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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에 따라 네 가지 업이 있으니 생산업, 돕는 업, 방해업, 파괴업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작성자위뭇따 vimutta|작성시간23.09.05|조회수40 목록 댓글 0
III.1.업의 분류

§18. 역할에 따라(kicca-vasena)


역할에 따라 네 가지 업이 있으니
(1) 생산(janaka)업
(2) 돕는(upatthambhaka) 업
(3) 방해(upapīḷaka)업
(4) 파괴(upaghātaka)업이다.

 

여기서 '역할'은 kicca를 옮긴 것인데 기능이나 작용으로도 옮길 수 있으며 이 경우 역할(rasa)과 동의어로 간주된다. 여기서는 업이 과보를 가져오는 역할에 따라 업을 넷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역할로 옮겼다. 어떤 업이든지 다른 여러 환경을 만나면 이 업의 네 가지 역할 가운데 하나 혹은 여러 역할을 하면서 과보를 가져오게 된다.

 

업에 대해서 공부하는 불자는 1가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결론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무조건 선업을 짓겠다'는 것이다.

 

네 가지 업 중에서 업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생산업이라 할 수 있다.

 

1. 생산(janaka)업: '생산[업]'으로 옮긴 janaka는 √jan(to generate)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낳는, 생산하는'을 뜻하며 남성명사로 쓰이며 '아버지'를 뜻하기도 한다.

'생산업'은 말 그대로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과보(vipāka)를 낳는 업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생연결(paṭisandhi)의 찰나나 삶의 과정(pavatti)에서 과보의 마음이나 업에서 생긴 물질을 생산하는 모든 유익한 의도나 해로운 의도를 생산업이라 부른다. 입태의 순간에 생산업은 재생연결식과 업에서 생긴 물질을 일어나게 한다. 이 물질이 새로 받은 몸을 구성한다. 삶의 과정에서는 다른 과보의 마음들을 일어나게 하고 감성(pasāda, 감각기능), 성(bhāva, 남성 혹은 여성), 심장토대와 같은 업에서 생긴 물질을 상속하게 한다. 생산업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알음알이와 물질들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생기는 작용을 거듭하면서 그런 역할이나 기능을 계속 유지해가는 것이다. 

몸과 말로 짓는 일곱 가지 업은 행위가 완전히 끝나야 유익한 업의 길이나 해로운 업의 길(업도, kamma-patha)로 확정되어 재생연결식의 역할을 할 수 있고³³⁹⁾ 모든 업은 삶의 과정에서 과보를 생산할 수 있다.(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22의 해설 참조)

³⁹⁹⁾ 주석서들은 업의 길(업도, kamma-patha)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처나 악처로 인도하는 길이 되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한다."(DA.iii.1048)
"유익한 재생연결이나 해로운 재생연결을 생산하는 것을 업의 길이라 부른다."(PsA.i.301)
"여기서 업의 길이란 재생연결을 생산하는 업들이 발생하는 입구가 되는 길을 말한다."(PdṬ.226)
"'업의 길이 다름'이란 재생연결을 생산하는 업의 길의 특별함이다."(Anudīpanitīka 162)

이를 종합하면 업의 길(업도, kamma-patha)의 가장 큰 특징은 '재생연결을 생산하는 것(paṭisandhi-janaka)'이다. 업이 과보를 낳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재생연결(paṭisandhi)을 결정하는 것이고 하나는 삶의 과정(pavatti)에서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들 가운데 재생연결을 결정하게 되는 업들을 특별히 업의 길이라고 부른다. 업의 길이 되지 않는 업들은 삶의 과정에서 과보를 가져오지만 재생연결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한편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 의도(cetanā)와 ㉡ 의도와 결합된 어떤 법들"(DhsA.88)이라고 업을 정의한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는 열 가지 해로운 업의 길(십불선업도) 가운데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즉 살생, 투도, 사음과 말로 짓는 네 가지, 즉 망어, 기어, 양설, 악구는 의도(cetanā)이고 마노(의)로 짓는 세 가지, 즉 간탐, 악의, 그릇된 견해는 의도와 결합된 법들(cetanāsampayutta-dhammā)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방법으로 10선업도 가운데 앞의 일곱가지는 의도이고 뒤의 세 가지, 즉 간탐 없음, 악의 없음, 바른 견해는 의도와 결합된 법들이라고 설명한다.(DA.iii.985~986)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506)

이하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말로 짓는 네 가지, 마노로 짓는 세 가지 모두 열 가지 해로운 업을 언급하고 있다. 경장과 논장에서는 이것을 '해로운 업의 길(불선업도, akdusala-kamma-patha)'이라 표현하며 해로운 업이 나타나는 길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것은 '유익한 업의 길(선업도, kusala-kamma-patha)'이라 나타난다. 우리에게는 십불선업과 십선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처음의 일곱 가지,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와 말로 짓는 네 가지는 각각의 행위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을 시작하는 의도와 일치한다. 이런 의도 그 자체는 그 행위를 성취했든 성취하지 않았든 간에 해로운 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업의 길(aniyata-kamma-patha)'이다. 아직 실제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성취하고 목적하는 바를 달성했다면(예를 들면, 죽이려 작정한 대상을 죽이거나 남의 재물을 탈취해서 가졌을 때) 그것은 '확정된 업의 길(niyata-kamma-patha)'이 된다. 이렇게 확정된 업의 길은 재생연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업의 길은 삶의 과정에서 과보로 나타나게 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508)

