빳사나를 행하여 그 집중력의 수준이 근접삼매, 혹은 그보다 조금 약한 찰나삼매 정도의 집중력으로 상카라를 명상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즉, 위빳사나를 하는 마음은 선정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 도와 과의 마음은 사마타가 아닌 위빳사나를 통해 얻을 것인데, 이 도와 과의 증득이 본삼매 속행과정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 1장에서 배운 ‘40가지 출세간 마음’과 관련하여, 도와 과를 얻을 때 특정 선의 경지로 결정되는 것은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A-1.
종성의 마음까지 근접삼매가 이어지고, 도와 과는 출세간 선정으로 삼매에 해당합니다.
근접삼매에서 장애가 억압되고, 본삼매에서 완전히 억압되며, 출정하면 그대로 장애와 오염원이 남아 있습니다.
근접삼매의 힘으로 출세간 선정에 들어가면, 열반 대상의 힘 혹은 사성제의 힘으로 이 장애를 영구적으로 멸절시킬 수 있습니다.
출세간 선정의 경지는 위빳사나를 닦기 전 수행한 사마타의 경지대로 정해집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00-202)
『청정도론』에서는 선의 토대가 없이 위빳사나를 닦는 자를 '마른 위빳사나를 닦는 자'라고 부르고 '순수 위빳사나를 닦는 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들이 도와 과에 이르면 그들의 도와 과의 마음들은 초선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일어난다.
선에 토대를 두고 위빳사나를 닦은 자들은 그들이 도에 이르기 전에 얻은 선의 경지에 상응하는 도와 과를 증득한다. 어떤 요인이 도와 과에서의 선의 경지를 결정하는가에 대해서 옛 대가들은 견해가 엇갈린다. 『빠라맛타디빠니 띠까』는 이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어떤 문파에서는 출세간도의 증득에 이르는 위빳사나를 닦기 전에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선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이론은 도에서의 선의 경지는 명상선이라 불리는 위빳사나 명상의 대상으로 사용된 선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또 다른 세 번째 문파에서는 수행자가 여러 선을 터득하고 나면 도에서의 선의 경지를 그 자신이 원하는대로 제어할 수 있다고 한다.(PdṬ.78~79)
A-2.
우선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202쪽에 나와있는 내용이 본삼매 마음과 도과의 마음의 기본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지만 어떤 설명을 따르더라도 모든 도와 과의 마음들은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나 禪을 닦은 자 할 것 없이 모두 禪의 마음의 한 유형이라고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마음들은 세간적인 禪과 같이 완전히 몰입하여 대상을 아주 깊이 주시하는 형태로 일어나기 때문이며 세간적인 禪과 상응하는 강도를 가진 禪의 구성요소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위빳사나의 지혜가 정점에 이르면,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정점에 이르면 그다음부터는 위빳사나 수행자가 특별히 더 할 일은 없다고 표현되고 있지요.
의문전향-준비-근접-수순-종성-도-과-과
‘준비-근접-수순-종성’은 본삼매는 아니지만 이미 삼매에 상응할 정도의 단계에 있는 마음들입니다.(이름 자체가 ‘준비단계의 삼매, 근접삼매’로 불리고 그것으로 보았을 때 ‘수순’ 역시 삼매의 일종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위빳사나 수행자가 더 이상 할 것 없이도 그대로 흘러가는 흐름이 잡혀 있다고 봐야 하겠지요. 이렇게 흘러가서 ‘종성’에서 열반을 대상으로 하게 되고, ‘도의 마음’에서 오염원을 잘라버리게 되는 구조이지요.
위빳사나는 아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빳사나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비록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그 상카라들을 ‘무상’이나 ‘고’나 ‘무아’로 통찰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것이 정점에 이른 상태이니, 자연스럽게 ‘상카라들이 소멸된 경지’인 ‘열반’으로 대상이 바뀌면서 ‘종성’ ‘도’ ‘과’로 이어지는 흐름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수순하는 마음 등이 ‘상카라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과 도나 과의 마음이 ‘열반’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개념적으로 매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전환되는 과정으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이지요. ‘상카라들의 소멸’이 곧 ‘열반’이라는 말에서도 보이듯이 대상이 바뀌는 것이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마음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두 가지는 미묘하지만 다른 차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열반’으로 ‘뛰어든다, 뛰어들듯이 마음이 생겨난다’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제2권 37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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