나머지 세 가지 업의 길은 몸과 말로써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오직 마노, 즉 마음에서만 발생한다. 이런 업은 마노의 문(의문, mano-dvāra)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마노의 문이란 이런 의도적인 행위에 개입된 매 찰나 일어나는 알음알이를 전체적인 측면에서 일컫는 집합적인 명칭이다.

'간탐'으로 옮긴 abhijjhā는 탐욕(lobha)의 한 요소인데 남의 재물을 가지려는 욕구로 일어난 것을 말한다. 남의 재산을 가지려는 탐욕(lobha)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확정된 업의 길(niyata-kamma-patha)이 되지는 않는다. 그 재산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일어나야만 확정된 업의 길이 되는 것이다.

'악의'로 옮긴 vyāpāda는 성냄(dosa)의 한 요소인데 남을 해치고 괴롭히려는 욕구가 일어날 때 확정된 업의 길이 된다.

'그릇된 견해'로 옮긴 micchā-diṭṭhi는 이것이 도덕적으로 허무주의적인 견해의 한 형태를 취할 때 확정된 업의 길이 된다. 여기서 도덕적으로 허무주의적인 견해라는 것은 인과를 부정하는 것 등을 말한다. 경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그릇된 견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①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ahetuka-diṭṭhi, 무인론자들의 견해): 중생의 번뇌와 청정에는 아무런 원인(인, hetu)도 조건(연, paccaya)도 없다는 견해로서 중생들은 우연이나 운명이나 필요에 의해서 오염되기도 하고 청정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②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 도덕부정론자들의 견해): 행위는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한다라는 견해로서 선업이 가지는 특질을 인정하지 않는다.

③ 허무주의의 견해(natthika-diṭṭhi, 허무론자들의 견해):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natthi)는 식으로 사후 개체의 영속성을 부정하는 견해로 행위의 도덕적인 중요성을 부정한다.

..."이 가운데서 뿌라나 깟사빠는 '행해도 죄악을 범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여 업(kamma)을 부정한다.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한다.'고 주장하여 과보(vipāka)를 부정한다. 막칼리 고살라는 '원인도 없다.'고 주장하여 둘 다를 부정한다. 여기서 업을 부정하면 과보도 부정하는 것이고 과보를 부정하면 업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는 뜻으로는 둘 다를 부정하므로 무인론자(ahetuka-vāda)이고, 도덕부정론자(akiriya-vāda)이고, 허무론자(natthika-vāda)이다."(DA.i.166)

 

모든 업은 삶의 과정에서 과보를 생산할 수 있다.

재생연결식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업은 업의 길로 한정된다.

 

물론 업도도 삶의 과정에서 과보를 생산할 수 있다.

 

재생연결식을 결정하는 업의 역할인 kama-patha(patha는 영어로 path, way, road와 같다)는 강한 업지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강한 탐욕인 간탐, 강한 성냄인 악의 등이 그것이고 실제로 몸으로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거나 말로 욕설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등의 행위도 적극적이고 강한 업의 행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십선업도, 십불선업도를 지으면 재생연결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업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업들은 그것이 유익한 업이든 해로운 업이든 위력이 작다고 할 수 있겠다.

 

2. 돕는(upatthambhaka) 업: '돕는 [업]'으로 옮긴 upatthambhaka는 upa(위로)+√stambh/stabh(to prop, 받치다)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문자적인 뜻 그대로 '지탱하는, 지지하는, 돕는, 후원하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돕는 업'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은 과보를 생산해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지만 다른 업이 과보를 산출하는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할 때 그 업이 고통스러운 업이나 즐거운 업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업이다. 예를 들면, 어떤 업이 유익한 생산업의 기능을 수행하여 한 중생이 인간으로 태어나려 할 때에 돕는 업은 그 사람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역할을 하여 그 사람의 건강과 삶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해로운 업이 극심한 병에 걸리게 하는 생산업의 기능을 수행하면 돕는 업은 약이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등의 역할을 하여 병을 연장시키게 한다. 축생으로 태어날 때는 해로운(불선) 업이 생산업의 기능을 수행하면 돕는 업은 그 해로운 업이 익어서 더욱더 괴로운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거나 해로운 과보가 더 오래 지속되도록 수명을 연장시키는 등의 기능을 행할 것이다.

 

돕는 업은 '불난 데 부채질 하는 역할'로 이해하면 쉽다.

안 좋은 업을 더 좋지 않게 만든다. 반대로 좋은 업을 더 좋게도 만든다.

 

3. 방해(upapīḷaka) 업: '방해[업]'으로 옮긴 upapīḷaka는 upa(위로)+√pīḍ(to press)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문자적인 뜻 그대로 '내려 누르는, 억압하는, 방해하는' 등의 뜻으로 쓰인다.

'방해업' 역시 자신은 과보를 생산해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지만 다른 업이 과보를 산출하는 기능을 할 때 그것을 방해하고 좌절하게 하여 괴로운 과보나 즐거운 과보에 대항하거나 그 기간을 단축시키는 역할을 하는 업이다. 그래서 생산업이 처음에 쌓였을 때는 아주 강하다 하더라도 방해하는 업이 그것과 정반대가 되면 생산업이 과보를 가져올 때는 그 강도가 많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선업이 더 높은 세상에 재생하게 하려 할 때에 방해하는 업이 끼어들면 그보다는 더 낮은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업이 좋은 가문에 태어나는 작용을 하려 할 때에 방해업이 끼어들면 그보다는 낮은 가문에 태어날 것이다. 물론 이와 반대로 불선업이 대지옥에 재생하게 하려 할 때에 유익한 방해업이 끼어들어 소지옥이나 아귀 등의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도 우리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방해업이 끼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4. 파괴(upaghātaka)업: '파괴[업]'으로 옮긴 upaghātaka는 upa(위로)+√han(to strike, to kill)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때리는, 상처를 주는, 죽이는' 등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파괴하는'으로 옮겼다.

'파괴업'은 다른 약한 업을 눌러 없애버려서 익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업이 익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업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인간에 태어날 때 생산업이 긴 수명을 가지는 기능을 했지만 삶의 과정에서 파괴업이 일어나 때 아닌 죽음을 맞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을 때 처음에 나쁜 업이 작용하여 악처로 떨어지는 표상이 나타나더라도 선업이 나타나서 그 악업을 파괴해버리고 선처의 표상이 일어나게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레디 사야도는 이 파괴업은 눈이나 귀 등의 감각기능을 제거해버려서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 등이 되게 할 수도 있으며 성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한다.(PdṬ.153)

『위바위니 띠까』는 '생산업은 다른 업의 과보를 제거하지 않고 자신의 과보를 생산하지만 파괴업은 다른 업의 결과를 제거해버리고 자신의 과보를 나타나게 한다.'고 생산업과 파괴업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위바위니 띠까』에 인용된 다른 대가들은 파괴업은 결코 자신의 업의 과보를 가져오게 하지 못하며 한 업의 과보를 완전히 잘라내버리고 제3의 업의 과보가 나타날 기회를 제공한다고 한다.(VṬ.169)

이렇게 업을 그 역할이나 기능의 측면에서 네 가지로 분류해보았다. 물론 같은 업이 경우에 따라서 네 가지 역할을 다 행할 수 있다. 레디 사야도는 의도적인 살생을 보기로 들어 어떻게 한 업이 네 가지 역할이나 기능을 다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고의로 살생을 저질렀는데 그것이 과보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음의 세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른 불선업을 익게 하는 '돕는 업'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선업이 익는 것을 '방해하는 업'이 될 수도 있고 선업의 효과를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파괴업'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살생이 과보를 낼 기회를 얻을 때 그 행위에 개입된 모든 의도는 그 사람이 악도에 태어나게 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그 업은 더이상 재생연결을 생산할 힘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 업은 여전히 나머지 세 가지 기능을 하며 삶의 과정에서 과보가 나타나도록 하는 역할이나 기능을 계속한다. 이런 역할은 수백 겁이 지난다 해도 가능하다.(PdṬ.151~154)

그러면 『청정도론』을 살펴보자.

[청정도론 XIX]: "16. 또 다른 네 가지 업이 있다. 생산업, 돕는 업, 방해업, 파괴업이다.

① 생산(janaka)업은 유익한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 재생연결과 삶의 과정에서 물질과 정신의 과보의 무더기를 생기게 한다.

② 돕는(upatthambhaka) 업은 과보를 생기게 할 수 없다. 다른 업에 의해서 재생연결이 주어지고 과보가 생길 때 즐거움과 고통이 생기면 그것을 지지하고 지속되게 한다.

③ 방해(upapīḷaka)업은 다른 업에 의해서 재생연결이 주어지고 과보가 생길 때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면 그것을 방해하고 막으며 지속되지 못하게 한다.

④ 파괴(upaghātaka)업은 그 스스로 유익한 것이기도 하고, 해로운 것이기도 하며, 힘이 약한 다른 업을 파괴하고 그 업이 그것의 과보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버리고 자기의 과보를 낼 기회를 만든다. 이와 같이 [파괴하는] 업에 의해서 기회가 주어질 때 [파괴하는] 업의 과보가 일어났다고 한다."

 

 

 

 

인용 출처: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초기불전연구원(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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